그 디기탈리스는 저 혼자 오지 않았다

이순훈(소설가, 서울시약사회 문화복지위원장)

기사입력 2009-04-08 09:47     최종수정 2009-04-13 12:1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네가 들에 난 풀포기 콩포기 돔부꽃 되어/ 나를 기다리다 못해 시들어간다면/ 어쩌리 그 외로움을 어쩌리 싶어서/ 나는 오늘도 들길에 나섰다, 들길을 간다 (나태주 ‘들길’ )

무심히 우산을 펴들고 거리로 나선 건 어제 읊조리던 그 시구와 추적이는 빗소리의 부추김 때문이리라. 비닐하우스들이 늘어선 꽃집 앞, 모판 위에 소롯이 나앉은 페츄니아ㆍ 팬지ㆍ디기탈리스ㆍ고추ㆍ 토마토ㆍ 상추…, 선을 보듯 다소곳한 그 모습에 걸음이 절로 멈춰진다.

화원 안으로 들어선다. 반가이 맞는 주인의 환한 웃음도 함박꽃같다. 화초마다의 특성, 햇볕ㆍ물ㆍ 퇴비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가히 전문가답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중년부부가 불쑥 끼어든다. 선물용으로 적당한 ‘특별한’ 분재가 필요하단다. 엉겁결에 주인을 빼앗겼으나 기꺼이 한 발 물러선다. 어차피 다 사가지 못할 그 많은 화초들과 욕심껏 인사 나눌 기회를 주었으니…ㆍ

빨간 장미ㆍ연둣빛 소국ㆍ핑크빛 후크시아ㆍ하얀 학자스민…ㆍ. 머리에 빗방울을 묻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커다란 등을 내보이며 벽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화초 대신 남자를 살핀다. 반묶음 머리다.

손바닥으로 가방 위의 빗방울을 쓰윽 훔치더니 카메라를 꺼내면서 혼잣말을 한다. 저게 제브리나인가…. 황토에 덮인 굵은 뿌리를 비닐로 감싼 묘목 사이에서 엿들은 투박한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오른손 검지를 들어올리게 한다.

저기 저 화분…. 갑작스런 내 반응에 남자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가장자리 암녹색 세로줄무늬와 나란한 은백색 세로줄무늬잎이 제브리나만의 특징이라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얼른 손등으로 입을 가린다.

공감 가능한 뜨악함이다.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지층을 역방향으로 밟아 내려가면 약초인지 잡초인지 식별 못해 멀미 앓던 그 숱한 산이며 계곡에 선 어리버리한 내가 있다.

생약학 실습의 일환으로 찾아다니던 백운산ㆍ 관악산ㆍ소백산의 약초군락지들… 그렇게 채집해온 약초의 표본섹션을 만들어 현미경 관찰하기, 그와 연동된 약용식물학, 약품무기화학, 약품정성분석학, 정량분석학, 유기약학, 약제학, 약물학…, 주 치료작용에 상호작용과 부작용까지 연계시켜야 했던 임상약학, 독성학, 면역학, 약사법규… 유구히 구전되어 내려온 ‘약학대학 왜 왔던가’를 푸념처럼 노래하며 지고지순한 청춘마저 오롯이 저당잡혀야 했던 그 지난한 시험과 실험 너머의 160학점고지.

문득, 약사고시를 패스했다는 국가면허 취득과 정규학점을 이수했다는 약학사 취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만, 사람의 건강을 다루는 약을 맡기기엔 여전히 걱정이 앞선다던 교수님의 고별사가 죽비소리처럼 선연하게 되살아온다. 돌아가 책상 앞에 앉을 일이다.

IPA성분으로 하여 리콜되었다가 15세 미만 사용불가라는 연령금지 단서로 회생한 약품이나, 베이비파우더 속의 탈크 파동에 대해 뼈아프게 자성할 일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소명, 약(藥)을 일생의 고갱이로 여겨야 하는 내 안의 약사(藥師)를 추상같이 호출해낼 일이다. 디기탈리스! 강심제ㆍ이뇨제의 원료가 되는 잎을 품은 그 화분을 안고 돌아오는 내 마음 속에도 순열한 소명의 화초가 벙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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