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어느 약대생의 6.25 전쟁 순국 일기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편집부

기사입력 2021-06-23 16:35     최종수정 2021-06-24 09:08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1일
마침내 사립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이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라는 이름이었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개명되었고, 그해 10월 초에 개강해 수업을 시작한 곳이다. 원래 전문대였기 때문에 3년 학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작년에 기존 전문부에 1년을 더해 4년을 공부할 수 있는 학부로 개편되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장충동 부민관 건물에 새로 개관한 국립극장에서 약대 친구인 박찬수와 연극을 보기로 했기에 아침에 집을 나섰다. 찬수는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심각해 보여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전쟁이 났다고 했다. 으레 그렇듯 38선 쪽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교전을 큰 전쟁으로 잘못 알고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극장에 갔는데, 굳게 닫힌 문에 쉰다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전쟁이 났다고 떠들어 대면서도 국군이 이기고 있으니 다들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1950년 6월 26일
아버지께서는 “찬식아, 전쟁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 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고, 지금 대통령은 대전에 가 있다”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정보는 지금까지 틀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넌 잠시 피난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물어보셨다. 아버지께서는 어쩌실 것인지 여쭤 보았더니 “어린 자식들을 네 엄마에게만 맡기고 내가 어떻게 가겠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도 피난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1950년 8월 16일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사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날마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팔에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 김 아저씨와 같은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아마 공산주의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우리 집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부르주아’인지라 인민군의 감시도 굉장히 심하고, 이미 재산도 많이 빼앗겼다. 오늘은 총 든 인민군 셋이 와서 아버지를 데려갔다. 3일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문득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12월 25일
믿기지 않지만 내일이 입대일이란다. 내일이면 완전히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정체 모를 두려움이 스멀스멀 엄습해 오는 듯하다.

1951년 1월 15일
요즘 육군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훈련은 정말 힘들다.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었지만, 내 조국과 내 가족을 내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순간 사명감이 앞섰다. 그리고 가끔은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1951년 2월 15일
전세가 좋아지고 있다. 며칠 전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을 수복한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지프를 타고 이전에 살던 서울 집을 방문했다. 다들 피난을 가 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1950년 4월 18일
오늘도 전장에 나갔다. 여기가 지옥이구나 싶었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떨어졌고, 동료들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죽도록 무서웠지만 뭣 모르는 아이들을 이끌고 전투를 진행해야 하는 소위인지라 무서운 티를 내지 못했다. 한창 전투를 하다 보면, 나와 내 전우들을 죽이려는 인민군복 입은 상대가 그저 악마로 보였다. 왜 전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유를 찾기 전에 눈 앞의 분노가 그것을 가려버리고 만다. 전쟁통에 혼자 깨어 있으면 오히려 그게 머저리다. 전쟁은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별것 없다. 전쟁은 ….

1951년 4월 29일
놀랍도록 전쟁에 익숙해지고 있다. 내기 죽으면 누군가 오래오래 슬퍼해 주었으면 좋겠다. 엄마,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지치는 것도 지긋지긋해.

아, 슬프다. 서찬식 님은 1951년 5월 9일 제3이동외과 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오래 남기를 바라본다. 그의 바람처럼!

이상은 ‘서울대 순국 참전 동문 이야기 (일조각, 2021, 45-63)’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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