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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한끼 줍쇼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19-11-06 09:38     최종수정 2019-11-06 13:14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JTBC 방송에서 2016년부터 주 1회 방송하고 있는 ‘한끼 줍쇼’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방송국의 설명에 의하면 이 프로그램은 ‘정글과도 같은 예능 생태계에서 국민 MC라 불렸던 두 남자가 저녁 한끼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타리’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경규씨와 강호동씨 두 사람이 각각 인기 연예인 한 명씩을 동반하고 불쑥 어느 동네를 찾아가 아무런 사전 양해 없이 어느 집의 초인종을 눌러 “저녁 한끼 같이 먹으면 안될까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적지 않은 집이 ‘청소가 안 되어 있다’거나 ‘이미 식사를 마쳤다’라는 이유를 대면서 요청을 거절하거나 사양한다. 그러다 마침 여건이 되는 집은, 두 사람을 들어 오게 해서 식사를 같이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일정 시간 안에 승낙을 받지 못하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고 하나,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개요이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세상이 먹고 살만해 지고, 또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집을 찾아가 느닷없이 “한끼 줍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출연하는 두 MC가 워낙 유명하고 능숙하니까 그 말을 꺼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겐 벨을 누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방송은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서 이처럼 남에게 무례하게 해도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 달리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에서 느닷없이 남의 집 대문의 벨을 누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총과 칼을 휴대하고 살던 시대라면 그건 ‘날 죽여 달라’고 죽음을 자청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에게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겁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초대를 받은 집에 들어 갈 때에도 “익슈큐즈 미”라든가 “오소레 이리마스”와 같이 실례를 용서해 달라는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 나서 들어가는 그들이다.

일본에서는 남을 부르는 것 자체가 엄청 겁나는 일이다 그래서 ‘여보세요’라고 부르지 못하고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이라고 한다. 그것도 작은 목소리로! 일본인에게 ‘여보세요’는 ‘여기를 봐라 (Look at me!)’와 같은 무례한 명령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옛날 양반은 남의 집 대문에 서서 “이리 오너라”라고 외쳤다. 그것도 큰 소리로!! 그만큼 우리나라는 안전한 나라였다.

옛날부터 우리는 남의 집에 들어갈 땐 인기척을 내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저녁이면 전깃불도 없는 컴컴한 사랑방에 화로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둘이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 때 바깥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나며 동네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말(마실)을 오신다. 그 할아버지는 대개 “어이 참 달이 밝네, 보름이 얼마 안 남았나”, 또는 “저놈의 개는 동네 사람도 못 알아 보고 짖네”라고 하시며 나타나신다.

때로는 말을 하는 대신 “칵 퇴!” 하며 가래침을 뱉는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 오늘은 됭고개 밑 영감님이 오시는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이 인기척이 외국의 ‘익스큐즈 미’나 ‘오소레 이리마스’에 해당하는 ‘양해 구하기’였던 셈이다.

내가 30대일 때에는 친구 집에 무단(無斷) 방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흥이 오르면 ‘우리 집에 가자’고 호기를 부려야 멋진 사내였다. 심지어 신혼부부 집에 쳐들어가 밤새 술을 마시고 이불에 실례까지 저지르고 아침에 도망 나온 무용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한끼 줍쇼’란 이처럼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또 다소(?) 무례해도 안전했던 우리나라의 과거를 배경 삼아 탄생한 프로그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인(萬人)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된 오늘, 이 프로그램은 배경을 잘 못 잡은 인물 사진처럼 어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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