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훈의 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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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공부 잘하는 약 논쟁

정재훈 약사

기사입력 2018-05-23 09:40     최종수정 2018-05-24 11:38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정재훈 약사▲ 정재훈 약사
운동선수가 도핑테스트를 하듯 수험생도 시험을 치르기 전 약물 검사를 받아야 할 시대가 올 것인가? 농담 같지만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2008년 1월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전세계 60개국 1,400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 5명 중 1명 꼴로 질환 치료가 아니라 집중력과 기억력 향상을 목적으로 메틸페니데이트, 모나피닐, 베타차단제와 같은 약물을 복용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메틸페니데이트와 같은 중추신경흥분제에 대한 논란은 일단 뒤로 하고 최근 몇 년 사이 화제가 된 모다피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참고로, 앞서 언급한 네이처 설문조사에서 약물 유경험자의 44%가 이 약을 복용했다고 답했다.

모다피닐은 원래 낮 시간에 과다하게 졸리고, 마치 졸도하듯이 수면발작이 오는 기면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이다. 몇 년 전부터 이 약이 해외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약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영국에서는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구할 수 있는 약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런 약을 복용하는 대학생의 수가 늘어나면서 학교 측에서 이러한 약물 남용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모다피닐이 효과가 있긴 있는 것 같다. 24건의 최근 연구를 연구자들이 종합 분석한 결과, 모다피닐은 주의력을 향상시키고 학습과 기억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약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맥락과 상황을 파악하여 유연하게 행동하는 뇌의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약은 뇌 속의 여러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주는데, 예를 들어 도파민 시스템에 영향을 주어서 기민성을 높일 수 있고, 노르에피네프린에 영향을 주어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고, 히스타민에 영향을 주어서 졸리지 않게 할 수 있다. 항히스타민제 복용 시 졸릴 수 있는 것과 반대가 되는 약리 작용이다.

부작용 없는 약은 없다. 모다피닐의 경우에도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원래부터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경우 이 약을 먹고 나서 창의력이 도리어 낮아지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고, 두통, 불면증,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거나 불안증, 구역감 등이 부작용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졸리거나 코가 막히거나 설사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남용 및 중독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메틸페니데이트, 암페타민과 같은 중추신경흥분제에 비하면 모다피닐은 비교적 안전한 편으로 보인다. 특히 중독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약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짧은 기간 복용하는 상황만을 가정한 것으로, 장기 복용했을 경우의 위험성은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의사와 상담 없이 인터넷으로 불법 구매하여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 경우 약 자체의 부작용도 문제가 되지만 알약 속에 실제로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요즘은 정말 세계가 비슷하게 돌아간다.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압박감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있다. 네이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수험생뿐만 아니라 50-60대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약물 남용 비율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는 사회 분위기와 체계를 바꿔나가지 않고는 상황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모다피닐과 같은 약의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공정한 경쟁을 위해, 부작용을 막기 위해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인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가난한 지역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 환경을 개선해줄 수 없으니 공부 잘하는 약이라도 처방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새로운 약이 개발되고, 기존 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머리 아프더라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그런 사회적 토론은 약의 도움 없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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