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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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황진이(黃眞伊) <제30話>

기사입력 2017-07-05 09:38     최종수정 2017-07-05 11:1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뜬눈으로 밤을 샜다. 화담을 극적으로 만난 황홀감이 진이는 현실같이 않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심장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진이지만 화담 앞에서는 수줍은 일개 여인이고 싶어서일 게다.

화담의 아침은 일찍 찾아왔다. 어제의 비로 삼라만상은 세수와 목욕을 한 듯 깨끗하여 아침 해에 흐릿하게 보이는 샛별(金星)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진이는 뻑뻑한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집을 떠나 화담으로 올 때 맞은 비로 흠뻑 젖었던 옷이 말끔히 말랐다.

화담에 도착하여 화담스승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가 계속 조금씩 쏟아졌다. 그 비로 사위가 젖어있어 그녀의 옷도 마르지 않았던 것을 말리 사이도 없이 너무 피곤하여 그냥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동창이 밝아오는 즈음 진이가 깨어났다.

그런데 화담이 진이 옆에서 자고 있다. 밤새 진이가 화담 곁에서 잤던 것이다. 하지만 진이의 몸엔 밤새 사내 손길이 왔다 간 흔적은 티끌만치도 찾을 길이 없었다. 너무 피곤하여 집에서 준비하여 온 육포와 만두 등으로 태상주를 마신 것 까지는 생각이 났으나 그 후론 기억이 없다.

화담은 처음엔 마뜩찮은 표정이었으나 태상주가 몇 잔 들어가자 마음을 푸는 표정이었다. 온화한 분위기이나 눈 속에 눈이 있는 눈으로 꿰뚫어 보는 시선에 진이는 생애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무서움이 아닌 강렬한 사나이의 힘이 투사(投射)되는 시선이다. 그런데 그 사내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잤다. 그러나 옷깃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사나이 손끝이 왔다 간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이는 바람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허엽이 벌써 나와 있었다. “잘 주무셨소?” “예 소녀는 잘 잤습니다만 선비님들은 어디서 주무셨는지요?” “예 우리들은 저 위에 또 초당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다 잠이 오면 자고 자다 깨어나면 다시 공부합니다! 딱히 밤과 낮이 없소이다!” 진이는 허엽에게서 알 수 없는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뜨거운 살을 섞었던 소세양·이사종·이생, 그리도 송도 유수 등 숱한 사내들이 자신의 몸뚱이에 목을 맸던 이들에게서 느꼈던 정이 아닌 또 다른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그런데 문득 허엽에게서 화담의 그림자가 보였다. 허엽은 진이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다. 그런데 그에게서 화담의 그림자를 찾았다.

하지만 진이는 표정을 꼭꼭 숨겼다. “텅 빈 누각에서 자다 일어나 문득 발을 들어보니/ 비 지나간 산 빛 더욱 짙어졌네./ 볼수록 화공도 그려내지 못할 저 경치/ 높은 봉우리 구름 걷히니 푸른 꼭대기 드러나네.‘ 서경덕의 《비개인 뒤 산을 보며》를 떠올린 듯하다.

아침 해가 중천에 뜨자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박지화·이지함·박인헌·장가순·홍인우 등이 초당에서 내려왔다. 좁은 방에 콩나물 시루같이 사내들이 질서정연하게 화담 스승을 중앙으로 둘러앉았다. 시래기국에 감자가 섞인 옥수수밥이다. 화담은 몇 숟가락을 먹는 시늉을 하다 국화차 한 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제자들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밥그릇을 비우고 초당으로 돌아갔다. 허엽과 박지화가 남았다. 셋은 국화차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허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명월은 이곳에 어찌 왔소이까?” 진지한 표정이다. 이곳은 청루가 아니란 의미가 담긴 말투다. “화담 스승의 문인이 되려 합니다.” 당찬 진이의 언사(言辭)다.

허엽과 박지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퇴기인 주제에 무슨 고매한 화담 스승의 문인이 되려는 얼빠진 소리냔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진이가 누구인가! 세상 사내들의 심리를 독심술로 읽듯 꿰뚫어 보는 기능이 있지 않은가!

몸과 마음으로 기계(妓界)에서 터득한 세상살이의 지혜다. “소녀는 선비님들의 수발을 들으러 왔습니다. 소녀 아직 학문이 미천하여 어찌 화담 스승님의 문인(門人)이 되겠습니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면서 어깨 너머로 익히다 학문이 쌓이면 문인으로 받아 주십사 찾아왔습니다.” 논리가 정연한 진이의 말에 허엽과 박지화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화대를 받고 몸을 팔았던 퇴기로만 보았다간 큰코다치겠다는 표정이다. “허엽과 박지화 선비님께선 스승님께 소녀가 이곳에서 선비님들 수발을 들 수 있도록 말씀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허엽과 박지화는 국화차를 마시며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묵시적 동의가 이루어진 눈치다. ‘높이 자란 대나무 맑은 개울가에 있고/ 그 안의 정자는 작고도 그윽하다./ 세월은 아직 여름에 속하지만/ 바람과 이슬은 이미 가을이로다./달빛이 숲 사이로 새어 나오고/ 샘 소리는 섬돌 아래로 흐른다./ 누가 이 밤의 정경을 알겠는가./ 끝없이 뻗어있어 거둘 수 없다.’ 소옹(邵雍)의 《높이자란 대나무》 8수 중 둘째수를 회상 한 듯하다.

진이는 화담의 홍일점 문인이 되었다. 화담의 그림자가 되어 수발을 들었다. 술을 즐기는 화담을 위해 태상주는 명월관에서 2~3일에 한 번씩 가져왔으며 안주인 육포도 가져왔으나 산에서 버섯 등 산나물은 진이가 직접 채취하여 만들었다.

화담에게선 향긋한 선향(仙香)이 풍겼다. 그의 옆에 있으면 술에 취한 듯 선향에 취하여 온몸이 노곤해져 정신까지 몽롱해졌다. 진이는 그럴 때마다 비몽사몽의 꿈속에서 화담이 이사종으로 변신하여 숨 막히는 정사를 즐겼다. 이사종만이 아니다. 벽계수와 이생, 그리고 소세양까지 차례로 나타나 자기 여자라고 멱살잡이하며 싸웠다.

그런 모습에 사내들이 자신을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노류장화를 넘어 고깃덩어리로 보이는 신세가 처량하여 신세타령까지 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잠꼬대를 하였다.

진이는 특별 배려로 화담과 같은 방을 쓰고 있다. 화담이 올 들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옆에서 수발을 들라는 제자들의 회의에서 내린 결정사항이다. 진이가 잠꼬대를 할 때면 화담은 “황선비, 황선비...”라고 흔들어 깨웠다. 화담의 따뜻한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진이의 눈앞엔 화담이 아닌 옥황상제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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