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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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송덕봉(宋德峰) <제8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8-08-29 09:34     최종수정 2018-08-29 16:35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죽매와 옥매가 정도전(鄭道傳·1345~1398)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 맞춰 노래와 춤을 저녁이면 연습에 열중이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에 정이들은 이웃들과 연회를 베풀려는 속내다. 죽매는 노래하고 옥매는 춤을 출 때 덕봉은 시를 낭송하려는 계획에서 벌써 보름이 지났다.

 

오늘도 미암은 자정이 다 되어 귀가하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사람 좋기로 육조거리에서 소문이 난 미암이 고향으로 내려간다니 그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의 이별주가 줄을 섰다. 더욱이 긴긴 유배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한양생활에 재미를 붙였을 텐데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에 친구들은 놀라워한다. 아쉬워하는 이도 있겠으나 경쟁관계에 있는 인사는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랬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중심으로 좋은 직업을 동인(東人)·서인(西人)을 비롯한 학파(學派)들이 전쟁에서 상대방을 무찔러 얻은 전리품처럼 차지하려는 사대부들의 생활터전이다. 사색당파의 치열한 당쟁도 깊이 속을 들여다보면 밥그릇 싸움으로 직결되었다.

처음엔 학문으로 연결되어 모인 학문의 전당이 과거를 통해 육조거리로 진출하는데 징검다리역할이 되어 학파가 정파(政派)로 진화하였다. 그들은 결국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파는 내쫓고 자기파를 심는 밥그릇 쟁탈전이다.

미암은 그런 꼴을 더는 보기 싫어 귀향하여 향반(시골양반)자리로 되돌아 가려한다. 고기도 놀던 데가 좋다고 미암이 한양생활에서 겉돌고 있었다. 긴 유배생활 끝에 복직되어 비단옷에 귀한 먹거리가 어울리지 않았다. 유배생활이 몸에 배었던 미암이 어쩔 수 없이 의관을 직위(종2품 참판)에 맞게 입어야 하는 허례가 마음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향(해남)이 가깝다는 이유로 삭풍이 휘몰아치는 함경도 종성으로 옮겨졌다. 낯설고 물 설은 곳이다. 긴 유배생활 끝에 복직되어 한양 북촌에 둥지를 틀었다. 아들, 딸, 며느리 등 대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덕봉의 알뜰한 내조 끝에 권력의 핵심들이 거주하는 북촌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미암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겠다는 통고다. 미암은 한번한 말은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첫마디에 동의가 없으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상대가 지쳐 마지못해 양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고집통이다.

이번에도 덕봉은 한 달 만에 동의를 말했다. 부부관계를 하려는 분위기에서 “언제 내려갈 거예요?”가 그것이다. 이번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겨울한철 미뤄진 것은 폭설이 핑계다. 《진신도팔경시》배경을 구경시켜 준다는 미암의 약속도 핑계거리가 되었다.

미암의 몸놀림이 여느 때와 달리 세차고 신나보였다. 얼굴엔 환희의 기쁨이 가득하다. 쳐다보는 덕봉의 마음도 전례 없이 용솟음친다. 둘은 금방 뜨겁게 한 덩어리가 되었다. 미암이 덕봉의 귀향에 동의에 대한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보였다. 덕봉도 그렇게 생각하고 요철(凹凸)을 척척 맞추어 주었다.

미암 부부는 친구 같은 부부인 동시에 부부 같은 친구이기도 하다. 덕봉의 학문은 미암에 뒤지지 않는다. 어느 부분은 앞서는 경우도 있다. 덕봉은 다복한 가정의 막내딸이다. 위로 정노·정언·정수 세 오빠가 있으며 언니도 있다.

덕봉은 한양에까지 알려진 명문가는 아니었으나 담양에선 소문난 가문에서 남녀차별없이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며 성장하였다. 그녀는 언문(한글)뿐만이 아니라 한문과 사서(四書:논어·맹자·중용·대학) 등을 공부하여 여사풍이었다. 임란(1592) 이전까지는 여성들에게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가정교육 등이 실시되어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국가인 고려의 사회적 분위기가 남아있었으리라...

덕봉은 북촌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보습에서 번뜩이는 예지와 시문과 역사에 성리학까지 해박한 지식에 이웃 사대부 댁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덕봉이 처음 북ㅍ촌에 들어왔을 때 소실과 그의 가솔까지 불러들여 중양절(重陽節·9월9일) 잔치를 벌였듯이 담양으로 내려가기 전에 다시 중양절 잔치를 벌이려 한다. 이웃과 이제 정이 푹 들었는데 헤어지려니 마음이 아프고 섧기까지 해서다.

못 다한 알뜰한 정을 중양절로 때우려 한다. 중양절엔 국화가 있어야 하는데 마침 정원엔 노란국화가 한창이다. 남편 미암에게도 어둡기 전에 돌아오라 당부했으며 죽매와 옥매와 함께 덕봉이 아침부터 음식 준비에 부산하다.

마침 가을바람이 불어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전형적 가을 날씨다. 죽매의 노래와 옥매의 춤이 가히 일품이다. 죽매는 노래뿐이 아니다. 거문고까지 능숙하게 연주하여 잔치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경사스럽게 고당의 위에서 모시니 / 추풍에 해 비치는 때로다. / 거문고 노래에 흥취가 일어나니 / 이 모임을 백년이나 기약하네.’ 사위 윤관중의 시(詩)다. 이에 미암의 외아들 정렴이 수창(酬唱)한다. ‘백발의 부모님이 당상에 함께 계시니 / 색동옷을 입고 이때에 춤을 춘다. / 우리 집의 무한한 즐거움은 / 이밖에 다시 무엇을 바라리오.’ 이에 미암이 받는다. ‘대궐에서 은총을 받던 날 / 국화를 순 잔에 띄우는 때 / 한 집에 친한 이 오륙인이 / 함께 태평의 때를 즐긴다.’ 부창부수라 했다. 덕봉이 그냥 있을 리 없다. ‘옛날 남북으로 헤어져 있을 때 / 어찌 이때가 있을 줄 알았으리요. / 맑은 가을 좋은 명절에 모이니 / 천리에서 서로 가액이라도 한 듯 하여라.’ 이렇듯 중양절의 잔치는 시와 노래, 그리고 춤까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는 연희가 벌어졌다.

미암이 20년의 귀양살이에 덕봉의 생활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시어머니까지 모셨다. 시어머니가 작고하자 덕봉은 미암이 없어 소홀히 한다는 말을 들을까 더욱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미암은 귀양살이로 본의 아니게 임종을 보지 못하는 불효가 되었다.

이제 귀향하여 미암이 시묘 살이 하듯 지근거리에서 묘소를 참배하려한다. 이승에서 못 받은 효도 저승에서 알 리 없으나 미암은 그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다. 귀향을 서두르는 것도 사실은 그러한 속내다. 그런 미암의 깊은 속내를 덕봉도 알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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