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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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홍랑(洪娘) <제5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9-05-02 09:36     최종수정 2019-05-02 09:58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정원 연못가에 홀로서 있는 오동나무는 어느새 잎을 하나둘 떨어뜨리고 앙상하기 그지없다.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온 홍랑(洪娘)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살림살이도 어려워졌으며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홍랑은 고죽이 있는 경성으로 가려한다.

보통결단이 아니다. 함경도 국경지대는 전장에서 뼈가 굳은 장수들도 꺼리는 지경이다. 윤관장군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조차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명재상 이색(李穡)이 떠나가는 어느 장수에게 간곡한 격려를 하였다. “장백산(백두산)은 높고 험준하여 철령관은 우뚝 솟은 산맥은 수천 리나 뻗어있어 험난한 군사요충지이니 북방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해 주게! 그리고 꼭 몸성히 돌아와야 되네...” 그랬다.

그런 곳에 지금 고죽이 가 있는 것이다. 여자 홍랑은 망설임이 없다. 남장을 하고 떠나려는 태도다. 고죽을 위해선 어떠한 것이든지 할 수 있는 비장한 표정이다.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 태도다.

한편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병영을 둘러 본 고죽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병졸들도 숫자만 있을 뿐 실제 병사는 태반이 허수다.

여진족들의 등살은 하루가 다르게 극성이 더해갔다. 더욱이 병마절도사 김선삼(金善三)이 와병중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여진족들은 제집 드나들 듯 오가며 행패를 부리고 있다.

고죽의 명성은 이곳 병졸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가 이곳 북평사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병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오합지졸에서 기압이 바짝 들어갔다. 하지만 고죽은 병사들을 자식처럼 대하며 가족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심동체를 만들려는 속내다. 고죽이 병사들을 자식같이 대하자 그들도 어버이나 맏형처럼 맞아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병영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고죽은 홍랑을 떠올렸다.

품고 품어도 실증이 안날 홍랑을 홍원에 두고 온지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이곳은 오랑캐들이 들끓어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는데 날씨까지 삭풍이 몰아쳐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렇다고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에게 등 따습고 배불려 주라고 보낸 북평사가 계집이나 생각하고 주색에 빠진다는 것은 고죽으론 상상도 못할 행동이다. 하지만 풍류객 고죽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이 병석에 있어 고죽은 그의 대리인으로 동분서주 하다보면 하루해가 촌음(寸陰)처럼 지나갔다.

오늘도 그런 하루였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병영을 둘러보고 백성들의 안녕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게다가 병마절도사가 병중에 있어 그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몸이 부서져라 뛰어다녀도 만족할 하루가 아니다.

오늘은 육신이 더욱 고달프다. 이럴 땐 더욱 홍랑이 눈앞에 어른거려 안절부절 상태다. ‘은근히 굴러가는 수레의 두 바퀴는 / 하루에도 수없이 같이 구르건만 / 마음은 같아도 수레와 같지 않아 / 헤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갈팡질팡 / 수레바퀴는 자취나마 있으련만 / 눈으로 볼 수 없는 네가 마냥 그립다’ 《무제》(無題)다.

그랬을 터다. 고죽의 나이 그때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삼십대 후반이다. 풍류객에게 여인은 빛과 그림자다.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에게 등 따습고 배 불리게 해주는 목민관으로 왔으나 문득문득 홍랑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단둘이 혼례를 치루고 화촉동방을 꾸몄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밤마다 잠 못 이르게 했을 터다.

명장 휘하에 약졸 없다고 고죽이 부임한 이후엔 병사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그들은 고죽이 외로워하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고죽에게 사랑하는 여인 홍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데려오자는 거사를 꾸몄다. 고죽의 편지도 동행시켰다.

하지만 홍랑을 데려오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이 길주(吉州) 산속에서 도둑에게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호사다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고죽과 홍랑의 사랑은 더욱 뜨겁게 내면으로 불타올랐다. ‘어렸을 때 집을 떠나 / 편지도 드물어라 / 가을이 왔건만 아직도 / 싸움하던 옷 그대로 입고 있네 / 성머리에서 불어대는 나팔소리가 / 찬서리 내리길 재촉하자 / 누렇게 물든 느릅나뭇잎 / 하룻밤 새에 다 떨어졌네’ 고죽의 《변방 싸움터에서》다. (시옮김 허경진)

마음은 홍원 홍랑에게 맡기고 몸만 경성으로 간 고죽의 심경일 게다. 고죽과 홍랑은 밤마다 꿈에서 만나 뜨겁고 알뜰한 사랑을 불태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고죽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홍랑을 벌건 대낮에 벼락을 맞은 듯 생각을 할 뿐 호사스런 마음일망정 사랑놀이를 할만치 여유가 없다.

오랑캐들이 경성을 향해 돌진해 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어서다. 고죽은 잠이 오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까진 자신의 명성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오랑캐들도 감히 경성까지는 넘보지 못했었는데 직접 침공을 해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어서다.

병권(兵權)이 병마절도사 김선삼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선삼은 애초부터 고죽이 경성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파(政派)가 달라 사사건건 이견으로 부딪치고 자기보다 앞서가는 꼴을 못 보는 인사다. 더욱이 자신이 병석에 있는데 고죽이 전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병권을 고죽에게 넘겨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코앞까지 오랑캐들이 침공해 왔다는 첩보가 날아들었으나 병마절도사는 병권을 고죽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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