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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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홍랑(洪娘) <제7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9-05-15 09:36     최종수정 2019-05-15 10:22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거짓 군령(軍令)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 고죽의 단호한 충성심이다. 오랑캐(여진)들은 시시각각으로 경성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는 첩보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을 며칠 동안 설득했어도 요지부동이다. 자신이 병석에 있는 동안 고죽의 잘되는 꼴이 배가 아파서 더욱 이 핑계 저 핑계로 군령을 내리지 않는다.

고죽은 결국 거짓 군령을 내려 경성을 지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 보다 당당한 사내가 되자는 결단이다. 고죽은 한밤중에 내당으로 나와 천단(天壇)을 만들어 요배(遙拜)를 올리며 임금에게 헌시를 읊었다. ‘한밤중에 단을 쌓고 구름을 쓴 뒤 / 분양하고 멀리서 님에게 절하오 / 달빛속의 내 모습 보는 사람 없어도 / 대궐에 계신 님은 내 마음 아시리...’ 그랬다. 고죽은 그렇게 군령을 어겨가며 임금에 대한 충성과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는 단호한 사대부다움이다.

사실 고죽은 문과 출신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진사에 합격한지 6년 뒤다. 이때 고죽은 백광훈·이산해·윤탁연·최립 등의 시인들과 무이동(無異同)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즐겨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다.

그때 고죽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고죽은 1539년(중종34) 전라도 영암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수인(守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또한 송강정철·만죽서익 등의 명사들과 삼청동에서 풍류를 즐겨 세인들은 이들을 이십팔수(二十八宿)라 불렀다.

이렇듯 고죽은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사대부 풍류객이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풍류문학을 개척한 아름다운 프로티어라 하겠다. 이 같이 풍류문학을 창조적이고 아름답게 격조 있는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촉매역할은 홍랑이 했을 것이다.

사실 사랑에 여인이 빠질 수는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문화예술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물론 동성애 등이 있어 사랑이란 단어가 단순히 남과 여의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면 남자와 여자가 떠오르는 것이 통례라 하겠다.

홍랑은 고죽에 대한 마음이 사랑을 넘어 종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고죽이 이승을 떠나자 홍랑은 시묘(侍墓)살이를 자청하였다. 시묘살이는 자식이 부모 묘에서 하는 것이 통례인데 여자가 그것도 기생출신 부실이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홍랑은 종교 같은 고죽을 위해 즐겁게 했으리라...

고죽은 풍류에만 열정적인 게 아니었다. 충성심 또한 남다르다. 국태민안을 위해 고죽은 병마절도사의 군령을 어기기로 결심을 하고 잠시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비몽사몽 상태에 홍랑이 나타났다. 그때 고죽은 “안 된다. 이리 빨리 뛰어오너라!”라고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홍랑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도끼를 든 험상궂은 사내에게 쫓기는 장면이었다. ‘남쪽 연꽃 북쪽 연못에 연꽃 깊이 피었는데 / 연꽃의 마음 괴로운 게 사람마음 같아라 / 아직 연꽃 지기도 전에 가을비가 일고 / 비와 이슬 몇 번이던가 서리와 우박이 침범하네 / 그리워도 보지 못해 사람 늙게 하더니 / 거울 속 머리털은 벌써 세어버렸네 / 차라리 연못의 연잎이나 따다가 / 고운님 입으실 옷이나 지을 것을...’ 고죽의 《연꽃의 마음이 사람마음 같아》서다. (시옮김 허경진)

그랬을 것이다. 오랑캐들과 일전을 치룰 전투를 앞두고 천단에 제(祭)를 올리고 휘영청 밝은 달을 문득 쳐다보다 비몽사몽 상태였으나 오매불망 하던 홍랑을 보았다. 그것도 발가벗은 몸뚱이로 험상궂은 사내에게 쫓기는 장면이다. 고죽은 마음 같아서는 만사 팽개치고 홍랑이 있는 홍원으로 말달려 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는 임금의 명을 받은 북평사가 아니던가! 언제 어떻게 경성을 향해 오랑캐들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전운이 감도는 상태다. 고죽은 무력함을 느낀다. 홍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밤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시를 읊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하고 있을 홍랑을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원망하고 있다.

이처럼 경성의 안위가 백척간두에 있는데도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태평하기만 하다. 전투에서 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류다. 전투에서 패전하여 고죽이 죽을상이 되는 모습을 자신이 출세하는 것보다 즐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들은 학파가 달랐다. 고죽이 율곡이이와 가까웠으니 서인(西人)편으로 볼 것이다. 서인의 반대파는 동인(東人)이었으니 김선삼이 서인편인 고죽의 출세를 달가워 할 리가 없다. 경성 백성의 안위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그랬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리며 끌어주고 밀어주어 자기파들끼리 벼슬을 독차지 했었다. 일제는 이 같은 정파들의 행태를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폄훼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과 같이 새로운 인재가 발탁되어 혼탁한 정계를 쇄신하는 효과도 있었다.

동인과 서인의 물고물리는 빈번한 사화(士禍)로 인적쇄신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어 조선조 500년이란 역사가 탄생됐다는 평가도 있다. 당쟁의 나라 조선의 아이러니다.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국태민안보다는 상대 파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위인이다.

고죽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태민안을 더 걱정하였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경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병마절도사 김선삼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대부로서 비굴한 자세다. 천하의 풍류객 고죽은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죽은 자신의 안위보다 언제나 국태민안과 임금에게 충성이며 그 깊이는 같았다. 가슴이 시리도록 사랑하는 홍랑도 나라가 있어서다. 고죽은 진정한 조선을 사랑했던 풍류객 사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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