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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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홍랑(洪娘) <제9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9-05-29 09:36     최종수정 2019-05-29 09:39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비좁고 열악한 주거환경이지만 사랑하는 남녀는 행복하다. 지금 홍랑과 고죽이 그러하다. 언제 오랑캐들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 몰라도 잠시 홍랑을 볼 수 있어 풍류객 고죽은 감격할 기쁨이다.

홍랑도 고죽의 마음과 같다. 종교 같은 사랑을 위해 불원천리 달려와 이제 잠시라도 고죽을 볼 수 있는 행복을 만든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한 것이다. 홍원에서 이제나저제나 서찰이 오길 기다릴 때보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홍원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아 아름다운 상상만을 했었는데 경성에 와 현실을 보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전황이었다. 홍랑은 고죽을 잠시 볼 때 비로소 뜨거운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며 안도의 표정을 보일 수 있었다.

고죽도 같은 마음이다. 한 몸 같은 뜨거운 남녀의 사랑이 불원천리 달려와 한 곳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전황(戰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살아있는 신으로까지 생각하는 홍랑이 고죽은 문득문득 겁까지 났다.

전장에서 행여 자신이 잘못되는 일이 생기면 홍랑이 어떻게 될까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기필코 혁혁한 공을 세워 한양으로 올라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홍랑은 경성으로 온지 일주일이 지나자 홍원에 있을 때의 평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정을 어렵사리 찾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들은 홍랑이 경성에 온지 열흘이 지난 뒤에도 제2의 화촉동방을 머뭇거리고 있다. 고죽이 병사들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고향산천에 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와 있는데 장수라고 여자를 데려다 잠자리를 하면 사기가 떨어질까 관사에 들지 않고 군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장수와 병사의 동고동락이다. 홍랑은 고죽이 잠자리에 들어오지 않자 불안하다. 아녀자가 전장에 나타난 것이 불길하여 잠자리에 안 드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요즈음 우리 님은 어찌 지내시나 / 하룻밤만 그리워해도 센 머리가 늘어나네 / 난간에 홀로 기대 잠 못 이루는데 / 주렴 넘어 대숲엔 빗소리만 시끄러워라...’ 김씨(金堉·1580~1658)의 《빗소리》다.

홍랑이 지금 딱 이 시의 심정일 게다. 고죽이 있는 곳에 가면 홍원에 있을 때처럼 살가운 부부관계가 재현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경성에 와 보니 현실은 생각했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더욱이 자기 남자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목석 보듯 하는 것이 분하기까지 하다. 공연히 20여일이나 걸려 산 넘고 물 건너 남장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왔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동상이몽이다. 고죽은 고죽대로 마음이 편치 않다. 홍랑이 홍원에 있을 때는 불원천리 달려가 뜨거운 가슴 깊이 품고 싶었으나 막상 본인 스스로 달려와 객관에 있으니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싸움터에 계집과 운우지정을 즐기는 장수로 소문이 날까 걱정이다. 병마절도사의 군령을 어겨가며 오랑캐와 일전을 벼르고 있는 일향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한편 경성에 도착 이후 홍랑은 해가 어스름하게 서산에 걸리면 목욕재개하고 뒷물을 하였다. 밤마다 자리끼 까지 떠다 놓았다. 고죽이 언제 불시에 들이닥쳐도 주인을 뜨겁게 맞을 수 있는 태도다.

사실 고죽은 홍랑을 데려오려고 홍원에 극비리에 사람을 보냈었다. 하지만 홍랑은 홍원에 없었다. 정황상으로만 보면 홍랑은 어디론가 가고 홍원에 없는 것이다. 고죽은 처음엔 소식조차 없는 자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어느 사내의 여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홍랑이 바람처럼 남장을 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고죽의 오해였다. 고죽은 홍랑이 오기 전엔 퇴근 후엔 아무리 바빠도 이웃 산사(山寺)에 잠시 들렸다. 그곳에 가면 왠지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부처는 있어도 분향이 끊겼고 / 중이 없는데 세월은 절로 오가네 / 낡은 울타리에 누더기 걸려있고 / 물 마른 우물가에 버려진 표주박 / 들길에는 올가을의 낙엽이 수북 / 부엌에는 해묵은 나무가 몇 묶음 / 할 일 없는 길손이 한차례 다녀가면 / 버려진 절간은 더 한층 쓸쓸하이...’ 고죽의 《폐사》(弊社)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오늘밤이라도 제2의 화촉동방을 치루고 싶다. 하지만 욕정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몇몇 장수들 말만 듣고 운우지정을 즐기면 그들의 실망이 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북평사도 별수 없네.’라고 돌아서서 수군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여서다.

그렇다고 홍원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언제 오랑캐들의 침공이 물밀 듯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마냥 독수공방으로 있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고죽은 안팎 꼽사가 되었다. 여자와 전장이다. 전장엔 여인이 필수라지만 지금은 아니다. 장수들과 병사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긴다.

자신들은 사랑하는 처자식을 이역만리에 떼어놓고 싸움판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 북평사는 밤마다 운우지정을 즐긴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 스스로 지는 전장이 되기 때문이다.

고죽은 모든 상황을 읽고 있다. 승전했을 때와 패전 했을 때의 자신을 놓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절세미녀 홍랑이 와 있는데 후자가 될 수는 없다. 대승하여 임금의 축하주를 받는 꿈을 꾸고 있는 게다.

오랑캐들은 고죽이 경성 북평사로 부임해 온 후론 전황이 달라졌다. 공세가 수세로 바뀌었다. 몇 번 침공을 시도했다 대패한 후론 뚜렷한 수세로 진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고죽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전황에서도 홍랑은 땅거미가 지면 목욕재개하고 뒷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던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다. 바람처럼 고죽이 들려 홍랑의 한을 풀어주고 나비처럼 날아갔다. 홍랑이 경성에 온지 꼭 보름이 지난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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