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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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홍랑(洪娘) <제14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9-07-03 09:36     최종수정 2019-07-03 09:40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시묘(侍墓)살이 9년의 혹독한 사랑의 영혼은 제1회 파주 홍랑 문화예술제(회장 사영기)로 되살아났다. 무려 435년(2018년 4월 18일)만이다. 사랑이 문화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운 행사다.

홍랑과 고죽이 주인공이다. 사내는 조선팔도를 대표하는 풍류객이며 홍랑은 시와 노래, 그리고 가야금과 거문고까지 능수능란한 기생(前) 신분이다.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첫눈에 반해 부부가 되었다. 영원히 헤어져서는 못사는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뜨거운 사랑을 시샘 했음인지 짧은 만남에 긴 기다림에 시달리는 처지로 만들었다. 홍랑이 그렇게 되었다. 홍원에서 극적으로 부부가 되어 헤어지고 만나길 되풀이 하다 다시 헤어졌다.

고죽이 한양으로 영전 되었으니 기쁘긴 하나 여자의 마음은 서글프고 안타깝다. 더욱이 소실(小室)의 신분이여서다. 조강지처였으면 떳떳이 따라나설 수 있으나 기생 첩은 그리 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이면서 태어난 신분에 따라 사회의 등급이 매겨지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그러하였다.

재능으로만 따지면 홍랑이 조선에서 단연 손꼽히는 여자였을 터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어렵고 세상살이가 순탄치 않아도 홍랑은 고죽의 사랑이면 웃음과 기쁨과 꿈을 잃지 않는다. 고죽이 한양으로 올라갈 때 홍랑은 덕풍역(德豊驛)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갈 수가 없었다. 당장 홍랑이 가서 거처할 곳이 없어서다. 고죽은 사랑하는 홍랑을 조강지처 못지않은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으나 마음과 같이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홍랑은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덕풍역(현 하남시 덕풍동) 인근에 집을 얻어 고죽의 소식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그들은 태풍이 불면 훌러덩 날아갈 듯 한 초가집에서 홍원의 화촉동방 이후 가장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다.

홍랑은 고죽이 그리울 때면 그의 시를 거문고에 실었다. ‘올바른 길은 세상에서 용납되기 어렵다네 / 하찮은 벼슬이야 가난 때문에 하는 거지 / 온 집안이 외진 시골로 떠난다기에 / 봄날 강가에서 외로운 배와 헤어지네 / 섬돌 아래에는 단약을 달이던 아궁이 / 창가에는 홀을 잡은 사람 / 황교도 오리를 타고 다녔으니 / 얼마인가 기린각을 배알 하겠지’ 고죽의 《괴산으로 부임하는 조원을 보내며》다.

그랬다. 홍랑은 고죽의 사랑이 목마르다. 기생이었을 때는 본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사내들이 제 욕정만 채우고 꿀만 빨아먹고 꽃을 떠나는 벌 나비 같았다. 그러나 고죽과의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를 더 배려하는 꿈같은 잠자리다.

홍랑은 덕풍역에서 고죽과 헤어진 후 흉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고죽의 절명이다. 덕풍역에서 헤어진 지 한 달여여 후다.

사색당파(동인:남인·북인, 서인:노론·소론)의 희생양이 되었다. 고죽이 중도파여서다. 정국이 평온하고 국태민안 이였을 때는 사색당파에 속하지 않은 중도파가 유리하나 세태가 불안하면 가장 위험한 위치다.

사색당파에서 서로 상대파로 몰아 위해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고죽은 중립파로 분류되어 있는 영의정 노수신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어 사색당파 모두의 경계대상 이였을 터다. 자기네 편이 아니면 모두 경계대상으로 분류하여 적이 되었다. 고죽도 그렇게 학자관료 집단인 사색당파의 밥그릇 싸움에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홍랑은 고죽이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발탁되었으니 자신도 곧 북촌이나 육조 이웃 어느 곳에서 살 수 있으려니 하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절명 소식이 날아들었다. 홍랑은 서슴없이 고죽의 무덤 앞으로 갔다. 여자 시묘살이가 시작되었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의 시다.

고죽도 즉각 수창하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그랬다.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보다 더 아끼고 더 사랑하였다. 지독한 사랑이다. 그들에겐 사랑이 곧 신앙이었을 터다.

시묘살이는 부모 묘소 앞에서 아들이 하는 것이 상례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홍랑은 여자의 몸으로 지아비 고죽의 묘에서 3년이 아닌 9년을 하였다. 절색(絶色)으로 조선팔도에 소문이 나 있는 여인이 시묘살이를 하니 사내들이 그녀를 그냥 놔 둘리가 없다.

홍랑은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에 검댕이를 바르고 그것도 부족하여 스스로 위해를 하여 추녀가 되었다. 절기(絶妓)의 단호한 태도다. 고죽과 홍랑이 실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눈 세월은 6개월에 불과하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는데 홍랑과 고죽에겐 6개월이란 세월이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산 삶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새로워 화촉동방으로 영혼의 기(氣)를 높였다.

관기(官妓)를 사랑하여 사대부로 풍기문란 등으로 좋은 벼슬자리에선 벗어났다. 풍류객의 적나라한 삶이다.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의 나라로 겉으론 도덕군자이여야 벼슬을 할 수 있었다. 학문이 높았으나 고죽은 학문에 걸맞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풍류객답게 사랑을 택했을 것이다.

34살의 고죽과 16살의 홍랑이 처음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들은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고죽이 절명하자 홍랑은 역시 시묘살이로 지아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장 9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자청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삶을 제물로 하여 예술로 재탄생 시키는가 보다. 홍랑은 파주 홍랑 문화예술로 부활하여 여류문학사에 영원한 역사가 되었다.

한편 해주 최씨 집안에선 그녀를 집안사람으로 인정하여 고죽 앞에 안장시켰다. 지금은 홍랑과 고죽은 신분 없는 세상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영겁의 세월 속에서 화촉동방 같은 사랑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홍랑과 고죽의 세기적 로맨스는 그렇게 만인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을 피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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