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부패의 추억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15-11-18 09:38     최종수정 2015-11-18 10:09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약 한달 전, 우연한 기회에 1989년에 미국에서 우리 부부에게 세례를 주신 박창환 목사님이 서울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존경해 마지않던 그분과 헤어진 지 무려 26년만의 일이었다. 그 분이 살고 계시다는 장신대 기숙사로 찾아 뵙고 보니 모든 것이 감격이었다.

우선 92세라는 연세에도 여전히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것이 놀라웠고, 아직도 일주일에 2-4시간씩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 강의를 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신학 교육이 부실한 남미에 가서 참된 신학교육을 시킬 계획이라는 사실이었다.

감격의 해후를 한 후 내 근황을 보고 드렸더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특히 약사님들에게 강의를 하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라고 하셨다. 나는 ‘정년 퇴임 후에도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라는 말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목사님은 곧 이어 내게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강의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평소 정직을 강조하시던 목사님이지만 다시 한번 목사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은사이신 고 김신근 교수님이 한국동란 때 말단 부대의 약제장교로 근무하던 때의 일이란다. 하루는 상부에서 DDT 한 드럼통을 잘 받았다고 싸인 해서 올려 보내라는 서류가 한 장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드럼통은 보이지 않았다. 위 부대에서 아래 부대로 내려 오는 도중에 여기 저기서 다 빼 돌렸기 때문이었단다.

내가 1971년 육군의 모 특과 학교에 입학한 날, 나와 함께 입학한 졸병 모두는 갖고 있던 돈 전부를 부대 간부에게 뺏겼다. 각자 돈을 소지하고 있으면 고참들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으니 안전하게 중대본부에 맡기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더니 매일 저녁 모두에게 빵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웬 호사인가 했더니 월말에 피교육생들의 봉급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받을 봉급에서 먹은 빵 값을 제하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희한하게도 그 학교는 피엑스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그날 저녁 점호를 면제시켜 주었다. 저녁 점호는 당시의 일과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신 졸병에게 내무반 침상에 누워서 점호를 면제받게 해 주다니, 세상에! 그러니 너도 나도 집으로 술 사 마실 돈을 부치라는 전보를 칠 수 밖에.

또 8-90년대만 하더라도 운전자는 지갑에 면허증과 함께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끼워 넣고 다녀야만 했었다. 교통경찰이 면허증 제시를 요구할 때 지갑을 건네주면 그 오천 원권을 꺼내 갖는 대신 위반 사실을 눈감아 주곤 하였기 때문이다. 교통 경찰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한 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돌아 보면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온통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이런 세태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이제는 교통경찰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또 동사무소나 구청의 민원 창구에도 과거에 만연했던 급행료가 없어지는 변화가 생겼다. 분명 군대도 지금은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산행 중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단다. 119에 연락하니 10분도 안되어 대원이 출동하여 산중턱까지 들 것을 들고 와 병원으로 날라 주었다. 친구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 10만원 정도의 사례비로 주려고 하였지만 119 대원은 끝내 그 사례비를 받지 않았단다. 나도 119에 대하여 이미 20여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바가 있다. 분명 119는 우리나라의 희망이다.

그러고 보면 서민들의 세계는 이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아진 것 같다. 문제는 고위층의 부정 부패는 오히려 더 은밀해지고 그 규모가 커진 느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고위층의 부정 부패까지 없앨 수 있을까? 분명 교통 경찰과 119 및 관공서의 성공 사례를 연구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위층이 스스로 청렴결백 해 질 의지가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박 목사님의 말씀이 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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