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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역설(逆說)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20-01-15 10:00     최종수정 2020-01-15 10:23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1. 나는 현직 교수일 때 책을 여러 권 썼는데 그때마다 한 글자도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처음 부임하였을 때인 1983년에는 나도 영어 책의 번역판을 낼 욕심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일정 분량씩 번역을 해오라고 시킨 적이 있었다.

얼마 후 학생들이 가져온 번역을 보니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이 잘 못 써온 부분을 일일이 수정액으로 지우고 다시 써야 했는데, 그게 내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는 것보다 더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떠한 책을 쓸 경우에도 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혼자서 시종을 책임지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또 학생들이 제1저자로 발표하는 연구 논문을 쓸 때, 그리고 나의 연구 프로포잘을 쓸 때에도 주로 나 혼자 일의 시종을 주관하였다. 나는 그러는 것이 교수로서, 또 연구자로서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것을 혹시 완벽주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는데, 학생들이 가져 온 원고나 논문이 웬만했으면 나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혹사하는 섣부른 완벽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동료인 K 교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상당 부분을 학생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나는 K교수의 지시 사항을 수행해 내는 학생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이런 업무를 시키는 것이 교수의 정도(正道)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제법 흐른 시점에서 문득 돌아보니 K 교수의 지도를 받은 졸업생들이 번역도, 논문쓰기도, 프로포잘 작성도 내 제자들보다 훨씬 더 잘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교수 생활을 정도대로 잘 한답시고 고생 고생한 내가 결국은 능력이 떨어지는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시키지 않고 스스로 다 하는 것이 교수의 정도라는 젊었을 때의 내 믿음에 대한 역설(逆說)이 아닐까?

2. 나는 온누리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2004년 갑자기 장로가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내가 장로가 되자마자 같은 공동체에 유일하게 계시던 선배 장로님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 가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우리 공동체의 대표 장로의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그 때의 당혹감은 아무리 설명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교회 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공동체의 대표가 되고 나니 난감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다행히 교회 일의 모든 것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J 집사님이 공동체의 총무를 맡아 주었다. 할렐루야! 나와 J 집사님은 대표 장로와 총무로서 4년이나 섬기게 되었는데, 이는 그 동안 우리 공동체의 장로가 나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J 총무님은 특유의 유능하고 성실함으로 그 4년을 한결 같이 섬겨 주셨다.

4년 임기가 끝나가는 어느 날, J집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장로님이 일일이 참견하셨으면 총무 역할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라 주셨기에 스트레스 안 받고 4년을 총무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내가 일일이 참견하지 않은 이유는 실은 내게 업무에 간섭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고 하니 어찌 내가 놀라지 않았겠는가? 그 때 나는 실력 없음이 오히려 덕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었다.

3. 위키피디아를 보면 역설(paradox)이란 언뜻 보면 일리가 있거나 있는 것처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게 하는 논증이나 사고 등을 일컫는다고 한다. 쉽게 말해 우리 인생이 반드시 사람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역설은 실은 하나님의 은혜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아무 것도 아닌 자를 택하여 쓰시는 하나님 (고전 1: 27-28), 또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는 말씀을 역설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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