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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피린계특이체질

정재훈 약사

기사입력 2018-02-28 09:42     최종수정 2018-03-07 09:55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정재훈 약사▲ 정재훈 약사
“피린계 특이체질”이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간단해보이지만 의외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피린계 약물이 무슨 뜻인지부터가 애매하다. 피린계 약물은 아미노피린, 안티피린, 이소프로필 안티피린처럼 피린으로 끝나는 진통제를 통칭하는 용어다.

피라졸론이라는 화학구조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피라졸론 계열 진통제라고 불러야 더 정확한 명칭이지만, 발음이 어렵다보니 대신 피린계 약물이라는 말로 굳어졌다.

안티피린은 피린계 약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약이다. 1884년 독일의 화학자 루트비히 크노르가 개발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학 합성된 진통제이다. 그런데 안티피린은 본래 일반명이 아니라 상품명이다.

해열제를 뜻하는 영단어 antipyretic에 약 이름이라는 걸 표시하는 -ine을 합쳐서 만든 상품명이다. (이 약의 국제일반명INN은 phenazone이다.)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동업자>라는 소설에 안티피린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공 홍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의사인척 하고 다닌다.

“약은 역시 안티피린과 위산뿐이엇습니다. 어떠한 병에든 食前藥(식전약)으로 안티피린, 食後藥(식후약)으로 위산이엇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안티피린이 상당히 잘 알려진 약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설피린(다이피론), 아미노피린과 같은 약이 많이 쓰였는데, 피린으로 끝나는 약들이 워낙 인기가 좋아서인지 나중에는 피린계 소염진통제가 들어있지 않은 약에도 끝에 피린이라는 말을 붙여 팔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피린계 소염진통제가 들어있든 들어있지 않든 약 이름에 피린이 들어있는 것들이 많았다. 원래부터 비공식 용어였던 ‘피린계 약물’이 더욱 두루뭉술한 말이 되고 만 셈이다.

자신이 피린계 약물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실제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약국이나 병원에 가서 자신이 피린계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피린계 약물을 복용 후에 피부 발진 또는 두드러기가 생기거나 또는 천식, 만성 비염과 같은 질환이 악화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정말 피린계 특이체질이라면 그 한 가지 계열의 약에만 과민한 것이다. 따라서 피린계가 아닌 다른 계열의 소염진통제는 복용해도 무탈해야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환자 본인은 피린계 약물 특이체질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피린계가 아닌 다른 소염진통제를 복용해도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가성 알레르기 반응이다.

가성 알레르기 반응은 알레르기와 증상은 비슷하지만 진짜 알레르기로 인한 ‘면역 반응’이 아니다. 때문에 ‘가성’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소염진통제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가성 알레르기 반응은 약에 의해 COX-1 효소가 억제되면서 반대로 염증성 물질인 류코트리엔이 축적되어서 생겨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두드러기가 나거나 만성 호흡기질환이 악화된다. 가성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면 아세트아미노펜처럼 COX-1 억제 효과가 미약한 약은 대체로 별 문제없이 복용할 수 있고, 세레콕시브처럼 COX-1은 건드리지 않고 COX-2만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약도 복용이 가능하다.

드물지만 진짜 피린계 약물에 특이체질인 사람도 있다. 이들이 모르고 피린계 약성분이 들어있는 알약을 복용했다가는 몇 분 만에 두드러기와 안면부종, 구역, 구토, 저혈압에 심하게는 기절하거나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응급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 정말 면역반응이다. 따라서 피린계 약물이 아닌 다른 계열의 소염진통제를 사용했을 때는 아무 반응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집에서 시험해볼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특정계열의 소염진통제에만 진짜 알레르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 소염진통제에 가성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는 것인지 판별은 알레르기 전문의가 상주하는 병원에서만 가능하다. 진단을 받고 나서는 자신이 그러한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카드를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한다.

피린계 특이체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정말 피린계 약물에 알레르기인지 아니면 일반적 소염진통제에 가성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누군가 피린계 특이체질이란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귀를 쫑긋 세워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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