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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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황진이(黃眞伊) <제28話>

약업신문

기사입력 2017-06-21 09:36     최종수정 2017-06-21 10:20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몇 년 만에 극적 해우로 정염을 불태운 진이와 이생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제 정신을 찾았다. 동창으로 새벽달이 들어와 알몸뚱이 남녀를 감싸고 있다. 접동새 울음이 멀리서 들려오고 있다. 밤새 풀무질을 하고도 성이 안찼는지 이생의 손이 진이의 사타구니로 뱀처럼 기어온다.

진이도 싫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내의 살 내음을 맡은 지 얼마만인가? 한양에도 송도에서도 진이가 마음만 먹으면 사내는 굴비를 꿰듯 꿸 수 있으나 그녀는 화담 서경덕 같은 사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제2 화담(서경덕 호)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순간 진이의 삶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그녀가 존재하는 한 제2의 화담 찾기는 지속될 것이다.

이럴 때면 진이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그랬다. 진이의 집념은 서릿발 같다. 숱한 사내들을 품에 안았으나 화담으로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30년 면벽 수행의 지족선사를 뜨겁게 품었으나 그녀의 펄펄 끓는 가슴을 식힐 남심(男心)은 아직 찾지 못하고 오늘도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진이는 전국을 바람처럼 거침이 없이 마음 가는대로 나도는 남사당을 찾았다. 진이의 기질과 딱 맞는 느낌을 받았다. 구경꾼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단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생이 나타났다.

하룻밤 정도는 미륵(彌勒)같은 존재일지는 모르나 진이의 마음을 채워줄 영혼의 사내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새벽 운우지락을 한바탕 즐기고 낮 동안은 밤새 뜨거운 살을 섞으며 육체의 허기를 채울 때와는 다르게 뜨악한 분위기로 있다 날이 저물자 다정한 부부모양 남사당패 놀이마당을 찾았다.

낮에는 논·밭으로 나가 일하고 해가 서산으로 고개를 숙이자 농부들은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몇 백 년은 됐을 소나무 밑에 차려진 남사당놀이는 어둠이 깔리자 횃불로 사위를 밝히고 판이 벌어졌다.

진이는 어름사니 재주에 마음이 쏠렸다. 기생이 되기 전에 남사당을 알았다면 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 생각하였다. 언듯언듯 횃불에 비치는 얼굴이 당차 보였다. 자신보다는 어려보이지만 줄 위에서 날렵하게 자유자재로 재주를 부리는 개성 있는 연기에 매료되었다.

진이는 어름사니가 부러웠다. 몇 년 전에만 이 같은 남사당놀이를 알았다면 기꺼이 입단하여 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뭘 그렇게 골돌이 생각하고 보시오? 가서 국밥으로 저녁이나 먹읍시다...” 이생이 잡아끄는 대로 국밥집에 가서 이화주(梨花酒)에 국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주막으로 온 이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오뉴월 들소모양 진이에게 달려들었다. 한바탕 제멋대로 육체의 허기를 채운 후 “나하고 아주 삽시다. 지난번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에 갔더니 나는 할 일이 없었소이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나왔는데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고 유산을 남기셨더라고... 그 유산이 만만치 않아 우리 둘이 넉넉히 여생을 즐길 정도야! 그 동안 나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지 않소?” 의기양양한 이생의 말투다.

진이의 귀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광평의 쇠처럼 굳은 심지 일찍 알았으니/ 내 본래 잠자리 같이 할 마음 없었네./ 다만 하룻밤 시 짓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 풍월을 읊으며 꽃다운 인연을 맺고 싶을 뿐...’ 고려시대 기생 우돌(于咄)의 《국섬에게》다. 진이가 이생이 자기와 평생을 같이 살자는 제의에 갑자기 우돌의 시가 떠올라 사내 손을 버러지인 냥 소스라쳐 떨쳐버렸다.

진이에게 남자는 화담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몽주가 단심가로 고려 충신으로 영원히 남았듯이 진이가 번개처럼 포은(정몽주 호)의 단심가를 떠올린 것은 이승에선 화담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내려 하는 것이다.

포은은 이방원이 《하여가》 (何如歌)로 회유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선죽교에서 포살되었다. 목숨을 건 고려 충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포은은 역사에 영원히 역사로 살고 있다.

진이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다. “왜 대답이 없소? 아버지에게 성(姓)은 받지 않았으나 유산을 받아 어차피 불효자로 찍혔으니 진이의 남자로 여생을 살고 싶소!” “이생 서방님은 아직도 진이의 마음을 모르고 계십니까? 삼남을 비롯하여 금강산·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저의 온갖 것을 다 보고서도 더 보고 싶은 것이 남았습니까? 정신 차리세요! 이 진이는 어는 한 남자의 여자로 애초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말을 퍼붓고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별이 총총하다. 몸에선 이생의 정액이 비릿하게 풍겼다. 유람할 때 수없이 느꼈던 익숙한 향기 같은 냄새다. 몇 년 전의 일이 어젯밤 정사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갈피를 못 잡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이 진이가 부리나케 남사당놀이 마당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구경꾼들의 요란한 함성과 박수에 신명나는 예쁜 어름사니는 줄 위에서 멋진 곡예를 부렸다.

저벅저벅 이생도 진이 뒤를 따랐다. 남사당놀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보름달은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자 하늘의 자리를 내어주며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넓디넓은 하늘의 자리에서 떠나기가 서러운지 붉은 태양이 아침 하늘에 불쑥 솟구치고서야 겨우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양은 천상 사내여서인지 보름달이어도 여자는 수줍은 표정으로 하늘자리를 계속 버티지 않았다. 진이는 말로는 이생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마음 한 구석엔 따뜻한 양지를 만들었다. 이생 정도면 마음을 터놓고 투정을 부리며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세양과 이사종은 넘치고 처졌다. 어쩌면 이생이 자기에게 딱 맞는 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화담이 홀연히 나타나 학춤을 추며 힐긋힐긋 진이를 훔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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