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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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김삼의당(金三宜堂) <제10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7-10-18 09:36     최종수정 2017-10-18 10:08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하미(둘째딸)가 화촉동방을 치르고 시집으로 간 집안은 강남으로 떠난 제비 둥지 모양 스산하기까지 하다. 하미와 남편 하립까지 있을 땐 온갖 꽃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집안의 행복을 축복해 주는 분위기로 느껴졌는데 그들이 떠나자 똑같은 풍광이 비웃음 같이 느껴졌다.

삼의당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밭으로 나갔다. 새싹들이 파릇파릇 대지를 뚫고 새 생명을 신고하고 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다. 문득 처녀 때 추억이 떠올랐다.

이웃집 아이들과 바구니를 들고 산과 들로 냉이와 고들빼기를 캤던 장면이 눈앞을 가렸다. 광한루에 가서 산수유 밑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던 장면들도 동시에 어제일 같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자 밭에서 일손이 잡히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부녀가 비운 자리가 너무 컸다. 밭에 나갔던 며느리가 점심때가 되지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오자 마당을 서성이던 시아버지와 마주쳤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 한마디도 없이 사랑채로 들어갔다. 시아버지 뒷모습에서 왜 일은 하지 않고 벌써 들어왔느냐는 분위기를 느꼈다.

삼의당은 방으로 들어가 수건도 벗지 않고 벌러덩 누웠다. 하미가 훌쩍이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떠나던 모습이 20여년 전 자신이 친정집에서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떠날 때가 떠올랐다.

여자 팔자다. 금지옥엽으로 키워 시집보내면 성씨(姓氏)도 없어지고 남의 집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시 하는 풍습이 삼의당은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자꾸 걸렸다. 남편과 옛 영화 재현에도 해가 갈수록 회의감이 들어갔다. 본인이 바라는 옛 영화 재현의 열망만큼 하립은 그렇게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자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곤 하였다.

지금 마음이 그러하다. 한양으로 떠나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성화를 못 이겨 떠밀려 마지못해 가는 뒤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집에 들려 며칠을 마음껏 운우지정을 즐기고 떠날 때마다 마음은 여자 옆에 두고 몸만 덜렁덜렁 떠나가는 모습처럼 보여 삼의당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삼의당의 마음도 더 무거워져 갔다. 이번의 남편 뒤태를 보고는 ‘과거를 포기해야겠다.’ 쪽으로 마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되지도 않을 일 계속하다 보면 오히려 좋게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관계에 발목이 잡힐 우려도 삼의당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농부 삼의당은 아침에 논밭으로 나가면 해가 떨어질 무렵에야 집에 들어오곤 하였다. 허둥지둥 저녁을 지어 시아버지께 올리고 몇술 뜨고 방으로 들어가면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런데 생리가 끊어지고 체한 것 같이 속이 더부룩하면서 메스껍기까지 하였다. 배도 조금씩 불러왔다.

늦둥이다. 삼의당은 가슴부터 메어왔다. 아이야 삼신할머니가 주신 것이니 낳을 수밖에 없으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아들을 출산하면 특히 시아버지가 좋아하겠지만 또 딸을 낳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다.

대(代)를 잇지 못하면 소실이라도 들여야 할 정도로 하씨 집안은 가난하지만 가문의 적통(嫡統)을 중시하였다. 삼의당이 하씨 집 며느리로서 옛 영화 재현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들을 낳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책무다.

그래서 지금 배가 불러오고 있는 것이 꼭 아들이길 삼의당은 선조님들에게 밤마다 정화수 기도를 하고 있다. 하립이 서울에서 오기 하루 전의 꿈도 예사롭지 않다. 광한루 완월정(연못) 앞을 친구와 거니는데 갑자기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와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꿈은 꿈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배가 불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왔다.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지나 섣달그믐이 되어 해산달이 되었다. 마흔이 넘어 얻은 늦둥이는 생각과는 달리 순산하였다.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닮았다. 아버지인 하립은 기쁨보다는 먹여 살릴 걱정이 앞서는지 반가운 표정이 아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전례 없는 행복한 표정으로 사당에서 몇 번이고 황공해하는 인사를 올렸으며 친정에선 아들을 못 낳다 늦둥이를 출산하자 대를 못 잇는 죄인의 심정을 털어냈다며 축하 미역과 쌀에 잉어까지 사서 보냈다. ‘석양에 자리 깔고 꽃 그늘 속에 앉으니/ 깊은 숲속 새소리 듣기 좋군요./ 막걸리 석 잔에 노래 한가락 부르니/ 청풍명월 주인의 마음이네요.’ 《낭군과 함께 읊다》다. (시옮김 허경진)

그랬을 것이다. 하립이 화촉동방에서 뜨거운 살을 숨 가쁘게 섞으면서 철석같이 약속한 ‘옛 영화 재현’을 실현하여 말년에 고향으로 귀향하여 만화방초가 흐드러지게 핀 사랑이 가득한 집에서 멋진 노년을 꿈꾸었을 터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오뉴월 남가일몽의 상황으로 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 와중에 불혹(不惑·40세)을 넘겨 늦둥이를 출산하였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삼의당은 기쁘기도 하지만 아들(河榮進)의 장래 걱정이 앞섰다. 끼니가 간데없는 살림에 입신양명 하도록 뒷바라지가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영진은 외가 탁영 김일손과 친가 경재 하연의 장점만 속 빼 닮아 걷기에 앞서 말을 하고 두 발로 걷자 할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영재다. 친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외할아버지까지 신이 나서 “영진이는 영의정 감이야! 우리가 힘을 합해 과거를 도웁시다.”라고 손을 맞잡고 다짐하였다. 늦둥이로 인해 웃음을 잃었던 양가에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삼의당도 하늘을 뚫는 기쁨이 넘쳤으나 어른들 앞이라 입을 열지 못하고 표정까지 숨겼다. 늦둥이에다 먹는 것도 신통치 않아 젖꼭지를 물고 칭얼댈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가난한 향반 늦둥이 어미의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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