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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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김금원(金錦園) <제11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8-01-24 09:36     최종수정 2018-01-24 09:23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오늘따라 삼호정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봄이 되었는데도 봄 같지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지난 모임 때 금원이 이곳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모이면 떠날 줄 모른다. 조만간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들은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분위기다.

삼호정 회원들은 어느 땐 밤을 꼬박 새기도 한다. 지금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누구 한 사람도 갈 채비를 하지 않는다. 전 같으면 점심을 먹고 늦은 오후가 되면 영감이 올 때가 됐다면서 하나둘 떠나갔는데 오늘은 네 여인 모두 갈 눈치가 아니다.

마침 덕희 대감은 육조(六曹) 친구와 약속이 있어 하룻밤 자고 내일 오기로 되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집에서 야시회(夜詩會)를 하면 어떨까요? 마침 덕희 대감께서 육조친구와 약속이 있어 가셨는데 내일 오신 다네요...” “장악원 기생들과 회포를 푸시겠네요?” 죽서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대부들이 금원언니를 규수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하는데 덕희 대감께서 이젠 학문세계에서 언니한테 밀리실 거예요...” 그랬다.

1843년 27세 때 서유영·신위·홍우건 등 금원과 교유했던 여러 사대부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를 규수사마자장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마자장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원을 규수사마자장이라고 당대의 석학인 신위·서유영·홍우건 등의 기록에 남겼다. 규수자장(子長·사마천의 字)인 금원은 비록 김덕희의 소실의 위치에 있으나 당시 여항문학계에선 알아준 여류시인임엔 틀림없는 역사다.

그런데 금원이 오늘 삼호정의 모임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덕희 대감이 육조친구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을 만나는데 새로운 벼슬 얘기가 나올 것이 뻔해서다.

죽서의 말이 끝나자 금원이 벌떡 일어나 《정선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한 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네/ 명사십리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 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노래를 계속 부르려 했으나 울음이 복받쳐 끝냈다.

“뭐가 그렇게 슬프냐?” 운초가 벌겋게 충혈 된 금원의 두 눈을 유심히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 “별 것 아니에요. 제가 강원도 원주 출생이잖아요!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정선아리랑의 전설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을 뿐이에요...” 금원이 자신의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쉽게 수습하려 했으나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여장부를 넘어 궁형(宮刑·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당한 규수사마자장으로까지 불리는 금원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노래를 부른 내면엔 무엇인가 깊은 사연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 것이다. “언니 왜 그래? 속 시원하게 얘기해봐! 행복은 나누면 커지고 불행은 나누면 작아진다고들 하잖아...” 친동생 경춘과 죽서의 말이 한입처럼 동시에 나왔다.

금원의 목소리는 사내음성처럼 크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지금 정선아리랑이 꽃 울타리를 넘어 행인들이 오가는 길가로 아침안개처럼 굽이굽이 넘어가고 있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길이 하나둘 멈추더니 어느새 2~30명은 되었다. 그들 중엔 소리를 듣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소리 없이 닦아내며 훌쩍이는 이도 있었다.

《정선아리랑》은 고려유민의 한이 깃든 소리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신의 영혼의 절규다. 그런데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오가던 행인 중에 불사이군의 후예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정선아리랑》은 고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함부열 등 72현이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때 전오륜(全五倫)도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7명의 친구들과 정선 남면 서운산 거칠현동(南面 瑞雲山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겨 끝까지 충절을 지키며 흠모와 망향에 대한 고달픔을 한시로 읊었는데 후세인들이 이를 노래로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이 되었다.

이 같은 《정선아리랑》의 전설을 금원이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 속으로 통곡하면서 불렀다. 소리가 끝이 나자 오가며 듣던 행인들도 하나둘 제 갈 길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몇몇은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지 행여 소리가 더 계속 흘러나올까 서성대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떨어지고 밤은 깊어갔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산수유 등에 비쳐지자 신비스럽기도 하지만 푸른빛이 밤공기에 잦아들자 으스스한 분위기가 돌았다. 소리를 듣던 행인들의 발길이 끊기자 삼호정 주위는 물속처럼 조용해졌다.

금원은 소리를 끝내고 술잔을 돌렸다. 자신이 목이 타기도 하지만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금원은 오늘 모임이 삼호정 시회의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부평초처럼 한가롭게 이곳저곳 떠돌다/ 부지런히 산에 오르고 물가에도 갔었네/ 고향으로 가고픈 마음 달래 기쁘게 맑은 물을 쫓아가니/ 서울의 바람과 연기도 조만간 걷히리라.’ 역시 《무제》(無際)다.

아마도 남편 김덕희가 중국 청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어 가리란 확신이 섰던 때인 듯하다. 사신을 따라 갈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다녀온 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인 듯해 보인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노류장화인 기생이나 소실의 신분은 그러하였다.

하지만 삼호정의 멤버인 금원·운초·경산·경춘·죽서는 벌나비가 날아가 꿀만 빨아먹고 바람처럼 떠나간 해어화(解語花)만은 아니다. 한국 최초 여류시인 동호인의 모임인 삼호정이었다. 여필종부의 제한된 사회적 공간에서 역사에 영원히 남을 문학사를 창조해 낸 아우라(Aura)의 아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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