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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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김금원(金錦園) <제12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8-01-31 09:36     최종수정 2018-01-31 09:59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여인들의 삶은 고려 때까지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신라에 세 여왕(선덕·진덕·진성여왕)이 탄생된 것만 봐도 여성의 삶이 조선조와는 확연히 달랐다. 고려 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왕건의 부인이 29명이나 되었으니 치맛바람이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 뻔하다.

 

이같은 여인의 삶은 1392년 조선이 건국 된 뒤 여권신장이 아닌 퇴보의 역사였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 사회다. 이 시대에 금원이 출생하였다. 금원은 여자로 태어났으나 여자이길 거부 하였다. 하지만 여자였다.

여자이길 거부하며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금강산 단독 유람 길에 올랐다. 14살 때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팔만구암자를 두루 본 뒤 설악산까지 보고 한양에 다다랐다. 세상 천하를 다 보고 왔어도 자유영혼의 여성이 설 곳은 찾을 길이 없었다.

잠시 기생의 길을 걷다 소실이 되었다. 서녀(庶女)의 몫이다. 벗을 수도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는 숙명의 멍에다. 금원은 멍에 같은 숙명의 길을 벗어보려고 고군분투해 보았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대부 소실 자리다. 금원은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남장을 하고 사내들의 세상을 마음껏 보았다. 하지만 여자가 남장을 하고 남자로 살수는 없는 사대부 나라다. 금원은 결국 여자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남자 중심의 나라지만 그대로 순종만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금원은 글쟁이가 되었다. 대명천지에서 조선의 심장인 육조를 비롯한 사대부들이 포효하는 세상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웅지를 겨룰 수 있는 자유영혼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문학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호수가 버들은 푸른 실처럼 늘어져/ 봄날 암담한 마음을 아는 것일까/ 나무 위 꾀꼬리 하염없이 우니/ 임 보내는 슬픔 이기지 못하겠네.’ 금원의 자작시 칠언절구(七言絶句)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원은 원주 관아 기생이 되어 금앵이란 기명(妓名)을 얻었다. 이때 홍우건·신위·서유영 등 당대 유명한 문신들과 알뜰한 교우를 맺었다. 기생은 규방의 아낙보다 행동에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금원이 원한 삶은 아니지만 단순히 웃음을 파는 노류장화가 아닌 시적 재능을 인정받고 한 인간으로 존중받게 되자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사대부 김덕희는 금원의 남다른 재주와 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시를 주고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되었다. 금원에게 결혼은 그것도 떳떳한 조강지처가 아닌 소실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금원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기생은 소실이 되거나 면천(免賤·천민이 평민이 됨)이 되어도 평생 꼬리표가 붙었다.

홀아비 신세 과부가 알아주듯 기생의 애환은 역시 기생이 알아주었다. 운초와 김이양도 시재가 뛰어난 운초의 재능으로 이어졌다. 금원·운초·경산·경춘·죽서도 시가 매개가 되어 삼호정에서 우의를 키웠던 것이다. 하지만 금원은 자나 깨나 현실생활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였다.

김덕희와 뜨거운 잠자리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금원도 여자다. 여자는 지아비의 따뜻한 사랑이 최고의 행복이다. 덕희 대감의 알뜰한 사랑을 받을 때가 금원이 여자로 태어났음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금원은 지적 호기심에 밤낮으로 조바심을 하였다.

금원은 《호동서락기》를 쓰기로 작심했다. 《호동서락기》엔 연유가 있다. 호(湖:충정도)·동(東:금강산·동해안)·서(西:관서지방)·낙(洛:한양)을 지칭하였다. 금원이 14살에 남장을 하고 유람했던 곳을 담은 여행기다.

물론 사대부들에 의해 금강산 유람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불과 14살 소녀가 남장을 하고 조선천하를 유람한 여행기는 《호동서락기》가 최초일 것이다. ‘두곡의 풍류는 금앵을 일컬으니/ 교방의 가무로 일찍 이름이 알려졌네/ 봄 앞의 채필은 수놓은 것처럼 보이니/ 담화(澹畵)와 신시(新時)에 모두 명성이 있네.’ 서유경이 금원에게 《관동죽지사》 11수를 지어준 시 중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당시 지체 높고 학문으로도 인정받는 사대부들이 금원의 시재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서유경 뿐만이 아니다. 당시 호방하고 진취적 학문의 소유자들은 금원을 단순히 노류장화에서 사대부의 소실로만 보지 않았다. 여류시인이자 학자로까지 보았다. 그들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여행기 《호동서락기》를 보고는 더욱 놀랐을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금원을 ‘규수사마자장’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송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호동서락기》는 1850년 금원이 34세 되던 봄에 탈고하여 이듬해에 출간하였다. 추사 김정희도 금원이 쓴 김덕희 제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금원은 《호동서락기》에서 금강산뿐만이 아니라 명승지를 두루 섭렵, 경관 묘사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절제된 음률로 시로도 남겼다. 그래서 뜻깊은 사대부들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조선엔 여류문인들이 많았다. 사대부들의 사회에서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끼와 재능을 발휘하고 싶었으나 사회는 그 공간을 주지 않았다. 기생이나 소실은 조강지처보다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삼호정의 소위 5인방은 소실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사대부집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면 정경부인이 되고도 남을 재원이었으나 서녀의 멍에를 메고 나와 그들은 소실이 되었다. 만약 운초·황진이·이매창·허난설헌·금원·경산·경춘·죽서 등 샛별 같은 여류시인들이 없었던들 조선의 여류문학은 불모지였을지도 모른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피어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류문학의 세계다. 또한 생각이 깊고 미래를 내다 본 뜻 깊은 사대부들의 따뜻한 응원과 격려도 아름답고 찬란한 여류문학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언덕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그녀들을 노류장화로만 보지 않고 시우(詩友)로도 당당한 상대로 인정해 주는 아량을 아낌없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 대우와 아량이 그녀들에겐 천군만마의 응원이 되었을 게다.

그래서 그들은 성별을 뛰어넘는 진정한 시우가 되었다. 아름다운 문학의 세계다. 금원은 그런 문학의 세계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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