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
<5> 강중희 (동아제약 사장/제6회/1966년)
동아제약의 창업주 동호(東湖) 강중희 회장은 1907년 9월 경북 상주군에서 진주강씨 가문 3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죽림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문중에서 설립한 신광학원에 입학해 신학문과 일본어를 배웠다.
18살 때 관부(關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직물공장과 인쇄소 견습공으로 꿈을 키웠고, 나고야의 봉제공장에서도 일했다.
23세 때인 1930년 서울로 상경해 을지로 4가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동양제약 판매원으로 입사하면서 주문, 배달, 수금 등의 업무를 맡은 것이 제약인생 외길을 걷게 된 첫발이었다.
그 후 1932년 종로구 중학동에서 동아제약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의약품 도매상 ‘미야베약방’(宮部藥房)을 개업했다. 동업자가 손을 떼자 ‘미야베약방’을 인수해 붙인 상호가 ‘강중희상점’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강중희상점’은 판매량 1위의 의약품 도매상으로 발돋움했고, 감기약과 소화제, ‘생명수’ 등의 제조허가까지 취득했다. 해방 후 혼란기에 ‘동아약품공사’로 개명했지만 3‧8선 이북의 수금이 불가능하고 재고처분이 어려워지는 등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6년 제약업 허가를 취득하면서 동아약품공사는 기지개를 펼 수 있었고, ‘생명수’가 동화약품의 ‘활명수’와 경쟁하는 인기품목으로 올라서면서 문자 그대로 회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기반을 다진 강중희는 상점을 개점한 후 17년만이었던 1949년 8월 동아제약(주)로 사명을 변경하고 법인화를 단행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수복 후 미국 국제원조협력처(ICA)의 원조자금을 받아 용두동에 항생제 공장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제약업의 길로 접어들었고, 1961년 ‘박카스’ 개발을 계기로 동아제약을 국내 최정상의 제약기업으로 성장‧발전시켰다.
강중희 회장은 사세확장과 함께 경영합리화에도 심혈을 기울여 기업회계 제도의 도입, 기업공개, 국내 최초 일반사채 공모, 자동생산시설 대체, 원료국산화 등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일본 메이지제약과 합작으로 항생제 원료 가나마이신 발효공장을 설립했는가 하면 식품 및 화장품 생산 등 관련분야들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54년 한국제약협회의 전신인 대한약품공업협회 부회장을 맡은 데 이어 1967~1975년에는 회장에 취임해 8년 동안 연임하면서 한국 제약산업의 성장‧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기업의 사회봉사라는 신념에도 투철해 1964년 학교법인 상주학원을 출범시키면서 고향에 상주고등학교를 설립, 후진양성과 육영사업에도 정성을 쏟았다.
대한적십자사 상임위원, 경영인구락부 회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상장기업(上場企業)협의회 회장, 상공회의소 상임이사,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 상주고등학교 이사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도 돋보인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강중희 회장은 동탑산업훈장과 모범상공인 보사부장관 표창, 국무총리 표창, 대통령 표창 등을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수상경력을 쌓아 지금도 재계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약업신문
2016.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