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 교가(校歌)의 부활
1950년 사립 서울 약학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 고유의 교가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5년). 가사는 다음과 같은데, 과연 당대 시인의 작품답게 힘차고 원대한 약학의 포부가 잘 표현되어 있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臺)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險)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 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 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찬바람 불고 비가 나린들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 500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그러나 교가의 악보(樂譜)는 지금까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국립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던 김성태님이 작곡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 악보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집 기술 상 악보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악보까지 찾아 내 그 교가를 다시 불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작곡가의 장남이 서울대 경영대학의 명예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그분께 전화를 드려 ‘혹시 그 악보를 찾을 수 있겠느냐’ 문의했더니 ‘당시 (광복 이후) 아버지께서 작곡하신 각급학교의 교가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악보 찾기를 일단 포기하고 언젠가 우연히 발견되기만을 기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단기 4288년, 그러니까 서기 1955년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제9회) 앨범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입수되었는데, 그 앨범에 그 악보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만세 만세!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환호가 나왔다.
![]() |
이제 약대 교가의 가사와 악보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으니, ‘동창의 날’ 같은 때에 이 교가를 합창해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 아예 약대의 교가로 되살려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며 달콤한 꿈을 꾸는 요즘이다.
그런데 195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교가가 언제까지 공식적으로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약대에 입학한 1967년 이후에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1960년대에 들어서기 전후부터 서서히 부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참고로 이 귀한 앨범을 소장했던 분은 1951년 국립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3월 25일에 졸업(제9회)한 박한순(朴漢順)님이다. 박한순은 박명진(1903~1957, 서울 치과대학 초대학장)의 4녀인데, 둘째 오빠 박한덕(경성약전 14회, 1943년 졸업), 첫째 언니 박한원(사립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둘째 언니 박한일(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박한원과 쌍둥이) 등 4남매 (1남 3녀) 모두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특별한 기록도 갖고 있다.
박한덕의 딸 박영애가 박한순의 딸 제미경 인제대 교수 (박영애의 사촌 동생, 어머니와 부산시 해운대구 거주)로부터 박한순의 앨범을 빌려 와 이영남 (충북대 명예교수, 현 약학역사관 자문위원, 박영애와 여고 동창으로 절친)에게 보여줌(2024년 11월 중순)으로써 위 내용(악보 등)이 공개된 것이다.
참고로 이 앨범에 실려 있는 당시의 약학대학 교기(校旗)의 모습도 소개한다. 3개의 벤젠핵 모습이 과연 약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 |
약대 교가(校歌)의 부활
1950년 사립 서울 약학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 고유의 교가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5년). 가사는 다음과 같은데, 과연 당대 시인의 작품답게 힘차고 원대한 약학의 포부가 잘 표현되어 있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臺)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險)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 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 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찬바람 불고 비가 나린들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 500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그러나 교가의 악보(樂譜)는 지금까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국립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던 김성태님이 작곡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 악보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집 기술 상 악보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악보까지 찾아 내 그 교가를 다시 불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작곡가의 장남이 서울대 경영대학의 명예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그분께 전화를 드려 ‘혹시 그 악보를 찾을 수 있겠느냐’ 문의했더니 ‘당시 (광복 이후) 아버지께서 작곡하신 각급학교의 교가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악보 찾기를 일단 포기하고 언젠가 우연히 발견되기만을 기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단기 4288년, 그러니까 서기 1955년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제9회) 앨범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입수되었는데, 그 앨범에 그 악보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만세 만세!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환호가 나왔다.
![]() |
이제 약대 교가의 가사와 악보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으니, ‘동창의 날’ 같은 때에 이 교가를 합창해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 아예 약대의 교가로 되살려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며 달콤한 꿈을 꾸는 요즘이다.
그런데 195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교가가 언제까지 공식적으로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약대에 입학한 1967년 이후에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1960년대에 들어서기 전후부터 서서히 부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참고로 이 귀한 앨범을 소장했던 분은 1951년 국립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3월 25일에 졸업(제9회)한 박한순(朴漢順)님이다. 박한순은 박명진(1903~1957, 서울 치과대학 초대학장)의 4녀인데, 둘째 오빠 박한덕(경성약전 14회, 1943년 졸업), 첫째 언니 박한원(사립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둘째 언니 박한일(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박한원과 쌍둥이) 등 4남매 (1남 3녀) 모두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특별한 기록도 갖고 있다.
박한덕의 딸 박영애가 박한순의 딸 제미경 인제대 교수 (박영애의 사촌 동생, 어머니와 부산시 해운대구 거주)로부터 박한순의 앨범을 빌려 와 이영남 (충북대 명예교수, 현 약학역사관 자문위원, 박영애와 여고 동창으로 절친)에게 보여줌(2024년 11월 중순)으로써 위 내용(악보 등)이 공개된 것이다.
참고로 이 앨범에 실려 있는 당시의 약학대학 교기(校旗)의 모습도 소개한다. 3개의 벤젠핵 모습이 과연 약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