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신재규 교수의 'From San Francisco'
<105> 병주고 약주고
신재규
입력 2023-01-02 18:42 수정 최종수정 2023-01-27 15:48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스크랩하기
작게보기 크게보기
병주고 약주고

“항상 이러세요.”

진료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며 졸고 있는 환자를 보면서 딸과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딸이 설명을 더 보탠다.  

“어머님은 밤 2시쯤 주무셔서 아침 10시쯤 일어나세요.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시자 마자 마루에 있는 소파로 가셔서 바로 누워 버리세요.  그리고는 하루종일 저렇게 졸고 계십니다.”

82세의 이 환자는 가족이 있는 두 나라에서 생활한다 - 일년에 절반은 엘살바도르에서 지내고 나머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다.  환자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딸의 집에 머무른다.  그래서 딸이 처방약을 주는 등 어머니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다.

환자는 지내는 나라에 따라 다른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즉 엘살바도르에서 지낼 때에는 그곳에 있는 신경과 의사를,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 당뇨병, 고혈압 등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은 엘살바도르의 신경과 의사가, 당뇨병과 고혈압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와 가족은 2주전 가정의학과 의사를 방문했었다.  이 때, 환자와 가족은 환자가 낮에도 매우 졸려한다고 호소했었다.  가정의학과 의사는 그 이유를 환자가 우울증과 불면증 치료를 위해 복용하고 있는 약들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의사가 나에게 약물사용에 대한 협진을 의뢰하여 환자와 가족이 나를 방문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처방받아 어머님이 복용하고 있는 약들입니다.”

딸이 내게 건내 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약들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에게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 용량과 복용횟수는 생략한다):

쿼티아핀 (quetiapine; 쎄로켈): 정신병 치료제
멀타자핀 (mirtazapine; 레메론): 우울증 치료제
멜라토닌 (melatonin): 수면제
가바펜틴 (gabapentin; 뉴론틴): 진통제
모다피닐 (Modafinil; 프로비질): 각성제
도네페질 (donepezil; 아리셉트): 치매 치료제
시티콜린 (citicoline; 미국에서 허가된 약은 아니며 우리나라에는 주사제로만 사용): 기억력 증진


이 약 리스트를 보니 환자가 낮에도 졸려 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무려 네 개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많이 필요했던 것을 보니 환자의 불면증이 꽤 심했던 것 같다.

리스트를 다시 찬찬히 보고 있을 때 모다피닐이라는 약이 눈에 띄였다.  모다피닐은 낮에 갑자기 졸음이 오는 기면병 (narcolepsy)의 치료를 위해 허가받은 약이다.  

“혹시, 어머님이 기면병의 진단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이로 미루어 보아 모다피닐은 환자가 낮에도 졸려하니까 이를 치료하려고 처방한 것 같았다.  즉, 다른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다.

이와같이 먼저 처방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을 처방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prescribing cascade라고 한다.  Cascade는 원래 시작은 하나인데 궁극적으로 여러 개로 갈라져 떨어지는 폭포처럼 하나의 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prescribing cascade는 처음 시작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 약을 더하지만 새 약도 새로운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다스리기 위해 다른 약을 계속 추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기인 셈이다.

모든 약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은 꼭 필요한 적응증에만 사용해야 한다.  특히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약을 분해하고 배설하는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노인은 여러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가지 약을 함께 복용하고 있어 약물간 상호작용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따라서 노인에게 약을 쓸 때에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위 환자로 돌아가자.  비록 모다피닐이 다른 약들의 부작용인 졸음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중지하면 졸음이 더 악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졸음을 유발하는 약의 숫자를 줄이고 그 다음 모다피닐을 중지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들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 보였다.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환자에게 졸음을 유발하는 네 개의 약 중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중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쿼티아핀은 정신병 치료에 주로 사용하지만 우울증을 치료할 때 어떤 치료제 단독으로 우울증이 잘 조절되지 않은 경우 보조제로 더해지기도 한다.  즉 이 환자의 경우 아마도 처음에는 우울증 치료제인 멀타자핀을 처방받았지만 이것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이 잘 조절되지 않자 쿼티아핀을 추가한 것이다.  지금은 졸음의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졸음을 유발시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우울증 치료 보조제도 있으므로 굳이 쿼티아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또, 가바펜틴은 주로 신경손상에 의해 찌릿찌릿하거나 불에 닿는 듯한 느낌을 주는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쓰이며 졸음을 가장 잘 유발하는 통증약 중 하나다.  환자는 이러한 종류의 통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바펜틴은 졸음이라는 부작용을 이용하여 환자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졸음을 유발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통증 치료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아세트아미노펜, 타이레놀).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동시에 중단하면 불면증이 악화될 수 있다.  또, 뇌에 작용하는 약을 중단할 때 갑자기 중단하면 금단증상이 생길 수 있다.  용량을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줄여야 한다.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의 용량을 동시에 줄이게 되면 환자와 가족이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를 먼저 줄여서 중단한 다음 불면증에 문제가 없으면 다음 것을 줄이고 중단하는 것이 안전해 보였다.

“일단 쿼티아핀을 중단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드시고 계신 양의 반인 하루 50 mg을 2주동안 주셔 보세요.  이동안 불면증이 악화되면 다시 원래 용량인 100 mg을 주십시요.  만약 불면증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면, 2주 뒤부터는 주시지 마시고요.”
“만약 중단한 다음 불면증이 악화되면요?”
“하루 50 mg을 다시 주시기 바랍니다.”


딸이 혼동될까봐 나는 글로 적어서 건네 주었다.

“쿼티아핀을 중단한 다음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3주 뒤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3주 뒤면 쿼티아핀을 성공적으로 중단한 다음 일주일이 지난 때이니까 환자의 상태를 보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지요.”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전체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105> 병주고 약주고
아이콘 개인정보 수집 · 이용에 관한 사항 (필수)
  - 개인정보 이용 목적 : 콘텐츠 발송
- 개인정보 수집 항목 : 받는분 이메일, 보내는 분 이름, 이메일 정보
-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 기간 : 이메일 발송 후 1일내 파기
받는 사람 이메일
* 받는 사람이 여러사람일 경우 Enter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 (최대 5명까지 가능)
보낼 메세지
(선택사항)
보내는 사람 이름
보내는 사람 이메일
@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105> 병주고 약주고
이 정보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
스크랩한 정보는 마이페이지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