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규 교수의 'From San Francisco'
<107> 환자를 우롱하는 미국 건강보험
신재규
입력 2023-03-08 14:45
수정 최종수정 2023-03-08 15:00
“약사님, 이 약을 꼭 복용해야 하나요?”
Mr. T가 당뇨병 치료제인 엠파글리플로진(empagliflozin; 상품명: 자디앙) 약병을 집어들고 물어본다. 75세인 그는 작년 여름 엠파글리플로진을 처방받은 이후 아무 부작용없이 잘 복용해 오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네. 지난 주에 약국에 가서 한달치를 받아 왔는데 160달러(우리돈으로 약 20만원)를 본인부담금(copay))으로 내야 했어요. 작년에는 한달치가 30달러(우리돈으로 3만8천원)였는데 금년에 너무 비싸져서 경제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매년 초, 나는 Mr. T와 같이 그동안 복용하고 있던 약에 대해 본인이 내야 하는 금액이 갑자기 크게 증가한 환자들을 본다. 이는 미국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에 기인한다.
Mr. T와 같이 65세 이상의 환자들은 미국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공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어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달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가입자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통합하여 운영한다. 즉, 건강보험 가입자는 보험증 하나로 병원과 약국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의 메디케어 가입자는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병원 진료에 대한 보험만 가지고 있고,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없으면 가입자는 처방약값 전액을 자비로 내야 한다.
이처럼 메디케어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유는 정부가 사보험에 메디케어 가입자를 위한 처방약 보험상품의 개발과 판매를 위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건강보험이 직접 지불해 준다. 반면, 미국의 처방약 보험의 경우, 가입자는 일단 메디케어의 승인을 받은 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그리고, Mr. T처럼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사보험은 정부로부터 받은 돈으로 지불해 준다. 즉, 정부는 사보험에 처방약 보험에 대한 외주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디케어의 처방약에 대한 지불 구조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이론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처방약에 대한 다양한 보험 상품이 개발될 수 있다. 가입자는 자신의 형편과 상황에 맞는 상품을 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전국적으로 801개의 메디케어 처방약 보험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둘째, 처방약 사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사보험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적게 할수록 이익을 더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사보험은 사전승인(prior authorization) 등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처방자들이 약을 함부로 처방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이와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영에서는 단점이 훨씬 더 많다. 왜냐하면, 사보험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사보험은 가입자의 건강보다는 이익을 더 우선한다. 그 좋은 예가 Mr. T의 경우이다. 그리고, Mr. T의 사례는 사보험인 실손보험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우리나라에 타산지석이 될 지도 모르겠다.
Mr. T가 그동안 복용해 오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증가한 이유는 그가 가진 사보험이 금년부터 다른 약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사보험은 메디케어 처방약 중에 지불해 주는 약들의 목록 (formulary)을 매년 새로 정한다. 정부의 규정에 따라 비슷한 종류의 약들 중 두 개를 선택해서 지불해 주어야 한다. Mr. T가 가진 사보험은 금년에 엠파글리플로진과 더불어 다파글리플로진 (dapagliflozin; 상품명 -포시가)을 지불해 준다. 그런데 작년과 달리 그의 보험은 다파글리플로진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마도 다파글리플로진을 제조, 판매하는 제약회사와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보험사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을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기 위해 엠파글리플로진에 대한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린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과 엠파글리플로진은 당뇨병 치료 효과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처방약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알아보니 한달치 다파글리플로진에 대한 Mr. T의 본인부담금은 89달러 (우리돈으로 약 11만원)으로, 여전히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러면, 왜 같은 종류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크게 올랐을까?
Mr. T가 처방약 보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보험들이 써 왔던 상술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약국에서 약을 교부받을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입자는 매달 보험료를 내야 한다(영어로 이를 premium이라고 부른다). 사보험의 월보험료는 무료부터 40~50달러 (우리돈으로 6만원)에 이르기까지 상품마다 다르다.
둘째, 가입자는 매년마다 보험이 약값에 대해 지불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 금액을 본인이 먼저 부담해야 한다 (영어로 이를 deductible이라고 부른다). 이 deductible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에는 없지만 자동자 보험에 널리 사용되는 자기부담금과 같은 것이다. 즉, 자동차 수리를 할 때 가입자가 우선 자기부담으로 일정금액 (예를 들어, 50만원)을 내고 나면 나머지 수리금액에 대해 자동차 보험이 지불을 해 주듯이 미국 사보험 가입자도 약관에 정해진 일정금액을 먼저 약값으로 낸 뒤에야 보험이 그 해 나머지 기간동안 지불을 해준다. 따라서,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본인부담금, 월보험료, deductible 세 개의 합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생략하지만 이 세 개의 합은 환자가 어떤 약들을 복용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와같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이를 잘 모른다. 가입자들은 당장 매달 지불해야 하는 월보험료를 보고 보험상품 가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Mr. T의 월보험료를 보면 미국 전체에서 판매되고 있는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3달러 (우리돈으로 약 4만원) 보다 훨씬 낮은 13달러 (우리돈으로 약 만6천원) 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낮은 월보험료를 가진 상품들은deductible이나 본인부담금이 비싼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낮은 월보험료는 가입자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 것이다.
Mr. T의 보험은 deductible이 103달러 (우리돈으로 약 13만원)로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84달러 (우리돈으로 약 48만원)보다 훨씬 쌌다. 따라서, 이 보험은 비싼 본인부담금으로 돈을 버는 상품이었다. 그런데, 엠파글리플로진의 본인부담금이 작년에는 저렴했던 것으로 보아 Mr. T가 가입할 때에는 월보험료, deductible, 그리고 본인부담금까지 모두 저렴했던 것 같다.
작년 말 보험을 갱신하는 시기가 되어 올해의 월보험료를 기존 가입자에게 알려줄 때, Mr. T는 월보험료가 비싸지 않자 보험을 바꾸지 않고 같은 회사의 것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보험이 올해 월보험료를 알려줄 때 인상된 본인부담금도 명시했었겠지만 여러 정보와 섞여 있어 혼동되기 쉽고,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을 숙지한 가입자가 아니라면 이를 잘 눈여겨 보지 않는다.
Mr. T의 보험은 싼 가격으로 일단 가입자들을 유인한 다음, 가입자들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해 다음 해의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림으로써 이익을 내는 상술을 쓴 것이다.
메디케어 처방약 사보험은 계약기간이 매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이다. 따라서, 일부 저소득층을 제외한 일반 가입자들은 연중에 다른 회사의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즉, Mr. T는 본인부담금이 아주 비싼 현재의 보험을 연말까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주 측정한 그의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6.2%로 아주 좋았다. 그래서 비싼 엠파글로플로진을 당분간 중단하고 기존에 복용하고 있던 메트포민 (metformin)와 글리피지드 (glipizide) 등 본인부담금이 싼 제너릭 약들만 계속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만약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다시 높아지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만 할 뿐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