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신재규 교수의 'From San Francisco'
<110>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신재규
입력 2023-05-31 15:44 수정 최종수정 2023-05-3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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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표정으로 참석자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학장님이 말씀하신다.

“조사결과를 말씀해 주세요.”

오늘 회의는 내 과목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사건에 대한 조사결과에 따라 관련된 학생들의 징계수위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다.  보통 부정행위가 일어났을 경우 교육관련 부학장님과 해당과목 교수가 학칙에 따라 징계를 결정하지만 이번에는 학장님과 학사관련 부학장님까지 모였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들의 수가 전체 학급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일으킨 것은 수업전에 보게 되어있는 온라인 퀴즈에서였다.  내 과목은 ‘거꾸로 교실 (flipped classroom)’이라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즉, 수업에 오기 전 학생들은 미리 녹화 된 강의를 온라인으로 본다.  그리고,수업 중에는 교수의 지도하에 환자치료에 대한 토론을 한다.  이와같은  ‘거꾸로 교실 (flipped classroom)’이라는 수업방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필요한 지식을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이를 수업 시간동안 여러 환자 케이스에 적용해 보는 것이 수업시간에 필요한 지식을 배운 다음 집에서 혼자 환자 케이스에 적용하는 것보다 학습에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교실이 성공하려면 학생들이 수업전에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해 오지 않으면 토론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를 해 오도록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퀴즈, 즉 시험을 내주는 것이다.

내 과목에서 퀴즈는 총 열한 번 있다.  그리고 각 퀴즈는 객관식 10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퀴즈가 전체 과목성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이고, 각 퀴즈는 1%를 차지한다 (학생들은 11개의 퀴즈 성적 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을 성적 계산에서 제외할 수 있다).  

과목이 반쯤 지난 어느날, 나는 동료의 부정행위를 의심하는 학생들의 제보를 받았다.  일부 학생들이 퀴즈 본 것을 제출하기 전에 웹사이트를 통해 다른 학생들에게 정답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시작한 조사는 무려 한달 이상 걸려서야 끝났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웹사이트를 통한 공유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배로부터 받은 퀴즈의 정답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공유하거나, 선배의 아이디를 빌려 그 전년도의 과목 웹사이트에 가서 퀴즈의 정답을 얻은 다음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학교는 부정행위의 여부를 학교의 교칙과 강의계획서에 기록된 윤리규정에 따라 판정한다.  이에 따르면, 퀴즈 문제나 그 답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수 없으며 또, 본인의 의도에 관계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학생이 부정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부정행위이다.  따라서, 정답을 공유한 학생들과 이를 이용한 학생들 뿐만 아니라 퀴즈의 정답을 후배에게 준 선배, 그리고 자신의 아이디를 빌려준 선배 모두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건강관련종사자는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 환자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높은 윤리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학교 학생들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부터 윤리기준을 준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급전체의 3분의 1 이상이 이를 어기고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와같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에 대한 징계로 우리학교는 그동안 학생의 해당과목 학점을 F로 처리하고 다음해에 재수강하도록 해왔다.  그런데 같은 방식의 징계를 내리는 데에는 학교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학교가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구 교과과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아직 과정을 모두 마치지 않았으므로 학교는 구 교과과정과 새로운 교과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일어난 내 과목은 구 교과과정에 속해 있었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해서 더 이상 개설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부정행위를 한 학생들에게 F학점을 주면 다음 해에 내 과목을 다시 개설해야 한다.

무엇보다 실습과정 스케줄을 짜는 것이 큰 문제였다.  

구 교과과정과 신 교과과정의 마지막 1년은 병동, 클리닉, 약국 등 환자를 만나는 곳에서의 실습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구 교과과정은 4년과정인 반면 새로운 교과과정은 3년과정이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두 교과과정의 학생들이 동시에 실습을 받아야 한다.  즉, 실습에 나가는 학생들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그동안 새로운 실습장소를 구하고 실습 스케줄을 조정하는 등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부정행위로 징계를 받아 내 과목을 다음 해에 다시 수강해야 한다면 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실습을 두 달 늦게 시작하게 될 상황에 놓인다.  한두 명의 실습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학급의 3분의 1 이상이나 되는 많은 수의 학생들의 실습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은 학교에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러한 학교 사정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F학점을 주는 대신, 과목 전체에서 퀴즈가 차지하는 비중인 10%를 모두 0%로 감점처리해서 학점을 주는 것으로 징계하자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학장님의 질문에 학사관련 부학장님이 대답하신다.
“학교가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대체 징계안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과거에 비슷한 사안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들에게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학교는 퀴즈, 숙제, 시험 등에 관련된 부정행위에 대해 모두 F학점을 주는 징계를 택했습니다.  또, 소수가 걸리면 중징계, 다수가 걸리면 경징계를 받는다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정행위를 계획하는 학생이 혹시 걸리게 되면 경징계를 받기 위해 다수의 학생들을 끌어들이려고 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학교가 일관성있는 징계정책을 써야 학생들이 건강관련종사자에게 기대하는 높은 윤리기준을 준수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학교 사정에 따라 징계수위가 달라지게 되면 학생들은 윤리기준을 사정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학생들, 미래의 건강관련종사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학사부학장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교육부학장님께서 말씀하신다. “일관성있는 징계 정책으로 부정행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제가 실습스케줄을 담당하는 교수를 직접 도와 이 학생들의 내년 실습 스케줄을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부정행위를 한 학생들에게는 모두 F학점을 주고, 내년에 제 과목을 다시 개설하겠습니다.”

학교 사정이 매우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원칙에 따라 일관성있는 정책을 결정한 이 회의가 UCSF약대에서 일한다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순간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높은 기준을 준수하기를 요구한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교수와 학교부터 이를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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