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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2> 연탄 아궁이 개량 기술
연탄 아궁이 개량 기술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집안일 중에 잘했던 일, 즉 혹시라도 아내나 자식들 앞에서 “나도 한때는 말이지!” 하며 은근히 자랑할 만한 일이 있었나 곱씹던 중, 문득 신혼 초 수유리 단독주택에서 아궁이를 고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975년 겨울, 신혼방은 유난히 추웠다. 온돌방 바닥이 워낙 냉골이라 요와 이불을 아무리 깔아도 몸이 떨렸다. 석유 스토브를 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느 날, 나는 반지하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가 방이 이렇게까지 추운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살펴보니,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연탄의 열기가 방의 고래로 제대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불길을 고래 쪽으로 유도하는 철제 두꺼비의 목이 짧고 철판도 얇았다. 열효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철물점에 가서 목이 길고 두꺼운 두꺼비를 구입해 교체하고, 열이 샐 만한 틈은 모두 진흙으로 메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불길이 고래 속으로 잘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날부터 방바닥이 뜨끈뜨끈해져 안방이 훈훈해졌다. 대성공! 이제는 살 만한 방이 되었다. 기세를 몰아 굴뚝에도 손을 댔다. 짧고 틈이 벌어진 굴뚝을 한 층 높이고, 갈라진 부분을 메웠다. 그때만 해도 사다리 없이도 지붕을 사뿐히 오를 체력이 있었다. 이어 다락에 올라 안방 종이천장 위를 들여다보니, 기왓장 틈 사이로 하늘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까운 열기가 종이천장과 그 위 빈 공간을 통해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단독주택 지붕 구조는 이처럼 매우 부실했다. 얇은 송판 조각들을 얼기설기 대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그렇다고 지붕을 새로 다 고칠 수는 없었다. 그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종이천장 위에 스티로폼을 밀어 넣어 보기로 했다. 그 시절엔 스티로폼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신혼살림에 딸려온 스티로폼 박스가 몇 개 있어 이를 재활용할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개량 작업이 끝나자, 그 춥던 안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창문을 열고 자야 할 정도로 방이 더워진 것이다. 대성공! 이 일로 나는 아내에게 ‘제법 괜찮은 남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 평가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2년 뒤인 1977년, 우리는 관악구 낙성대동에 있는 작은 단독 기와집을 약 750만원을 주고 사서 이사했다. 그 집엔 방이 세 개 있었는데 역시나 겨울엔 방마다 추웠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수유리 집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두꺼비를 교체하고 불길이 새는 틈을 진흙으로 메웠더니 역시 방이 금세 따뜻해졌다. 이제 나는 연탄 난방에 관한 한 제법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연탄 아궁이를 이용한 난방법은 기본적으로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연탄의 질이 좋지 않아 하루에 3번 연탄을 갈지 않으면 불이 꺼지곤 했다. 그래서 한밤중에도 한번 일어 나 연탄을 갈아야 했는데, 매번 아궁이가 있는 지하실에 내려 가서 세 방의 연탄을 가는 것은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에는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연탄의 일산화 탄소 가스가 방바닥 균열을 통해 방으로 스며 들어와 방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빈발했었다. 연탄 아궁이 난방법은 방바닥 밑으로 살인가스를 흐르게 하는 흐르는 무서운 난방법이었다. 그래서 연탄 아궁이대신 연탄보일러를 써서 난방을 하는 방법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집 안이 아닌 집 외벽에 설치하는 연탄 보일러는 가스가 실내로 스며들 위험이 없어 안전하였고, 보일러 하나에 연탄 세 장을 넣으면 방 세 개를 동시에 덥힐 수 있어 훨씬 편리했다. 그 후 1988년, 현재 살고 있는 자곡동 집(당시 시세 약 1억 원)으로 이사했을 때는 연탄 보일러 대신 기름보일러가 가정집의 난방을 책임지고 있었고, 적어도 2007년부터는 도시 가스 보일러가 우리집 난방을 책임지고 있다. 만약 지금까지도 연탄 아궁이를 사용하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아마 연탄 아궁이를 잘 고치는 기술자로 동네에서 어깨에 힘 좀 주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7-09 0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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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1> 주례 없는 결혼식
주례 없는 결혼식 요즘 결혼식의 모습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결혼식 주례(主禮)가 없어진 일이다. 요즘 참석했던 세 번의 결혼식 모습을 소개한다. 첫번째 참석한 결혼식에서는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신랑이 선글라스를 쓰고 입장하였다. 단상에 오른 신랑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가 입장합니다”고 외쳤다. 이에 신부가 아버지와 함께 식장에 들어서더니 대뜸 둘이 막춤을 추었다. 그 후 아버지 손을 잡고 행진한 신부가 신랑에게 인계되었고,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자기가 어떤 배우자가 되겠는지 서약하였다. 이에 사회자가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고 선포하였다. 곧이어 신랑 신부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사회자는 “가장 먼 데서 온 하객은 손을 드세요” 하며 상품을 주는 등 분위기가 여흥(餘興)으로 바뀌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나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두번째 참석한 결혼식에서도 주례가 없었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양가(兩家) 부모님의 입장 및 양가 어머니의 화촉 점화가 있은 후 신랑 신부가 함께 입장 등단하였다. 역시 신랑 신부가 각자 배우자로서의 다짐을 읽은 다음 사회자의 성혼(成婚) 선언이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양가 부모의 덕담(德談)이었다. 먼저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자 하객(賀客) 및 신랑 신부에게 제법 긴 겸 덕담을 하였다. 이어서 신랑 부모도 각자 경우에 맞는 좋은 내용의 덕담을 하였다. 식이 끝난 다음 신부 아버지에게 ‘덕담 내용이 좋았다’고 했더니, ‘사실 준비하느라 스트레스 좀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식은 누군가의 축가 한 곡으로 마무리되었다. 가장 최근에 참석한 세번째 결혼식도 주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부 댁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信者)임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지 않았다. 좀 의외였다. 식은 옛날처럼 양가 어머니의 화촉 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신랑이 먼저 혼자 입장한 다음, 뒤이어 신부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였다. 그 뒤 신랑 신부가 혼인 서약문을 낭독한 후 역시 사회자가 성혼(成婚) 선포를 하였다. 그 후 신랑 아버지의 덕담이 있었고, 이어서 신부 아버지의 덕담이 있었는데, 특이했던 점은 신부 아버지가 짧은 덕담에 이어 축가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다행히 축가가 결혼식 분위기에 잘 어울려 하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식은 신랑 아버지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세 번의 예식에 참석하면서 느낀 소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무리 주례를 모시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성혼 선언은 목사님이나 원로 인사가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었다. 신랑 또래의 젊은 사회자가 감당하기에는 성혼(成婚)의 의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이제 결혼식 주례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제 고 홍문화 교수님 같은 명 주례는 다시 나타날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세번째로는 세 결혼식이 모두 예전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형식이 비슷하더라도 그 내용에 따라 어떤 결혼식은 경건하고 아름다운 반면에, 어떤 결혼식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역시 형식은 진실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었다. 네번째로는 앞으로는 결혼식에 축의금만 보내고 현장 참석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청첩(請牒)을 받으면 꼭 참석해야 했다. 사정이 있어 못 가면 축의금을 전달해 줄 사람을 찾아내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종이 청첩장이 사라지고 대신 신랑 신부 및 양가 부모 6인의 계좌 번호가 전부 나와 있는 전자 청첩장을 받게 되었다. 이제 직접 참석하지 않고도 내가 지정한 사람의 계좌로 축의금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요즘 결혼식장의 음식 값이 너무 비싸서 작은 축의금을 들고 가서 식사까지 하고 오기가 미안한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예식의 내용도 우리 같은 구세대의 참석을 별로 반기지 않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현장 참석을 삼가는 것이 이 시대의 매너가 아닐까 싶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6-25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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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20> 은사님들이 주신 교훈
지난달 5월은 스승의 달이다. 문득 나를 이끌어 주신 은사님들께 배운 교훈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1983년, 동경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서울대 약제학 교수직에 응모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몇 해 전에 은퇴하신 ‘약제학의 대부(代父)’ 우종학 교수님께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비 오는 날이면 ‘우산 쓰고 가면 되지’ 하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라.”이 말씀은 교만하지 말고 세상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 내신 삶의 지혜이자 사랑 어린 충고였다. 약제학 연구실 생활을 비 오는 날로 비유하시면서 힘들테지만 지혜롭게 잘 견뎌내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원래도 대범하지 못한 나였지만, 지금도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그 말씀을 떠올리며 한 박자 쉬려 애쓴다. 또 한 분, 약제학실의 두 번째 교수이셨던 김신근 교수님께서는 실용적이고도 따뜻한 조언을 많이 해 주셨다.“머리 염색은 시작하지 마라. 한 번 염색하면 계속해야 한다. 어느 날 염색을 거르고 친구들을 만나면 ‘어디 아프냐, 왜 이렇게 늙었냐’는 말을 듣게 된다. 번거롭다.”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차를 살 때는 흰 차는 피하라. 처음엔 예쁘지만 금방 더러워져서 세차(洗車)가 번거롭다.” 김교수님의 한의약학(韓醫藥學)에 대한 깊은 식견도 인상 깊었다.“숙지황을 만들 때 ‘구중구포(九蒸九曝)’란 꼭 아홉 번 찌고 말리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하라는 의미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나 ‘구중궁궐(九重宮闕)’처럼 ‘아홉’은 숫자라기보다 횟수의 많음을 뜻한다.”또 이런 말씀도 해 주셨다.“‘동의보감(東醫寶鑑)’의 성격을 아느냐? 허준 선생이 중국의 여러 의서(醫書)를 검토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긴 처방만을 선별해 원전(原典)과 함께 소개한 일종의 종설(綜說, review article)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원처방이 거의 없다. 따라서 ‘동의보감 원방에 따라 만든 OOO’이라는 광고는 대부분 말이 안 된다.” 금년에 작고하신 이민화 교수님도 기억에 깊이 남는다.“장군(將軍)을 왜 ‘제너럴(general)’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영관급까지는 각자 병과가 있지만, 장군이 되면 병과(兵科)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폭넓은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나의 약학관(藥學觀)과도 연결되었다. 약학사나 약사로서 경력을 시작할 땐 좁은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가 되어야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면 약학 전반을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물론 요즘은 제너럴리스트로 졸업해서는 취직도 쉽지 않은 고도의 전문기술 시대가 되었다. 석사 과정 시절부터 나를 아끼고 지도해 주신 박만기 교수님은 말씀보다 행동으로 많은 교훈을 주셨다. 교수님은 약속이 있으면 늘 시간보다 먼저 오셨다. ‘차라리 미리 도착해 기다리는 게, 집에서 뭉개다 늦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생각나면 즉시 실천으로 옮기는 선생님의 부지런함은 나의 게으름을 일깨워 주셨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못 할 일은 맡지 않으셨고, 일단 맡으면 반드시 제시간에 마무리하셨다. 코로나로 갑작스럽게 소천하신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타깝다. 유병설 교수님은 학문적 자존심이 높으셨다.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시면 내 연구실을 찾아오셔서 자랑하셨다. 나는 교수의 논문 자랑은 당연한 일이라며 진심으로 부러워해 드렸다.한 번은 내가 전화를 받으며 “심창구 교수입니다”라고 했더니, 유 교수님은 “그건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다. ‘심창구입니다’ 또는 ‘교수 심창구입니다’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다. 평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실수했던 것이다. 유 교수님은 자연계의 저명한 교수님들을 소개해 주시는 등 여러모로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췌장암으로 예순도 되기 전에 소천하신 그분이 요즘 부쩍 그리워진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님들의 교훈은 더 선명해진다. 그분들의 말씀과 삶의 태도가 지금도 나의 길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6-11 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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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9> 약학의 특성 12: 교육의 깊이와 너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상당 기간 동안, 약학대학 졸업생들의 사회 진출 분야는 매우 넓었습니다. 제약회사나 약국, 또는 병원약국뿐 아니라 화학, 식품, 화장품 공장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진출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는 약학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broad knowledge)을 습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많은 과목을 이수해야 했기에 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 교육은 다소 부족했습니다.오늘날은 약학대학 졸업생이 다른 산업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과거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산업 전반이 단순한 개론 수준의 지식만으로는 기여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고도화되었기 때문입니다.약학 교육은 기본적으로 전문성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약물의 약리작용을 이해하려면 분자 수준의 생화학 및 약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약물 설계와 개발을 위해서는 유기화학, 물리약학, 제제학 등 고도화된 전문 지식(specialized or in-depth knowledge)이 요구됩니다.하지만 약학의 직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런 전문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분야와 융합하고 소통해야 하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 넓은 범위의 개론적 지식이 요구됩니다. 약학의 4대 분야 중 하나인 신약개발만 보더라도, 약물학·독성학 등 특정 분야의 전문성뿐 아니라,전체 개발 과정을 조망하고 단계별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개론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각 연주자 외에 전체를 통합하고 조율하는 지휘자(conductor)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의사, 간호사, 임상시험 관리자, 정책 결정자 등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해서는 통계학, 데이터 과학, 생명윤리, 보건정책, 경제학, 그리고 소통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도 필수입니다.최근 교육계에서는 'T자형 인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T'자의 수직선은 깊이 있는 전문성을, 수평선은 폭넓은 개론 지식을 의미합니다.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타 분야와 연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약학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T자형 인재가 특히 요구되는 분야입니다.문제는 이러한 전문성과 개론 지식을 동시에 교육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르치려다 보면, 교육 연한을 10년으로 늘려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어떤 이들은 변리사, 변호사, 벤처 캐피털, 기업 경영까지도 약학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자칫하면 교육이 산만해지고 학문적 깊이마저 얕아질 우려가 있습니다.이 때문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효율적인 커리큘럼 구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약학의 목표와 부합되지 않는 과목은 과감히 정리하고, 새롭게 필요성이 대두되는 분야는 주저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약학교육의 깊이와 너비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약학 교육의 개혁은 결국 커리큘럼의 개혁에서 시작됩니다. 더 이상 커리큘럼에 대한 전문성도, 관심도 없는 교수들에게 그 개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이제는 교육학 전공자를 전임 교수로 채용하여, 그들에게 교육 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맡겨야 합니다.몇 년 전부터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퇴직한 교수의 자리를 동일한 전공 분야의 후임자로 채우는 전통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관행을 과감히 깨고 약학교육의 미래 목표에 부합하는 새로운 분야의 전공자를 교수로 채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커리큘럼 개혁의 실질적인 첫걸음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후배 교수님들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이상으로 12회에 걸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5-28 1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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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8> 『한국약업사』보정판(補訂版) 출판의 의미
금년 3월 약업신문사는 창간 70주년 (2024년) 기념사업으로 『한국약업사』 보정판을 출판하였다. 원 『한국약업사』는 고(故) 홍현오 선생이 구한말에서 1970년에 이르는 시기를 약업(藥業)의 창업시대, 유년시대, 혼란시대, 재건시대로 구분하여 각 시대의 사건들과 약업인들의 활약을 상세히 서술한 불후(不朽)의 명저이다. 이 책에는 재한(在韓) 일본인의 약업 (제3장), 장업소사(粧業小史, 제6장) 및 주요 의약관계 연표도 함께 실려 있다. 이번 보정판에서는 기존 본문에 인물 색인을 추가하여 독자의 편의를 높였다.나는 『한국약학사(2011년,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 』와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개정판, 2017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등의 편찬 과정에서 『한국약업사』를 자주 참고하였다. 이 책을 펼치면 약계(藥界)의 수많은 선각자들이 삼국지의 영웅호걸들처럼 어려웠던 시기를 헤치며 시기에 약업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박진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한국약업사』에는 삼국지 (등장인물 약 1100명) 보다 더 많은 인물들 - 한국인 1107명, 일본인 72명, 기타 외국인 18명 등 약 1200명 - 이 등장한다. 이처럼 수많은 선배 약업인들의 피땀어린 활약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신약개발강국을 논할 정도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님들의 과감한 도전과 용기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토록 방대한 약업계의 역사를 빠짐없이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藥學史分科學會, 2014년 창립) 회원들은 『한국약업사』를 우리나라 근·현대 약학사 및 약업사 연구의 최고의 경전(經典, bible)으로 꼽고 있다.다만 원저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불편함이 있었다. 발간 당시의 흐름에 따라 본문이 세로쓰기 및 2단으로 편집되어 있고, 한자 사용이 많으며, 당시의 표현 습관이 현재와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약학사 분과학회의 김진웅 회장과 이영남 운영위원(충북대 명예교수), 그리고 서울대 약학역사관(藥學歷史館)의 주승재 관장 등과 협의하여 이 책의 보정판을 약업신문사의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으로 발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결과, 이 보정판이 탄생하게 되었다.보정판에서는 본문을 가로쓰기 형식으로 바꾸고, 일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은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었다. 물론 원저의 향기를 잃지 않도록 지나친 수정은 삼갔다. 우리들은 각자 이 책을 여러 차례 읽으며 문장을 다듬고, 일부 오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또한 주요 등장 인물 및 사건 관련 사진, 연표, 인물 색인도 추가하였다. 사진 자료 등은 약업신문 이종운 주간의 협조를 받았고, 실무 작업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박주영 학예연구원의 도움을 받았다.이 작업을 하면서 아쉬움도 남았다. 유세환, 이석모 등 약학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선배님들의 사진을 구하지 못해 책에 싣지 못한 점, 그리고 이 책 이후의 약업사가 정리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 특히 안타까웠다. 이를 통해 그때 그때 기록을 남기는 습관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이번에 『한국약업사』 보정판을 통해 장차 세계 약업을 선도할 포부를 가진 우리 한국 약업계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깊은 영감을 얻게 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바이오 의약품 등의 연구·개발·제조에 매진하고 있는 젊은 약업인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약업인들의 도전 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배우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미래를 열어가기를 바란다. 과거를 반추하고 배우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국약업사』 보정판 발간이라는 값진 결실을 맺게 해준 우리나라 약계 전문지의 종가(宗家) 약업신문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5-07 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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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417>. 약학의 특성 11. 임상약학과 맞춤약학
내가 1967년 약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조윤성 교수님은 임상약학(clinical pharmacy, 臨床藥學)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그 후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논란을 벌이다가 근래에 와서 드디어 임상약학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6년제 교육을 실시하던 2009년부터 본격적인 임상약학 교육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임상약학이란 창약학, 제약학, 용약학(用藥學)이라는 약학의 3대 분야 중에서 용약학의 목적을 구체화시킨 이름입니다. 임상약학 교육을 통해 약사들의 보다 정확하고 안전한 약물 투여가 가능해졌습니다. 종래의 약물요법을 돌이켜보면, 환자에게 어떤 약을 투여할 때 일률적으로 어른은 1정, 어린이는 1/2정을 투여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체중이 심하면 2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어른은 무조건 1정을 투여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인종이나 개인에 따라 약물에 대한 반응 (약효 또는 부작용)도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률적으로 일정량을 투여하는 종래의 약물 투여방식에는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지요. 1995년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9살짜리 소녀가 어느 날 프로작(Prozac, fluoxetine)이라는 치료약을 복용하는 도중에 발작을 일으키고 사망하는 사고가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녀를 부검한 결과 프로작의 혈중 농도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를 입양한 양부모가 살인 의혹을 받았는데,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유전자 검사를 해 본 결과 이 소녀에게는 간에서 프로작을 대사시키는 CYP2D6라는 효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상용량의 약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이 간에서 대사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되어 사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000년도에 포춘(Frotune)이라는 잡지의 표지에 ‘유전자 비극(a DNA tragedy)’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약물 대사에만 개인차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물 분자가 결합하여 약효를 나타내는 체내 약물수용체(receptor)에도 개인차가 있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에서 개발한 폐암 치료제인 이레사(Iressa, gefitinib)는 서구인보다 아시아인에서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데, 이는 이 약의 수용체인 EGFR의 변이체(mutation)가 아시아인에게 월등히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밖에 약물의 흡수와 배설의 속도를 좌우하는 막 수송 단백질(membrane transporters)도 인종과 개인에 따라 그 발현과 활성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와 같은 환자의 유전적 특성의 개인차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같은 약을 같은 용량으로 투여하는 종래의 약물요법은 매우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특정한 약에 대해서는 환자의 유전적 특성을 파악한 다음에 투여할 약을 선택하고 사용량을 결정하도록 되었지요. 옛날에 이제마 선생이 주창한 사상의학(四象醫學), 즉 환자의 체질에 따라 약을 달리 써야 한다는 생각과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환자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여 약물요법을 결정하거나 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생각을 맞춤약학(individualized or personalized medicine)이라고 부릅니다. 구두에 발을 맞추는 방식에서 발에 구두를 맞추자는 생각이라고나 할까요? 미국 UCSF병원에서는 약 의사 (藥醫師, Pharm. D)가 환자상담을 통해 맞춤약학을 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약학, 특히 임상약학에서 약물유전학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될 것입니다. 다만 환자의 유전자(DNA) 검사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당장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의 유전적 정보가 공개될 때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과학과 윤리가 적절한 합의를 이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맞춤약학’에 대해서는 이미 약춘 31과 32 (2008.1.2과 1.16일)에서 언급한 바 있음을 밝힙니다.<필자소개>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25-04-23 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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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6>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심창구 교수 지난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 동안, 근대 서양의약학이 일본에 도입된 경로인 규슈 지방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방문한 모든 곳이 다 의미가 깊었지만, 그 중에서도 구마모토 현 오쿠니정에 있는 기타자토 시바사브로 (北里紫三郞) 기념관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다. 기타자토는 뛰어난 세균학자로 작년부터 일본의 천엔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8살 때에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해 2년간 외가 쪽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는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는 대신 툇마루 걸레질을 시켰다고 한다. 키타자토는 툇마루에서 광이 날 정도로 성실히 걸레질을 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하자 구마모토 현에서는 소학교 1, 2 학년 도덕 교과서에 이 이야기를 실어 놓고 이처럼 ‘성실’하게 살아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소년 기타자토가 무릎을 꿇고 열심히 걸레질하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미담(美談)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 사람다운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옆을 보니 그가 걸레질했던 바로 그 툇마루 2장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와! 아무리 세세한 것까지 전시를 잘 하는 일본 사람들이지만 그 툇마루까지 떼어서 전시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문득 이어령 선생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오래 전에 일본 기술자가 한국기술자에게 무슨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유의사항 10가지를 설명하는데, 한 7, 8가지쯤 설명한 시점에서 한국 기술자는 슬슬 궁둥이를 들썩거린다는 것이다. 한국 기술자는 “대충 기술의 원리를 알았으면 됐지 고지식하게 10가지를 꼭 배운 그대로 할 필요까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단다. 일본 기술자의 입장에서는 10개가 다 필요해서 가르치는 것인데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 한국 기술자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매뉴얼에 적혀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을 성실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또 일의 성패(成敗)에 못지않게 과정 중에서 매뉴얼을 성실하게 따랐느냐 여부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설사 일의 결과가 좋게 나오더라도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책임을 추궁당할 가능성이 큰 나라가 일본이 아닌가 한다. 반면에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해 왔다. ‘대충 해라’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의 중요성만 강조해 왔다. 적어도 과거의 우리에게 과정이란 빨리 빨리 통과해야 할 단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의 정신이 ‘과정을 꼼꼼하게’였다면 우리의 시대 정신은 ‘빨리 빨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빨리 빨리’ 정신은 분명 우리나라를 이토록 빠른 기간에 선진국으로 ‘압축 성장’ 시킨 동력의 하나이지만, 성수대교와 삼풍 아파트 붕괴로 상징되는 부실, 졸속, 날림 공사로 이어져 막대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 우연히 옛날 영상 하나를 보았는데, 시골에 가 있는 전직 대통령이 동네 어린이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작은 일을 성실하게 잘 하면 사람들이 더 큰 일을 맡긴다. 큰 일을 하려면 우선 작은 일을 성실하게 해 버릇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빨리 빨리’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과정의 중요성까지 몸에 익혀 과정 중시와 결과 중시의 사고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한번 질 높은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는 단연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 혹자는 일본을 그대로 모방하면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답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의 유전자 특성상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일본만큼 꼼꼼한 사회가 되지는 못하리라 확신한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일본의 과정 중시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우리에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툇마루 걸레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을 제대로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나라가 된 것이다.
2025-04-08 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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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5>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2
1. 둘째날 오후제인스 저택: 이틀째 오후에는 메이지 유신 (1868) 이후 구마모토에서 서양 교육을 했던 제인스 저택을 방문하였다. 1869년 구마모토번(藩)이 세운 양학소(洋學所)는 다름 해 양학교로 개명하고, 구마모토 최초로 서양식 건물 2동을 세워, 양학교 교사로 초빙한 미 육군 포병장교 출신 제인스의 가족과 의학소 교사 만스펠트의 저택으로 제공하였다. 제인스는 3년간 수학, 지리, 물리, 화학, 천문, 생물 등을 혼자 영어로 강의하였다. 이 건물은 2016년 구마모토 지진으로 완전 붕괴되었다가 2023년 재건되었다. 사노쓰네타미 기념관: 사노는 에도(江戶)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걸쳐 근대화에 공을 세운 ‘사가의 7현인’ 중 한 명으로, 당시의 대표적인 난학자(蘭學者, 네델란드 학문)들로부터 최신 서양의학과 과학이론을 배웠다. 1852년에 번주(藩主)가 세운 세이렌카타(精煉方)이라는 이화학연구소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네델란드 군 교관을 통해 대포와 화약 개발에 필요한 화학 실험 및 기계 시험제작 등을 배워1855년 일본 최초로 증기선 모형 제작에 성공하였다.사가번(佐賀藩)은 1857년 네델란드로부터 군함 실습용 증기선을 구입하고, 18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용 증기선을 건조하였다. 2005년 미에쓰 해군소(3重津海軍所) 터 발굴 중 발견된 19세기 말의 드라이 도크가201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히라도(平戶)시로 이동하였다. 2. 셋째날 ‘히라도상관(平戶商館)’: 1609년 애도(江戶) 막부(幕府)로부터 무역허가를 받은 네델란드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설립하였다. 1641년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出島)로 상관을 이전하면서 33년의 역사를 마쳤다. 하비에르 기념교회: 하비에르(Javier)는 포르투갈 국왕인 주앙 3세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 실론, 말레이 반도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548년 일본인 야지로에게 세례를 준 것을 계기로 1549년 가고시마(鹿児島)에 상륙하였다. 많은 주민들에게 세례를 주고, 메이지 시대에 금교령(禁敎令)이 해제되자1931년 현 위치에 성당을 세웠다. 점심 식사 후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하여 원폭자료관과 평화공원을 둘러 ‘지볼트(Siebolt) 기념관’을 탐방하였다. 지볼트 기념관: 1823년 일본에 온 신성로마제국 주교령 뷔르츠부르크 (현 독일 바이에른 주) 출신의 의학자 겸 박물학자인 지볼트는 에도시대에 일본에 서양의학과 박물학을 전수하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자연과 문화 등을 유럽에 널리 소개한 인물이다. 1832년 네델란드 라이덴에 ‘일본박물관’을 개설하였다. 데지마(出島): 이어서 나가사키 시의 데지마를 방문하였다. 1550년 포르투칼 상선이 입항한 것을 계기로 히라도는 일본과 중국 등지와의 무역, 즉 남만(南蠻) 무역과 일대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상황의 변화로 데지마로 그 거점이 옮겨졌다. 데지마는 바다를 메운 4천평 미만의 섬이다. 네델란드가 기독교 포교 금지와 관련되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유일한 서양 통상국이 되었다. 데지마에는 상관장(商館長), 서기, 창고장 등의 상원과 의사, 목수, 요리사 등 10~15인의 네델란드인 등이 거주했다. 상관장은 애도를 방문하여 서양 지식을 일본에 확산시켰다. 3. 마지막 넷째날출발지인 후쿠오카로 돌아와 ‘규슈대학의학역사관’과 근처에 있는 원구사료관(元寇史料館)을 방문하였다. 원구사료관: 13세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2차례 일본을 침략하였다. 1274년 제1차 침공에는 고려군 5천여명을 포함한 약 3만명의 원군이, 1281년 2차 침공에는 고려군 4만명을 포함한 14만병이 나섰다. 그러나 두 번 다 폭풍우(神風, 가미가제) 때문에 퇴각하였다. 이번 탐방은 일본 근대화의 경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공부가 되었다.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대한의사학회(大韓醫史學會)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상의 내용도 동 학회의 ‘2025해외답사-일본 근대 의료사’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2025-03-26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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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4>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1
규슈 지방의 근대 의약학 수용사 탐방기-1 지난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간, 일본의 규슈 지방을 탐방하였다. 규슈는 일본이 서양의학을 수용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한국의사학회(醫史學會)가 기획한 해외 탐방에 우리 약학사분과학회 회원 6명이 합류한 탐방이었다. 참여자는 총 18명이었다. 1. 첫날, 오전 10:20에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먼저 사가현(佐賀縣)의 도스시(鳥栖市) 다시로(田代) 지역에 있는 ‘나카토미(中富) 약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엽부터 히사미츠(久光) 제약이 배치매약(配置賣藥)이라는 기법으로 주로 붙이는 약을 판매했던 곳이다. 배치매약이란 개인집을 방문하여 약을 먼저 주고 반년이나 1년 후에 다시 방문하여 요금을 받는 방식을 말한다. 이어서 구마모토(熊本) 현 아소군(阿蘇郡) 오쿠니쬬(小國町)에 있는 ‘키타자토 시바사브로(北里紫三郞)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키타자토는 근대 일본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세균학자이다. 그는 1871년 신설된 구마모토의 ‘후루시로(古城) 의학교’에 입학했다가 네델란드 해군 군의관인 콘스탄트 만스펠트(Mansvelt)의 권유로 ‘도쿄대학 의학부’로 진학했다. 1886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 위생연구소에 유학하여 탄저균과 결핵균 배양 등의 병원미생물학 연구의 일인자인 로베르토 코흐(Koch) 에게 사사하였다. 1890년 동료였던 베링(Behring)과 ‘동물에서의 디프테리아 면역과 파상풍 면역의 성립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두사람이 동시에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으니1인에게만 상을 수여한다는 당시 규정에 따라 베링만 노벨상을 수상했다. 귀국 후 ‘사립 키타자토 연구소’를 설립하여 광견병, 인플루엔자, 이질, 발진디푸스 등의 혈청 개발에 힘썼다. 1916년 난립한 의사회를 규합하여 대일본의사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17년 게이오(慶応) 대학 의학부 병원의 병원장을 역임하고 1931년 만 78세에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얼마전 바뀐 일본 1000엔 지폐에서 그의 초상을 볼 수 있다. 2. 둘째날인 2월 12일에는 2016년 지진으로 대다수의 전각(殿閣)과 석축(石築)이 훼손되어 보수 중인 구마모토성(熊本城)을 잠시 구경한 다음, 구마모토 시의 히고(肥後) 지역에 있는 ‘히고의육박물관(肥後醫育博物館)’을 방문하였다. 1756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공립의학교인 재춘관(再春館, 사이슌칸) 및1878년에 세워진 사립 구마모토 의학교가 오늘날의 구마모토대학 의학부로 이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구마모토의 번주(藩主) 등은 약초강습회(1756)를 열다가 재춘관이 설립된 후에는 약초 실습소 (오늘날의 약초원)인 반지엔(藩滋園, 1870-1870)을 설립했다. 1885년에는 당시 구마모토에서 근무하던 육군약제관들과 당시 현립 구마모토 의학교 약무국장 등 지역 약업가들이 출연하여 ‘사립구마모토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구마모토 대학 약학부로 이어진다. 약학대학 관내에 반지엔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학교육의 역사를 소개하는 ‘구마약(熊藥) 박물관’이 있다고 하나 시간 관계상 방문하지 못 하였다. 이어 구마모토 시의 ‘야마사끼(山崎)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야마사끼 마사타다는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01년 현립 구마모토병원 산부인과 부장 및 사립 구마모토 의학교 교수로 근무하다 1909~1910년 독일 뮌헨 대학과 본 대학에서 산부인과 유학 후 1911년 사립 구마모토 산파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1925년에는 현립구마모토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한 후 이 현립(縣立) 대학을 관립(官立)으로 이관시켰다. 이 기념관은 그가 1929년 히고(肥後) 지역의 의학교육사인 ‘히고의육사(肥後醫育史)’를 저술한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다. 일본이 서구 의약학을 재빠르게 도입한 데에는 해운 항로가 일찍 열린 데다가 지도층의 적극적인 수용 자세가 크게 기여한 것 같았다.이어서 제인스(Janes)의 저택과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다음 회에 계속)
2025-03-12 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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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413> 약학의 특성-10. 의약품의 순결성(純潔性)
심창구 교수 약학은 생체이물(生體異物, xenobiotics)을 적용하여 인체의 생명 현상을 바람직하게 조절하는 학문입니다. 이때 생체이물을 약(drug)이라고 부릅니다. 인체에 적용하는 만큼 의약품은 우선 활성성분(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 API)의 함량이 정확하고 균일해야 합니다. 즉 정밀성(精密性)이 요구됩니다. 특히 API 함량이 수 밀리그램이나 마이크로그램에 불과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의약품의 두번째 특징은 순결성(purity), 즉 되도록 API이외의 불순물(不純物, impurity)을 함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각 나라의 약전(藥典)은 의약품 원료로 사용하는 각 API에 혼입(混入) 가능성이 있는 불순물의 한도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API에 대해서는 황화물이나 염화물의 혼입 한도를, 또 다른 API에 대해서는 비소나 납의 혼입 한도를 규정하는 등 API마다 규제하는 불순물의 종류가 다릅니다. 얼핏 생각하면 모든 API에 대해 동일한 규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제가 1974~1976년 모 제약회사 시험과에서 근무할 때, 저는 API마다 순도 시험 항목이 다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몸에 해로운 모든 불순물을 검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API의 제조 공정, 즉 합성이나 정제(精製) 과정에서 혼입될 가능성이 있는 물질(불순물)에 대해서만 검사하도록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사전(事前)에 승인된 방법에 따라 제조한 API는 약전에 규정된 순도 시험만 통과하면, 불순물의 혼입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승인받지 않은 방법으로 제조한 API의 경우, 설령 약전에 규정되어 있는 순도 시험에 ‘적합’했다고 하더라도 그 물질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승인된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제조할 경우, 예상하지 못한 불순물이 혼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조 공정에서 A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겠다고 승인받아 놓고 실제로는 B라는 물질을 써서 API를 제조했다면, 약전 규정에 따라 '잔류 A 농도'를 검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정부는 API가 승인된 방법에 따라 제조되고 있는지 확실히 감독해야 합니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약전에 수재된 순도 시험이 그 원료에 대한 최소한(最小限)의 시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불순물 시험 규정을 모두 통과한 원료 속에서 작은 옷핀이 하나 발견되었다면, 이 원료를 사용하여 의약품을 제조해도 괜찮을까요? 약전에는 이러한 ‘옷핀’이 혼입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원료는 당연히 폐기해야 합니다. 약전의 규정은 최소한도의 규정일 뿐 규정되지 않은 불순물이 존재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96년, D 제약에서 제조 ·판매하던 징OO이라는 정제(錠劑)에서 메탄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는 은행잎으로부터 이 약의 유효 성분을 추출할 때 사용한 메탄올이 정제에 극미량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메탄올은 휘발성이 강해 제조 과정에서 대부분 증발해 버립니다. 그래서 "시중의 소주 한 잔에 들어 있는 메탄올 양이 이 정제 100정에 들어 있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변명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소비자의 안전성 요구 수준에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D 제약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만약 정부가 이 약의 제조 공정을 사전에 검토하여 제품 중 잔류할 가능성이 있는 메탄올의 허용 한도를 엄격히 규정하고 관리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습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첨가제(excipients)의 순결성입니다. 의약품 제조에는 대부분 결합제, 붕해제, 착색제 같은 첨가제가 함께 사용됩니다. 앞으로는 안전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수준이 상승하고, 분석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PI뿐만 아니라 첨가제들의 순도도 의약품 품질 평가의 중요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의약품은 언제나 정밀하고 순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2025-02-26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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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2> 몇 살이세요?
심창구 교수 새해 (2025년) 설날 아침이다. 그래서 속절없이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 설날이면 나이 먹어 좋아라 하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더 늙게 되었다고 한숨을 내 쉬는 노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문득 내가 몇 살이나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누가 몇 살이냐고 물어도 금방 대답을 못할 정도이다. 치매(痴呆)에 걸려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나이 셈법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나자 마자 한 살로 치는 전통적 나이 셈법이 있는가 하면, 태어난 다음 해부터 한 살로 치는 셈법, 또 자기가 태어난 생일이 되어서야 비로서 한 살을 더 먹는 서구식 셈법 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뱃속에서 열 달 있다가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나자 마자를 한 살로 치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도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가 다음날 아침에 두 살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빨라 보인다. 최근에 정부가 서구식 즉, 생일날에 나이를 먹는 셈법을 권장(?)하자, 갑자기 나이가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바람에 나이 셈법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생일날 축하 케이크에 양초를 몇 개 꽂아야 하는 지도 금방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이를 물으면 아예 ‘몇 년 몇 월 몇 일생’이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몇 살이라고 해야 옳은가? 같은 맥락에서 언제 나이를 먹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양력 새해 첫 날인지, 음력 새해 설날인지, 아니면 생일인지 헷갈린다. 생일에도 양력, 음력이 다 있으니 더욱 헷갈린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은 세월이 너무 빠르다며 나이 먹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으로는 김형석 교수님처럼 100세가 훨씬 넘은 분들의 장수를 부러워한다. 나이 먹기를 싫어하면서 나이 많은 분을 부러워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이 먹는 일을 기쁘고 감사한 일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나이를 더 먹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얼른 얼른 나이를 먹다 보면 어느덧 나도 내가 평소에 부러워하던 대 선배님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건강해야 나이도 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젊은이들의 나이에 대해서는 느낌이 좀 다르다. 우리 아들 며느리들과 손주들은 언제까지나 나이를 먹어 늙지 말고 젊게 활기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요컨대 늙은이가 나이 먹는 것은 괜찮지만, 젊은이들이 나이를 먹어 늙는 것은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문득 ‘나이’의 어원(語源)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거의 전지전능(?)한 챗지피티(Chat GPT)에게 물어봤더니 ‘낳다(출생하다)’가 ‘낳이’를 거쳐 변한 것이란다. 맞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 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지도 물어봤다. 영어로는 ‘get older’ 또는 ‘age’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年を取る年(토시오토루)’라고 하는데 우리는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대답인즉 ‘먹는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는 행위를 가르키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경험의 축적, 내면화(內面化), 체화(體化, 몸에 축적됨을 가리킴)를 강조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음식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몸속에 쌓이는 것처럼, 나이도 경험처럼 삶의 일부로 몸속에 쌓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더위를 먹는다’, ‘욕을 먹는다’, 상대방에게 한방 먹었다’ 등도 비슷한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설명 같았다. 챗지피티에게 물으면 무엇이든 일단 아는 척은 잘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든 먹는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배고프던 시절에 나이라도 ‘먹자’라는 생각에서 이런 표현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독자 여러분, 이번 설을 쇠시면 몇 살이 되시나요? 어르신들께는 이렇게 여쭙겠습니다. 올해로 춘추(春秋)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연세(年歲)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올해도 연부역강(延富力强) 하시고 평안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근하신년(謹賀新年)!
2025-02-12 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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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1> 무재능(無才能)의 비유전(非遺傳).
심창구 교수 얼마전에 ‘약창춘추 3’이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막내 손녀 (초5)가 그린 그림을 표지에 실었더니 주변에서 그림이 참 좋다는 평들을 해 주셨다. 그림을 잘 그리는 피(遺傳)가 흐르지 않는 우리 집안으로서는 좀 신기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림과 나의 인연을 회고해보았다. 내가 시골 초등학교 6학년일 때 (1959년)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멀리 보이는 계양산 (인천)을 그린 일이 있었다. 크레용으로 그린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산의 등성이와 계곡을 입체감 나게 묘사했다’고 몇 번이나 칭찬을 해 주셨다. 계곡을 산등성이보다 진하게 칠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혹시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나?” 이런 생각을 그때 살짝 했던 추억이 있다. 그 후 나는 인천으로 가 동산(東山)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미술 시간에 미술 선생님께서 ‘미술반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할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 때 들은 칭찬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누님에게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림을 그리면 배가 고프다’며 미술반에 들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 말에 별 아쉬움도 느끼지 않고 미술반 가입을 취소하였다.그 미술 시간에 한번은 에노구(絵の具)라는 수채화 물감으로 흰색 꽃병을 그리다가 그만 파란색 물감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했다. 잘 지워지지가 않기에 일부러 파란색을 한 방울 더 떨어뜨려 큰 원을 그려 넣었다. 나름 독창성(?) 을 발휘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를 보신 선생님은 ‘물감을 잘못 떨어트렸으면 지워야지’라고 지적하셨다. 나 혼자 독특하다고 우겨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나는 중학교 3년간 인천 금곡동 집에서 동산 중학교까지 약 3km 길을 걸어서 다녔는데 그 길에 외화 재개봉(再開封) 상영관인 문화극장이 있었다. 문화극장에서는 미국의 서부영화를 상영하는 날이 많았다. 당시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게리 쿠퍼' ‘버트 랑카스터’ 그리고 '아란 낫드’가 결투를 하면 누가 이길까? 같은 논쟁(?)을 할 정도로 서부영화가 인기가 높았다.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는 시간 날 때면 일부러 문화 극장 앞에 가서 입구 위에 크게 걸려있는 영화 광고 간판을 쳐다보곤 했다. 당시는 사람이 일일이 간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문화 극장의 경우 극장 입구 바로 왼쪽에 간판을 그리는 화실이 있었는데 가끔 입구가 반쯤 열려 있어 간판 그리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우선 지난번에 사용했던 캔버스 간판에 있는 그림을 흰 유화 물감으로 덧칠해서 완전히 지우고 난 다음에 새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중 특히 인물의 모습이 영화 포스터에 있는 배우의 모습과 어쩌면 그리 똑같은 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문화 극장의 그 그림들이 국내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최고의 극장 간판 작품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그림들이 멋있어서 나도 몇 번 스케치 북에 서부영화 주인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후로는 그림에 흥미를 느껴본 기억이 전혀 없다. 1967년 대학에 들어 갔는데 바로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미술반에 놀러갔다가 고등학교 동기의 권유로 얼떨결에 미술반장에 추대(?)됨을 당한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반장인 내가 문외한이니 미술반도 당연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함으로 반항(?)하고 지내는데 어느 날 정말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숙명여대 종학생회 회장 출마자로부터 선거 포스터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실력이 없어 못 그리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몇일을 고민한 끝에 지물포(紙物鋪)에 가서 예쁜 도배지 한 장을 사서 포스터 크기로 자른 다음, 그 위에 파스텔로 후보자의 성명과 공약 몇 자를 써 봤더니 제법 그럴 듯했다. 휴~ 잔꾀로 위기를 모면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에 진땀이 난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손녀는 이런 나의 무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않아 정말로 그림을 잘 그린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할렐루야! 혼돈기에 한가한 이야기를 쓰는 심사가 괴롭다. 약창춘추3 표지에 실린 손녀딸의 그림.
2025-01-22 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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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10> 약대 교가(校歌)의 부활
약대 교가(校歌)의 부활1950년 사립 서울 약학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김광균(金光均) 작사, 김성태(金聖泰) 작곡의 약학대학 고유의 교가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5년). 가사는 다음과 같은데, 과연 당대 시인의 작품답게 힘차고 원대한 약학의 포부가 잘 표현되어 있다. 1. 진리의 횃불 두 손에 들고 성동(城東)벌 고대(高臺) 위에 모인 우리들 배움의 길은 멀고 험(險)하나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희망에 가득 찬 깃발 올리자. 2. 조국은 우리 것, 힘을 합하여 거치른 황토밭에 씨를 뿌리자. 장차 올 영광의 날 두 품에 안고 하나의 이름 없는 초석(礎石)이 되자. 3. 찬바람 불고 비가 나린들 우리의 갈 길을 누가 막으랴. 장하다 약대 500의 학도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 학문의 월계관 찾으러 가자.그러나 교가의 악보(樂譜)는 지금까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당시 국립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던 김성태님이 작곡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 악보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집 기술 상 악보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악보까지 찾아 내 그 교가를 다시 불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고 있던 중에 작곡가의 장남이 서울대 경영대학의 명예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그분께 전화를 드려 ‘혹시 그 악보를 찾을 수 있겠느냐’ 문의했더니 ‘당시 (광복 이후) 아버지께서 작곡하신 각급학교의 교가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악보 찾기를 일단 포기하고 언젠가 우연히 발견되기만을 기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단기 4288년, 그러니까 서기 1955년에 발간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제9회) 앨범이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입수되었는데, 그 앨범에 그 악보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만세 만세! 반가운 소식에 저절로 환호가 나왔다. 서울대 약학대학 교가 원보 ©서울대 약학역사관이제 약대 교가의 가사와 악보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으니, ‘동창의 날’ 같은 때에 이 교가를 합창해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 아예 약대의 교가로 되살려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며 달콤한 꿈을 꾸는 요즘이다. 그런데 195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교가가 언제까지 공식적으로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약대에 입학한 1967년 이후에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1960년대에 들어서기 전후부터 서서히 부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참고로 이 귀한 앨범을 소장했던 분은 1951년 국립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3월 25일에 졸업(제9회)한 박한순(朴漢順)님이다. 박한순은 박명진(1903~1957, 서울 치과대학 초대학장)의 4녀인데, 둘째 오빠 박한덕(경성약전 14회, 1943년 졸업), 첫째 언니 박한원(사립 서울약학대학 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둘째 언니 박한일(전문부 4회, 1950년 졸업, 박한원과 쌍둥이) 등 4남매 (1남 3녀) 모두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특별한 기록도 갖고 있다. 박한덕의 딸 박영애가 박한순의 딸 제미경 인제대 교수 (박영애의 사촌 동생, 어머니와 부산시 해운대구 거주)로부터 박한순의 앨범을 빌려 와 이영남 (충북대 명예교수, 현 약학역사관 자문위원, 박영애와 여고 동창으로 절친)에게 보여줌(2024년 11월 중순)으로써 위 내용(악보 등)이 공개된 것이다. 참고로 이 앨범에 실려 있는 당시의 약학대학 교기(校旗)의 모습도 소개한다. 3개의 벤젠핵 모습이 과연 약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당사 서울대 약학대학 교기 ©서울대 약학역사관
2025-01-08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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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9> 일본인의 전통 지키기
심창구 교수.◇합격자 발표작년 초인가 TV를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요즘도 일본 동경대학 입시에 응시한 학생들이 발표 당일 학교에 가서 게시판에 게시된 합격자 명단(수험번호)를 보고 있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아직도 그런 옛날 방식으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다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는대로 이 것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다.그런데 마침 작년말에 동경대학 한인(韓人) 유학생 송년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더니, 현재 동경대학에 다니고 있는 일본인 여학생 한 명이 봉사자로 참석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뜸 ‘과연 게시판에 합격자 번호를 써 붙인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봤더니, 그 학생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대답하였다.와, 그게 사실이었구나! 다만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게시판을 보기 전에 인터넷 등으로 자신의 합격 여부를 미리 알기는 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수험번호를 써서 운동장에 게시를 하느냐? 그리고 설마 수험번호도 아직 붓글씨로 쓰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 학생 왈 ‘합격자 발표는 옛날부터 그렇게 써 붙이는 것이 전통이라 그러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붓글씨로 쓰지는 않고 아마 컴퓨터 글씨로 프린트하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전통이라 그냥 하는 거라고?우리나라에서는 게시판에 가서 합격자의 수험번호를 확인하는 그 전통이 없어진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67년에는 얼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약대 운동장 한 곁에 서있는 게시판에 가서 자신의 합격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합격한 수험생과 부모는 환호했고, 떨어진 학생과 부모는 낙심의 한숨을 쉬곤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그 전통이 왜 일본에는 아직도 남아 있을까?◇전국고교야구대회2024년 일본에서 열린 제106회 고시엔(甲子園)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재일 한국인이 설립한 교토국제고가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간토다이이치고를 2-1로 꺾으며 대회 사상 외국계 학교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경기 후 한국어 교가(校歌)가 일본 전역에 생중계됨으로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오늘은 교토국제고가 아니라 고시엔 대회의 권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시엔 대회는 몇 개의 일본 고교 야구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이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출전 자체를 엄청난 명예로 생각한다고 한다. 다들 고시엔 운동장 흙을 기념으로 담아 가는 바람에, 주최 측이 계속해서 흙을 보충해 주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우리나라에도 고교 야구가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인천에서 중 고등학교 다닐 때(1960년대 전반)만 해도 약 5개의 전국규모의 고교 야구대회가 국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되는 고교 야구대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전통이 사라진 것이다.가장 큰 원인은 물론 프로야구의 출범이겠지만, 프로야구의 인기 가운데서도 고시엔 대회의 인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일본을 보면 두 나라의 사정이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야구 팀 수가 우리나라의 야구선수 수보다 훨씬 많다고 할 정도로 야구 인구가 워낙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에 비해 적은 야구 인구에도 불구하고 전국 고교 야구대회 수가 너무 많아 인기가 시들 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먼저 출범한 전국 대회의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신문사마다 전국대회를 만든 바람에 빚어진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고찰일본인의 심성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기에,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전통을 이토록 잘 지키고 있는가? 혹시 나의 지론처럼 일본인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섣부른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결과가 이와 같은 전통 지키기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무쌍 정도가 아니라 늘 격변의 와중에 있는 우리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2025-01-03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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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8> 여동문회 창립 45주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여동문회가 창립 45주년을 맞아 기념회지를 발간하고 총회(11월 5일)를 열었다. 이 기념호를 통해 월계회(月桂會)를 모태로 하여 발전을 거듭해 온 여동문회의 45년에 걸친 발자취를 정리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기념회지에 축사를 쓰는 영광을 얻었다. 그 내용을 다소 수정하여 이하에 소개한다. ‘서울대 약대 여동문회’가 창립 4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회지를 발간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일찍이 1915년에 설립된 약학강습소를 이어 1918년에 문을 연 조선약학교는 1924년에 3명의 여동문을 배출하였습니다. 그 후 1928년까지의 조선약학교 시절에 총 15명의 여동문이 배출되었습니다.조선약학교가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된 시절 (1931~1947, 1~17회)에는 여성의 입학의 길이 닫혀 있어 여동문이 1명도 배출되지 못 했습니다. 그 후 1945년 광복 이후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시절 (~1950년)에는 총 38명의 여동문이 배출되었고,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된 후에는 오늘날과 같이 여동문의 배출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여동문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여동문들의 활동상에 시대에 따른 큰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학부를 졸업 (1971년, 25회) 하기 전에는 물론 그 이후까지도 상당기간 국내 제약회사는 여동문의 취업에 폐쇄적이었습니다. 또 어렵게 취업이 되더라도 결혼하거나 늦어도 출산시에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약대에 여학생이 많아지는 현상을 우려하곤 했습니다.그러나 제가 2년간 제25대 약대 동창회장을 역임 (2020~2021)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은 1987년 우리나라에 물질특허 제도가 도입되고 이어서 다국적 제약기업이 국내에 다수 설립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국적 기업은 우리나라 기업과 달리 여성의 취업에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의 각 방면에서 여동문들이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동문님들의 유능함이 드디어 빛을 발(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이제 약학대학 내외에서 여성의 수가 너무 많다는 시대착오적인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의 여동문들은 서울대 약대 개교 이래 최고의 전성기(全盛期)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가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남과 여의 구별은 부질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모교 동창회에서도 머지않아 여동문의 멋진 리더십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코를 거울에 박고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 말처럼 현재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유구한 역사(歷史) 속에서 현재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 쉽지 않습니다. 현재를 하나의 점(点)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 하나만 가지고는 역사의 나아가는 방향을 인식하기 어렵지만, 과거의 점과 현재의 점을 연결하면 비로소 선(線)이 만들어지고 선의 방향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이 장차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 것인지 그 지향점(指向點)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히 그 지향점이 바람직한 지, 아니면 바꿔야 할지도 성찰해 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과거에 안주하는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는 미래학(未來學)입니다.저는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藥學史)분과학회를 창립(2014년)하고, 모교의 약학역사관 설립(2015년)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발간(2016년)을 주도한 자칭 ‘약학사맨’입니다. 제가 약 45년에 걸친 여동문회의 역사가 정리된 ‘여동문 회지’의 기념호 발간을 남다른 감회로 기뻐하는 이유입니다.마침 지난 10월 10일 우리 나라의 작가 한강님의 2024년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18번째 여성 수상자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여동문회가 뻗어 나갈 미래를 계시하는 의미 심장한 경사라고 생각합니다. 여동문회의 발전과 여동문회지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4-12-16 09: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