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44> 삼키면 안 되는 약이야기
약을 사용하다보면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액체 성분의 약이 그렇다. 입에 넣었다고 무조건 삼켜서는 곤란하다. 구강청정제처럼 입을 씻어내는 약은 뱉어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삼켜야 할 수도 있다.
삼키지 말아야 하는 약으로 치과 치료를 받고 나서 자주 사용되는 클로르헥시딘액이 대표적이다. 이 약은 주로 치과에서 수술 후에 살균 소독이나 염증 완화에 자주 사용된다. 보철(의치)에 의한 염증, 아구창 등의 구강내 칸디다감염증, 치은염, 인두염, 아프타성 구내염에도 사용한다.
이 약은 구강용으로 입안에 작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므로 삼켜서는 안 된다. 만약 실수로 삼키면 어떻게 될까?
크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 클로르헥시딘 구강용은 농도를 0.5%로 희석시켜놓은 것으로 실수로 한두 모금 삼켰다고 특별히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대부분의 약성분이 체내로 흡수되지 않고 그냥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을 삼키거나 구강용이 아닌 손소독용의 고농도 제품을 삼키면 자극이 심할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약이지만 삼키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약의 용도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약성분이 들어있지만 입안에만 작용하도록 제형이 설계된 약은 먹을 필요도 없고 삼켜서도 안 된다. 요즘 자주 광고되는 약 중에 구내염으로 입안이 헐어서 아플 때 입안을 헹구어 내거나 가글하는 액체 성분 소염진통제가 그런 경우다.
여기에는 디클로페낙이라는 소염진통제 성분이 들어있는데 약성분 자체는 먹는 소염진통제에 들어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용도가 구내염을 위한 것이므로 입안에서 헹구거나 가글했을 때 효과가 있고 이에 대한 인정을 받아서 약으로 승인된 것이므로 가글 뒤에는 뱉어내야한다.
그러나 실수로 삼킨다고 해서 크게 위험하진 않다. 일단 약이 적게 들어있다. 먹는 약으로 나온 경우 한 알에 이 성분이 50mg 들어있는데 이 약은 한 포에 11mg 정도로 1/5 정도가 들어있다. 삼켜서 특별히 문제가 될 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켜서 유익한 효과를 볼 정도의 양도 아니며 원래 용도대로 가글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므로 사용법에 따라 사용을 권한다. (가글 뒤에 뱉어내도 약성분 일부가 흡수되기는 한다. 하루에 두세 번씩 일주일을 이 약으로 가글을 해도 먹는 약 한 알을 삼켰을 때 흡수되는 약에 비해 흡수되는 약성분의 양이 1/50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약이 적게 흡수된다.)
이런 약을 삼켜서는 안 되는 것은 약성분 외의 다른 성분이 먹는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강용 약에는 입안에 상쾌한 느낌을 주기 위해 소르비톨과 같은 당알코올, 보존제로서 벤조산나트륨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는데 먹는다고 크게 해가 되지는 않지만 굳이 삼킬 필요도 없다.
구강청정제는 제품에 따라 알코올을 함유한 경우도 있어서 삼키면 안 된다. 구강청정제를 쓰고 나서 음주 단속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대개 20% 내외,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의 경우에는 알코올이 26.9%까지 들어있다. 전보다 알코올 도수를 낮춘 요즘 소주보다 더 센 술인 셈이다.
그러니 알코올 함유 구강청정제로 입을 헹구고 나서 음주 측정기를 불면 입안에 남아있는 에탄올 때문에 술을 마신 것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술을 사기도 쉽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국내와 달리 규제가 엄격한 북미에서는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못 사 마시니까 구강 청정제를 사서 마시기도 한다.
구강 청정제 속 향료로 인해 위장점막에 엄청나게 자극적인데도 그렇게 해서까지 알코올을 섭취하려는 걸 보면 알코올 중독이 무섭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구강 청정제는 가급적 알코올이 안 들어있는 게 음주 운전 오해를 막기 위해서도 더 안전하지만 구강 건조를 막고 입속 세균총 균형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낫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입에서 헹군 뒤에 삼켜야 하는 약도 있다. 니스타틴이라고 하는 약을 구강캔디다증 치료에 종종 사용하는데 이때는 진균감염이 주로 구강점막에 있지만 위와 장의 점막에도 감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입에서 충분히 헹군 뒤에 삼키도록 한다. 이 경우는 삼킬 것을 미리 감안하여 제형이 만들어졌으므로 안심하고 삼켜도 된다.
2019-10-02 09:40 |
[약사·약국] <43> 몸이 붓게 하는 약 이야기
약을 복용하고 나면 다음날 얼굴이 붓거나 팔다리가 부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몸이 붓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으로는 스테로이드, 소염진통제, 피임약, 칼슘채널차단제 계열의 혈압약, 로시글리타존과 같은 당뇨약이 대표적이다. 왜 이런 부작용이 생길까?
나트륨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 밤에 라면을 국물까지 다 먹고 잔 다음날을 생각해보면 된다. 하루 섭취 권장량에 해당하는 2그램 가까운 나트륨(소금으로 환산하면 5그램)을 섭취하고 나서 그대로 자면 소변으로 내보낼 시간이 없다.
이때 나트륨이 몸에 머문다는 건 수분도 함께 붙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다음날 얼굴이 붓는 것이다. 약으로 인한 부종도 기본적으로 나트륨이 빠져나가는 걸 방해하여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약마다 차이가 있다.
혈압약이 부종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모든 혈압약이 그런 것은 아니다. 고혈압 치료에 흔히 사용되는 이뇨제는 오히려 붓기를 빼준다. ACEI, ARB 계열의 혈압약은 몸이 붓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몸이 붓는 것은 주로 동맥혈관을 확장시키는 혈압약에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대표적으로 미녹시딜, 다이아족사이드와 같은 혈압약이 이런 부작용이 흔한데, 요즘에는 이런 약은 고혈압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칼슘채널차단약이라고 하는 혈압약, 암로디핀, 니페디핀은 자주 사용되는 항고혈압약으로 세동맥 혈관을 확장시켜서 몸이 붓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부작용이 생기는 원리를 알면 부작용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피는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른다. 세동맥은 도로를 확장해서 차가 많이 들어오는데 세정맥은 도로가 그대로면 길이 갑자기 좁아지니까 혈관내액이 유출되어, 즉 새나가서 부종이 생기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세정맥도 넓혀주는 것이다. 그래서 칼슘채널차단약과 ACEI 또는 ARB 계열의 항고혈압약을 함께 쓰면 칼슘채널차단약이 세동맥을 확장시켜주고 ACEI가 세정맥을 확장시켜서 부종이 줄어든다. 말하자면 상행선과 하행선을 모두 넓혀 교통 체증을 막는 것이다.
몸이 붓게 하는 약으로 또 하나 기억해둬야 할 게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이다. 이 약은 신장에서 혈관을 확장시키고 나트륨 재흡수를 막는 프로스타글란딘의 합성을 막아서 부종을 악화시킬 수 있다. 소염진통제로 인한 부종은 일반적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붓기도 가벼운 수준이지만 고혈압이 있거나 심부전이 있는 경우에는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만성질환이 없고 약 복용 중에 일시적으로 몸이 붓는 느낌이 있을 때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현재 고혈압이나 심부전, 신부전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심장이나 신장 기능이 저하된 경우 또는 신독성 약물 복용 시에 몸이 붓거나 체중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경우, 숨쉬기가 힘든 경우에는 즉시 병원 방문이 필요하다.
신장은 대표적인 배설기관으로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 약을 내보내는데 중요하다. 일부 약물은 신장을 통해 배설되는 과정에서 신장에 유해하게 작용하여 신장독성을 일으킨다. 아미노글리코시드, 페니실린, 세팔로스포린, 시프로플록사신 등의 항생제, 시스플라틴 등의 항암제가 대표적 예이다. 이들 약을 사용 중일 때 간혹 신장독성으로 인해 몸이 붓거나 체증 증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약 때문에 몸이 붓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해서 약부터 끊어서는 곤란하다. 약으로 치료 중이었던 질환이나 증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작용을 무시하고 넘어가도 위험하다. 의사, 약사와 충분한 상담을 통해 대응방법을 찾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약으로 바꿔주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존의 약을 계속 사용하면서 용량을 줄여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약 부작용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미리 잘 알아두면 혹시 모를 위험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019-09-18 09:40 |
[약사·약국] <42> 잠 안 오는 약이야기
평소에 잠을 잘 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잠이 안 오면 당황스럽다. 공포영화나 납량특집 웹툰을 보고 잔 것도 아닌데 무서운 꿈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꾸다가 깨는 일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스트레스, 야식 때문에 잠이 안 오는 날도 있다.
하지만 숨은 원인이 약일 수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카페인은 이해하기 쉬운 예다. 커피나 차를 많이 마신 날 잠이 안 오는 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이 때 섭취량과 시간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오전에 한두 잔은 괜찮은데 하루 3-4잔을 마시거나 오후 3-4시 이후에 마시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사람이 많다.
잠이 안 올 때 술을 마시면 도움이 된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술은 수면에 방해가 된다.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잠에 들 수 있지만 자다가 중간에 깨는 게 문제다. 알코올이 인체의 수면을 조절하는 체계를 교란해서 잠이 안 오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매일 같이 술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가진 사람일수록 초반에는 잠을 잘 자다가 중반 이후에 깨어나서 다시 자기 힘들어할 가능성이 높다. 알코올 자체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지만 알코올이 이뇨제로 작용하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중간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니까 수면의 질이 좋을 수가 없다. 평소보다 생생한 꿈을 꾸거나 걱정, 불안이 가득한 꿈을 꾸게 되기도 한다.
무서운 꿈이나 생생한 꿈을 꾸게 하는 또 다른 숨은 원인은 니코틴이다. 금연 때문에 니코틴 패치를 사용 중인 경우 밤에 자기 전에는 떼고 자는 게 좋다.
밤에 패치를 붙이고 잠이 들면, 수면장애나 악몽 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자각몽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보통 아침에 패치를 붙이면 밤에는 떼고 자도록 권하는 이유다. 술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운 날 액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한 꿈에 시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무서운 꿈의 숨은 원인 중 하나가 감기약이다. 막힌 코를 뚫어주는 비충혈제거약이 특히 문제가 된다. 감기약 속의 슈도에페드린, 메틸에페드린 같은 비충혈제거제 성분은 뇌 속으로 흘러들어가 중추신경계를 자극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일시적으로 덜 피곤하고 정신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일부 사람들이 감기와 무관하게 감기약을 습관적으로 마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소에는 차분하던 사람이 약을 먹고 나서 불안해지거나 신경이 과민해질 수 있다.
잠을 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거나 무서운 꿈을 꿀 수도 있다. 감기약과 카페인 음료를 함께 마시면 이런 효과가 더 증가할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을 줄이려면 자기 직전에 감기약을 복용하기보다 두세 시간 전에 복용하거나 또는 비충혈제거제가 들어있는 감기약은 저녁에는 복용을 피하는 게 좋다.
이런 약 부작용을 모르고 밤에 감기약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악몽 속에 깨어나 귀신이 보인다며 병원 응급실을 찾는 사례도 종종 들린다.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약은 그밖에도 많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같은 우울증 치료약, 기관지를 확장시키는 천식약, 항히스타민제, 스테로이드, 여성호르몬제도 드물지만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니코틴 대체제 외에 금연치료제로 사용되는 부프로피온, 바레니클린도 불면, 비정상적인 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약 때문에 불면증이나 악몽을 꾸는 게 의심된다고 해서 약 복용을 스스로 중단해서는 곤란하다. 자칫하면 치료 중인 질환이 악화될 수 있다. 잠재적 원인 중 하나가 약일 수는 있으나 불면증, 악몽의 원인은 다양하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의 증상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일 수도 있다.
우선 의사, 약사와 상담을 통해 약이 정말 문제의 원인인지 파악하고 대응하는 게 현명하다. 예를 들어 불면증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약을 저녁에 복용 중일 때는 약을 아침에 복용하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복용 중인 약의 용량을 줄여주거나 다른 약으로 바꿔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2019-09-04 09:40 |
[약사·약국] <41> 약을 끊고 싶다면 약을 도와주세요
약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2017년 덴마크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자. 40-60세 성인 1,069명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심장질환을 겪을 위험이 크다는 진단을 받았다. 예방을 위해 약과 생활습관 개선 중에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호하는가?” 962명은 생활습관 개선을 택했다. 열에 아홉은 고혈압 약 대신 생활습관을 조정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혈압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이 약을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한다. 영양제처럼 이름은 약인데 음식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아닌 이상 약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질적 화학물질로 여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으니, 약을 적게 먹고 싶다면 약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30-45분씩 걷기처럼 가벼운 운동을 일주일에 세 번 해주면 혈압이 떨어진다. (수축기 10.3mmHg/이완기 7.5mmHg) 과체중일 경우 체중을 4.5kg 줄여주면 혈압이 떨어진다. (7.2/5.9) DASH로 알려진 고혈압을 막기 위한 식단(Dietary Approaches to Stop Hypertension)을 따라 식습관을 조정하면 혈압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다. (11.4/5.5) 하루 마시는 술을 2.7잔 줄여도 혈압이 떨어진다. (4.6/2.3) 하루 섭취하는 나트륨을 1.8g 줄이면 (소금으로 치면 4.5g에 해당한다) 혈압이 떨어진다. (5.8/2.5) 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혈압 수치와 비교하면 효과가 그리 강하진 않다. 하지만 최소한 약을 더 적게 먹는 데 도움이 된다.
고혈압 약을 끊을 수도 있다. 역시 약을 도와주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보통 혈압약을 끊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혈압 상태로 돌아간다. 짧게는 이삼일, 길어야 6개월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혈압약을 끊고 나서도 1-2년 이상 정상 혈압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 언급한 생활습관 조정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일수록 고혈압 약을 끊고 나서도 정상 혈압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생활습관 조정을 해준 사람의 경우 39%가 약을 끊고 나서 4년이 지난 시점에 계속해서 정상혈압을 유지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생활습관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고혈압도 재발할 가능성이 90%가 넘는 셈이다. 약으로 치료를 시작한 시점에서 혈압이 낮을수록 단 한 가지 혈압약으로 혈압이 조절되는 사람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고혈압 약의 가짓수가 적다는 건 그만큼 약을 잘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나이가 젊은 고혈압 환자일수록 성공적으로 약을 끊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단, 방송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고혈압 약을 끊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약을 끊어서는 안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혈압약을 끊으면 신속하게 고혈압 상태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다.
불행히도 이때 특별히 자각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약을 끊고 나도 괜찮다고 안심했다가 고혈압 상태를 방치하여 뇌졸중, 심근경색, 심부전, 만성신장병, 치매와 같은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때로는 약물 치료 이전보다 혈압이 더 높아지기도 한다. 일부 약물의 경우 갑자기 중단하면 그로 인한 금단 증상으로 교감신경이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심혈관계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스스로 약을 끊을 수 있다고 자신하기보다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조심스럽게 감량해나가는 게 좋다.
평생 혈압약의 도움 없이 정상 혈압을 유지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나이들면 항고혈압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당뇨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항우울증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으며 항고지혈증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약 이름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고혈압과 싸우거나 우울증과 싸우거나 고지혈증과 싸우는 약이다. 약이 이들 질환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약을 도와줄 수도 있고 약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여서 해당 질환을 도와줄 수도 있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그러나 현명한 선택을 위해 하나만 기억하자. 싸움의 결과를 거두는 건 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2019-08-21 09:40 |
[약사·약국] <40> 전자담배와 약의 제형 이야기
전자담배로 갈아타고 나서 불면증이 생긴다. 말이 안 될 거 같지만 사실이다. 평소 커피를 즐겨마시던 흡연자라면 그럴 수 있다. 커피 속 카페인을 대사하는 효소 때문이다.
담배 연기 속에는 약 7000종의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물질이 들어있다. 이들 중 70종은 발암물질이다. 이토록 해로운 연기를 매일 같이 들이마시는데 우리 몸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간에서 CYP 1A1, 1A2, 2E1과 같은 대사효소의 발현을 끌어올린다. 쉽게 말해 흡입되어 들어온 화학물질을 얼른 청소해서 내보내기 위한 공기정화시스템을 더 열심히 가동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담배 연기로 인한 해를 전부 막을 수는 없고, 이러한 시스템 때문에 역으로 발암물질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효과는 있는데, 바로 카페인의 대사도 빨라진다는 것이다. 담배 연기 속 화학물질을 내보내려고 더 많이 만들어낸 효소가 카페인을 청소해서 내보내는 일도 함께 맡고 있기 때문이다. 흡연자가 커피를 여러 잔 마셔도 아무 걱정 없이 잠잘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뒤에서 열심히 일하는 대사효소 덕분이다.
그런데 전자담배에는 종전의 궐련형 담배와 달리 불로 태울 때 발생하는 연기 속 화학물질이 거의 없다. 화학물질이 안 들어오니 인체도 굳이 청소를 위한 대사 효소를 더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다.
궐련형 담배에서 전자담배로 바꾸고 나면 그런 이유로 체내 대사 효소가 원래 수준으로 돌아간다. 금연을 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전처럼 하루 너댓 잔의 커피를 마셨다가는 불면증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CYP 1A2로 대사되는 약물(디아제팜, 에스트로겐, 메타돈, 니페디핀, 와파린, 테오필린)을 복용 중인 사람도 금연이나 전자담배로 바꾸고 나서 약의 용량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담배는 궐련형 담배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금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니코틴 흡수가 빠르기 때문이다. 약의 효과는 약성분이 얼마나 빠르게 흡수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북미에서 아편계 진통제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메타돈 유지요법이라는 치료가 대표적인 예다.
치료를 원하는 마약중독자들에게 메타돈이라는 마약성 진통제를 매일 약국에 와서 마시도록 한다. 메타돈은 지속시간이 매우 길고 입으로 삼키는 방식으로 복용했을 때는 효과가 매우 느리게 나타나서 마약중독자들이 혹시라도 마약을 사용했을 때 느끼는 도취감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동시에 금단증상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전자담배와 달리 금연보조제의 중요한 차이점도 여기에 있다. 니코틴 패치, 껌, 로젠지(사탕) 등의 금연보조제에도 담배와 똑같은 니코틴이 들어있다. 하지만 흡수 속도가 다르다. 담배는 니코틴을 뇌에 가장 신속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담배를 피우면 15초 만에 니코틴 성분이 뇌 속으로 들어간다. 흡수가 빠를수록 약의 효과가 강하게 느껴지고, 그럴수록 중독성이 크다. 담배를 끊기가 어려운 이유다. 이에 반해 금연보조제는 소량의 니코틴이 서서히 흡수되도록 하므로 담배를 피울 때와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덜하다.
담배 대신 니코틴을 넣어주는 약을 니코틴 대체제라고 부르는데, 이같은 약을 사용했을 때 니코턴의 혈중농도는 담배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낮은 수준이라서, 오히려 담배에 대한 욕구를 줄여준다. 낮은 수준으로라도 니코틴의 혈중 농도가 계속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태에서는 담배를 피워도 그로 인한 보상감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틴 대체제를 사용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흡연만 할 때보다 혈중 니코틴 농도가 더 높아져서 그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이다.
니코틴 껌은 껌처럼 계속 씹는 게 아니라 두 번 씹고 나면 잇몸과 뺨 사이에 껌을 물고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혈중 니코틴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약을 서서히 흡수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혈중 니코틴 농도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때 금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지만, 계속해서 조금씩 간식을 하고 있던 중에는 밥맛이 떨어지는 원리와 비슷하다.
똑같은 니코틴이지만 금연을 도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커피 속 카페인에 둔감하게 만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약은 성분에 따라서만 달라지지 않는다. 제형도 중요하다.
2019-08-07 09:40 |
[약사·약국] <39> 약도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2년 전 한 TV 프로그램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스피린을 원래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2016년 인터넷매체에 아스피린으로 머리를 감고, 발의 각질을 제거하고, 옷에 묵은 때를 제거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되고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전파된 적이 있었다.
그런 속설이 1년이 지난 2017년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마침내 방송 제작진에게까지 들어가 그 주의 아이템으로 선정된 것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방송에서 약에 대한 잘못된 속설에 대해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답했다.
아스피린과 아스피린이 분해되어서 생기는 살리실산은 다른 약이다. 살리실산을 두피에 바르면, 각질을 녹이고, 약간의 항균 효과가 있어서 비듬이나 지루성 피부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스피린에는 그런 효과가 없다. 아스피린을 가루내어 물에 타서 발라도 비듬이나 지루성 피부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화학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아스피린의 화학명은 아세틸살리실산이다. 물에 녹이면 살리실산으로 가수분해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pH 7.0, 실온에서 물에 녹이면 절반이 분해되는 데 약 52시간이 걸린다.
아세틸기는 아스피린의 작용 기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살리실산에는 항혈소판 효과가 없고 항염 작용도 아스피린보다 약하다. 반면 아스피린은 살리실산과 같은 산이 아니라 에스테르여서 각질을 녹이는 효과가 없다.
아스피린은 가정에서 실수로 과용량을 복용해서 사고가 많이 나는 약이고, 특히 어린이들이 뭔지도 모르고 다량을 삼켰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보관시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약이다.
그러나 이미 방송을 준비한 제작사로서는 아이템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이번에는 사용 기한이 지난 아스피린으로는 괜찮지 않냐며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반납해서 폐기처분하도록 해야지 원래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답했다.
나는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제작진은 포기하지 않았고 다른 전문가와 인터뷰하여 기어코 방송을 내보냈다.
다른 방송사에서 디아제팜을 과용하면 죽을 수도 있냐는 질문을 해온 적도 있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신경안정제를 과용하면 졸리고 무기력해지며 운동실조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단독 복용으로 사망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알코올이나 다른 중추신경억제제와 함께 복용했을 때는 부작용이 더 심해져서 호흡억제에까지 이를 수 있다. 방송사에서 예상한 답이 아니었지만 그게 문제의 상황에 맞는 답이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전문가와 인터뷰하여 디아제팜은 치사적이라는 식으로 방송이 나갔다. 기본적 사실 확인 없이 그저 방송 제작진의 입맛대로 답하는 전문가는 존재한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가장 최근에는 파스에 대한 또 다른 낭설을 인터넷에서 봤다. 파스 속 살리실산메틸이 분해되면 메탄올과 살리실산으로 분해되어, 메탄올은 공기중으로 날아가고 살리실산이 피부로 흡수된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설명을 덧붙여서 그래서 메탄올이 증발하는 덕분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참신한 이론이지만 철저히 틀렸다. 파스 속 살리실산메틸이 피부로 12-20% 정도 흡수되는 건 맞고 일부는 피부의 가수분해효소에 의해 메탄올과 살리실산으로 분해되는 것도 맞다. (파스에 함께 넣는 멘톨과 캠퍼가 이를 억제하므로 실제 대사는 간에서 주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흡수된 뒤다. 이미 흡수된 피부 속에서 메탄올이 소량 생겨난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지만 이렇게 생겨난 메탄올이 선택적으로 날아가거나 날아가면서 시원함을 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체내에서 대사, 배설되는 게 맞다. 파스에 대해서는 유독 틀린 설명이 많다. 캡사이신 성분의 파스를 붙이면 뜨거운 것은 혈관 확장 때문이 아니고 TRPV1 온도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멘톨 성분의 파스를 붙이면 차가운 것은 혈관 수축 때문이 아니고 TRPM8 온도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얼음찜질을 할 때는 혈관수축이 되지만 차가운 파스는 느낌만 차가울 뿐 혈관은 확장하므로 얼음찜질을 대신할 수 없다. 약의 전문가로서 약사는 스펀지처럼 아무 정보나 빨아들이면 안 된다. 과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의심과 질문을 해봐야 한다. 거짓정보를 가려낼 수 있어야 진짜 약의 전문가다. 아는 약이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2019-07-17 09:40 |
[약사·약국] <38> 장내가스를 줄이는 방법
높은 산에 올라가면 방귀가 잦아진다. 과자 봉지를 높은 곳에 가져가면 외부 기압이 낮아져서 봉지가 부풀고 내려오면 쪼그라드는 것처럼, 우리 대장 속 가스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부풀어서 방귀가 더 자주 나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비행기를 타면 뱃속에 가스가 차는 듯한 느낌이 심해질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르지도 않았고 하늘을 날고 있지도 않은데 뱃속에 가스가 부글거리는 듯하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음식, 약물, 장내 세균총의 변화 또는 질환으로 인해 장내 가스 생성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뱃속에 가스가 만들어지는 기전은 다양하다. 위와 소장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대장으로 넘어온 음식물 찌꺼기가 장내 미생물에 의해 발효되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위산 중화과정이나 영양 성분의 대사과정에서도 생겨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뱃속에는 약 200mL 의 가스가 들어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트림과 방귀를 통해 제거되는 가스의 양은 적게는 500ml부터 많게는 1.5리터에 달한다.
평소보다 장내 가스가 더 많이 생겨도 별 느낌 없이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조금만 가스가 늘어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먼저 원인이 되는 음식이나 생활습관을 찾아 조정해주는 게 좋지만 약으로 증상을 줄이고 싶다면 시메티콘, 디메티콘 성분의 소포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소포제란 거품을 없애는 약이란 뜻으로 위장에 생긴 가스 기포의 표면장력을 줄여 기포를 터뜨리거나 합쳐지도록 하여 가스 제거를 쉽게 해준다. 시메티콘, 디메티콘은 덩치가 큰 실리콘 중합체여서 체내로 흡수가 안 되어 전신 부작용이 드문 안전한 약이다.
다만 이들 성분이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혹시 장폐색과 같은 심각한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
우유 속 유당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유당불내증이 있을 경우는 우유와 유제품 섭취로 인해 가스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 이 경우 유제품 섭취를 피하면 제일 좋고 유당을 제거한 우유를 마시거나 우유 대신 발효유를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막상 살다보면 우유와 유제품을 전적으로 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유당불내증이나 과민성대장증상 환자의 경우에 프로바이오틱스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유제품에 더해 양파, 샐러리, 당근, 양배추와 같은 채소 콩류, 사과, 살구, 자두와 같은 과일도 가스 생성량을 늘릴 수 있다. 무를 먹고 트림하지 않으면 보약이 된다는 농담 속 진실은 무는 장내 가스를 생성하는 식품이란 것이다. 소르비톨과 같은 당알코올 성분이 들어간 껌이나 캔디도 많이 먹으면 가스와 복통을 유발할 수 있다. 지방질이 많은 식품도 장내 가스로 인한 증상을 악화시킨다.
생크림 케이크, 수플레, 스펀지케이크, 밀크셰이크, 탄산음료처럼 자체적으로 공기를 품고 있는 식품도 가스 증상을 악화시킨다. 감기약이나 알레르기약에 들어있는 항히스타민제 성분도 장운동을 늦춰 가스로 인한 증상이 증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식사 습관도 가스와 관련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음식을 삼킬 때 공기도 삼키게 된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을 수는 없지만 게걸스럽게 삼키지는 말아야 한다. 음식을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는 습관이 가스를 덜 삼키고 증상을 줄이는 데 좋다.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거나, 사탕을 빠는 것도 공기를 더 많이 삼키게 하므로 가스 증상을 줄이려면 피해야 하는 습관이다.
장내 가스 증상이 여러 달 지속되거나 너무 자주 생기는 경우, 복통이 심하거나 부위가 갑자기 바뀌는 경우, 40세 이후에 처음으로 증상이 나타난 경우, 위장관 출혈이나 체중 감소를 동반한 경우는 병의원에 방문하여 상담받기를 권한다.
2019-07-03 09:40 |
[약사·약국] <37> 해외여행자를 위한 알쓸신약
해외여행자 수가 계속 늘고 있다. 2018년 한국인 출국자 수는 2,870만 명으로 9년 연속 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해외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준비물이 약이다. 상비약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만성질환자의 경우에는 평소 복용하는 약부터 미리 챙겨둬야 한다.
여행지에서 고혈압약이나 당뇨, 천식약을 구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처방약이고 설사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경우에도 원래 쓰던 약과 동등한 것인지 확인이 쉽지 않다. 여행 중간에 만성질환 치료약이 떨어져서 복용을 중단하게 될 경우 대단히 위험하다. 여행이 원래 계획보다 늘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넉넉한 분량을 준비해 가는 게 좋다.
방문하는 국가의 언어에 능통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외에서 증상이 악화되어 병의원을 방문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병명과 상태를 영문으로 적은 처방전을 준비해두는 게 좋다. 간혹 입국 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영문 처방전을 미리 하나 가져가는 게 안전하다.
상비약도 챙겨가야 한다. 여행지에서도 쉽게 약을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상비약을 빠뜨렸다가 낭패를 보기 쉽다.
하지만 막상 해외여행을 나가서 상비약이 없으면 곤란할 때가 많다. 약사인 나도 해외여행 중에 상비약을 사러갔다가 낭패를 겪은 경우가 있다. 의외로 약성분이 영어로 적혀있는 나라는 많지 않아서 해당국가의 언어를 읽지 못하면 원하는 약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나라 언어를 상당히 잘 구사하는 분들도 약에 대해서는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경우를 종종 본다. 해열진통제, 가벼운 설사에 대비한 지사제, 소화제, 종합감기약, 멀미약, 가벼운 상처 치료를 위한 연고, 일회용 밴드, 거즈, 반창고, 모기기피제, 항히스타민제 등을 미리 챙겨두는 게 좋다.
상비약을 준비했다고 끝은 아니다. 사용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오히려 위험하다. 각각 어떤 경우에 쓰는 약인지 정도는 미리 알아둬야 하고, 사용 전에는 뒷면의 일반의약품 정보와 첨부문서를 확인해야 한다.
2-3분 시간을 내어 설명서를 읽어두면 약을 잘못 사용해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약 사용을 중지하고 현지의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도 약 사용 설명서에서 찾을 수 있다.
상비약을 챙겼다고 모든 걸 상비약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든 증상이 심할 때는 병의원을 가야 한다. 가벼운 열이 있거나 가벼운 근육통 등이 있을 경우 해열·진통제를 복용할 수 있지만, 고열, 심한 근육통, 또는 갑자기 쓰러진 경우에는 얼른 현지 병의원에 방문하는 게 낫다.
가벼운 설사가 있을 때는 지사제를 사용할 수 있지만 복통, 고열을 동반하는 감염성 설사일 경우는 현지 병원을 방문하거나 또는 병원에서 미리 처방을 받아 항생제를 준비했다가 사용하는 게 좋다. 약을 써도 이틀 내에 설사가 멈추지 않을 때도 현지 병의원에 방문해야 한다.
여행 시 짐을 챙기다 보면 가져가야 할 물건들이 점점 늘어나 가방이나 캐리어가 제대로 닫히지 않을 지경에 이른다. 이때 짐의 부피를 줄이려고 상비약 포장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건 좋지 않다.
약의 용량, 용법, 사용상 주의사항, 사용기한이 적혀있는 포장 박스를 버리면 상비약을 챙겨 가서도 막상 써야할 때 제대로 쓸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연고나 크림 같은 약을 다른 용기에 담아가는 것도 약의 품질을 저하시킬 수 있어서 추천하기 어렵다. 포장을 벗겨가면 다른 약과 혼동될 우려도 있다. 다른 짐의 부피를 줄이고 약은 가급적 원래 포장된 상태로 가져가는 게 좋다. 여행 중일 때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상비약은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그래도 상비약을 깜박 잊은 경우는 생긴다. 현지에서 약을 구입해야 할 때는 현지 약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끝으로 해외에서 좋다는 약이 이름만 다를 뿐 국내에 있는 약과 동일한 제품인 경우도 많으니 구입 전에 잘 살펴보길 권한다.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을 갔다가 파나돌(파라세타몰)이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과 같은 성분 약인 줄 모르고 사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2019-06-19 09:40 |
[약사·약국] <36> 반드시 알아둬야 할 모기 기피제 이야기
벌레는 안 물리는 게 최선이다. 야외활동이 많은 여름철, 벌레에 안 물리려면 곤충 기피제 사용법에 대해 잘 알아둬야 한다. 시중에 다양한 제품이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곤충 기피제는 DEET(디에틸톨루아미드) 성분 또는 이카리딘 성분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남들보다 모기에 더 잘 물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유 중의 하나가 체취나 땀 냄새로 인한 것이다. 모기는 이산화탄소, 체열, 땀, 피부 분비물의 냄새를 감지하여 흡혈대상을 찾는다. DEET 성분의 모기 기피제를 피부와 옷에 뿌리면 곤충이 싫어하는 냄새의 증기를 발생시켜 모기와 진드기, 벼룩 같은 곤충을 쫒아낸다.
하지만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농도에 따라 30% 함유 제품은 5-8시간, 20%는 4-6.5시간, 10%는 2.5-4.5시간으로 효과 지속 시간이 짧아진다. 반대로 농도가 높을수록 피부자극과 같은 부작용이 심해진다는 단점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요즘에는 피부 자극이 DEET보다 적고 독성도 낮은 이카리딘 성분 기피제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이카리딘은 모기가 사람 냄새를 맡는 것을 방해하여 효과를 내며 모기와 진드기를 쫒아내는 효과가 있다. 역시 농도에 따라 효과 지속 시간이 달라진다. 10% 함유시 모기 기피 효과는 5시간, 진드기 기피 효과는 7시간 정도 유지되며 20% 함유 제품은 모기로는 7시간, 진드기로는 8시간까지 효과가 지속된다.
연중 이맘때면 방송과 인터넷에 천연성분 기피제에 대한 정보가 쏟아진다. 하지만 정향유, 시트로넬라 오일, 콩기름, 유칼립투스 오일, 티트리 오일 등을 함유한 이들 천연성분 기피제는 모기에 대한 기피제로서 DEET보다 효과가 떨어진다. 2017년 식약처에서 제조중지 및 신규품목 허가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모기 기피제는 어떻게 써야 효과적일까? 우선 제품 사용설명서를 읽어봐야 하지만 일반적 원칙은 노출된 피부와 옷 위에 뿌리거나 바르되 적당한 양만큼만 사용해야 한다. 옷으로 덮인 피부에는 바르지 말아야 한다. 사용설명서 상의 지속시간을 확인하여 시간 간격을 잘 맞춰 재사용해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저농도의 제품으로 성인이 발라주는 게 좋고, 특히 손, 입, 눈 주위에는 바르지 않는 게 좋다. 2세 이하 유아는 이카리딘 계열의 제품이 낫다. 곤충 기피제는 찢어지거나 상처가 난 피부에는 뿌리지 않는 게 원칙이며 스프레이 타입일 경우 얼굴에는 뿌리지 않고 먼저 손에 뿌려서 얼굴에 문질러주는 게 안전하다.
야외활동을 마치고 귀가해서는 비누와 물로 피부에 남아있는 기피제를 깨끗이 씻어줘야 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쓰면 모기 기피제도 미세먼지처럼 작용할 수 있다. 분무제는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사용해야 한다.
자외선 차단제와 모기 기피제를 둘 다 써야 할 때도 종종 있다. DEET 성분은 자외선 차단제와 함께 쓰면 피부로 더 많이 흡수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자외선 차단제를 20-30분 전에 먼저 발라서 충분히 스며들도록 하고 모기 기피제는 나중에 나가기 직전에 뿌린다.
모기밴드는 믿지 않는 게 좋다. 밴드를 찬 팔 주변에나 조금 효과가 있을까, 그다지 효과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휴대폰 앱도 효과에 대한 근거가 미약하다. 진한 색상 옷을 입으면 모기에 더 잘 물린다는 속설도 틀린 이야기다. 다만 밝은 색상 옷을 입고 야외에 나가면 벌레가 달라붙었을 때 더 잘 보여서 쫒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벌레엔 안 물리는 게 최선이지만 모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곤충이다. 2015년 한 해 전 세계에서 72만5000명이 모기로 전염되는 말라리아, 뇌염, 황열병, 뎅기열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말라리아는 백신이 없으며 위험지역 여행 시에는 예방약 복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세계적으로 100개국이 말라리아 위험 지역이며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일부, 동남아시아 등이 위험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여행 전에는 가까운 병원, 보건소에 문의하거나 또는 질병관리본부 웹사이트에서 내가 여행할 지역이 혹시 말라리아 위험지역인지 확인하자.
2019-06-05 09:40 |
[약사·약국] <35> 알아둬야 쓸데있는 소화제 이야기
아직도 소화불량 증상에 소화효소제 알약부터 찾는 사람이 많다. 소화효소제를 음식에 넣고, 흐물흐물해지는 걸 보여주는 실험이 가끔 TV에 방송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화효소제 알약은 대부분의 경우 불필요한 약이다. 소화효소제 알약에는 보통 돼지의 췌장에서 추출한 효소가 들어있다.
췌장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일부 환자를 제외하면 건강한 성인은 소화효소제 알약에 들어있는 소화효소의 수십~수백 배 이상의 소화효소를 췌장에서 분비한다. 굳이 다른 동물의 소화효소를 넣어주지 않아도 인체에서 충분한 소화효소를 만들어낸다. 이미 100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1을 보태준다고 별 도움이 될 리 없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소화효소제 알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고 소화제에 함유된 다른 성분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 소화제 알약에는 소화효소 외에도 위에 차 있는 가스를 배출시켜주는 성분이나 지방 소화를 돕는 담즙산 성분도 함께 들어있다. 이들 성분도 소화불량에 두드러진 효과가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 약을 먹지 않아도 시간이 경과하고 음식이 위에서 장으로 내려가면 소화불량 증상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가벼운 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에는 제산제가 소화효소제보다 나은 선택이다. 제산제는 위속에서 직접 작용하여 5분 이내에 빠르게 증상을 완화시킨다. 단, 제산제의 효과는 일시적이며 위속에 제산제가 남아 있는 동안에만 효과가 있다. 속 쓰리다고 빈속에 약을 삼키면 약이 위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약효가 반짝하고 사라져버린다. 식후 1시간 이내에 복용해주어야 제산제가 최대 3시간까지 위에 남아 효과를 낼 수 있다. 제산제는 위에서 산을 중화하는 작용을 한다.
히스타민2 수용체 길항제(H2RAs)도 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에 자주 사용된다. 길고 어려운 이름이지만 약품 포장 뒷면에 라니티딘, 니자티딘과 같은 약 성분이 적혀있으면 다 이런 계열의 약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런 성분의 약을 복용하면 보통 30분~45분 정도가 지나 약효가 나타난다. 빠른 효과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제산제와 H2RAs 성분이 함께 들어있는 복합제가 더 나은 선택이다.
"소화제를 자주 먹으면 인체의 소화효소 분비 기능이 떨어져 나중에는 약을 안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인체가 만들어내는 소화효소의 1/100에 불과한 소량의 소화효소를 알약으로 먹는다고 소화효소 생산을 중단할 만큼 우리 몸이 허술하지 않다.
하지만 속쓰림, 소화불량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제산제나 위장약을 장기 복용하면 위궤양이나 위암의 초기 증상이 나타날 때 모르고 지나갈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다. 소화제 뒷면의 주의사항에 2주 이상 복용하여도 증상의 개선이 없을 경우 의사, 약사와 상담하라는 경고문구가 명시된 이유다.
습관적으로 소화제를 찾는 사람이라면 생활 습관을 조정해보는 것도 좋다. 식후 3시간 이내에는 눕지 말자. 밤늦게 기름진 육류와 술을 배불리 먹고 마신 뒤 바로 잠자리에 들면 음식이 위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서 다음 날 아침 속이 쓰리고 거북한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흡연은 위산 분비를 자극하는데다가 식도와 위를 잇는 하부식도괄약근을 느슨하게 하여 속쓰림 증상에는 이중으로 해롭다. 금연이 최선이지만 그게 안 되면 식후에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라도 멈추길 바란다. 뱃살의 압박도 위를 눌러 속쓰림과 역류 증상을 악화시킨다. 체중을 줄이고 가급적 꽉 끼지 않는 옷을 입는 게 좋다.
끝으로 약 복용도 속쓰림, 소화불량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소염진통제는 식후 즉시 복용해야 부작용으로 속쓰림, 소화불량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감기약이나 알레르기성 비염 약 중에 코막힘 제거약 성분도 하부식도괄약근을 느슨하게 하여 위식도 역류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2019-05-22 09:40 |
[약사·약국] <34> 논란의 약 스타틴 이야기
“고지혈증약 스타틴, 발기 부전에도 효과” 5년 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뉴스다. 미국 럿거스 대학교에서 713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한 11건의 무작위 임상시험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 스타틴 복용시 비아그라와 같은 발기부전치료제의 1/3에 해당하는 정도로 증상 개선 효과가 나타났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연구자들은 혈중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떨어지고 혈관내피의 기능이 향상되어 혈관 확장을 돕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연구 결과도 있다.
2010년 이탈리아 플로렌스 대학의 연구진은 스타틴 복용이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스타틴 복용으로 인한 남성호르몬 부족으로 성욕 감퇴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가? 하지만 약에 관한 한 이런 논란은 흔한 일이다. 약은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효과가 있으면 부작용도 있다. 그래서 어떤 약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는 약효로 인한 유익과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을 두고 저울질이 필요하다.
다시 스타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발기부전에 대한 논란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스타틴 복용시 기억력 저하, 혼돈과 같은 인지기능 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론상 그럴 수 있다. 스타틴은 우리 몸에서 콜레스테롤이 만들어지는 걸 방해하는 약인데, 통념과 달리 콜레스테롤은 몸에 꼭 필요한 성분이기도 하다. 콜레스테롤은 뇌신경세포막에도 꼭 필요한 성분인데, 뇌는 뇌-혈관장벽이라는 장벽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뇌 속으로는 간에서 만들어낸 콜레스테롤이 운반될 수 없다.
그래서 뇌는 자체적으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서 쓴다. 일부 스타틴이 아마도 뇌 속으로 들어가서 콜레스테롤이 만들어지는 걸 방해하면 인지장애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근거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스타틴 복용시 인지기능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기 어렵다. 장기간 스타틴 복용으로 혈관건강을 개선하면 도리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이 역시 아직 확실치 않다.
물에 잘 녹는 수용성 스타틴(프라바스타틴, 로수바스타틴)은 부작용이 적게 나타나고, 기름에 잘 녹는 지용성 스타틴(심바스타틴, 아토바스타틴)은 약은 조금 더 많이 나타난다는 주장도 있다.
지용성이면서 근육관련 부작용이 적게 나타나는 플루바스타틴 같은 약도 있어서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한 종류의 스타틴 복용으로 부작용이 의심되는 경우 처방한 의사와 상담을 통해 다른 종류의 스타틴으로 약을 바꾸거나 용량을 줄여보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스타틴을 복용중인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당뇨병 위험이 조금 증가할 수 있는 걸로 나타난다. 왜 스타틴이 그런 부작용을 일으키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고혈압, 비만과 같은 당뇨병 위험 인자를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며, 고용량의 스타틴을 복용했을 때 위험이 더 크게 나타난다.
하지만 스타틴 복용으로 인해 얻게 되는 심혈관계 건강상의 유익이 당뇨병 발생 위험 증가보다 훨씬 크다. 고혈압, 심장병 등으로 스타틴을 꼭 복용해야 하는 경우 당뇨병을 걱정해서 스타틴을 끊는 것보다는 복용하는 게 현명한 결정이다.
역시 드물지만, 스타틴을 복용하는 중에 근육통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의사에게 즉시 알려야 한다. 증상이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약을 일시적으로 끊었다가 다시 복용할 수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횡문근융해증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이 나타나 근육과 신장이 손상될 위험이 있다.
다른 약과 스타틴을 함께 복용하면 이런 부작용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으니, 스타틴을 복용중일 때는 약물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약사와 반드시 점검해보는 게 좋다. 끝으로 하나 기억할 점이 있다.
2017년 학술지 랜싯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일수록 스타틴으로 인한 근육통, 인지기능 저하, 발기부전과 같은 부작용을 호소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걱정도 지나치면 독이다. 약이 양날 선 검이라고 날을 너무 무서워하다가 도려내야 할 것을 도려내지 못하면 더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본래 칼이란 필요할 때는 휘둘러야 하는 법이다, 균형을 제대로 잡고.
2019-05-08 09:40 |
[약사·약국] <33> 약 사용 중 햇빛 조심
봄철 야외 활동은 즐거운 일이지만 약을 사용 중일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약 복용 중에는 자외선을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약 사용 중에는 피부가 햇빛에 더 민감해진다. 먹는 약이든 바르는 약이든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바르는 약일 때 더 자주 나타난다.
약물로 인한 광과민성(photosensitivity) 반응에는 광알레르기(photoallergy)와 광독성(phototoxicity)의 2가지 상태가 포함된다. 광알레르기는 비교적 드문 면역반응으로, 자외선이나 가시광선이 약과 만나면 약이 알레르기 원인물질로 변화하여 생긴다.
자외선 중 주로 UVA가 피부에서 이러한 광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한다. 광알레르기는 약물의 용량과 관련이 없고, 대체로 관련 화학물질이나 약물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노출된 이후에 발생한다. 다행히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는 편이다. 광알레르기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바르는 항생제, 향유, 일부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다.
광독성은 더 흔하게 생긴다. 광독성 반응은 쉽게 말해 약 사용 중에 햇빛에 의한 화상에 더 취약해지는 것이다. 면역반응이 아니라서 화학물질이나 약물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도 발생하고, 약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위험이 증가한다. 광독성을 일으키는 약물은 광범위한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염진통제, 설파제나 퀴놀론 계열의 항생제, 티아자이드 이뇨제, 비타민A유도체와 같은 약에 더해 성요한의 풀과 같은 약초 성분도 광독성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다행히 모든 약이 광과민성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과민성과 관련되는 약물의 가짓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약과 햇빛의 충돌에 대해 소비자가 일일이 기억하긴 어렵다. 자신이 사용 중인 약이 광과민성을 유발하는지 약사와 확인하는 게 좋다.
광과민성 유발이 가능한 약을 사용 중인 사람은 자외선 지수가 높은 여름날 지나친 야외활동을 자제하는 게 좋다. 특히 햇빛이 강렬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가급적 직사광선 노출을 피하고, 야외활동 중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늘에서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야 한다.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양산, 긴 팔과 긴 바지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옷이 젖으면 자외선이 거의 차단되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티셔츠를 입고 물놀이를 해도 등이 까맣게 타는 이유다.) 물론 위의 방법으로 모든 자외선이 차단되지는 않는다. 자외선 차단제를 충분히 바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자외선 차단제의 성능을 나타내는 제일 흔하게 사용되는 지수는 SPF인데, SPF가 높을수록 일광화상을 막는 데 효과적이지만, SPF 표시로는 UVB에 대한 효과만 알 수 있다. 약으로 인한 광알레르기 반응은 UVA에 의해서 생길 수 있어서, 약 사용 중에 쓸 자외선차단제로는 UVA까지 차단해주는 자외선 차단제를 고르는 게 좋다. (PA로 표시 PA +, ++, +++)
광독성을 줄이려면 UVB 차단도 물론 중요하다. SPF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숫자가 높은 것만 찾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에게 일광 화상을 유발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60분(1시간)이라면, SPF 6짜리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경우, 그 사람이 같은 정도의 햇빛 화상을 겪는 데 걸리는 시간은 6시간이 된다.
SPF가 15인 제품은 UVB의 93%를 차단한다. SPF가 30까지 올라가면 UVB 차단율은 96.7%가 되고, SPF가 40이 되면 UVB의 97.5%가 차단될 뿐이다. SPF가 70인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UVB 차단 효과는 98.6%에 머무를 뿐이다. SPF30 이상부터는 차단 효과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약으로 인한 피부 문제를 막으려고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할 때 기억해야 할 점은 무엇보다 충분한 양을 자주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바르지 않으면 자외선 차단제의 효과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끝으로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자외선 차단제 성분 역시 광과민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후 발진, 두드러기, 피부 자극이 나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럴 때는 우선 다른 자외선 차단 성분이 들어 있는 제품을 이용해 볼 수 있지만,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이나 발진이 나타나면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하다. 자외선 차단제도 약이다. 궁금한 점이 있을 때는 약사와 상담하자.
2019-04-24 09:40 |
[약사·약국] <32> 알아두면 쓸데있는 약의 제형 이야기
약에는 다양한 제형이 있다. 캡슐, 정제, 가루약, 시럽처럼 먹는 약도 있고 주사로 맞는 약도 있다. 연고나 젤, 크림처럼 바르는 약도 있고, 붙이는 패치도 있다. 어떤 제형이냐에 따라 약효가 나타나는 시간과 부작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입술에 물집이 생기면서 따가운 헤르페스 바이러스 포진에는 아시클로버라는 성분의 항바이러스제가 종종 사용된다. 이 약은 먹는 약일 때 가장 효과가 좋다. 증상 초기 1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통증이 하루 더 짧아진다.
바르는 약일 때는 이보다 효과가 떨어지며, 이마저도 제형이 연고냐 크림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연고는 바셀린처럼 기름진 타입, 크림은 수분 함량이 더 높아 잘 발라지는 타입으로 이해하면 쉽다.) 크림은 구순포진 증상이 나타날 때 1시간 이내에 발라주면 증상을 한나절 줄여주는데 반해 연고는 효과가 떨어진다.
반면, 스테로이드 성분의 연고와 크림을 비교하면 동일 성분일지라고 연고가 크림보다 흡수가 더 잘 된다. 언뜻 생각하면 연고나 크림이나 같은 양의 약이 들어있으니 효과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약성분이 연고 기제(베이스)에서 피부로 전달되는 속도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제나 캡슐의 경우도 제형이 다양하다. 일반 정제나 캡슐이 있고, 천천히 또는 정해진 곳에서 약물을 방출하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서방정, 장용정과 같은 알약이 있다. 겉보기에는 비슷한 모양이지만 어떤 제형이냐에 따라 약성분이 혈중으로 흡수되는 속도가 다르고 따라서 약효 발현, 지속시간, 부작용도 다르게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제형의 선택이 다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도록 하려면 일반 정제나 캡슐이 좋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고 부작용을 줄여주려면 지속형 알약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알약은 쪼개지 말고 반드시 그대로 복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서방정, 장용정 때문이다. 일반 알약은 삼키기 어려우면 쪼개거나 부숴서 가루로 만들어 먹어도 되지만 서방정의 경우 부수거나 쪼개어 먹었다가는 천천히 녹아 나와야 할 약성분이 한꺼번에 흡수되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장용정은 위에서 녹지 않고 장에서 녹도록 특수하게 만든 것인데, 약을 쪼개면 위에서 약물이 녹아 나와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물 대신 우유로 장용정 변비약을 삼키면, 장에서 녹아야 할 코팅이 위에서 녹아버린다. 이로 인해 장운동을 촉진시켜야할 변비약 성분이 위를 자극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약을 복용한 후 화장실에 갔다가 대변에 알약이 그대로 나왔다며 놀라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이럴 때 환자 입장에서는 약성분이 하나도 흡수가 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일부 서방형 알약은 약성분을 전부 방출한 뒤에도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대장을 통과하여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다만 내가 복용 중인 약이 그런 제형에 해당하는지는 약사와 상담해봐야 한다.)
글을 마치기 전에, 부형제의 억울함을 풀어줘야겠다. 알약에 부형제가 들어있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과장하는 이야기가 방송이나 인터넷에 종종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로, 부형제가 안 들어있으면 낭패일 경우가 더 많다. 약성분만으로 알약을 만들기는 어렵다.
약성분이 원하는 곳에 가서 흡수되어 효과를 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빠르게 흡수되어 신속한 효과를 내거나 반대로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되도록 돕는 일은 부형제의 몫이다. 부작용을 줄이고 쓴맛을 가리고 삼키기 더 쉽게 하는 것도 부형제의 역할이다.
약 모양이나 색상을 다르게 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고, 모양을 보기 좋게 만들며, 약성분이 분해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여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전부 부형제가 하는 일이다. 약효를 내는 주성분이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라면 부형제는 로빈과 같은 조력자이다.
비록 약효는 없지만, 부형제는 약이 제대로 일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성분이며, 게다가 안전성이 입증된 물질이다. 쓸데없이 집어넣은 성분이 아니라 약성분을 돕도록 의도적으로 알약 설계에 포함시킨 성분이 부형제인 것이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2019-04-10 09:07 |
[약사·약국] <31> 알아두면 쓸모있는 비염약 이야기
봄은 알레르기의 계절이다. 막힌 코를 뚫어주는 비충혈 제거제 스프레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하지만 코막힘은 알레르기의 증상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코막힘에만 도움이 되는 비충혈 제거제 스프레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게다가 너무 오래 사용하면 약물성 비염이라는 부작용이 생긴다. 콧속에 약을 뿌려주면 코가 뚫리는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원래보다 코막힘이 더 심해지는 반동성 비충혈이 나타난다.
약으로 인해 도리어 비염 증상이 악화되는 이러한 약물성 비염 부작용을 피하려면 연속으로는 5-7일 이하, 하루에 2-3회 이하로 사용 기간과 회수를 제한해야 한다. 필요할 때만 잠깐씩 쓰고, 장기적으로는 다른 약으로 증상을 관리해줘야 바람직하다.
모든 스프레이를 오래 쓰면 안 되는 건 아니다. 코에 뿌리는 약 가운데는 장기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도 있다. 생리식염수나 보습제가 들어있는 스프레이는 콧속 건조함을 줄여주고 섬모 운동을 촉진시켜서 콧속 점액질 배출을 쉽게 해준다.
이보다 고농도의 식염수 또는 해수 스프레이는 코막힘 증상 완화를 위해 장기간 안전하게 사용 가능하다. 알레르기 비염 증상이 매일같이 계속되거나 증상이 심할 경우 콧속에 뿌리는 스테로이드 스프레이가 효과적이다.
스테로이드 스프레이는 알레르기비염의 증상인 콧물, 코막힘, 재채기, 가려움증을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입증된 약이다. 다만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진 않는다. 보통 처음 쓰고 나서 6-8시간 지나서야 효과가 나타나며 최대 효과를 보려면 2-4주까지 걸릴 수 있다.
코막힘에 사용하는 비충혈 제거 스프레이가 쓰자마자 효과를 보이는 데 비하면 조금 느리지만, 하루에 1~2회 꾸준히 사용하면 콧속 염증을 줄이고 알레르기 비염의 여러 증상을 완화하는데 가장 좋은 선택이다.
인터넷으로 ‘스테로이드 부작용’ 이라고 검색하면 면역 저하, 골다공증과 같은 부작용이 나온다며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약을 콧속에 뿌렸을 때 약 성분이 전신으로 흡수되는 비율은 매우 낮다.
콧속에서만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발현되고, 전신으로 흡수되는 약 성분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스테로이드 전신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거의 희박하다. 같은 맥락에서 고혈압이 있을 때는 먹는 비충혈 제거약보다는 뿌리는 스프레이가 코막힘 증상 완화에 더 안전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기간 사용만 피하면 된다.)
코에 뿌리는 약도 제대로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코 가운데 위치한 비중격막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뿌린다. 쉽게 말해 오른쪽 콧구멍에는 왼쪽 손으로, 왼쪽 콧구멍에는 오른 손으로 약을 쥐고 엇갈리게 뿌려주는 것이다.
또한 1-2주 이상 오랫동안 뿌리지 않았거나 약을 처음 사용할 때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허공에 대고 2-3회 분무하여 약이 제대로 뿌려지도록 준비한 뒤에 사용한다. 약을 뿌릴 때는 코 속에 너무 깊숙이 넣지 않도록 하며 코가 너무 심하게 막혀있거나 콧물이 심할 경우 가볍게 코를 풀고 나서 약을 뿌린다.
약을 뿌리자마자 코를 풀지 않도록 한다. 약을 뿌릴 때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약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한다. 약이 뒤로 넘어가면 약을 삼키게 되어 약효도 떨어지지만 살에 들려서 기도로 들어갈 위험도 있다.
비염에 쓰이는 약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가벼운 알레르기 비염 증상이 띄엄띄엄 나타날 때는 먹는 항히스타민제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졸음과 입마름을 유발하는 1세대 항히스타민제보다는 부작용이 덜한 2세대 항히스타민제(세티리진, 로라타딘)를 권한다.
2세대 중에서도 세티리진은 사람에 따라 졸릴 수 있고, 복용량이 늘어날 경우 졸음 부작용이 두드러질 수 있으니 주의한다. 반면, 펙소페나딘은 복용량을 늘려도 졸음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항히스타민제는 증상이 나타난 뒤에 복용하는 것보다 알레르기 원인 물질에 노출되는 기간 내내 꾸준히 복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온도 변화에 민감한 혈관성 비염과 같은 경우는 뿌리는 항히스타민제나 뿌리는 항콜린제가 효과적이다. 비염의 경우에도, 자신의 증상과 만성질환 유무에 따라 알맞은 약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터넷보다 전문가와 상담을 권한다.
2019-03-27 09:40 |
[약사·약국] <30> 약의 용도 이야기
통증으로 약을 복용 중인데 알고 보니 우울증 치료제다. 간지러움 증상 때문에 받아온 약인데 우울증 치료제다.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 성분이 검색해보니 항암제다. 환자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간혹 병원이나 약국으로 항의하러 오는 경우도 있다. 왜 한 가지 약을 여러 용도로 써서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가.
우리 눈에 다양해 보이는 여러 증상의 원인이 하나의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통, 치통, 관절염, 생리통, 근육통은 통증이 나타나는 부위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전은 비슷하다. 통증과 염증, 또는 발열의 원인이 되는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물질을 줄여주는 약으로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동일 성분의 소염진통제(예를 들어 나프록센, 이부프로펜)를 치통에도 쓰고 생리통에도 쓸 수 있는 이유다. 소염제와 진통제가 따로 있는 줄 알고 각각을 찾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약(NSAID)으로 진통, 소염, 해열 효과를 모두 얻을 수 있다.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물질이 우리 몸에서 통증, 염증, 발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므로 이 한 가지 물질의 합성을 막는 것만으로 통증, 염증, 발열을 줄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한 가지 약이 여기저기에 가서 작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신경병 통증에 흔히 사용되는 삼환계 항우울제(TCA)가 대표적 예이다. 통증이 계속되면 우울해지고 우울하면 통증에 민감해지는 악순환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려고 우울증 치료제를 만성 통증과 우울증을 함께 앓는 환자에게 사용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울증이 없는 사람도 항우울제로 동일한 통증 완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통 우울증 치료제가 우울 증상을 완화하는 데는 2-4주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만 통증 완화 효과는 훨씬 더 빠르게 1주일 이내에 나타난다.
우울증에 사용할 때와 달리 적은 용량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삼환계 항우울제가 정확히 어떤 기전으로 신경병 통증을 완화하느냐는 아직 모르지만 노르아드레날린 재흡수를 억제하는 것이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걱정을 덜기 위해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자. 우울증이 없는데 신경병 통증에 우울증 치료제를 먹는다고 우울증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환계 항우울제처럼 인체 여기저기에서 작용하는 만큼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여기저기서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단점도 있다. 항콜린 작용으로 인해 입마름, 기립성 저혈압, 변비, 소변 정체와 같은 부작용이 문제가 되고, 과량 복용시 심장 독성의 위험이 있다.
다행히 우울증 치료제로 사용할 때보다 통증에 사용할 때 복용량이 적어서 부작용이 덜하다. 그런 이유로, 삼환계 항우울제를 본래의 용도인 우울증 치료에 사용하기보다 신경병 통증에 쓰는 경우가 더 많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예로, 항암제인 메토트렉세이트(MTX)를 류마티스 관절염, 건선과 같은 자가면역 질환에 사용한다. 이 약을 항암제로 사용할 때와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로 사용할 때는 사용량과 복용 방법이 다르고 작용 기전도 다르다.
관절염에 메토트렉세이트가 효과를 나타내는 정확한 기전은 아직 모르지만 아데노신을 매개로 하는 항염증 효과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절염 치료에 저용량을 사용할 때와 항암제로 고용량 투여 시의 부작용 빈도도 다르다.
그렇다고 부작용이 안 나타난다는 건 아니고, 조심해서 모니터링해가면서 써야하는 약이다. 용량을 적게 쓰면 부작용도 줄어든다는 사실이 약을 복용 중인 분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가려움증에 독세핀과 같은 항우울제를 쓰는 것도 비슷하다. 독세핀은 삼환계 항우울제이면서 강력한 항히스타민제이기도 하다. 가려움의 원인이 되는 히스타민의 작용을 차단하여 효과를 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심리적 요인으로 가려움증에 더 민감한 환자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미타자핀이라는 약도 우울증 치료제이면서 동시에 항히스타민제로서 작용을 나타내어 가려움증 치료에 사용된다. 알고 보면, 약의 세계에도 팔방미인은 존재한다.
2019-03-13 09: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