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29> 낙상에 주의해야 할 약 이야기
칠전팔기는 멋진 말이지만 이론일 뿐이다. 사람이 실제로 일곱 번을 넘어졌다가는 큰일 난다. 낙상으로 고관절 골절을 당하면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누워있는 동안 근육이 빠르게 힘을 잃는다. 매주 근력이 10-20%씩 줄어들어 입원 3-5주 만에 원래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일주일만 누워있어도 허벅지 근육량이 3%나 줄어든다.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등과 다리의 근육을 움직이는 젊은 환자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경우에 이러한 근육 소실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 누워있는 동안 근육이 줄고 힘이 빠져서 골절이 낫고 나서도 다시 쓰러지기 쉽다.
넘어지고 겨우 회복해서 일어났다가 또 넘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혼자 일어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건강하던 노인이 낙상 몇 달 뒤에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이유다. 건강을 위해서는 칠전팔기보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다.
낙상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낙상의 절반 이상이 집에서 발생한다. 집안이 정리가 안 되어 있을수록 걸려 넘어질 위험이 크다. 바닥에 물건을 치우고 조명을 밝게 유지하는 게 좋다. 봄나들이도 길이 너무 미끄러운 날은 자제해야 한다.
젊었을 때는 휘청하다가도 균형을 잡아서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균형을 잡기 어려워지므로, 낙상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 숨어있는 낙상 위험 요인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약이다.
고혈압에 복용하는 이뇨제, 혈압강하제, 수면제, 요실금약, 항우울제,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등의 여러 약물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낙상 위험을 높일 수 있다. 특히 4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낙상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낙상을 조심하려면 자신이 복용하는 약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모든 약이 낙상 위험을 높이는 건 아니다. 주로 어지러움이나 졸음 부작용을 유발하는 약이 위험하다. 하지만 만성질환이나 건강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약을 여러 가지 복용하는 경우에 낙상이 걱정된다고 무작정 약을 끊을 수도 없다.
모든 약에는 약을 복용해서 얻는 유익과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이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가에 대해 저울질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알파차단제라는 약을 복용하면 기립성 저혈압과 같은 부작용으로 낙상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잔뇨감 때문에 밤에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회수가 늘어나고 그 와중에 넘어져서 낙상을 입을 위험이 커진다.
결국 약을 복용하되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이 최선이다. 같은 알파차단제 중에서도 어지러움이나 기절 등으로 낙상이 생길 위험이 적은 것을 고르고, 약 복용 시간을 잘 지켜서 부작용 위험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보통 전립선 비대증 치료약을 자기 전에 복용하도록 권하는 것도 이러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함이다. 약 복용을 시작하고 처음 일주일 동안은 어지러움 증상이 더 흔하게 나타나므로 몸이 적응할 때까지 조심해야 한다.
고혈압 때문에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을 복용 중일 때에도 누워 있거나 앉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나면 혈압이 떨어지면서 어지럼증이 생기는 기립성 저혈압으로 쓰러져 낙상을 입을 수 있다. 급격한 자세 변화를 피하고 지지대를 잡아주는 게 좋다.
졸음,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약의 가짓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부작용과 낙상을 경험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위험을 줄이려면 우선 내가 복용중인 약에도 낙상 위험을 높이는 약이 있는가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처방약뿐만 아니라 일반약과 건강기능식품도 모두 포함하여, 자신이 복용 중인 약을 나열한 리스트를 만들기를 권한다.
이 목록을 가지고 가까운 약국에 가서 낙상 위험을 높이는 약이 있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또한 다른 이유 없이 평소보다 졸리거나 어지러운 느낌이 드는 경우, 혹시 복용 중인 약에 그런 부작용이 있는지에 대해 약사와 상담을 받아보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유익하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약을 복용 중일 때 술을 마시면 졸리고 몸의 균형을 잡기 힘들어져 낙상 위험이 증가한다. 과음을 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2019-02-27 09:40 |
[약사·약국] <20> 겨울철 무좀약 이야기
아직 추운 겨울인데 무좀약을 찾는 이가 늘어난다. 무좀하면 덥고 습한 여름이 생각나는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겨울이라고 무좀균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좀의 원인은 표피사상균과 백선균 같은 진균이며, 쉽게 말해 곰팡이다.
냉장고에 보관했는데도 곰팡이가 피어올라 상한 잼을 생각해보라. 곰팡이는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생존과 번식이 가능하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다른 곳은 다 겨울인데 발은 여름이라는 거다.
겨울에 날씨가 추우니 종종 양말도 더 두꺼운 것으로 신고 다니는데 제품에 따라서 보온은 잘 되고 통기성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땀이 나서 습하고 따뜻하니 무좀 증상이 악화되기 쉽다.
소, 말과 같은 가축이 겨울철에 축사에서 서로 접촉이 늘어나면 진균으로 인한 표피 감염이 잘 생기는 것처럼 사람도 겨울에 온천, 사우나, 찜질방 같은 곳을 이용하다보면 공용 발판이나 젖은 바닥, 수건 등을 통해 무좀균이 옮을 수 있다.
겨울철 무좀이라고 치료 방법이 여름과 다르지 않다. 항진균제가 들어있는 연고, 크림, 분말, 스프레이를 사용한다. 뿌리는 타입의 약보다는 바르는 약이 효과가 좋다. 약을 문질러 발라주는 과정에서 피부로 약성분이 더 잘 이동하기 때문이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발을 깨끗이 씻고 잘 말린 뒤에 정성껏 발라줄수록 치료에 효과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스프레이나 분말은 재발을 막는 예방용이나 신발 소독용으로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발바닥이나 발가락 사이 피부에 무좀일 경우 1주만 약을 발라줘도 증상이 좋아지고 3-4주 정도 약을 발라주면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만, 발톱무좀은 다르다. 일반 무좀 연고나 크림의 약성분은 발톱 깊숙이 침투할 수 없어서 네일라커 타입의 발톱 전용 무좀치료제를 사용해야 하며, 치료에 무려 9~12개월이 걸린다.
여름에 시작한 무좀 치료가 이듬해 봄이나 여름에 끝날 수도 있는 셈이다. 발톱무좀의 경우 먹는 약을 사용해서 치료해도, 약 복용은 3개월이지만,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6개월 이상 시간이 걸린다. 발톱이 깨끗하게 새로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보통 발톱이 손톱보다 3-4배 더 느린 속도로 자란다. 무좀이 있는 성인의 경우 발톱이 더 천천히 자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래서 만약 바르는 약으로 발톱 무좀을 치료하기로 결정한 분들은 이 기간 동안에 꾹 참고 열심히 약을 발라주어야 한다.
여름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면 앞으로도 2-3개월은 더 발라줘야 완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좀이 없어도 약을 바르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보다 비약물 요법으로 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무좀이 있을 경우, 겨울에도 발을 잘 씻고 건조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발을 하루 1회 이상 깨끗하게 씻고 땀을 많이 흘리는 경우는 더 자주 씻는 게 바람직하다. 발을 씻은 후에는 발가락 사이까지 꼼꼼히 잘 말리고, 발수건은 따로 쓰거나 수건으로 발을 닦을 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맨 마지막에 닦아주어야 한다. 발 닦은 수건으로 다른 곳을 닦으면 신체의 다른 부분까지 감염될 수 있다.
손발톱 무좀이 있을 경우에는 피부에 보이는 무좀만 치료해서는 재감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무좀약을 발라주면 나은 듯하다가도 자꾸 재발하는 사람이라면 가까운 병의원에 방문하여 손발톱 무좀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다.
여름이라면 샌들을 신는 게 꼭 끼는 신발보다 낫지만, 겨울에도 조금 넉넉한 신발을 신어서 통풍이 잘 되도록 해주면 무좀 예방과 관리에 도움이 된다. 양말은 면양말로 매일 갈아 신는 걸 습관으로 해야 한다. 모직물이나 합성섬유 양말은 통기성이 떨어져 무좀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피부의 곰팡이균은 제압했는데, 신발이나 양말에 남아있던 녀석들이 다시 발로 옮겨와 무좀이 재발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오래된 신발이나 양말은 과감히 버리자. 세척, 건조 후에 항진균제가 들어있는 분말을 뿌려두었다가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무좀은 가족에게서 옮을 수도 있다. 무좀 환자가 있을 경우, 발수건이나 신발을 함께 쓰지 않는 게 좋다. 약에게만 맡기지 말고, 내가 약을 도와줘야 효과를 본다는 사실은 겨울철 무좀약 사용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19-02-13 09:40 |
[약사·약국] <27> 약 먹을 때 주의해야 할 카페인 이야기
카페인은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약성분 중 하나다. 보통 자양강장제 드링크에는 카페인이 30mg, 복합진통제에는 한 알에 30~50mg정도가 들어 있다. 종합감기약에도 카페인이 포함된다. 특히 매일 습관적으로 오용되는 문제가 심각한 물약 종합감기약에는 카페인이 30mg까지 들어있다. 간혹 두통약이나 감기약을 먹은 날 잠을 청하기 더 힘든 이유다.
카페인이 약에 괜히 들어가는 건 아니다. 복합진통제 속 카페인은 약이 더 빠르게 효과를 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카페인 단독으로는 진통 효과가 없지만 진통제 약성분의 흡수 속도를 높여주거나 또는 약성분이 몸에서 제거되는 걸 늦춰서 약효를 높인다. 감기약 속 카페인도 마찬가지로 두통을 비롯한 통증 개선이나 감기로 인한 불편감을 줄여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카페인은 식품에도 들어있고, 약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주의하지 않으면 과잉으로 인한 부작용을 경험하기 쉽다. 커피전문점 기본 사이즈 커피 한 잔에 100-200mg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커피 한두 잔에 감기약 또는 두통약의 2-3회 분량의 카페인을 더하면 식약처의 성인 하루 카페인 섭취 권장량 400mg을 넘기기 쉽다. 제일 쉽게 생각나는 부작용은 불면증이지만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도 카페인 과잉 때문이다. 카페인이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혈관을 수축시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혈압도 상승할 수 있다.
커피를 잘 안마시던 사람의 경우 갑작스런 카페인 섭취는 크게 5-10mmHg까지 혈압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고혈압 때문에 약을 복용 중이라고 커피를 피할 필요는 없다. 매일 같이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 있어서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혈압이 올라가더라도 아주 살짝 상승하는 정도에 그친다. 다만 커피를 꾸준히 일정하게 마시는 사람에 비해 마시다 안마시다 하는 경우 카페인으로 인해 혈압이 요동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고혈압 환자들은 이런 경우 혈압 증가가 정상에 비해 1.5배 더 크게 나타난다.
커피 여러 잔을 마셔도 아무 문제없이 잘 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카페인 함유 두통약 한 알만 먹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간에서 카페인을 대사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 몸속으로 들어온 카페인을 청소해서 내보내는 속도 차이가 크게 4배까지 날 수 있다. 반응이 민감한 사람일수록 카페인 효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흡연도 카페인 부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흡연하면 간에서 카페인 대사효소(CYP1A2)가 더 많이 만들어진다. 쉽게 말해 담배 피우는 사람은 카페인이 빨리 사라지므로 그 효과나 부작용에 더 둔감해진 상태다. 흡연자가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숨은 이유다. 반대로 금연하면 간 대사효소가 원래 수준으로 돌아가므로 커피 속 카페인에 민감해진다. 그래서 금연 뒤에는 커피 마시는 양을 줄여주는 게 좋다. (카페인 대사효소의 활성 증가는 담배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니코틴 패치와 같은 금연보조제로 흡연을 대신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카페인에 민감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카페인을 포함한 약물 대사 속도가 느려진다. 젊었을 때는 커피를 마셔도 밤에 잘 자던 사람이 나이 들면서 커피 한두 잔에도 밤을 지새우며 괴로워하는 이유다. 이 때 약에 카페인이 들어있는 걸 모르고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면 둘의 카페인이 더해져서 효과가 더 강력해진다.
약과 커피 또는 카페인 음료가 충돌하는 경우를 조금 더 살펴보자. 철분제를 커피와 함께 복용하면 흡수가 저하될 수 있다. 커피는 칼슘 배출을 조금 증가시키고 흡수를 약간 떨어뜨리므로 칼슘보충제도 커피와 동시보다는 2-3시간 떨어뜨려 복용하는 게 좋다. 퀴놀론계 항생제와 플루복사민이라는 항우울제는 카페인 대사를 막아서 부작용이 늘어날 수 있으니 평소보다 카페인 섭취를 줄여야 한다.
약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모르고 먹을 때가 많다. 약 사용 설명서나 뒷포장 면에 카페인 함유 유무와 함량을 체크하는 걸 습관으로 하면 카페인 과잉으로 인한 괴로움을 피할 수 있다. 카페인이 들어있는 약인지 아닌지 구입 전에 약사와 미리 상담해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알쓸신약 칼럼을 수시로 읽는 것까지 습관으로 한다면? 최고다.
2019-01-30 08:43 |
[약사·약국] <26> 약의 사용 기한
추운 겨울 바깥에 나가기는 싫고 집에 있는 두통약을 찾고 나니 기한이 지난 것뿐이다. 이런 약 써도 되는 걸까.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약에도 식품처럼 기한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식품은 유통기한, 약은 사용기한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판매해서는 안 되지만 이미 집에 사둔 식품이 단지 유통기한만 지났다고 하여 버릴 이유는 없다. 상태가 온전하면 먹어도 된다. 하지만 약은 유통이 아니라 사용기한이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판매도 할 수 없지만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게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안 되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이라도 원래 효과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FDA에서 미군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보관기간 연장프로그램(SLEP) 조사 결과가 있다.
약이 원래 포장 용기에 그대로 담겨있고 손을 대지 않은 상태일 때는 거의 평균 5년 반이 지나도록 전체 조사 대상의 88%에 달하는 약품이 약효를 유지했다. 사용기한을 원래보다 15년 이상 연장할 수 있는 약품도 있었다. 매년 폐기되는 약으로 인한 엄청난 비용을 줄여야 하는 미군에게는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온도와 습도를 최적으로 유지한 저장 시설에서 보관한 경우에 한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즉, 일반 가정에서 보관하는 조건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소비자가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인 약 가운데 어떤 약이 약효가 유지되고 어떤 약이 문제가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이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연구 결과나 제도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약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쓰지 않는 게 좋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을 복용하면 생기는 문제는 크게 보아 둘이다. 하나는 약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전성 문제이다. 둘을 놓고 보면 약효가 떨어지는 게 더 흔한 문제다. 예를 들어 항생제의 역가가 떨어지면 질병의 원인균이 제대로 박멸되지 않으니 치료가 어려워진다.
습기에 약한 아스피린과 같은 약도 사용기한 지나면 효과가 떨어진다. 가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화장실 선반에 약을 보관하면 약성분의 가수분해가 촉진되어 약효가 더 빨리 줄어든다. 드물지만 사용기한이 지난 약의 안전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테트라사이클린, 아미노글리코사이드와 같은 일부 항생제는 사용기한이 지나면 변질되어 신장에 해로운 독성물질로 변할 수 있어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이에 더해 약도 사용기한이 지나면 세균에 오염되거나 성분이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특히 시럽이나 서스펜션과 같은 액체 의약품의 경우 세균이 번식하여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약을 개봉해서 사용하면 사용기한이 줄어든다. 약에 표시된 사용 기한은 보통 1-2년 이상으로 긴 편인데, 이는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했을 때의 사용 가능 기한이다. 개봉 후에는 기간이 단축된다. 특히 안약의 경우 개봉하면 1개월 내에 전부 사용하고 남은 것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약에 따라 포장지에 인쇄된 사용기한까지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하나 블리스터팩에 개별 포장된 알약이나, 일회용으로 포장된 안약의 경우는 개봉하지 않은 것은 사용기한까지 두고 쓸 수 있다. (뚜껑을 열어서 사용한 일회용 안약은 바로 버려야한다.)
단, 이것도 보관상 주의사항을 제대로 지켰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용한 약의 보관 방법과 기간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편에 설명할 예정이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들은 과감히 버리는 건 좋지만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안 된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약은 환경에 큰 부담을 준다. 폐의약품을 오남용할 우려도 있다. 오래된 약은 약국이나 보건소에 있는 불용의약품 수거함에 버려야 한다.
아직까지 폐의약품을 수거하여 폐기하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는 않아서 약국과 보건소의 고민이 많다. 더 많은 사람의 고민과 참여가 필요한 문제다.
2019-01-16 09:16 |
[약사·약국] <25> 약 복용을 잊었을 때
약 먹는 걸 깜박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복약 상담을 잘 하고 싶은 약사라면 반드시 주목해할 문제다. 1999년 205명의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90%가 약 먹는 걸 깜박 잊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정보가 아주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몰라도 된다고 대답한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상담할 때 이 문제는 간과하고 넘어갈 때가 많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진행한 다른 연구에 의하면 약 복용을 잊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을 들었다는 경우는 전체 응답자의 절반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약을 복용하다보면 복용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생기고야 만다. 이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대응 방법은 알고 보면 쉽다. 약을 깜박 잊은 걸 깨닫게 된 시간이 원래 먹었어야 할 시간에 가까운가 아니면 다음번 시간에 가까운가 확인하면 된다.
다음번에 가까운 경우에는 그냥 건너뛰고 다음 번 시간에 맞춰 원래대로 복용한다. 주의할 점은 약을 깜박 잊었다고 해서 다음번에 두 배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항생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복용하도록 되어있다.
가령 하루에 두 번 복용하는 항생제라면 정확히 시간을 맞추면 매일 12시간 간격으로 복용하게 된다. 가령 아침 7시, 저녁 7시에 두 번 복용하는 약인데, 오전 10시쯤이 되어 약을 안 먹은 걸 기억했다면, 그 때는 바로 복용하면 된다.
다음 번 복용 시간인 저녁 7시와는 9시간 차이가 나지만 원래 복용 시간인 오전 7시와는 3시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후 4시쯤에 기억이 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번 복용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때는 아침 약은 잊어버리고 저녁 약부터 제대로 복용하면 된다.
위의 설명은 일반적 원칙일 뿐 예외도 있다. 가령 여성 피임약의 경우는 하루 잊으면 다음날 두 알을 복용해야 할 수도 있다. 피임약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사용설명서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참고하는 게 좋다. 불확실할 때는 약국 또는 병의원에 전화해서 확인하면 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 약을 복용하는 걸 사나흘,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 이상 잊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약에 따라 괜찮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약이 반감기가 길어서 몸속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는 약일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약의 효과가 짧은 편일 때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피임약, 항생제와 같은 경우에 약 복용을 3일 이상 중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가까운 약국이나 병의원에 문의하여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알아봐야 한다.
식전에 미리 먹어야 하는 약의 복용을 잊었을 경우에는 문제가 조금 복잡하다. 갑상선 호르몬제처럼 공복에 복용해야 흡수가 잘 되는 약을 깜박 잊었다가 복용할 때는 위장이 비는 식후 2시간 또는 식전 1시간에 맞춰 복용하는 게 좋다.
아침 식전에 복용하는 비스포스포네이트 계열 골다공증약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식후에 바로 복용해야 하는 약인데, 깜박 잊었다가 식후 2시간이 되어서 기억이 났다면, 빈속이라 약을 복용하면 위장에 자극을 줄 수 있으므로 우유나 가벼운 간식을 먹고서 약을 복용하는 게 좋다.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조차나지 않는 경우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같이 습관적으로 약을 복용하다보면 잘 기억이 안날 때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무턱대고 알약을 또 삼키면 두 배로 복용하게 되어 부작용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기억이 확실치 않을 때는 일단 건너뛰는 게 안전하다. 이런 일이 자주 생겨서는 곤란하므로 약 복용을 하고 나서는 약을 복용했다는 간단한 기록을 달력이나 스마트폰에 노트로 남겨두는 게 바람직하다. 약을 아침, 저녁으로 표시한 약봉투나 번호가 있는 약봉투, 약상자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약을 복용하는 것과 다른 일상적 활동을 연결 지어 두는 것도 좋다. 대부분의 약을 식후에 복용하도록 하는 이유도 기억하기 쉽게 하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알람을 이용하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2019-01-02 09:40 |
[약사·약국] <24> 겨울철 안약 제대로 알고 쓰기
매년 겨울이 되면 눈이 뻑뻑하고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따갑다는 사람이 늘어난다. 빨개진 눈으로 인공눈물이나 안약을 찾는다. 실내나 실외나 건조한 공기가 문제다.
춥다고 난방을 계속 틀어놓으면 실내가 바깥보다 더 건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안약을 써도 막상 쓸 때만 반짝하고 효과가 오래가질 않아 문제다. 안약 사용방법을 모르고 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인공눈물에는 안구 표면의 건조함을 줄여주고 촉촉함이 오래갈 수 있도록 하는 히알루론산나트륨(Sodium Hyaluronate, HA)과 카르복시메틸셀룰로오스나트륨(Carboxymethylcellulose, CMC) 같은 보습 성분이 들어있다. 수분을 오랫동안 붙잡아주고 증발을 막아 안구 건조 증상을 완화시켜 준다. 하지만 올바른 사용방법에 따라 써야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
원칙적으로 눈에 안약을 넣어줄 때는 한 번에 한 방울이 좋다. 눈이 수용할 수 있는 눈물의 양에는 한계가 있어, 그 이상을 넣어주면 넘쳐버리기 때문이다. 안약을 넣고 나서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깜박거리면 약효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눈을 깜박거리지 않을 때는 0.03ml, 눈을 깜박거릴 때는 고작 0.007ml에 불과하다. 안약 한 방울은 0.05ml이다. 넣고 눈을 살며시 감고 있어도 전체의 40% 이상이 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안약을 넣고 눈을 깜박거렸다가는 80% 이상이 눈 밖으로 샌다.
안약을 넣고 나면 쉽게 흘러내리는 이유다. 인공눈물 안약을 써도 효과가 금방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도 기껏 넣어준 안약의 대부분이 눈에 머물지 못하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두 가지 안약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최소한 5분 이상의 간격을 둬야한다.
안구 주변이 워낙 좁다란 공간인지라 두 종류의 안약을 연속으로 점안하면 둘이 서로 밀어내어 대부분의 안약이 눈 밖으로 새어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약이 낭비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곳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약효도 떨어진다.
인공눈물의 경우는 주로 보습 성분으로 되어있으니 별다른 부작용이 없어서 한 번에 한 방울 대신 두세 방울을 넣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사용 설명서에 한두 방울로 적혀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녹내장에 사용하는 안압 강하를 위한 안약은 1회 1방울 1일 1회와 같은 식으로 한 번에 한 방울을 사용하라는 설명 문구를 명시한다. 한 방울 이상을 쓰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어서 그렇다.
여러 방울을 넣어도 바깥으로 다 새나간다면서 왜 부작용을 걱정하는지 반문할 수 있다. 답은 안으로 새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안약의 상당부분이 코와 눈을 이어주는 코눈물관(nasolacrimal duct)을 타고 눈에서 코 뒤쪽을 타고 입까지 흘러들어갈 수 있다.
안약을 넣고 나서 종종 입에서 쓴맛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 때 생기는 진짜 문제는 입에 안약이 들어간 게 아니다. 코눈물관을 타고 내려가면서 코점막을 통해서 약이 전신으로 흡수되는 게 심각한 문제다. 약이 전신으로 흡수되어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혈압약이면서 동시에 녹내장에 사용하는 안약의 성분이기도 한 티몰롤의 경우, 양쪽 눈에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 10mg짜리 알약을 복용하는 것과 동일한 혈압 강하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1980년대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져 있다.
적은 양의 안약이 이렇게 강력한 전신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코눈물관을 통해 코로 들어가서 혈관이 모여있는 코점막에서 흡수되는 경우, 간에서 대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전신혈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준 안약의 무려 80%까지 이런 식으로 전신에 흡수될 수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녹내장 안약을 잘못 사용했다가 부정맥으로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으니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2015년 남호주 대학교 연구에서는 티몰롤 안약 사용 1-6개월에 서맥(bradycardia) 발생 위험이 두 배 가까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약이 코로 새어나가게 하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안약은 한 번에 한 방울만 떨어뜨리고, 그 다음에는 코와 눈 사이에 구석진 부분에서 만져지는 코눈물관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관을 통해 약이 내려가는 걸 막아주면 된다.
매번 안약을 넣고 나면 2-3분 정도 눌러주는 게 좋다. 인공눈물도, 안약도 약이다. 잘 알고 쓸수록 효과는 커지고 부작용이 줄어든다.
2018-12-19 09:40 |
[약사·약국] <23> 미백 알약 소동의 뒷이야기
얼굴 하얘지는 약이라며 글루타티온이 뜬지도 1년에 다 되어간다. 지난 1월 구독자 수가 당시 7만 5천 명(지금은 20만명)에 달하는 유튜버가 개인 방송을 통해 “평소 복용하는 약을 설명하겠다”며 “급성·만성 간염 치료제지만 피부가 하얘지는 ‘백옥주사’와 성분이 같다”고 글루타티온을 들고 나와 벌어진 소동이다.
얼굴이 원래 하얀 편으로 보이는 이 유튜버는 글루타티온 캡슐을 “3~4일 복용했더니 얼굴이 맑고 투명해졌다”며 “주사(수액주사)를 맞느니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사실 이 약성분은 간세포로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간염 치료보조 효과도 미미하다.
아세트아미노펜 성분 진통제 과용으로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에게 이 약을 투여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즘도 열심히 이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이 제법 있다. 하지만 이 약으로 미백 효과를 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일단 흡수가 거의 안 된다. 먹어도 체내로 거의 안 들어온다. 예를 들어, 하루에 알약 20개 분량(1000mg)을 4주 동안 복용해도 혈중 농도에서 유의할만한 차이가 안 나타났다. 한 번에 알약 60개 분량(3000mg)을 복용해도 별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주사하면 100프로 체내로 들어오지만 그래도 효과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2017년 4월 발표한 ‘미용·건강증진 목적 정맥주사 성분의 안전성 및 유효성 연구’를 보면 국내외 연구를 살핀 뒤 내린 결론은 백옥주사의 주성분인 글루타티온의 미백효과에 임상적 근거가 부족하며 “오히려 백반증·피부위축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사해서 글루타티온을 피 속으로 직접 넣어주어도 혈중의 글루타티온이 세포 속으로 그대로 들어갈 방법도 없을 뿐더러, 신장에서 효소에 의해 쉽게 분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연구 보고서에 언급된 것처럼 글루타치온 주사에는 잠재적 위험성이 있다.
해외에서는 치명적 약 부작용으로 스티븐스존슨증후군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었고, 이로 인해 하얀 피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글루타티온 주사가 큰 인기를 끈 필리핀에서는 정부 기관이 직접 나서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알약으로 복용할 때 이 성분의 부작용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루타티온은 다른 펩타이드처럼 소화, 흡수되므로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으며, 한 번에 엄청나게 많은 양을 먹지 않는 이상 별다른 부작용은 없다. (하지만 다른 단백질과 펩타이드가 그러하듯 거의 대부분이 쪼개져서 흡수되므로 효과도 없는 것이다.)
약에 대해서 조심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체험담이다. 누가 뭔가를 먹고 좋았다며 한 번 드셔보라고 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사실 음식에는 이게 통하는 전략이다. 맛집 추천을 받아서 찾아가면 모르는 집을 가서 먹을 때보다는 성공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약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무엇보다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 약을 써서 뭔가가 좋아진 건지, 믿음 때문인지, 효과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효과는 없었는데 기대로 인해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건지 구별하기가 정말 어렵다.
제약회사에서 신약이 개발될 때도 약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많은 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과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다. 전에는 이웃의 체험담만 조심하면 됐지만, 이제는 인터넷 체험담이나 동영상을 더 조심해야 한다. 파워 유튜버와 소셜미디어 인플류언서의 말 한마디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환자를 전문가가 제대로 상담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지난 1월 문제의 동영상을 보고 그 약이 정말 효과가 있냐며 물어보거나 확인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짜고짜 특정한 약을 찾으며, 포장마저도 동일한 걸로 달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설명이 참 어렵다.
글루타티온과 같은 특정 성분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과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스토리는 스토리일 뿐이다.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을 즐겁게 시청하더라도 그것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말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려면 약의 전문가, 약사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게 현명하다.
2018-12-05 09:40 |
[약사·약국] <22> 주의해야 할 술과 약의 상호작용
연말이 다가온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음주의 계절이지만, 약을 복용하는 사람에게는 주의가 필요한 시기다. 알코올이 약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 부작용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면제나 신경안정제와 같은 약이 대표적이다. 알코올의 진정 작용이 약물의 효과에 더해져서 과도하게 졸리고 정신기능과 운동기능,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긴다. 술 마신 다음 날 숙취가 더 심해지거나 오래갈 수도 있다.
항생제 복용 중에도 알코올음료는 피하는 게 좋다. 한두 잔을 마시는 정도로는 항생제와 별다른 상호작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세균성 감염이 있을 때 술을 마셔서 좋을 것도 없다.
게다가 메트로니다졸과 같은 일부 항생제는 복용 중에 술을 마시면 맥박이 빨리 뛰고, 구역, 구토 등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메트로니다졸은 중단하고 나서도 48시간 동안은 금주를 권한다.
당뇨병으로 약을 복용 중인 경우에도 술을 조심해야 한다. 당뇨약에 더해 알코올도 혈당을 떨어뜨려서 저혈당이 오기 쉽다. 당뇨병 치료제 중 메트포르민이라는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과음하면 젖산산증이라는 위험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므로 특히 위험하다.
술 마신 다음 날 머리 아프다고 두통약을 먹는 습관도 금물이다. 연말이라고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 연말이 아니어도 매일 같이 소주 반 병 이상을 마시는 사람이 두통약을 복용할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은 간독성 때문에, 소염진통제는 위장관 출혈과 같은 부작용 때문에 위험하다.
술 마신 다음날 어쩌다 한 번 두통약을 한두 알을 복용하는 정도로는 큰 해를 입을 가능성이 낮지만, 과음 뒤에 두통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약에 과민 반응이 있거나 평소 알레르기성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과 술 속에 녹아있는 아민 성분들이 알레르기 증상을 악화시키고, 과민 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술 마신 뒤 알레르기성 비염 증상이 심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경우 졸음이 덜한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증상 완화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졸음, 진정 부작용이 있는 1세대 항히스타민제(예를 들어 클로르페니라민, 디펜히드라민)는 알코올로 인해 부작용이 증폭되므로 피해야 한다.
흔히 “이 약과 술은 관계가 없을거야”하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문제가 되는 약도 있다. 심혈관질환 예방을 위해 혈액 응고를 억제하는 와파린 같은 약을 복용 중일 때 술을 마시면 단기적으로 부작용이 증가하거나 장기적으로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골다공증 치료제를 복용 중인 경우도 과음은 금물이다. 골다공증 환자는 약을 복용하는 것에 더해 무엇보다 낙상을 조심해야 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치명적이다.
금연을 도와주는 처방약을 복용 중인 경우에도 술을 마시면 약 부작용이 증가하고, 음주로 인해 담배를 피우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연말 지나친 술자리는 피하는 게 최선이다.
알코올은 이뇨제이기도 하다. 술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이유다. 이로 인해 체내의 수분과 전해질이 빠져 나간다. 연말이라고 며칠 연속으로 술을 마시고 나면 쥐가 잘 나거나 눈꺼풀 경련이 생기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알코올 때문에 마그네슘이 더 많이 빠져나가 일시적으로 부족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는 마그네슘이 풍부한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거나 또는 마그네슘 보충제를 복용하는 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눈꺼풀 경련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밤새 술을 마시고 양질의 수면 부족으로 쥐가 나는 경우에 마그네슘만 보충한다고 증상이 좋아질 리는 없다. 눈꺼풀이 떨리고 쥐까지 날 때는 무엇보다 음주량과 회수를 줄여줘야 한다. 쉽게 말해, 일주일이라도 술을 끊는 게 좋다.
약 복용을 이유로 술을 안 마시겠다고 선언하면 마음 편하겠지만, 그래도 한두 잔은 마셔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연말 술자리 참석 전에 내가 복용 중인 약과 술의 상호작용에 대해 미리 약사와 상담해보는 건 그래서 좋은 습관이다.
2018-11-21 09:40 |
[약사·약국] <21> 약 때문에 입이 마를때
약 부작용 중에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것 중 하나가 구강 건조 증상이다. 약은 구강 건조증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다. 구강 건조증은 65세 이상 인구의 30%에서 나타날 정도로 흔한데, 만성질환이나 약물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타액 분비를 감소시키거나 타액의 조성을 변화시키는 약의 가짓수는 500종이 넘는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맛을 감지하려면 먼저 음식 속 맛 성분이 입 안에서 침에 녹아야 한다. 그래야 혀의 미뢰에 있는 감각세포가 맛을 감지할 수 있다. 침이 말라버리면 음식 맛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다.
그밖에도 침이 하는 일은 많다. 구강조직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며, 입속에서 칸디다 감염과 같은 질병 발생을 억제하는 데도 중요하다. 침으로 인한 자정작용이 부족하면 충치가 발생하기도 쉽다.
구강 건조증을 그대로 방치하면 구강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입안이 말라 구강 점막이 쩍쩍 갈라지거나 내려앉고 입술이 입술 껍질이 벗겨지고 입꼬리가 갈라져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지어 말하는 기능에도 영향을 주어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구강 점막 감염 및 치주염 발생도 증가할 뿐 아니라 입안에 곰팡이가 발생할 수 있다. 혀 밑에서 녹여야 하는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과 같은 약의 효과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일상에서 약 때문에 구강 건조증 부작용을 경험하는 가장 흔한 경우는 감기약을 먹고 난 뒤다. 감기약에는 대개 1세대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는데, 이 약 성분에는 침의 분비를 줄이는 항콜린작용이라는 부작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 치료제나 요실금 증상 완화를 위해 쓰이는 약들에도 항콜린부작용이 있어서 구강건조증이 나타난다.
그밖에도 상당히 많은 종류의 약이 구강 건조증을 일으킬 수 있다. 조현병치료약, 비충혈완화제, 요로 진경제, 벤조다이아제핀, 항구토제, 아편계 진통제, 교감신경 항진제 등이 구강 건조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약으로 인한 구강 건조증은 다행히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약을 복용 중에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약을 끊으면 사라진다. 하지만 원인이 약으로 짐작된다고 하여 복용 중인 약을 스스로 끊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약물 치료의 중단으로 인한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약을 계속 복용해야 한다면 침샘을 자극해주는 게 도움이 된다. 가벼운 경우는 입안을 소량의 물로 자주 적셔주거나, 무설탕 껌이나 캔디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침의 분비에 문제가 있어서 입안이 건조한 것이므로 한 번에 물을 많이 마시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약으로 인한 구강 건조 증상이 있을 때, 껌이나 캔디를 써서 부작용을 줄이려면 무설탕 제품을 사용하는 게 좋다. 설탕은 입속의 세균들도 먹이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무설탕 캔디나 검에는 자일리톨이나 솔비톨같은 당알코올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이들 감미료는 단맛이 나면서도 입속의 미생물은 먹이로 쓸 수 없으므로 입안에 침이 돌도록 자극하면서도 충치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일리톨 같은 경우는 충치 예방 효과도 있다. 그러나 이들 당알코올 성분은 장내 미생물에 의해 발효되기 때문에 너무 많이 먹으면 설사나 복통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구강 건조증이 심한 경우, 필로카핀 성분의 약을 복용하면 침의 분비를 자극해서 도움이 될 수 있고, 입안에 인공타액을 수시로 뿌려주는 것도 입안 점막에 수분을 유지시켜 주고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도 약으로 인한 구강 건조증의 괴로움을 참기 어려울 경우에는 원인이 되는 약을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약사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런 질문에 친절하게 잘 대답해주는 약국이 좋은 약국이다.)
하지만 모든 구강 건조증이 약으로 인한 것은 아니며, 만성질환이나 다른 원인으로 입 마름이 계속되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우선 가까운 병의원에서 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 피할 수 없는 약 부작용일지라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에 큰 차이가 생긴다.
2018-11-07 09:40 |
[약사·약국] <20> 감기약 바로 알기
연중 이맘때면 가장 관심이 가는 약은 역시 감기약이다.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7일이라는 말처럼 감기약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 원인을 치료하거나 앓는 기간을 단축하지 못한다. 감기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200종이 넘는 원인 바이러스를 상대하는 약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거금을 들여 약을 개발한다고 해도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 비싼 신약에 지갑을 열 소비자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요즘은 감기 초기에 잡으라는 약 광고도 많다. 그런 광고는 누가 나와서 말하든 과대광고다. 종합감기약에는 감기를 초기에 잡을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도 증상 완화를 위해 먹긴 먹어야 할 수 있지만 부작용을 조심해야 한다.
졸음, 구강 건조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주의사항이 은근히 많다. 특히 고혈압, 당뇨병, 전립선 비대증과 같은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조심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다.
캐나다 약국에서 일할 때 당뇨병 환자가 약국에 오면 감기약 시럽에 설탕이 들어 있을까봐 걱정하며 물어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당뇨에 감기약을 주의해야 하는 것은 감기약 시럽에 설탕이 들어있어서가 아니다.
설탕시럽이라고 해도 약으로 섭취하는 설탕의 양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럽에 설탕이 충분히 들어가면 다른 보존제가 필요 없다. 합성 보존제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설탕시럽제가 딱이다.)
주의가 필요한 것은 감기약 성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혈당이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 감기약 속의 막힌 코를 뚫어주는 비충혈제거약 성분은 혈당을 높이고, 이에 더해 말초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당뇨환자들에게 혈관계 합병증을 높일 위험이 있다.
고혈압에도 비충혈제거약이 문제가 된다. 이 약은 혈관을 수축시켜서 막힌 코를 뚫어준다. 정상 혈압인 경우, 감기약 속의 비충혈제거약 정도로는 혈압에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고혈압인 경우 감기약 때문에 혈압이 오를 수 있다.
항고혈압 약은 대체로 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압을 낮춰주는데, 이와 정반대로 혈관을 수축시키는 코 감기약이 애써 복용하는 혈압강하제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으면 코가 막혀도 참고만 살아야 한다는 건가? 그렇진 않다. 콧속에 분무하는 스프레이 타입의 비충혈제거약을 쓰면 된다. (단 3-5일 이상 연속으로 쓰면 반동성 비충혈이라는 부작용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소금물 농도를 3%로 진하게 만든 비강 분무액을도 도움이 된다. 이런 약들은 콧속에서만 주로 작용하여 혈압이나 혈당에 미치는 영향이 적고 그만큼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에게도 안전하다.
전립선 비대증이 있는 중장년 남성도 감기약을 조심해야 한다. 감기약 속에는 비충혈제거약에 더해 항히스타민제도 들어있다. 두 약이 모두 소변 배출을 방해한다. 전립선비대증으로 전립선이 요도를 막고 있어서 본래 소변이 시원치 않은데, 약으로 아예 막혀 버리면 감기약 때문에 응급실행을 경험할 수 있다.
항히스타민제 때문에 졸음이 오니까 밤에 감기약을 먹고 바로 드러눕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게 하면 비충혈제거약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자다 깰 수 있다.
끝으로 감기약 속 진통제도 조심해야 한다. 두통약, 감기약, 근육통약 등의 다양한 약에 동일한 진통제 성분(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있다. 모르고 함께 복용하면 아세트아미노펜 과잉으로 간독성 부작용을 겪을 위험이 커진다.
감기약 하나만 해도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 이렇게 많다. 복잡한 내용을 어떻게 다 기억할까 고민될 수 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 나만의 단골 약국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앓고 있는 질환, 먹고 있는 처방약, 비처방약의 종류, 부작용, 복용 방법 등을 세부적으로 아는 약사와 상담한다면 감기약을 먹는 게 나을지, 안 먹는 게 나을지, 복용한다면 어떤 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현명한 선택이 가능하다.
2018-10-24 09:40 |
[약사·약국] <19> 혼동치 말아야 할 포도와 자몽 이야기
약에 대한 잘못된 정보 중에서도 유독 잘 사라지지 않고 계속 돌고 도는 이야기가 포도와 음식의 상호작용이다. 포도 또는 포도주스와 약을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불량 지식이 왜 대한민국에서 계속 회자되는 것일까? 번역 오류 때문이다.
자몽은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 단어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용어자료집(1997)에서는 자몽을 일본어투 생활 용어로 간주하여 그레이프푸르트로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7음절에 영어단어 그대로와 다를 바 없는 그레이프프루트를 실생활에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전히 자몽을 많이 쓴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 그레이프프루트라는 말과 생소하다보니 이 단어를 보면 grape fruit, 즉 포도와 과일을 붙여써야 하는 걸 띄워쓴 걸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종종 나오는 것이다. 영어자료를 읽다가 grapefruit이 나오면 포도 과일로 생각하고는, ‘아하 포도에 대한 이야기구나’라고 짐작하는 식이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원죄는 영어권 화자들에게 있다. 그들이 애초에 자몽을 영어로 Grapefruit로 부른 게 자몽과 포도가 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에서 하나하나 떼어 마트에 진열된 자몽에서는 포도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자몽을 멀리서 보면 과일 여러 개가 나무에 달린 모습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그레이프프루트이다. 이름의 유래는 이해할만한데 문제는 이게 헷갈린다는 거다.
영어로 된 자료를 번역하다보면 누군가는 Grapefruit를 포도로 착각하여 옮기는 사람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약과 음식의 상호작용에 대한 글 중에는 자몽과 약의 상호작용을 포도와 약의 상호작용으로 잘못 쓴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면역억제제 타크로리무스 예전 약 사용설명서에는 이 약을 투여받는 동안 포도주스를 먹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포도주스가 아니라 자몽주스로 정정되었지만 아직도 인터넷에는 예전 버전의 복약정보가 돌아다닌다.
식약처마저 가끔 잘못된 자료를 내놓는다. 포도주스를 고지혈증약(스타틴 계열), 고혈압약(칼슘 채널 차단제)와 함께 복용하면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물론 번역 오류다. 포도주스가 아니라 자몽주스의 상호작용이다.
식약처에서 2011년에 발간한 자료집 <약물의 효능에 영향을 미치는 과일주스>에는 제대로 나와있다. “포도주스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인 플루비프로펜의 CYP2C9을 통한 대사를 저해한다는 일부 연구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으나, 인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서 인지할만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보고는 없으며, 국내 의약품 허가사항에서 포도주스와의 병용투여에 대한 규제사항이 현재까지는 없다.” 정확한 설명이다.
포도주스도 드물게 약과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나 종류면에서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약사로 일하는 동안 한번도 포도주스와 약의 상호작용에 대해 환자에게 주의를 준 적이 없고, 다른 약사가 그렇게 설명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몽주스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한다.
자몽 또는 자몽주스는 일부 약과 심각한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자몽 주스 속 나린긴, 나린게닌과 같은 플라보노이느 성분이 장에서 약물분해효소인 CYP3A4를 억제하여 약의 혈중 농도를 높이며, 이런 효과는 주스를 마시고 나서도 72시간까지 지속된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일부 스타틴 계열의 약을 복용 중이거나 고혈압 때문에 일부 칼슘 채널 차단약을 복용 중일 때는 자몽이나 자몽주스를 피하는 게 좋다. 이런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자몽주스를 과하게 마셨다가는 스타틴으로 인한 근육 독성과 같은 약의 부작용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참고로, 다른 과일 중에서는 라임, 포멜로의 경우도 주의가 필요하지만, 포도, 레몬, 크렌베리에는 임상적으로 유의할 만한 CYP3A4 관련 약물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없다.
반대로 펙소페나딘과 같은 일부 항히스타민제는 자몽주스 또는 오렌지주스로 인해 흡수가 저해되어 약효가 떨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포도가 아니라 자몽 즉 그레이프프루트에 대한 것이다.
2018-10-10 09:40 |
[약사·약국] <18> 코 세척 제대로 하는 법
코를 세척하는 사람 수가 부쩍 늘고 있다. 연예인들이 코 세척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TV에 여러 차례 방송된 덕분이다. 한쪽에서 얻은 인지도와 권위가 전혀 무관한 다른 분야로 확산하는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탓하기만 할 수도 없다. 약사 입장에서야 이런 대중적 유행을 기회로 삼아 코를 제대로 세척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설명하는 게 더 건설적이다.
먼저 코 세척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대답은 ‘그렇다’이다. 여름엔 더워서 고생이라면 가을부터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비강 점막을 자극하는 게 또 다른 고통이다. 콧속에서 점액이 수분을 잃어 딱딱하게 굳고 끈끈해질 때 느껴지는 뻑뻑함과 은근한 통증은 그야말로 환절기 짜증유발자다.
이럴 때는 사실 식염수를 콧속에 뿌려주기만 해도, 비강 점막을 촉촉하게 하여 자극감, 건조감을 줄여주고 코막힘, 콧물, 재채기 등의 비염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네티 팟(neti pot)이나 주사기와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콧속을 세척해주면 비강에서 딱딱하게 말라붙은 점액을 제거하고 끈끈한 점액에 수분을 더해주어 섬모에 의한 청소를 쉽게 해준다. 또한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항원물질을 씻어내어 비염 증상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비강을 세척할 때는 멸균생리식염수처럼 우리 몸의 체액 농도와 동일하게 맞추어진 용액을 쓰는 게 좋다. 맹물 대신 소금물을 쓰는 이유가 살균을 위한 것은 아니다. 0.9% 정도의 소금으로는 살균은커녕 세균 번식을 막기도 어렵다.
체액에 농도를 맞춘 생리식염수를 쓰는 건 순전히 자극을 줄이기 위함이다. 콧속에 들어가면 맹물이 훨씬 더 자극적이다. 수영장에서 코에 물 들어간 경험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코가 심하게 막혔을 때는 생리식염수보다 고농도의 소금물을 써야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약국에서 3% 농도로 맞춘 비강분무액(일반의약품)을 구해 쓸 수도 있고 또는 코 세척기에 넣는 물의 용량은 그대로 두고 코세척 전용분말을 2-3팩 넣어 농도를 진하게 해줘도 된다.
미리 제조된 멸균생리식염수를 사다 써도 되지만 자원절약과 환경보호를 생각하면 깨끗한 물에 분말을 타서 만들어 쓰는 게 낫다.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코 세척을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위장으로 들어간 물은 위산에 의한 살균을 거치지만 코로 들어간 물이 미생물에 오염될 경우는 그런 방어 장치를 거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다.
2011년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오염된 수돗물로 코 세척을 했다가 아메바 감염으로 2명이 사망하여 충격을 줬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미국 FDA는 3-5분 끓여서 미지근하게 식혀 쓰거나 또는 깨끗한 용기에 24시간까지 보관하여 쓰도록 권장한다.
물론 수돗물 품질관리가 확실한 지역에서는 수돗물을 써도 무방하고, 중공사막, 역삼투압 방식으로 정수된 물이나 끓였다가 식힌 물을 쓰는 것도 좋다. 같은 이유로 코 세척 용액을 만들 때도 넣는 분말도 그냥 식용소금이 아니라 멸균 처리된 전용분말을 써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코 세척액에 사용되는 농도의 소금으로는 미생물 오염이나 번식을 막을 수 없다. 코 세척액을 한 번에 만들어두고 나눠 쓰는 건 물론이고 약국에서 구입한 멸균생리식염수를 오래 두고 쓰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한다. 끝으로, 기구가 오염되어도 미생물 감염 위험이 있으므로 사용 뒤에는 항상 기구를 깨끗한 물로 세척한 뒤 건조한 상태로 보관해야 한다.
코 세척액이 심각한 부작용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다. 가볍게 따끔거리거나 화끈거리는 정도다. 너무 자주 쓰면 자극감이 심해질 수 있으니 아무리 시원하더라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로 사용을 제한하는 게 좋다.
또한 평소에 사용할 때는 고개를 어깨 쪽으로 눕혀서 위쪽 콧구멍에서 아래쪽 콧구멍으로 세척액이 흘러내리는 방식으로 사용하여야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거나 사레들리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물은 자극이 심하고 비강 점막 손상 위험이 있으니 상온 또는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는 게 좋다. 코 세척 하나로도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다니, 약사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수다스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2018-09-19 09:40 |
[약사·약국] <17> 술 마신 뒤 타이레놀 정말 안될까
술 마신 뒤 타이레놀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사실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믿어왔다면 글을 끝까지 읽어보자. 먼저 정답부터 공개하면 사실이 아니다. 술 마신 뒤 타이레놀을 먹어도 될 때가 있고, 약 복용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 마신 뒤 어느 시점에 약을 복용하느냐, 술을 얼마나 자주 마시느냐, 타이레놀을 얼마나 자주 복용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아세트아미노펜이라는 성분명보다 타이레놀이란 상품명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 글에서 상품명을 쓰기로 한다.)
이야기는 복잡하다. 타이레놀은 간에서 크게 두 가지 경로를 거쳐 대사, 배설된다. 약이 대사된다고 하면 어렵게 느낄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간에서 약을 청소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타이레놀은 글루쿠론산이나 황산처럼 물에 잘 녹는 물질에 결합시켜(conjugation) 소변으로 내보내거나 또는 간의 대사효소(CYP2E1)에 의해 산화시킨 다음 글루타치온을 붙여 내보낸다.
문제는 이때 산화반응으로 만들어지는 NAPQI(N-acetyl-p-benzoquinoneimine)라는 물질이 강한 독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다행히 건강한 성인이 타이레놀을 하루 최대 복용량인 4000mg 이하로 복용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95%)이 무해한 글루쿠론산, 황산 결합형으로 배설된다.
하지만 나머지 소량은 들어온 그대로 빠져나가거나 독성물질인 NAPQI로 변하는 단계를 거친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은 간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대사효소가 더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이로 인해 독성물질도 더 많이 만들어진다. 하루 세 잔 이상 술을 마시는 만성 음주자의 경우 특히 위험하다.
그런데 술을 마신 직후에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때는 반대로 독성물질이 더 적게 생성된다. 타이레놀과 알코올이 간의 대사효소를 두고 경쟁할 때 간 대사효소의 선택을 받는 것은 주로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간이 알코올 해독에 바빠 타이레놀은 거들떠보지 않는 셈이다. 술 마신 직후 타이레놀 복용은 괜찮을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술 마신 다음날 머리가 아프다고 두통약을 찾을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알코올을 제거하고 난 뒤에도 간 대사효소는 증가된 상태를 잠시 유지한다. 이때 타이레놀이 들어오면 독성물질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긴다.
술이 깨고 나서 18-24시간 동안은 이러한 일시적 독성물질 증가가 계속된다. 개인 차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소주 한 잔을 마시면 깨는 데 1시간이 걸린다고 할 때, 소주 3잔을 마시고 3-4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하루 동안은 타이레놀 복용시 독성물질이 더 많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루 3잔 이상 술 마시는 사람에게 타이레놀을 피하도록 권하는 이유다. 다른 두통약도 쓰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하루 3잔 이상 술을 마실 경우 아스피린을 비롯한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면 위장관 출혈과 같은 부작용 위험이 높아진다. 약을 복용 중일 때는 알코올 섭취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다. 몸이 약에 집중하도록 하자.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는 불평도 나올 수 있다. ‘술 마시고 타이레놀 먹어도 되나요’는 짧은 질문이지만 답은 이렇게 길고 복잡하다. 약국에서 이 모든 걸 설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지만 이 모든 세부사항을 포함하여 답하는 게 반드시 유익하지도 않다.
남성의 91.3퍼센트가 술을 마셔서 이 분야 세계 7위인 나라에서는 술과 타이레놀은 함께 하면 안 된다는 간결한 설명이 훨씬 효과적이다. 술 마신 다음날 어쩌다 한 번 두통약 한두 알을 복용하는 건 몰라도, 그런 일을 자주 반복하거나 심지어 음주 뒤에 습관적으로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술과 타이레놀은 멀리 두는 게 안전하다.
대다수가 타이레놀이란 상품명에만 익숙하고 아세트아미노펜이란 성분명을 잘 모르는 것도 문제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에만 들어있는 성분이 아니다. 종합감기약에도 들어있고, 근육통약에도 근육이완제와 함께 들어있으며, 배 아플 때 먹는 약에도 진경제와 함께 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있다. 나도 모르게 복용하는 아세트아미노펜의 양이 합하면 하루 최대량인 4000mg을 넘어가기 쉬워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친숙한 약일수록 더 잘 알아둬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2018-09-05 09:40 |
[약사·약국] <16> 알고보면 할 말이 많은 제산제 이야기
제산제는 알고 보면 가장 오래된 약이다. 6000년 전에 이미 수메르인이 우유, 페퍼민트잎, 탄산염을 소화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중 탄산염, 즉 탄산수소나트륨(베이킹 소다)이 바로 제산제 성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위산 과다로 인한 소화불량 증상을 겪는 사람은 많았나보다.
나트륨 과잉 섭취에 민감한 요즘에 와서는 베이킹 소다를 제산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북미에는 아직도 소화불량에 베이킹 소다를 사용하는 집이 꽤 있다. 하지만 베이킹 소다를 제산제 대용으로 사용하는 게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드물긴 하지만 과식 뒤에 베이킹 소다를 삼키면 위산과 반응하여 생겨나는 이산화탄소 가스로 인해 위장이 부풀어올라 터져버릴 수 있다.
(19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의 편집장 윌리엄 그레이브스가 이로 인해 죽을 뻔했다가 7번의 수술 끝에 살아남은 사건이 유명하다. 이후 1983년부터 베이킹 소다에 과식으로 배가 꽉 찼을 때는 섭취를 금하는 경고문이 붙었다.)
제산제가 지금처럼 약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건 19세기에 이르러서다. 1809년 북아일랜드의 의사 제임스 머레이 경이 수산화마그네슘 성분 제산제를 처음 발명하여 치료에 사용했다. 하지만 제산제의 발명가로 세간에 더 잘 알려진 사람은 1873년 미국에서 수산화마그네슘 제산제 특허를 받아 판매한 약사 찰스 헨리 필립스이다.
우유빛깔 액체에 걸맞는 밀크 오브 마그네시아라는 이름을 붙여 그가 시장에 내놓은 액상형 제산제는 공전의 히트 상품이 되었고, 회사는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북미에서 같은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제산제는 역사가 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하는 약이다. 하지만 제산제가 정확히 어떤 약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제산제는 위산을 중화하여 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을 경감시켜주는 약이다.
위산과다로 인한 문제가 있을 때 사용되는 다른 약들(PPI, H2 차단제)은 위산의 분비를 줄여주지만 제산제는 이미 분비된 위산과 직접 반응해서 효과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제산제는 불이 나지 않게 막아주는 약이 아니라 이미 나버린 불을 꺼주는 약이다.
제산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굳이 알고 먹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이다.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나면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공복에 제산제를 복용하면 효과가 금방 사라진다. 제산제는 위산과 맞닥뜨려 효과를 나타내는 약이므로 위 안에 머무르는 동안에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식후에는 음식이 소화를 위해 위장에 오래 머문다. 음식과 함께 제산제도 천천히 내려가므로, 제산제의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된다. 식후 1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제산제의 효과가 3시간까지 지속된다. (공복에 속이 쓰릴 때는 어떡하냐고? 그때는 제산제가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 빈속에 속이 쓰리다는 건 배고프단 이야기다.)
술 마시기 전에 제산제를 미리 먹으면 덜 취한다는 이야기도 잘못된 음주 상식이다. 제산제는 위벽에 코팅을 해주는 약이 아니라 위산과 직접 반응해서 중화시키는 약이다. 게다가 제산제를 음주 전에 미리 먹으면 장으로 금방 내려가 버린다. 술 마신 다음날 쓰린 속을 가라앉히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술 마시기 전에 미리 제산제를 복용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제산제 속 알루미늄 성분이 체내로 흡수될까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제산제는 전신으로 흡수되는 비율이 낮다. 제산제 속 칼슘은 90%가 그대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10%가 전신에 흡수된다.
마그네슘은 15~30%, 알루미늄은 17~30%가 흡수되지만 이마저도 신장으로 배출된다. 신장기능이 정상인 사람에게 제산제 때문에 알루미늄이 축적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신부전 또는 신장기능이 저하된 사람은 제산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약을 고를 때에도 약사와 상담하는 게 안전하다.
제산제와 약물 상호작용으로 악명 높은 약이기도 하다. 제산제가 다른 약성분의 흡수를 방해하는 경우, 복용 간격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2주 동안 지속적으로 약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쓰림 또는 소화불량이 증상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친숙한 약일수록 우리가 잘 모르는 알아두면 유용한 지식이 참 많다.
2018-08-22 09:40 |
[약사·약국] <15> 혈압약 불순물 사태 뒤돌아보기
지난 7월 초 떠들썩했던 뉴스의 헤드라인을 다시 보자. 중국 원료의약품 제조사인 제지앙 화하이에서 공급한 발사르탄 혈압약 성분에 불순물이 검출되어 유럽의약품청(EMA)이 검토 중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 성분이 함유된 혈압약을 리콜중이다. 유럽의약품청이 내놓은 보도 자료의 첫머리에 발암물질이란 말은 없다. 식약처에서 낸 보도자료 제목도 비슷하다. “식약처, 불순물 함유 우려 고혈압 치료제 잠정 판매 중지”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아야 하는 매체들의 관점에서 불순물이라는 단어는 수위가 약하다. 최대한 충격적인 표현을 헤드라인으로 끌어내는 게 좋다. 결국 불순물 혈압약이라는 말 대신 ‘발암물질’ 혈압약이 뉴스를 뒤덮었다. 사실 자체는 틀림이 없다. 제지앙화하이의 발표에 따르면 발사르탄 원료의약품 제조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이란 불순물이 생성됐다. NDMA는 2A군 발암물질이 맞다. 그런데 막상 유럽 의약청에서 7월 5일 처음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환자들에게 “다음번에 처방약을 타러 가면 약이 다른 발사르탄 의약품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캐나다에서는 7월 10일, 미국에서는 7월 13일에 해당 불순물 함유 제품 리콜 조치를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혈압약에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뉴스가 뜬 것치고는 대응이 덜 긴박해 보인다. 이유는 7월 19일 유럽의약품청에서 추가 발표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불순물이 발견된 항고혈압약을 복용하더라도 즉각적 위험은 없다는 것이다. 약을 복용 중이던 사람이 갑자기 약을 끊으면 겪게 될 위험이 훨씬 더 크다. 심장 발작이나 뇌졸중을 겪은 뒤에 재발 방지를 위해 약을 복용 중인 사람들이 약을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 각국 정부에서 문제의 처방약을 스스로 끊지 말고 우선 병의원이나 약국을 방문하도록 권고한 이유다. 이번에 검출된 NDMA 자체는 생활상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질이다. 수돗물 염소 소독 과정에서 생성될 수도 있고, 햄, 소시지와 같은 가공육, 염장생선이나 젓갈에도 들어있다. 맥주, 위스키처럼 몰트를 써서 만든 주류에서도 검출되고, 김치에도 들어있다. 음식 속의 알킬아민이 위산과 반응하여 NDMA를 형성하기도 한다. 고농도로 노출되면 발암 위험이 있으나 일상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NDMA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이다. 식품 속 NDMA의 함량이 이미 낮은 수준이지만 더욱 낮게 만들기 위한 저감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가 된 혈압약 원료 속 불순물로 검출된 NDMA의 함량이 얼마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 의약청(EMA)에서 조사 중이다. 대한민국 식약처도 제지앙화하이의 발사르탄에 대해 발암 가능물질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의 검출량과 인체 위해성 여부를 평가·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식약처에 불순물 분석 방법이 없다는 식의 오보가 있었지만 NDMA 성분 분석 방법에 대한 검증(validation)이 필요했을 뿐이다. 식약처는 지난 7월 18일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통해 NDMA 시험방법에 대한 검증을 완료하고 분석에 들어갔다. 그동안 해당 약을 복용한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었는가에 대한 과학적 결론을 내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보도된 내용을 참고하면, 혈압약 속 NDMA의 양은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NDMA 양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번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직접 연구한 결과는 없지만, 발사르탄과 같은 계열의 ARB 혈압약을 복용할 경우 암 위험이 증가하는지에 대한 14만 8334명을 대상으로 한 19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결과 암 발병률에 위약과 차이가 없었다. 뉴스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의약품청에서 내놓은 헤드라인은 정확했다. 각국 정부에서 문제의 원료를 쓴 혈압약 리콜에 들어간?것은 약에서 발견되지 말아야 할 '불순물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들어있는 양이나 그로 인한 위해성의 정도에 관계없이, 들어있어서는 안될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으니 리콜 조치가 필요하다. 실제 위해성을 크게 우려해서라기보다 장기적으로 불필요한 노출을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이다. 그렇다. 건강 뉴스는 헤드라인만 읽지 말고 본문을 읽어야, 기왕이면 제대로 쓴 기사를 읽어야 유익하다. 사실 모든 뉴스가 그렇다.
2018-08-08 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