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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7> 여자들은 좋겠다
지난 5월 10여년의 아파트 살이를 청산하고 자곡동 옛터에 새 집을 짓고 이사하였다. 이삿짐을 싸면서 아내에게 제발 이것 저것 좀 버리고 가자고 애원(?)해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다 필요한 것이라 버릴 수 없다’고 퇴짜를 놓는다.
우리 집에는 청소도 잘 안 하면서 청소 도구가 대여섯 개나 되고, 요리도 별로 안 하면서 조리 도구와 그릇이 부엌 가득하다. 옷은 옷장이 모자라 여기 저기 걸려 있고 구두는 신발장이 모자라 복도에 쌓여 있다.
선글라스와 모자도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옷이건 뭐건 그저 서너 개씩만 있으면 족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여자들은 대개 다 그렇다고 한다. 여자들은 70이 넘어서도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럽다. 나이 먹어서도 물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물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우월하다. 우선 여자의 평균 수명이 남자보다 길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남녀간의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고루한(?) 남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자가 더 우수하다는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쇼핑 (홈 쇼핑 포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백화점에도 잘 가고 남대문 시장에도 잘 간다. 무언가 좀 싸게 사와 가지고는 ‘돈 벌었다’고 자랑이다.
사지 않는 것이 가장 돈을 버는 것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반면에 남자들은 쇼핑을 싫어한다. 부인 따라 시장 가는 걸 가장 싫어한다. 내 옷을 사준다고 해도 싫어한다. 오랜 시간을 소비 한 후 결국은 아내의 취향대로 내 옷이 선택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여자들은 TV 연속극 시청을 즐긴다. 그러나 남자들은 뉴스나 스포츠 중계는 보지만 연속극은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이면 여자들은 연속극 시청을 즐기지만 남자들은 심심해서 몸을 비튼다.
어느 교육학자는 ‘남자가 연속극을 잘 안 보는 이유는 섬세한 감정의 기복 등 연속극의 흐름을 이해할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그저 단순하게 ‘몇 대 몇’ 으로 승부가 나는 축구 같은 스포츠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 연속극은 맨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지만, 여자들에게는 ‘지금 중요한 순간이니 조용히 해’라고 할 정도로 매회의 내용이 명백하게 다른 모양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잔소리를 잘 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 잔소리 말고 수다를 떠는 능력면에서도 남자는 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여자들끼리 모여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눠 놓고서도 헤어질 때는 "자세한 이야기는 카톡으로 하자”고 하는 여자도 있다.
화제도 다양하다. 남자들에게는 깜도 안 되는 주제를 가지고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집 앞 카페는 아침부터 낮까지 젊은 엄마들로 붐빈다. 길 건너 어린이 집에 아이를 맡겨 놓은 엄마들이 거기에서 모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사교성도 뛰어나다. 아침 저녁 산보 길에 두세 명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은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은 누가 소개해 주지 않으면 말을 잘 걸지 못 한다. 그래서 동네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도 온통 여자들뿐이다.
할머니들은 거기서 밥도 해 먹고 화투도 치며 논다. 그러나 영감님들은 눈에 띠지 않는다. 남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억지로 가 봤자 십중팔구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조차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사실 남자들의 사교성 없음은 고령 사회의 큰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의 우월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할아버지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할아버지는 왜 있는 거지?’ 묻는 손자가 있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까?
“모든 면에서 우월한 여성들이시여, 부디 남성들, 특히 늙은 남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의 바람이다.
2017-07-0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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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6> 명예교수들의 현장 체험
지난 5월 10일, 일락회(一樂會)라는 모임을 통해 JW중외제약의 당진 공장을 견학하였다. 일락회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전국 약학대학 명예교수들의 모임인데, 중앙대 손동헌 명예교수님의 뒤를 이어 지금은 서울대의 이은방 명예교수님이 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은 140명 정도이며, 주요 사업으로 봄 가을로 연 2회 정도 제약관련 산업 현장을 견학하고 1-2회 뉴스레터도 발간하고 있다.
이번 춘계 견학에는 일락회 회원 23분(남자 10명, 여자 13명)이 참가하였다.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0일 아침 9시 30분에 서울 강남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2번 출구에 모여 회사가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10시 40분경 공장에 도착, 11시까지 회사를 소개하는 홍보영상을 관람한 후 12시까지 수액제 생산 공장을 견학하였다.
참가자들은 모두 엄청난 규모와 최신식 설비에 감탄하였다. 공장 견학을 마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당진 포구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회 정식을 먹으며 담소 하였다. 이어 오후 1시에 버스를 타고 심훈 기념관과 솔뫼 성지를 둘러 보았다. 이 때 회사가 주선해 준 문화관광해설사의 상세한 해설이 특히 유익하였다.
구경을 마치고 3시 40분쯤 다시 버스를 타고 양재역으로 돌아오니 오후 5시 30분경이 되었다. 다른 때의 견학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매 견학 때마다 회사 측의 배려(교통편, 식사 등 제공)로 참가자들은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견학 일이 마치 소풍날처럼 기다려진다고 한다.
견학을 갈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제약 기술이 어느덧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발전해 있을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분들이 적지 않다.
문득 약학대학의 현직 교수들은 이런 발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현장에 가서 보지 않으면 그 흐름을 놓칠 정도로 빠르기 발전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제약 기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명예교수들이 현장의 발전 흐름을 놓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현직에서 한발 물러선 퇴직 교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직 교수들을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교수가 흐름을 모르면 학생 교육에 대한 방향과 수준에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잘못 가르칠 우려가 크다는 말이다.
약학의 현장은 제약 공장뿐이 아니다. 제약 회사 내에도 연구소, 개발부, 국내외영업 부서 등이 다 현장이다. 또 병원약제부, 개업약국, 의약품 안전관리(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사회약학 분야(의약품심사평가원 등) 등도 다 현장이다.
학생들에게 앞으로 약학이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약대 교수들이 이런 현장에 대한 최소한의 현장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노파심 같지만 특히 최근의 약학대학 교수들의 현장 체험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약학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타학과 출신 약대 교수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인다. 요즈음의 교수들은 당장 코 앞에 닥친 연구가 바빠서 현장 체험의 필요성을 느낄 경황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교육은 물론이고 교수의 연구 자체도 점점 현실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좋은 강의와 연구를 위해서도 현장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한다. 각 약학대학마다 모든 교수들의 현장 체험을 의무화, 정례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즉 모든 교수들이 매년 약학의 각 현장에서 적어도 일주일 정도씩 연수를 받게 제도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마침 약학계에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약교협)가 있고, 그 산하에 약학교육평가원(약평원)도 있다. 두 단체가 힘을 모으면 모든 현직 약대 교수들의 현장 체험을 정례화, 의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뜻만 있으면 길은 얼마든지 열릴 것이다.
일락회 견학을 주선하며 느낀 노파심(老婆心)의 일단을 피력해 보았다.
2017-06-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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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5> 제6회 신풍호월 학술상
지난 5월 8일 오후 5시 제6회 신풍호월(新豊湖月)학술상 시상식이 서울대학교 호암 교수회관 2층 마로니에 홀에서 개최되었다.
이 상은 신풍제약(新豊製藥)의 창업주인 송암 고 장용택 회장(서울약대 13회 졸업, 작년 2월 28일 작고)이 선친이신 호월(湖月) 고 장창보 회장의 숭고한 의약보국(醫藥報國)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풍제약 창립 50주년인 2012년에 제정한 상이다.
이 상은 매년 신약 개발 및 약학 연구에 공로가 있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연구자를 수상자로 선정하여 시상(상금 3000만원)해 오고 있다.
이 상은 지난 5회까지는 매년 1명씩에게 시상하였는데, 올 해에는 특이하게 2명이 시상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기업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뜻 깊은 상을 제정하여 시상해 오고 있는 신풍제약에 약학인의 한 사람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세상에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 날 고 장용택 회장의 아들인 신풍제약의 장원준 사장은 시상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희망찬 오월을 맞이하여 ‘제6회 신풍호월 학술상’ 시상식을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오늘 시상식 자리에 참석해주신, 신희영 부총장님과 총동창회 박승희 부회장님, 그리고 내외 귀빈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오늘 수상자로 선정되신 이상국 교수님과 이호영 교수님의 연구업적을 높이 치하하며,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엄정하고 공정한 심사절차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해 주신 서울대 약대 이봉진 학장님과 심사위원회에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연구역량이 세계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연구결과와 논문 등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내제약사들의 신약개발 과정을 보면 다양한 산학협력을 통해 목표를 공유하고 공동 개발해 나가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대 약대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가 제약산업으로 연계되어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혁신 신약의 개발을 통해 인류 건강의 증진에도 크게 기여 할 것으로 믿습니다. 송암 장용택회장님께서 ‘신풍 호월 학술상’을 제정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연장과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신약개발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신풍 호월 학술상’이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만개한 봄 꽃처럼 그 기운이 더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중략) 끝으로 재단법인 관악회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무궁한 발전과 모든 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이날 이상국 교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수상 소감을 발표하였다. “(전략) 오늘 이상은 제가 지금까지 받은 상 중에서 제일 큰 상입니다.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상들은 대개 그 동안의 업적이나 성취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주어지는데, 이와 달리 이 상에는 미래에 대한 당부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앞으로 신약개발에 대하여 계속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 상에는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풍제약을 일구어 오신 창업주를 비롯한 회사의 역사와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여 이 상을 수상하며 신약개발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됩니다. (후략)”
또 다른 수상자인 이호영 교수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발표하였다. “우선 이런 큰 상을 받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제가 귀국한 지 이제 6년이 지났는데 이 상이 귀국 후 처음 받는 상이라 제게 더욱 의미가 큽니다. (중략). 무엇보다 별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제 지도를 따라 연구에 매진해 온 저희 연구실의 학생 및 연구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큰 상을 받는 오늘이 마침 어버이날인데 이번 수상을 통해 어머니께 작은 효도를 해 드린 것 같아 더욱 기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수상자들을 축하드리며 신풍제약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린다.
2017-06-07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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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4> 서울대 약대생들의 한국전쟁 참전
1950년 6월 초 대한민국 정부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가는 바람에 부득이 9•28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30일에 편입 조치가 시행되었다. 동시에 문교부는 한구동(韓龜東) 교수를 국립 서울 약대의 임시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서울대학교에 편입된 약학대학이 한창 개교 준비에 바쁠 때에 전세(戰勢)가 다시 역전되어 1951년 1월 약학대학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1•4후퇴). 이 때 한구동 교수가 꼼꼼히 실험기구와 책들을 챙겨 운반한 덕분에 약학대학은 부산 피난 시절에도 비교적 충실한 실험실습 교육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에는 일부 서울대 약대 재학생들도 참전하였다. 송득규(宋得奎, 1924년 5월 19일생, 함북)는 1948년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전쟁 당시 약학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는 1950년 7월 육군 제3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가 1950년 10월 3일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약학대학의 『단기 4283년 학생사진첩』에 54번 학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위패(12-7-043)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으며, 그의 이름은 전쟁 기념관의 전사자 명비(銘碑, 025-ㄱ-036)에 새겨져 있다.
박원종(朴源鍾, 1931년 5월 18일생, 경남 진주)은 진주중학교를 마치고 1950년 서울약학대학에 입학하여 당시 1학년생이었다. 그는 진주의 고위 행정관료였던 아버지가 인민재판을 통해 피해를 입자 전쟁에 참전할 뜻을 밝히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이상섭 명예교수(서울대 8회)의 회고이다.
약학대학생들 중에도 참전한 사람이 꽤 있었어요. 박원종은 자기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고 보병학교에 지원을 했을 거에요. 보병학교라는 것은 단기장교 양성기관이에요. 정규 사관학교는 4년이 걸리는데 보병학교는 입교해서 몇 주 교육시키고는 바로 소위로 임관(任官)해서 전선(戰線)으로 내보냈어요.
그래서 그때 육군 소위(小尉)로 임관된 사람들을 소모품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징병된 사병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서 소대장이 앞장서지 않으면 전투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대장인 소위들이 앞장을 섰다가 총알받이가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박원종은 제6사단 2연대 소속 육군 소위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18일 가평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이름과 사진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단기 4287년 학생사진첩』에 35번 학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정부는 그를 국립서울현충원(33-1512)에 안장하였고, 전쟁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전사자 명비(銘碑, 116-ㅇ-055)에 새겨 놓았다.
또한 1949년 입학하여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2학년생이었던 서찬식(徐燦植, 1931년 1월 2일생, 대전)은 제9사단 육군 중위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1951년 5월 9일 육군 제3이동외과병원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그를 국립서울현충원(33-1008)에 안장하고, 전쟁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전사자 명비(120-ㅂ-091)에 새겨 놓았다 [이상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참조].
다음 달은 보훈(報勳)의 달이다. 모든 참전 용사의 뜻이 다 고귀하지만, 특히 당시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 입대하여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약대 선배들의 높은 충절은 아무리 높이 기려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의 신원(身元) 파악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오늘 모습이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정정) 약춘 222에 소개한 ‘압착식물표본’은 고 도봉섭 교수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경성약전의 일본인 교수(아마도 구다니)가 광복에 의해 쫓겨가면서 놓고 간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 이 책을 도교수의 회기동 자택 마루 밑에 숨겨 두고 피난을 갔다 와 보니 누군가가 집어가서 벽지 등으로 사용하려고 하기에 놀란 도교수의 부인이 돈을 주고 재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책의 표지 등이 일부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상, 도교수의 며느리인 양제경 선생의 회고임).
2017-05-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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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3> 그건 약대생들이었다! 57년만에 바로 잡은 4.19 기사
2017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A12면에는 ‘4.19 시위 선두에 선 건 의대생 아닌 약대생들’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가 실렸다(http://naver.me/G1ecylNx).
이 기사에는 ‘19일 4.19혁명 57주년, 당시 서울대 약학과 70여명, 경무대 철문 앞까지 대열 이끌어, 흰색 가운 입은 탓에 의대생 오인’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었다.
내용은 57년전인 1960년 4월 19일, 당시 서울대 약대 4학년 학생이던 김한주씨와 박정식씨(79세)가 서울대 약대생들과 함께 참여한 4.19시위에 관한 회고이었다.
이번 기사는 4.19 시위에 참가했던 서울대 약대 선배들 (1957~1960년 입학생들, 15-18회 졸업생들)에게는 물론 나처럼 약학사(藥學史)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감격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는 잘못된 기사에 대한 무려 57년 만의 정정(訂正)이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20일, 동아일보는 석간(夕刊)에 19일 오전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를 하는 서울 약대생들의 사진을 싣고 그 밑에 ‘백색 까운을 입고 데모하는 의대생들’이라고 잘못된 설명을 달았다. 이 오보(誤報)가 드디어 바로잡힌 것이니 어찌 감격적이지 않겠는가.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 오보(誤報)를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백년사 (2016)’를 편찬하면서 시위에 참가하였던 선배들의 기억을 빌려 동아일보 사진 속의 인물 한 명 한 명에 약대생의 실명(實名)을 붙여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병년 선배 (17회, 당시 2학년)는 동아일보로부터 사진 원본을 구해 주었고, 홍청일, 박정식 선배 (15회) 등은 사진 속 인물의 실명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의 진행 코스 등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증언해 주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신문에 실린 시위 사진의 주인공들이 서울약대생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상기 ‘백년사’ 참조).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동아일보로 하여금 당시의 오보(誤報)에 대한 ‘정정’을 받느냐 이었다.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동아일보 측의 정정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정 요청 방법을 몰라 고심만 하고 있을 때에 서울대 가산약학역사관장인 박정일 교수가 서울대에 출입하는 동아일보 기자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4월 13일(목) 12시 동아일보 김동혁 기자와 박정식, 김한주 선배의 역사적인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장소는 약학역사관 자료실이었다. 두 선배는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고와 인터뷰에 임하였다.
특히 제주시에 거주하는 김한주 선배는 57년만에 역사가 바로 잡힌다는 설레임에 당일 아침 급거 상경하였다. 그는 ‘민주혁명의 기록 (1960년 6월, 동아일보사)’이라는 화보와 ‘월간 사상계(1960년 6월호)’의 권내 부록인 ‘피의 화요일’ 이라는 화보를 갖고 상경하였다. 이들 자료는 현재 약학역사관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4.19 시위에는 서울대 약대 외에 성균관대 약대 등의 약대 학생들도 가운을 입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대 약대생들의 시위에 관한 기록이나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2017-05-1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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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2> 서울대 약학역사관에 가시면 ‘압착 식물도감’을 보세요
2015년 6월 12일에 개관한 서울대학교의 가산약학역사관에는 100여년에 이르는 서울대약대의 역사 정리되어 있다. 역사관을 방문하고 서명을 남긴 사람은 지금까지 대략 760명에 이른다. 물론 서명을 남기지 않고 관람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득 역사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어떤 전시물에 흥미를 느꼈을까 궁금해 졌다. 물론 전시된 자료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압착 식물도감(植物圖鑑)인 Physiotypia Plantarum Austriacarum DER NATURSELBSTDRUCK이란 책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보면 우선 그 크기(가로 39, 세로 55.5, 두께 5 cm 정도)에 압도된다. 이는 일반적인 4*6배판(19.4 x 26.4) 넓이의 4.2배가 넘는 크기이다. 두 번째로는 이 책의 출판 년도에 놀라게 된다. 이 책은 1855~6년 오스트리아 왕조의 비엔나에서 총 5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말기인 철종 시대에 해당된다.
그 시기에 이처럼 멋진 식물도감을 출판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놀라운 것은 이 책의 인쇄 방법이다. 설명문(http://www.georgeglazer.com/prints/nathist/botanical/sepiaferns-main.html)을 보면 이 책은 식물 표본을 수증기를 이용하여 원형 그대로 압착한 다음 이를 동판(銅板)에 음각(陰刻)하여 세피아(sepia, 적갈색) 잉크로 인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쇄 기법을 Nature-printing 기법이라고 한다.
이 책의 각 권에는 오늘날의 분류법에 따라 분류된 식물 표본 100종이 인쇄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면 마치 각 식물이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지면(紙面) 위에 압착되어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각 식물의 선(線)이 과학적으로 정교할 뿐만 아니라 식물의 자연 그대로의 예술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와 같은 양치류(羊齒類) 표본 책자는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하는 장식품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도봉섭 탄생 백주년 기념자료집(2003년 10월, 가산약학역사관 소장)”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또 약사공론 1972년 6월 19일자 13면에도 이 책과 관련하여 동덕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의 고 도상학 교수(생약학)가 언급한 내용이 실려 있다.
도상학 교수는 그 기사에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의 식물학 교수였던 도봉섭 교수가 이 책을 고가(高價)로 구입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도상학 교수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아 20여년째 보존하고 있던 이 책은 그가 작고한 이후인 2015년 10월 26일 서울대 약대(학장 이봉진)에 기증되었다. 이날 열린 ‘도봉섭 교수 관련 자료 기증식(서울대 약대 21동 교수회의실)’에서는 이 책 외에 도봉섭 교수가 소장했던 76여점(생약학 분야 단행본, 논문 자료, 식물도감 등)의 자료도 함께 기증되었다.
도봉섭 교수의 장녀인 도정인, 차녀인 도정애(이대 약대 명예교수, 생약학), 자부(고 도상학 교수의 부인)인 양제경 (약사), 장손인 도의종 선생 등이 이 기증식에 참석하였다.
사실 이보다 14년 전인 2001년 6월 19일에도 도봉섭 교수의 소장 자료가 서울대 약대(학장 천문우)에 기증된 바 있다. 이 때 도정애 교수는 조선약학회지, 조선약학잡지, 조선약학석보, 일본약학잡지, 조선박물학회지 및 80여권의 책자를 기증하였다.
아무쪼록 이러한 자료들의 가치가 앞으로 후학들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2017-04-19 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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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1> 일본 교수 정년퇴임 기념행사 참관기
지난3월 8~11일 일본 교토(京都)대학 약제학 전공의 하시다(橋田 充)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국제심포지엄 및 퇴임 기념 축하회에 참석하였다. 내게주어진 역할은 심포지엄 advisor 및 좌장이었다. 감사하게도여비와 숙식비를 제공받았다. 오늘은 그 행사 참관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8일(수) 저녁에는 교토역에 붙어 있는 그란비아 호텔에서 심포지엄의 좌장 및 연자 들의 저녁 식사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는 미국 UCSF의 베네트(Leslie Z. Benet), 캔사스 대학의 보차드(Ronald T.Borchardt), 그리고 전 FDA의 샤(VinoidP. Shah) 박사 등 4명이, 홍콩대학의빈센트 리(Vincent H.L. Lee) 교수, 그리고 내가 초청을 받았다.
둘째 날인 9일(목)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포지엄이 열렸다. 장소는 Kyoto Research Park 내 4호관이었다. 첫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과 약과학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빈센트 리, 하시다, 샤 박사 등이 강연하였다. 점심 시간에는 2개의 별도 방에서 유료 런천(luncheon) 세미나가 열렸다. 나를 포함한 연자와 좌장들은 2층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 식사 후 열린 두 번째 세션에서는 ‘생물약제학과 약물동태학’을 주제로 ‘세포배양과 약과학(보차드)’ 등 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어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후 세 번째 세션이 열렸는데, 여기에서는폴리머릭 미셀, 엑소좀, 나노메디슨 등 ‘약물송달과 물질과학’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뒤 5시부터 1시간동안 우리나라의 3편을 포함한 총 37편의 연구 결과가 2층 로비에서 포스터로 발표되었다.
6시 30분부터는 옆 건물에서 2시간 동안 참석자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리셉션은 영어로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초밥 등을 서서 먹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자리에서 나는 “옛날에는 나이 먹은 노교수들이 정년 퇴임하더니, 요즘에는 하시다 교수처럼 젊은 교수들이 정년퇴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나는 1991년 한국의 약학회에서 하시다 교수를 처음 만난 이후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라고 덕담을 하였다. 나 이외에 보차드, 빈센트 리, 리켄(理硏)의 스기야마 교수 등도 축사를 하였다.
셋째 날인 10일(금)에는 아침 9시부터 열린 네 번째 세션에서는 ‘약물송달기술을 이용한 재생 치료(타바타)’, ‘세포시트(cell sheet) 조직공학 및 임상적용(오카노)’, ‘스마트 마이크로 머신의 생물의료에의 응용(고니시)’ 등이 큰 관심을 끌었다.
20분간의 커피 브레이크 뒤에 열린 마지막 세션에서는 ‘약과학의 최전선(베네트)’, ‘약물대사와수송체 관련 과학(스기야마)’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나는 일본 교수와 함께 이 세션의 좌장을 맡았다. 이날 낮 12시 10분, 230여명이 등록한 이 심포지엄의 막이 내렸다.
그날 저녁 6시, 정년퇴직기념축하회가 그란비아 호텔에서 열렸다. 하시다 교수 부부(부인은기모노 복장)가 금색 병풍이 펼쳐져 있는 단상 우측에 나란히 앉았다. 첫 순서는 은사인 무라니시 명예교수의 축사이었다.
그가 단상으로 올라오자, 하시다 부부는 일어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무라니시 교수는하시다 교수의 옛날 대학원 생활 등을 회고 하였다. 이어 베네트 교수와 다나베미쯔비시 제약회사 회장이 비슷한 성격의 축사를 하였다. 뒤이어 야지마 명예교수의 건배사가 있은 다음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참석자들은 식사가 시작되자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참석자 자리에는 하시다 교수의 정년퇴직 기념지(記念誌)가 놓여 있었다. 그 책에는 하시다 교수의 연구 업적 외에 나를 비롯한 12명(일본인 1명)의 축하 편지와 추억의 사진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다시 4명의 축사와 연구실 대표의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 그리고 하시다 교수의 짧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3일 간에 걸친 퇴임 기념 행사가 모두 끝났다.
2017-04-0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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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20> 입학식 특강
지난 3월 2일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 오후, 나는 약학대학 신입생들에게 ‘어떤 자세로 대학 생활을 시작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올해로 3년째 하는 특강인데, 지난 두 해에는 ‘21세기는 맞춤약학 시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었다.
참고로 올해 약대 신입생 68명 중 38명이 남학생으로, 이와 같은 남초(男超) 현상은 여초(女超) 현상이 일어난 1979년 이래 38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특강의 내용은 그 동안 ‘약창춘추’를 통해 밝혀 온 나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었다. 예컨대 ‘나의 오늘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고 정직하며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인생은 미스터리이다, 복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의 처분에 달렸다’, ‘참된 의미의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1등이 가장 나쁜 것이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사다리를 착실히 오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인생을 좀 길게 보라’, ‘친구를 잘 사귀어라’, ‘남의 의견을 경청하라’, ‘솔직한 지적은 관계를 해친다’, ‘인생의 가치는 사랑에 있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근사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였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노교수의 잔소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랑과 정성을 다 해 강의하였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음날(3월 3일)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서울대 단어 지워라, 성낙인 총장의 쓴 소리, 입학식서 ‘특권의식 비판’ 축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성 총장님은 3월 2일의 입학식에서 ‘오늘 이후 서울대학교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입학식이 여러분 인생의 최고의 날로 그치고 그 이후는 오늘보다 못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그간 우리나라 최고의 파워 엘리트로 각계각층에서 활약해 왔지만 최근 그들의 모습은 부끄러운 측면이 많다. 서울대란 이름에 도취되면 오만하고 특권의식에 빠져 출세를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고 한다.
나는 총장님의 축사 내용이 내가 그날 오후 약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 내용과 상당 부분 같은데 놀랐다. 예컨대 나는 ‘남을 딛고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고 완벽한 실패이다. 갑(甲)질은 실패한 사람의 행패에 다름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연약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는가가 참된 성공의 한 지표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부분이 총장님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총장님처럼 최근 매스컴에 자주 회자되는 서울대 동문들의 추태(?)를 떠 올리며 이 말을 했었다.
나는 그날 서울대 학생이라면 시험칠 때 커닝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직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서울대는 정직, 겸손, 성실, 환경, 교통, 질서, 예의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 갈 바 이상향(유토피아)을 미리 보여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국민들은 서울대 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서울대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세금의 지원을 받고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서 남을 딛고 일어서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서울대 출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런 서울대인들의 자랑질(?)을 용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서울대 출신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한다.
서울대를 예로 들었지만 세상의 모든 ‘잘 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잘 나감이 주변의 수많은 ‘을(乙)’들의 자의반 타의반 협조(?)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을(乙)들과 더불어 더욱 겸손, 성실, 정직하게 살기로 다짐하여야 한다.
지금 나라는 촛불과 태극기로 혼돈의 와중이다. 이런 때일수록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부터 회개하여야 한다. “돌이키면(회개) 살아나리라”란 우리 교회의 금년도 구호는 “돌이키지 않으면 죽으리라”라는 절박함을 경고하고 있다.
2017-03-22 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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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9> ‘한국제약기술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축하드리며
지난 2월 15일 안양에서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하 교육원)의 창립 10주년 기념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전문가 20여명이 모여 지난 10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자축하며 식사를 나누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축하의 말씀을 드렸다. 이 기념식은 우리나라 제약기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벤트이기에 그 때 드린 말씀을 이하에 옮겨보기로 한다. (이하 축사 전재)
제약기술•GMP 전문교육기관인 ‘한국제약기술교육원’이 2007년 창립된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아울러 교육원의 창립과 동시에 창간된 GMP•제약기술 전문지인 ‘팜텍’이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것도 축하 드립니다.
이 교육원은 창립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강의를 통한 강의(講義) 교육과 실습(實習) 교육, 그리고 팜텍과 같은 정기 간행물 및 서적 발간을 통한 지상(紙上) 교육을 실시하여 왔습니다.
교육원은 지난 10년 동안 212회 426일에 걸쳐 6,731명에게 제약산업 전 기술분야(297 과목)에 대한 강의(실습 27회 포함)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초빙된 전문가 강사만도 205인에 이릅니다. 이 강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제약기술인들의 큰 호응을 받아 지난해에는 역대 최대의 인원(940명)이 수강을 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원은 한국PDA와 공동으로 GMP 자료집인 「ICH Q7 Q&A - 원료의약품 GMP 해설서」(2012) 및 「Global GMP Q&A - 국제기구•주요국 GMP 해설서」(2015)를 발간하였으며, 한편으로 10년간 연 4회에 걸쳐 총 36권(Vol. 10, No.1)의 「팜텍」을 발간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에서는 30여 년 전부터 ‘팜테크재팬’이라는 GMP•제약기술 전문지가 월간으로 발간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팜테크재팬의 높은 수준에 감탄하며 부러워만 하고 있을 때에, 백우현 박사님(한국제약기술교육원 원장•한국PDA 회장)은 과감하게 팜텍을 창간하셨습니다. 제약기술서 불모의 이 땅에 개척자의 사명감으로 밀알 하나를 심은 것입니다.
그 동안 팜텍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내 전문가를 필진(筆陣)으로 적극 발굴하여 우리나라의 제약기술 향상에 필요한 글들을 집필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팜텍은 이제 외국 잡지의 논문을 번역해 싣는 모방잡지의 수준을 뛰어 넘어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독창성 있는 논문을 싣는 품격 있는 잡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제약기술의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팜텍이라는 우리 나름의 제약기술•GMP 잡지를 갖게 된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백우현 박사님을 비롯한 편집위원님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일입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2011년에는 ‘의약용어사전(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그 때 저는 축사를 통하여 “이 사전이 발간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나라의 체면(體面)이 서게 되었다”라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백우현 박사님은 팜텍의 발간을 통하여 우리나라 제약기술계의 체면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나라 식약처는 2014년 PIC/S 가입에 이어 작년에 ICH 회원국이 되는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러한 쾌거를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우리나라 제약기술 및 의약품 안전관리 기술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제약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오신 제약기술자 여러분들과 팜텍 및 교육원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약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 교육원과 팜텍이 더욱 더 질과 양의 면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지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의약품 안전관리 선진국이 되어야 할 우리나라의 제약기술계가 마땅히 품어야 할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교육원 및 팜텍의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2017-03-08 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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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8> 심양약과대학을 보기 전에는 약학대학의 규모를 논하지 말라
작년 12월 (18-21) 중국 요녕성 본계시(本溪市, Benxi city)에 있는 심양약과대학(瀋陽藥科大學, Shenynag Pharmaceutical University)을 방문하였다. 이 대학은 원래 심양시에 있었는데, 본계시가 야심차게 ‘약의 수도(藥都, China Medicine Capital)’를 시(市)의 비전으로 선포하면서 최근 20km 떨어진 현재의 연구단지 안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대학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 1931년 강서성 루이진(서금, 瑞金)에 설립된 중국공농홍군 위생학교(中國工農紅軍 衛生學校)가 그 기원이라고 한다.
이 대학을 보면 누구나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이 대학은 3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계 캠퍼스만 해도 부지가 120.35만㎡, 건축면적이 51.2만㎡나 된다. 여기에 본부 캠퍼스와 철서(鐵西) 캠퍼스까지 합치면 총 부지면적은 143.5만㎡, 건축면적은 70.8만㎡에 이른다. 약대가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411만㎡)의 1/3 이상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조직도 놀랍다. 이 대학은 약학과 관련된 모든 학문을 교육하는 종합대학(university)으로 약학대학(藥學院), 제약공정대학(製藥工程學院), 중약대학(中藥學院), 생명과학 및 생물제약대학(生命科學 及 生物製藥學院), 공상관리대학(工商管理學院), 의료기기대학(醫療器械學院), 기능성식품 및 와인대학(機能食品 及 葡萄酒學院), 무애대학(無涯學院, 석박사 통합과정, 8년. 무애란 학문에 끝이 없다는 뜻), 사회과학 및 문체대학(社會 及 文體學院, 문체란 문화와 체육을 뜻함), 평생교육대학(繼續敎育學院), 역홍상대학(亦弘商學院, business school, MBA 과정 포함) 등 무려 11개 대학(college, 學院)이 설치되어 있다.
이 11개 대학 모두가 다 우리의 약학대학에 해당되는데, 이 11개의 대학에 총 20개의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20개 학부는 학부 별로 신입생을 모집하지만 졸업생은 학부에 관계없이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면 약사면허를 받을 수 있다.
약학대학에는 5개의 학부, 즉 약제학부, 약학부, 약물분석학부 외에 영어 약학부와 일어 약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다른 10개 대학(college)에는 천연약물학, 약물화학, 약학개론, 분석화학, 화학제약공정학, 생물기술제약 학부 등의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
세번째로 놀라운 것은 학생 및 교직원의 수이다. 이 대학의 작년도 신입생 수는 무려 1,853명이었으며, 재학생 수는 학부생 8,345명, 대학원생 2,485명(박사과정 465, 석사과정 2,020), 평생교육과정 5,024명이었다.
약학대학에는 작년에 약제학부에 245명(37.1%), 약학부(약리학 및 약물독성학)에 229명(34.7%), 약물분석학부에 31명(4.7%), 영어약학부에 92명(14%), 일어약학부에 63명(9.5%) 등 총 660명이 입학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약학대학에 한하여 5년제의 영어약학 및 일어약학 학부가 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학부는 영어 또는 일본어로만 약학 수업을 한다. 이 대학 최고 엘리트 교육 과정인 무애대학의 수업연한은 8년이다. 나머지 학부의 수업연한은 모두 4년이다.
교직원의 수는 무려 1,162명에 이른다. 그 중 연구교육직만 671(교수 114, 부교수 22 포함)명이다. 이 대학의 학생과 교직원수만 해도 우리나라 약대 전체보다 더 많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 남경(南京)에 있는 중국약과대학(작년 신입생 2,450명)과 광주(廣州)에 있는 광동약과대학(한 학년 5,000명)의 규모가 심양약과대학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약학 관련자,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 공무원들이 중국 약대들을 살펴 본다면 우리나라 약학대학의 바람직한 규모에 대한 그들의 기존의 생각이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연세대학교 약학대학에 재직 중인 심유란 연구교수(심양약과대학 출신)의 도움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혀둔다.
2017-02-2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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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7> 일등들의 돌이키기
요즘 한 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국회, 검찰, 특검이나 헌재에 불려 나가는 모습이 티브이에서 끊이지 않는다. 이들을 보면서 “잘 나갈 때가 위험한 때”라고 하신 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분은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깨달아라’ 하셨다. 그러면서 “인생에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강조하였다.
사람들은 일등을 좋아한다. 특히 부모는 자식들이 모든 면에서 일등(一等)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등만 좋아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아프리카 밀림에 간 두 사람(A, B)이 갑자기 사자를 만났단다.
A는 체념을 하고 가만히 서 있었으나, B는 A보다만 빨리 도망 가면 잡아 먹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잽싸게 내달렸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사자는 이왕이면 싱싱한 먹이가 좋겠다고 생각하여 발이 빠른 B를 잡아 먹었단다. 일등을 하는 것이 죽을 수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약창춘추 32. ‘일등의 운명’ 참조).
우리는 우리의 인생 항로의 끝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지 못한다. 사자의 입이 기다리고 있다면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그저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만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강요하는 그 일등의 길이 어쩌면 아이를 ‘죽음에 내 모는 길’일지도 모르는 체 말이다. 요즘 법정에 불려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한 때 엄청 잘 나가던, 말하자면 ‘일등’을 하던 사람들임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일등을 추구하는 ‘일등 철학’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 되는지 실감하게 된다.
오래 전 일본 정계에서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스캔들의 주역들이 대개 동경대학 출신이니 특히 동경대 교수들은 입을 다물라. 제자들을 잘못 가르쳐 놓고 이제와 무슨 염치로 정의를 떠드는가?”라는 취지의 글을 일본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인 사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나 출신들은 앞장 서 회개하라, 국민들에게 사과해라!”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뛰어난 능력을 세상에 모범을 보이며 사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린 명예와 권력과 부는 모두가 다 세상에서 받은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 감사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만약에 그들이 그 좋은 머리와 능력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선점(先占), 독점(獨占)하고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君臨)하려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받은 축복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뿐더러 세상의 대접에 대한 배신(背信)이다. 잘못된 길의 끝에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올해의 표어는 “돌이키면 살아나리라”이다. 이는 우리 교회부터 회개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밀알이 되자는 취지일 것이다. 이 표어를 뒤집어 보면 ‘돌이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말이 된다.
사람이 독약을 잘못 먹었을 때 우선 그 독을 돌이키지(吐하는) 않으면 죽는 것처럼, 교회나 세상도 잘못 들어선 길을 돌이켜 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머지않아 다 죽을지도 모른다. 돌이키지 않고 잘못된 길로 열심히, 빨리 달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복을 받으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바른 길로 들어서라고’.
그러면 어떤 길이 바른 길일까? 나의 능력 밖의 일이지만, 감히 생각하자면 일단은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정직 성실한 태도로 세상을 삶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올해는 우리 교회와 서울대 등 소위 세상의 많은 일등 들의 돌이키기 운동이 세상을 덮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범을 따르게 되고 마침내 나라와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달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요즘에 바라는 나의 기원이다.
2017-02-08 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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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6> ‘서울대약대100년사’ 발간 소감
서울대 약대 이봉진 학장은 조선약학강습소 설립 100주년인 2015년 6월 12일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한 데 이어 ‘서울대학교약학대학 100년사(이하 ‘100년사’)’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그 편찬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이상섭, 김낙두, 김종국, 김병각, 이은방 명예 교수님 등의 자문과 김진웅, 박정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2016년말 원고를 탈고하고 마침내 2017년 1월 20일 100년사 발간기념회를 열게 되었다.
이 책의 발간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에 대한 근거 자료를 발굴해 준 장윤이 학예사의 탁월한 수고에 특별히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100년사는 야담(野談)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고 수정 및 보완 과정을 잘 참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고의 미세한 오류까지 찾아내고 개선안을 제시함으로써 책의 완성도를 대폭 높여 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의 수고에도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단언컨대 다른 출판사라면 이 과정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약학사 연구발전기금 또는 발간비 후원을 통해 이 책의 발간을 격려하고 후원해 주신 동문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처음에 이 책을 구상할 때에는 100년의 역사 중 초반부에 중점을 둘 생각이었다. 초반부의 역사는 가산약학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이니 관악산 캠퍼스 시절도 함께 다뤄달라는 주변의 부탁이 있어 결국 최근의 역사까지도 기술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악 캠퍼스 시절은 42년이나 될 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뤄야 할 내용이 방대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현직 교수들의 협조를 받기는 하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원래 2016년 9월말까지만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나 편찬 과정이 지연되면서 2016년 연말까지 일어난 사항을 일부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100년간의 발자취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컨대 약학대학의 을지로 캠퍼스나 연건동 캠퍼스에 대한 전경 사진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이었다.
한편 이 책을 편찬하면서 몇 가지 특별한 소득을 얻었다. 우선 전에는 은사님들의 강의가 부실하였다는 등 학교에 대한 불만을 많았었는데, 이번에 100년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하다 보니 은사님들은 그 때 그 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부산 피난 시절에도 휴강도 없이 강의와 실습을 성실하게 진행하신 은사님들의 열정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늘날 서울대 약대의 연구력이 세계 일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바탕에는 은사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소득은 다수의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일제 하 1919년의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바람에 약학대학 동창회 명부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속히 학적을 복원하여 그 분들의 명예를 높여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소득은 선배님들이 1960년의 4.19 혁명에 참여한 일을 밝힌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들’ 이라는 설명과 함께 흰 가운을 입고 데모하는 사진이 실렸었는데, 실은 이는 약대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었다.
편찬위는 17회 김병년 선배 등의 도움을 받아 사진 중 인물 하나 하나에 실명을 붙임으로써 사진 중 학생들이 약대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추후 동아일보에서 정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책이 발간 단계에 이를수록 편찬 초기에 충만했던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편찬인의 능력 부족으로 일부 사실이 누락되거나 부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학교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동문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디 동문을 비롯한 독자 제현의 관용을 부탁 드린다. 근하신년!
2017-01-25 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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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5> 믿음 이야기
1.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들의 부인은 ‘자기 남편의 믿음이 예전보다는 좋아졌지만 궤도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남편들이 아내의 훈육(訓育) 대상인 것은 교회에서도 처지가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개미끼리 모이면 큰 개미도 있고 작은 개미도 있을 것이다. 큰 개미가 작은 개미 앞에서 덩치 자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엔 개미란 그저 다 땅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생물일 뿐이다. 개미가 덩치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마찬가지로 교인들 간에 믿음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교인의 믿음의 크기가 다 비슷비슷하다는 뜻은 아니다. 강렬하게 예수님 향기를 풍기고 순교하신 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엄청난 믿음의 본을 보이신 훌륭한 교인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 같은 보통 교인들은 믿음의 크기를 비교하기에 앞서 부족함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말이다.
2.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여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職分)이나 사역(使役)을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마음에서 그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해진 다음에야 어떤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제 내 믿음이 굳건해 졌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믿음 가운데에서나마 직분을 맡거나 사역을 감당하면 그 때부터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위장된 교만이거나 반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나는 처음 장로가 되었을 때 정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두렵고 떨리고 거북한 심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특히 회중(會衆) 앞에 서서 대표 기도를 할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기도를 올려도 되는지’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고 대표 기도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정말 뻔뻔하고 두려운 일이다.
4. 나는 늘 문 아무개 목사님의 간증(干證)을 기억한다. 그 분은 옛날에 직업상 술을 마시고도 주일이면 습관처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예배에 참석한 그가 입을 열어 찬송가를 부르자 옆에 앉은 부인이 ‘술 냄새 나니 입을 다물라’고 했단다. 그 순간 그는 ‘나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에 생각이 미치면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많은 기성 교인들의 행태가 기독교의 전도를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더 나빠요' 소리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비교인들의 도덕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인들이 남을 구원하겠다고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모습이겠는가? 그러므로 교인들은 전도에 앞서 우선 비교인의 모범이 되는 생활부터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주제 넘지만 내가 생각하는 믿음의 큰 바탕 중 하나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 은혜로 주어진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물론 이웃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 및 이웃에 겸손하게 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되며,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믿음 생활은 성경 구절 많이 암송하는 수준을 벗어나,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칫 이단(異端)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이쯤에서 내 사설 학설을 덮기로 한다.
2017-01-0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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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4> 유머의 유익성
C 교수님은 유머에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계신 것 같았다. 한번은 ‘어떻게 그렇게 유머를 잘 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자기도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의 유머는 연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나를 만나자 마자, “심박사, 나 이 구두 새로 샀는데, 왼쪽 한 짝에 20만원 주었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구두 한 켤레는 비싸 봤자 20만원 하던 때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 구두가 그렇게 비쌉니까?”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근데 왼쪽 하나만 사면 오른쪽은 무료로 주더군”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완전히 C 교수님의 유머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사는 데 유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아직도 유머를 즐기는 사람을 조금 가볍게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나는 C 교수님과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면서 그 분의 유머가 어떤 면에서 유익한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유머는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C 교수님과 함께 있어 보면 유머의 힘이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유머를 주고 받다 보면 근엄한 표정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의 심각한 이야기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에 유머는 그 자리를 즐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헤어지고 나서도 뒷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C 교수님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다가 그 분의 유머에 입이 아플 정도로 계속 웃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C 교수님이 하면 같은 이야기라도 감칠 맛이 살아난다. 과연 C 교수님은 유머의 달인이시다. 한편 C 교수님한테 들은 유머를 곧장 행정실 직원들에게 전했다가 냉소(?)를 산 교수님도 있었다고 한다. 유머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세상을 살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을 헐뜯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사람 도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심지어 교회에서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정죄(定罪)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과 세상을 파괴시킬 뿐이다. 반면에 유머는 최소한 대화를 험담으로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내가 C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교훈이자 지혜이다. 그러므로 유머는 ‘사랑이 없는 정의’보다는 훨씬 세상에 유익해 보인다.
나는 유머 면에서 C 교수님의 수제자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 분처럼 되도록 대화의 상대방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 엄숙주의는 천성적으로 나한테 맞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도 밖에서 친구분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에는 의외로 유머가 많으셨다. 물론 집에서는 근엄한 척 하셨다. 그러고 보면 유머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모양이다.
아버지와 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체격이 왜소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유머가 왜소한 사람들 공통의 생존 전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덩치 큰 사람이 무서우니까 그 사람이 화나지 않도록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으로 유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문득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의 평균 체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왜소하다는 통계가 있는지 알아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머를 좋아하는 내가 조금은 비굴해 보이기도 한다. 부디 내 추론이 맞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C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유머 하나를 추가한다. 순경이 도망가는 도둑놈을 향해 “게 서거라” 외치며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도망가던 도둑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더니 “야, 너 같으면 서겠냐?” 이렇게 말하곤 다시 도망 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였으면 그 바쁜 도둑놈이 이런 대꾸를 하였겠는가?
말 되는 일만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6-12-2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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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13> 관악 약대의 아버지 김영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현재 세계의 약대 중에서 교수 1인당 발표 논문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공인 받고 있다. 1915년에 첫걸음을 뗀 조선약학강습소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하였던 우리나라의 약학이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1975년 8월 서울대 약대를 연건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1968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학교는 서울, 경기 등지에 분산되어 있던 각 단과대학들을 세 개의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즉 농대(수원 캠퍼스), 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생약연구소 등(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제외한 단과대학은 모두 관악산에 마련하는 신 캠퍼스로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약대 교수들은 연건 메디컬 캠퍼스를 떠나 관악 캠퍼스로 합류하고 싶었다. 그것은 장소가 비좁아 장래 발전 가능성이 낮은 연건 캠퍼스를 벗어나 광활한 관악 캠퍼스에서 많은 타 학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발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연건 캠퍼스에 남았다가는 의대의 등살(?)에서 벗어 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약대의 김영은(金泳垠) 학장(재임기간 1969.4-1972.9)은 틈만 나면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총장실을 찾아가 ‘총장님, 약대도 관악으로 보내주지 않으려거든 내 학장직을 잘라 주시오’ 하며 강경하게 관악 이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메디컬 캠퍼스의 명분이 워낙 그럴듯하였고, 더구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의대 출신인 한심석(韓沁錫) 박사이었기 때문에, 약대가 메디컬 캠퍼스를 벗어나 관악으로 이전하겠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때로는 벽창호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었던 김영은 학장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총장실을 방문하여 총장에게 약대의 이전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장실 앞 복도가 시끄러워져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상과대학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려고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상과대학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제학과는 사회대학으로, 경영학과는 경영대학으로 나뉘게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결사 반대하는 상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총장실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수위 등도 당황한 나머지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문을 열고 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대성 일갈하였다. “도대체 자네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난리를 치나? 당장 물러가지 못하나?” 갑작스런 김학장의 위세에 눌린 학생들은 주춤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수위 등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김영은 학장이 총장실 난입을 막아낸 것이다. 총장은 휴~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김 학장이 다시 총장을 찾았더니, 총장이 먼저 김 학장에게 “약대가 꼭 관악으로 가야겠습니까?” 물었다. 김 학장이 ‘물론입니다’ 대답했더니 총장은 "그럼 건설 본부장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더란다. 총장은 총장실 점거 사태를 막아 준 김 학장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건설 본부장은 서울대의 관악 이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임명한 월남전 참전 예비역 장군이었는데, 김 학장이 사전에 설득해 놓았기 때문에 약대의 관악 이전에 순순히 찬성하였다.
마침내 1971년 4월에 시작된 1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약대가, 2단계 건설 공사에 포함되어 1974년 4월에 공사에 착수, 1975년 8월 관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은 학장이 상대 학생들의 총장실 난입을 막아내는 해프닝이 없었다면 서울약대가 연건동을 벗어나 관악으로 이사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 김영은 학장을 ‘관악 서울 약대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
이상은 며칠 전 당시 학생담당 학생과장이었던 김병각 교수가 김영은 학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내게 전해 준 내용이다. 역사의 뒤안길은 돌아볼수록 흥미진진하다.
2016-12-07 09: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