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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2> ‘따듯한 말’이 곧 사랑이다
두 종류의 약을 함께 복용할 때 두 약의 효과를 합친 만큼의 약효가 나타나는 현상을 상가작용(相加作用)이라고 하고, 합친 것 보다 더 큰 약효가 나타나는 경우를 상승작용(相乘作用)이라고 한다. 사랑은 어느 쪽인가 하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감정인 듯 같다. 상대방과 사랑을 주고 받다 보면 사랑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투자한 것 보다 더 많이 되돌려 받는 수지 맞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의 특성 중 또 하나 신기한 것은 가짜 사랑도 진짜 사랑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 밥상에 계란찜을 올리며, 억지로나마 ‘어머니 사랑해요’를 반복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의 참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짜 사랑이 이 정도라면 진짜 사랑은 얼마나 위력이 크겠는가?'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일을 사랑의 극치로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내 제자임을 증거하라’고 하셨고, 성경의 여러 계명 중 으뜸되는 계명은 사랑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인생에서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씀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증표이자 바이오마커(biomarker)라 할 것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쉽다.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며 늙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부모들도,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원하는 것처럼 자식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식들의 부모 사랑은, 옛날부터 효도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놓아야 할 정도로, 기대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모기 입이 돌아 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니 아침 저녁으로 시원하고, 때로는 서늘하다. 머지 않아 가을이 오고 뒤이어 겨울도 올 것이다. 겨울이라. 문득 어린 시절 아랫목이 떠 오른다. 겨울철 밖에서 놀다가 방안에 들어 오면, ‘아이 추워’ 하면서 아랫목 이불 속에 손부터 넣었다. 그러고는 ‘아이 따듯해’ 하며 따듯함을 즐겼다.
내가 일본 유학시절 보낸 겨울은 늘 쓸쓸했었다. 다다미 방에 아랫목이 없어 이 따듯함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점점 쓸쓸한 게 싫어지고 따듯한 게 좋아진다. 그러면서 인생의 가치는 따듯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혹자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이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은 오히려 개 떡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늘 따듯하셨다. 그 따듯함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었다. 교회에 그런 따듯함 또는 그런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형 교회를 이룬다. 이는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지만 대부분은 아랫목의 따듯함을 그리워하는 ‘사랑 결핍증 환자들’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은 사랑의 방법론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그 말씀대로,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양자로 입양하여 사랑하신 고 손양원 목사님의 거룩한 사랑은 입에 올리기도 벅차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까? 나는 인생의 적어도 7할은 말로 의해 말미암으며, 3할 또는 그 이하 정도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칭 ‘언칠행삼(言七行三)’ 설이다. 그렇다면 사랑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말부터 사랑스럽게, 즉 따듯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반복하면 마침내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단점에 대한 ‘솔직한 지적’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게 만든다.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반복하건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따듯한 감성이다. 그러므로 따듯한 말, 그게 바로 사랑의 첫 걸음임을 확신하게 되는 요즘이다.
2015-09-1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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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1> 자식사랑 부모사랑
'인생은 성적 순(順)이 아니잖아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대체로 옳은 말이다. 나는 인생은 성적순이라기 보다는 사랑 순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두 아들과 두 며느리 및 그들에서 태어난 네 손주가 있다. 사실 요즘은 이 식구들을 보는 재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딴에는 최선을 다해 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가끔 우리가 각자 자기를 다른 아이보다 덜 사랑해준다고 삐치거나 투정을 부린다. 때로는 어이가 없고 난감하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은 양(量)보다 순서(順序)가 더 중요하다’라는 사실이다. 내가 받는 사랑의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남보다 조금이라도 적게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곧 남을 시샘하고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질투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이 간다. 어쨌거나 자식들이 서로 시샘과 질투를 하지 않도록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은 보통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끝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자식은 하나만 두어야 사랑하기 편하다는 말이 있을까?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사랑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통적인 필수 요소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 심지어 화초나 나무 같은 식물까지도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성경 도처(출20:5, 출34:14, 신5:9, 신6:15, 수24:19)에 언급되어 있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사랑 받기를 강력하게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질투’는 사랑의 시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요일4)만 아니라, 스스로도 사랑 받기를 원하시는, 우리와 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골(毛骨)이 송연(松煙)해지는 깨달음이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생명체는 공통으로 사랑을 필요로 할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안에 있어야 생명이 온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것처럼,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남의 사랑을 잘 받을 수 있다.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해도 선생님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아이는 십중팔구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이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의 인생을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란 의미에서, 사랑은 인생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묘약(妙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있다.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本能)이라는 말인 듯 하다.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실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반대로 자식의 부모 사랑은 굳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선 애들과 달리 늙은 부모는 저절로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좀 추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추하게 보이는 부모를 저절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효(孝)라고 하고, 효를 행하는 일을 효도(孝道)라고 하는데, 이는 효도 하기가 도(道)를 닦는 일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그 차이를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이 자식 사랑은 하기 어렵고, 부모 효도는 저절로 하게끔 만들어 놓으셨다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까? 아마 인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동물이 이미 멸종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랑법칙의 오묘함에 놀라는 요즘이다.
2015-09-0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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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80> 여성의 우월성 (3)
1, 2에 이어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근거를 소개하기로 한다.
9. 자존심이 더 강하다
남자는 아내에게 사과하면서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남편에게 사과하면서까지 살지는 않을 것 같다. TV에서 아내에게 100장도 더 되는 각서를 써 주고 살고 있다는 방송인 이야기를 보았다.
아내로부터 각서(覺書)를 쓰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 각서만 쓰면 잔소리가 끝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얼른 써주게 되었단다. 아마 아내더러 이런 각서를 쓰라고 하면 차라리 이혼을 하자고 대들 것이다.
나도 부부 싸움 후 내가 아내에게 사과를 한 적은 많지만, 아내로부터 사과를 받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자존심 싸움에서 아내를 이기려 들지 말 일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10. 모성애(母性愛)가 부성애(父性愛)보다 위대하다
고릴라 모자(母子)를 골방에 가두어 넣고 30분 동안 불을 때 방바닥을 뜨겁게 만든 뒤 문을 열어 보았다. 엄마 고릴라가 아이를 머리에 이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부자(父子)에 대해 같은 실험을 해 보았다.
어찌 되었을까? 아버지 고릴라가 아이를 깔고 앉아 있었단다. 그것도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부성애가 모성애에 KO 패하는 장면이다. 애초에 부성애라는 말이 있기는 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20년 전 큰 병으로 입원해 보니, 대부분의 아내들은 입원한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간호하고 있었다. 세상의 아내들은 대부분 그 정도의 훌륭함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내가 ‘아내 없는 사람은 아플 자격도 없나 보다’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입원하고 있는 경우의 남편들은 대부분 이 핑계 저 핑계로 병석을 지키기 않았다. 그걸 보고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들에 비해 훨씬 나쁜 x들이라는 사실을. 만약에 남편들이 아내들의 절반만큼이라도 정성껏 아내를 간호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드물게 훌륭한 남편’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지 않을까?
남자들은 ‘인간적으로 훌륭하기’ 종목에서도 도저히 아내들의 발꿈치를 따라가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1.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훨씬 길다
2014년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은 78.5세이고 여자는 85.1세였다고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약 7년이나 더 사는 것이다. 사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는 사실은, 위에서 열거한 그 어떤 항목보다 더 분명히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남자가 여자보다 일찍 죽는다는 것은 남자들의 복이다. 그래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죽는 것이 뭘 좀 안다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반대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라. 아내를 먼저 보낸 남자들의 말로(末路)가 얼마나 처량할 것인지를! 다만 아내보다 남편이 너무 먼저 죽는 것은 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은 든다.
아내가 남편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훗날 남편에 대한 주변의 평판마저 아내의 평가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다. 생시에는 물론 사후에도 남자가 불리하다는 이야기이다.
12. 결론
나도 ‘남편이 아내에게 이기고 사는 것이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내를 이기고 제대로 사는 남편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전투를 제외하고는 남자가 여자를 이길 분야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40대 후반부터는 내 경우에도 나보다 아내가 훨씬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뒤늦게라도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모든 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범사에 한시 바삐 아내에게 항복하라, 그것이 당신이 행복한 가정에서 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끝으로 아내 들에게는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아내 들이여, 모든 면에서 열등한 남편을 긍휼히 여겨 주시라”고. 이것이 내가 3편의 글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결론이다.
사족: 위 글에서 남자 또는 남편이란 대부분의 경우 ‘나’를 가리킴을 밝혀 둔다.
2015-08-19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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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9> 여성의 우월성 (2)
지난 번에 이어 여성이 왜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인가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기로 한다. 역시 가볍게 읽어 보기 바란다.
5. 용감하다
전쟁을 제외하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용감한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자리 잡기’라든가 ‘시장에서 물건값 깎기’ 등에서 남자들은 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아줌마 정신’은 바로 용감함이다.
아침 산책에 나서 보면 그룹을 이루어 대화를 하며 산보하는 것은 아줌마나 할머니들뿐이다. 남자들은 대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는다. 사람을 사귈 용기도, 떠들고 다닐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등산로 중간 운동장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율동을 가르치는 모임을 보면 참여자의 대부분이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뻘쭘해서 그런 데에 잘 끼질 못한다. 또 여자들은 산보할 때 마스크나 모자로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남자들은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그러지 못 한다. 남자에겐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이다.
경로당이나 노인정의 주도권이 할머니들 손에 완전히 장악된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다. 다소 간에 기부금을 좀 내고, 시종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만 할머니들이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수양이 되어 있는 영감님이 아니거든, 아예 노인정은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않는 편이 좋다.
6. 수다를 즐길 줄 안다
여자들은 수다의 깊은 맛을 안다. 전화로 1시간이나 수다 떨고 나서도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자이다. 앞에서도 말 했지만 여자들은 관심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이라도 수다를 즐길 수 있다.
반면에 남자들은 단순 무식해서 별로 수다를 떨 건덕지가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할 수 없이 수다대신 골프를 치거나 술을 같이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서로 말만 하기’로는 30분도 같이 보낼 수 없는 것이 남자들이다.
7. 사교성이 좋다
여자들은 사교성이 뛰어나다. 처음 보는 여자와도 금방 사귄다. 예컨대 ‘아이가 몇 살이냐’ ‘무슨 학원 다니냐’ 같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만나자마자 금방 서로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될 수 있다. 남자들은 그게 도저히 안 된다.
남편 모임에 따라 나선 아내들은 금방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아내들 모임에 따라 온 남편들은 서로 사귀지 못하고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해 하고 거북해 한다. 그래서 남편들은 아내 모임에 따라 나서지 않는다. 아니, 아내들은 그런 남편들을 다시는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여자들은 친구나 동창들과 국내외로 여행도 잘 다닌다. 서로 수다 떨며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 후 같이 갔던 친구들의 흉을 보는 후유증은 좀 있지만, 아무튼 잘 다닌다. 그러나 남자들은 남자들끼리만 여행을 다니지는 않는다.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행길에 부득이(?) 아내를 모시고 다니는 것이다.
8. 판단력이 좋다
집을 사는 문제 등 사소한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지구의 미래 같은 큰 주제만 담당한다는 남편들이 많다. 농담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가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남편들의 자조(自嘲) 섞인 진담이다.
과거의 아버지들은 아내 말을 듣지 않고 술 먹고 노름하고 바람 피우는 바람에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낸 경우가 많았다. 또 제 멋대로 집을 사거나 사업을 시작하다가 실패한 가장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명한 남편이라면 중대한 문제일수록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아니 아내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대체로 여성의 판단력이 남성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행여 여성의 판단력이 남편보다 우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편은 범사에 아내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신상에 좋다. 현실적으로 집안 내 파워를 장악한 사람이 아내인데 달리 어찌하겠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여성의 우월성은 다음 호에도 계속된다.
(정정) 약춘 177에서 이남순 박사 (전 성균관대 약대 초대학장)의 성함을 ‘이남선’이라고 잘못 기재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단순 착오이므로 이에 바로 잡으며 사과 드린다.
2015-08-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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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8> 여성의 우월성 (1)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우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근거는 대충 다음과 같다. 잠시 가볍게 읽어 보기 바란다.
1. 관심을 갖는 일들이 다양하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관심 있는 일들이 훨씬 많다. 쇼핑(홈쇼핑 포함), 화장, 옷, 여행, 실내 장식 등이 그 예이다. 그래서 시간 보내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다. 물론 그 바람에 돈 쓸 데가 많아지는 것이 좀 문제이긴 하다. 그래서 ‘성공한 남자란 아내가 쓰는 돈보다 더 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들과 달리 남자는 대체로 그저 일, 스포츠, 여자 정도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남자의 삶은 대체로 지루하다.
여자들은 관심사가 많아서 자연 남자보다 아는 정보도 많다. 남자들에겐 정보가 별로 없다. 남자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
2. 감성과 이해력이 뛰어나다
아내와 산책길에 나서보면 아내가 내가 너무 다른 걸 깨닫게 된다. 아내는 담장 위에 핀 장미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나는 담 밑에 불법으로 버려진 쓰레기를 개탄하고 있다. 아내는 내 미적 감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아내와 달리 피아노도 못 치고 음악 이론도 완전 꽝이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감성은 대체로 여자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어떤 교육학자가 티브이에 나와 ‘남자들이 연속극을 안 보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연속극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자들은 흔히 연속극이 막장 드라마이기 때문에 안 보는 척 하지만 그건 위선이라는 것이다. 사실 남자는 연속극의 주제인 감정의 기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단순해서 그저 권투나 축구처럼 승패가 명백하게 결정되는 일이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석 때 시댁에 다녀 온 아내들은 시어머니의 눈빛이 어쨌다는 등 이상한 소리로 남편을 들볶곤 한다. 물론 남편은 아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기 때문에 깩소리도 못하고 당하고 만다. 여자의 예리한 감성은 때로는 남자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3. 잔소리 능력이 뛰어나다
여자는 잔소리를 잘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 에어컨 온도 좀 올려라, 내려라, 에어컨 냉매 좀 충전해라, 필터 청소 했느냐, 타이어 공기압이 낮은 거 아니냐’ 등 쉴새 없이 남편을 코치한다. 대단한 능력이다.
여자는 특히 남편이나 시부모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유난히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한다. 시어머니를 여의고 자기가 시어머니 자리에 등극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시집살이 하던 때의 기억으로 남편을 핍박한다.
심지어 신혼 때 밥상을 들고 들어 올 때 고모가 여기 앉아 있고, 어머니가 저쪽 문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당신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며 생생한 동영상을 돌려가며 남편을 추궁한다. 남편은 기억이 나야 무슨 변명을 해볼 텐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궁지에 몰리면 겨우 ‘시끄러워!’ 소리치고 바깥으로 나가 담배를 빨다 들어 온다.
한번은 아내에게 “내가 살다가 실수로 또는 무심히 잘 한 일은 없었수?” 물었더니, 아내는 한 칼에 ‘없었어’ 한다. 그러고 보면 여자의 기억력은 남편을 핍박할 대상에 한정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4. 동시 수행능력이 뛰어나다
여자들은 마치 멀티 플레이어처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다리미질과 요리와 애 머리 빗기기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잔소리까지 병행 할 수 있다. 반면에 남자들은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면 반드시 적어도 한가지 일은 망쳐 놓는다.
남자들의 뇌 기능은 외통수인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뭘 시키기를 두려워한다. 오랫동안 안 시키면 남편들의 가사 처리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 퇴화한다. 결국 남편들은 나이가 들면 아내 없이는 살 수 없는 의존적 존재로 전락한다. 적지 않은 남편들의 말로(末路)가 이렇지 않을까? 아, 옛날이여!
여성의 우월성은 다음 호에도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2015-07-2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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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7> 약학사 연구의 재미
지난 6월 12일, 서울대 약대에서는 5월 20일 시작된 메르스 전염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근대 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행사는 기념 심포지엄 (1부), ‘가산(岢山) 약학역사관’ 개관식 (2부), 기념비 제막 (3부) 및 ‘감사의 밤’ (4부) 순서로 진행되었다.
나는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장의 자격으로 서울대약대 이봉진 학장과 함께 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하였다. 또 개인 자격으로 약학역사관의 개관 준비, 기념비 비문 작성, 그리고 감사의 밤에 상영된 100주년 기념 동영상의 제작에 기여할 수 있었다. 모두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약학 교육 100년의 역사를 정리한 ‘약학역사관’을 둘러보면, 이제야 비로소 일제하의 척박한 황무지에 약학의 귀한 씨를 뿌린 선배님들이 노고를 기리게 되었다는 송구스러움이 앞선다.
감사하게도 그 씨는 100년에 걸친 시련을 극복하고 싹트고 자라나서 이제 서울대약대는 교수 1인당 연구논문 수가 세계 약학대학 중 1등인 대학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신약개발 건수가 20개가 훨씬 넘는 미래의 신약개발 강국으로 기대되는 나라가 되었다.
밥술이나 먹는 후손이 있어야 조상의 묘역을 정비한다고 했던가? 요즈음 나는 황폐한 조상의 묘역을 새롭게 조성하는 개심(改心)한 불효자의 보람을 느낀다. 또 ‘상놈’ 또는 ‘불효자’라는 손가락질을 조금은 면하게 된 약학 가문(家門)의 자부심도 가져본다.
10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환희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김진웅 교수와 약학역사관의 장윤이, 조누리 선생의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속속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었다. “오늘은 이런 자료를 찾았습니다” 라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1. 예컨대, 조선약학교가 설립된 다음해인 1919년에 적어도 14명의 조선약학교 학생이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조서가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1942년 축구부를 위장한 경성약전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이 발각된 기록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선배님들의 민족정기에 대한 자부심이 솟구쳤다.
2. 1960년 4.19 혁명 때의 사진 설명을 바로잡은 것도 큰 기쁨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백색 가운을 입은 의사들도 데모에 나섰다’는 취지의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데모에 참여한 것은 약대생이지 의대생이나 의사, 또는 치과 의사가 아니었다는 선배님들의 증언을 수차 들은 바 있었다. 당시 조교였던 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도 분명히 증언하셨다. 또 당시 데모에 나섰던 약대생들이 인명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학생과장이셨던 고 이왕규 교수의 명 설득 덕분이었다고 한다 [김병각 명예교수의 전언(傳言)].
그래서 나는 이를 바로잡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동아일보로부터 사진을 구한 다음, 사진에 나온 사람들 하나 하나에 홍청일, 노환성 등 당시 약대생들의 실명을 붙여 나갔다. 이로써 드디어 중요한 역사 하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선배님들의 명예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3. 얼마 전 서정규 라는 대 선배님 (1928년생, 전 성보제약 사장)을 만나 광복 후 혼란기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분은 1945년에 경성약전 7회로 입학하셔서 3년 후인 1948년 6월에 전문부 1회로 졸업하시고, 금강제약에 취직하셨다가 다시 1년 더 학교에 다니시고 1950년 3월에 학부 1회로 졸업한 분이시다.
그 분 말씀에 의하면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자, 경성약전의 일본인 교장 다마무시는 학교를 미군정에 넘기려고 하였단다. 그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서 선배님 등이 목검(木劍)을 들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가운데 이남순 박사(훗날 성균관대 약대 초대 학장) 등이 교장실에 쳐들어 가 압력을 넣어, 그 해 9월 학교를 인수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도봉섭 교수와 이동선 이사장(이남순의 부친) 등도 함께 노력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자료와 생동감 넘치는 뒷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흥분 시킨다.
2015-07-0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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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6> ‘대한약학회’의 생년은 1946년으로 봐야
금년에 제59권을 발간하고 있는 ‘약학회지’가 창간된 것은 1948년 3월이다. 그러나 정작 약학회지를 발간하고 있는 ‘대한약학회’는 1951년에 창립되었다. 학회지가 학회보다 3년 먼저 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전말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일제시대의 ‘조선약학회’ 창립 (1911)
최초의 근대 약학 연구 모임인 조선약학회(朝鮮藥學會)가 창립된 것은 1911년으로 중심이 된 것은 경인 지방의 학자들이었다. 회보인 조선약학회보(朝鮮藥學會報)도 같은 해 창간되었다. 1914년 일본 약학의 태두인 나가이(長井長義)가 방한하자 이를 계기로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 조선약학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99명 회원의 대부분은 일본학자이었다. 조선약학회보는 1916년 제6호부터 조선약학잡지(朝鮮藥學雜誌)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한국인 연구진은 주로 총독부 위생시험소와,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던 계농생약연구소(桂農生藥硏究所) 및 당시 최대의 제약회사인 금강제약(金剛製藥)에 근무하는 연구자들 이었다. 1920년대에 조선약학잡지에 실린 한국인의 논문은 이호벽, 김충현의 논문 2편뿐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는 도봉섭(1934), 한구동(1935, 1942), 신덕균(1937), 김기우(1938) 등이 매년 1명씩 선정 시상하는 우수 논문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활약하였다. 1942년에 열린 조선약학회 창립 30주년 기념 학술행사에서는, 총 50편 중 19편의 연구논문이 한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다. 조선약학잡지는 일제 말기인 1943년 이후에는 발간되지 않은 것 같다.
2. 광복 후 ‘조선약학회’의 재건(1946) 및 약학회지의 창간(1948)
1945년에 광복이 되자 일본인 중심의 조선약학회는 자연 해산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4월 13일, 도봉섭, 한구동 등의 한국인을 중심으로 조선약학회를 재건하는 창립총회가 (사립)서울약학대학에서 열렸다.
[회장: 도봉섭, 부회장: 한구동, 서무간사: 심학진, 회계간사: 이남순 (東京帝國大學 약학박사), 편집간사: 허금]. 그 해 12월 14일에는 서울약학대학에서 제1회 학술대회 (30명 참석, 6개의 논문 발표)가 열렸다. 그리고 두 해 뒤인 1948년 3월, 드디어 약학회지(藥學會誌) 제1권 제1호가 발간되었다. ‘藥學會誌’라는 제호(題號)는 김충현씨가 붓으로 썼다고 한다.
3. 6.25 전쟁시 ‘대한약학회’로 개칭 (1951)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약학회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1951년 12월 16일,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국호(國號)에 따라 ‘조선약학회’를 ‘대한약학회(大韓藥學會)’로 개칭하는 발기총회가 열렸다. 장소는 피난지인 부산시의 시청 회의실이었다.
그러나 학회지명은 ‘藥學會誌’를 그대로 계승하기로 하였다. 대한약학회는 1955년 9.28 수복 후인 10월 12일,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제1회 학술대회 및 총회를 열었다.
일부 학자들은 6.25를 전후하여 월북하거나 또는 납북되어 북한의 약학을 육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들은 1957년 ‘조선약학(朝鮮藥學)’이라는 학술잡지를 발행하였고, 1960년에는 북한 보건성 이름으로 ‘조선약전’을 제정하는데 참여하였다. 남한의 대한약전(大韓藥典)은 1958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4. 요약
우리나라 약학회의 역사는 1) 1911년 일제하의 ‘朝鮮藥學會’ 창립, 2) 1946년 광복 후의 ‘朝鮮藥學會’ 재건, 3) 1951년 ‘大韓藥學會’로 개칭 요약할 수 있고, 학회지의 역사는 1) 1911년 ‘朝鮮藥學會報’의 창간, 2) 1916년 ‘朝鮮藥學雜誌’로 개칭, 그리고 3) 1948년 ‘藥學會誌’의 창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약학회의 출발 연도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해방 후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약학회’가 재건된 1946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때부터 ‘약학회지’가 발간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정확할 때에 비로소 힘이 생기는 법이다.
2015-06-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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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5> 약물의존(藥物依存)의 위험성
지난 4월 15일 ‘약물의존’이라는 일본 책 '니시 가츠히데 박사 원저'가 번역 출판 됐다. 그 책의 일부 내용을 이하에 소개하고자 한다.
1. 약물의 사용 실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떠한 형태로든 위법약물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는 그 약을 조심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는 충동적으로 과량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많은 젊은이들은 마치 어른들이 사교 시에 적당량의 술을 마시는 것처럼 자신들도 사교의 장소에서 그런 약물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약을 사용해도 겉으로는 물론 신체상으로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수는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대규모 조사를 해 보았더니, 마리화나, LSD, 엑스터시나 각성제 때문에 문제 행동을 일으켜 의료기관이나 경찰 또는 사회복지 관련기관에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사람의 수는 그런 약물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의 수보다 훨씬 적었다.
코카인은 스트리트 드러그(street drug, 길거리 약) 중에서도 가장 독성이 강하고 의존성이 높은 약물이다. 이 약은 여러 나라에서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사용자 중에 치료나 구제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약을 사용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따금 사교의 장소에서 코카인에 취했다가, 그 뒤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언제 '약'의 작용이 나타날지 모른다
문제는 과거에 '약'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 습관적으로 다시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춘기에 알코올이나 위법약물을 경험해 본 사람 가운데 약 10%가 나중에 약물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사람일수록 나중에 약물의존에 빠지기 쉽다. 습관적으로 또는 고용량의 약물을 사용했던 사람일수록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생겨 가족 관계, 사회 생활, 성(性), 교육, 직장 생활 등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
오랫동안 약물을 남용했던 사람이 겪는 증상의 하나가 '플래시 백(flash back, 환각의 자연스러운 재연)' 현상이다. 즉 자기이탈(自己離脫)이나 치료를 통해 약물의존증으로부터 용케 빠져 나와 정신적 신체적으로는 물론 사회 생활 면에서 아무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약물에 대한 갈망과 함께 환각과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왜 이런 플래시 백 현상이 나타날까? 그 기전은, 예컨대 각성제를 장기간 남용하면 도파민(dopamine)이 계속 방출되는데, 이 도파민이 자기산화를 받아 신경독성 물질로 바뀐 다음 신경세포에 변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즉 정상적인 신경 회로에 어떤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외관상으로는 약물의존증으로부터 회복된 것처럼 보여도, 실은 뇌의 신경회로에 회복될 수 없는 '고장'이나 '탈락'이 일어나 있는 것이다.
크랙 코카인(순도가 높은 코카인. 휘발성이 높아, 특수한 도구를 이용하여 불을 붙여 들이 마심)을 장기간 사용해도 뇌에 신경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 코카인 갈망이 나타난다. 코카인 갈망은 약물을 끊은 지 수 개월 또는 수 년이 지난 후에도, 약간의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 증상은 평생 지속된다.
이러한 현상은 알코올 의존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오랫동안 금주를 하고 있어도 언제 다시 문제성 음주에 빠질지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약물의존증은 재발하기 쉬운 병이다. 물론 장기간 사용할 때의 증상이 약물에 따라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중증의 약물의존증에 빠지면 '평생 낫지 않는 병'을 안고 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약물 사용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기를 기원한다.
2015-06-0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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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4> 카네이션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다. 옛날에는 ‘어머니 날’이라고
했는데, 그럼 아버지 날은 없느냐 하는 불만의 소리가 나오니까,
1970년대에 인심 쓰듯 ‘어버이 날’로 개명하면서
아버지를 끼워 준 것이다.
나는 어버이 날 아침이면 반드시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어버이 날 아침에 아래층에 사는 장남 내외가 카네이션을 안달아 주어 몹시 삐진 일이 있었다. 자식이 버젓이 있는데 어버이 날에 꽃 하나 못 얻어 단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내와 아들 며느리는 우리 아버지가 촌스럽게 카네이션 달기를 바랠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에는 내가 늙어서 ‘카네이션이나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아들 며느리가 내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주기를 바라게 되면서부터, 나는
96세의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시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요즘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 생화 한 송이를 달아 드리고 껴 안으며, ‘아버지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 드리면 흐뭇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신다. 나도 덩달아 흐뭇해진다.
카네이션 꽃 달기에 관한 나의 원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드시
어버이날 아침 외출 전에 부모님께 달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에 달아드리는 것은 게으름이며 불효이다. 두 번째로는 부모님 먼저 달아드리기 전에는 내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숨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왜
어머니가 생전에 며느리가 밥상 차려 드리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나 이제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아내가 이석증(耳石症)으로3주간이나 어지러워 하는 중에 두 며느리가 교대로 우리 집에 와서 여러 번 밥을 차려 주었는데, 그걸
받아먹는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며느리가 설거지까지 하고 간 날에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한 나이를 먹으면 누가 나한테 인사를 잘 하고, 어디 아픈데 없으시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고 물어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이런
대접을 못 받으면 적잖이 나음이 섭섭해진다.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이 유치한 것 같지만, 저절로 그리 느껴지니 어찌 하겠는가? 교양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일수록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나이 먹은 사람은 누구나 다 똑 같이 느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내 확신이다.
교회에서 잘 아는 어떤 분이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아내 되는
분이 그깟 갑상선 가지고 뭘 걱정이냐고 시늉도 주지 않았단다. 그분은 아내의 이런 반응에 큰 상처를
받고 섭섭해 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걱정해 주고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마도 늙어서 섭섭하고 삐지는 것은 우울증처럼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부모들의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다. 사실
자식 탓할 것 하나도 없다. 나도 젊었을 때 부모님 감정까지 깊이 신경 쓰고 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의 섭섭함은 내가 다스려야 할 나의 과제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크리스천에게는 교회가 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이런 저런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다. 매 주일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치면 일년에 적어도
52번의 위로를 받는 셈이다. 각박한 세상에 이처럼 반복해서
위로를 받을 곳이 달리 없을 것이다.
헨리 모리슨 이라는 선교사가 4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 사역을 마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 오는 배에, 마침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 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함께 타고 있었다. 뉴욕 항구에 배가 들어서자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교사를 마중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선교사는 적잖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저녁 노을 사이로 이런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한다. “헨리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 온 것이 아니란다”.
크리스천에게 참된 위로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땅에서도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2015-05-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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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3> 나노 의약(nano medicine)
과학에도 유행이 있다. 어떤 연구 주제가 인기를 끌기도 하고, 때가 지나면 시들해지기도 한다. 오늘은 나노 의약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항암제의 경우, 약학, 특히 약제학에서는 약물의 항암 활성보다 약물이 암세포에 얼마나 잘 분포하느냐가 더 큰 관심을 끈다. 항암제가 암세포가 아닌 정상 세포에 분포하면, 정상 세포도 죽이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물 분자를 암 조직 등 체내의 특정 부위에만 분포시키는 기술이 필요해 지는데, 이런 기술을 타게팅(targeting)이라고 한다. 따라서 타게팅은 약효를 최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중요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약과학자들은 항암제를 암세포에 타게팅 하기 위하여, 항암제를 리포좀이나 마이크로스피어, 또는 나노 미립자 등의 미소 운반체(carrier)에 봉입(封入)하여 정맥으로 주사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약물의 운반체를 약물송달체(Drug Delivery System; DDS)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는 나노 미립자(nano particles)가 가장 효율적인 타게팅용 DDS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암 조직에 분포되어 있는 혈관벽에 생긴 미세 틈새를 빠져 나와 암 조직 사이에 축적되는 나노 미립자의 특성 때문이다. 나노 미립자의 이러한 특성을 EPR(투과성 항진 및 축적) 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노 미립자가 암 조직에 축적되는 정도는 일반적인 기대 수준 이하이었다. 그래서 약과학자들은 암 조직이나 암 세포 표면을 특별히 잘 인식하는 특정 물질로 나노 미립자 표면을 처리 (修飾)해 보기로 하였다. 즉 암세포 표면의 특정 항원과 결합하는 항체분자(antibody)나, 암세포 표면의 특정 수용체(receptor)와 결합하는 분자(ligand)로 미립자의 표면을 수식해 본 것이다.
독소루비신(DOX)이라는 항암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DOX는 간암에 널리 사용되는 항암제이지만, 비가역적인 심근증이나 울혈성 심부전 같은 심장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인 약이다. 이 부작용은 DOX가 심장에도 상당량 분포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 연구실은 DOX를 함유한 나노 미립자 표면을 특정 물질로 수식하여 DOX의 심장 분포성을 낮추어 보고자 하였다.
우선 DOX를 함유한 알부민 나노 미립자를 만든 다음, 그 표면을 헤마토포피린(HP) 분자로 수식하였다. HP를 선택한 이유는 HP가 암세포 표면에 발현되어 있는 LDL 수용체와 특별히 잘 결합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HP로 나노 미립자 표면을 수식하면, 나노 미립자가 암세포 표면의 LDL과 효율적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미립자 안에 봉입되어 있는 DOX가 효율적으로 간암 세포로 분포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시행 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HP로 표면을 수식한, DOX가 함유된 알부민 나노 미립자를 제조할 수 있었다. 이 나노 미립자를 간암에 걸린 흰쥐에 정맥 주사한 뒤 체내 분포를 조사해 보았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즉 DOX의 간암 조직 분포성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DOX의 심장으로의 분포성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간암에 대한 치료 효과는 높아지고 심장에 대한 부작용은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는 고무적인 결과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이와 같은 나노 미립자를 곧바로 간암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결론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다. 체내에 투여된 나노 미립자가 체내의 미세 혈관의 혈류를 방해할 우려는 없는지, 또 특정 암을 타겟으로 삼은 나노 미립자의 크기와 경도(hardness) 및 체내 분해성은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안전한지 등에 대한 정보가 아직까지도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가 대유행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변변한 나노 의약이 개발되지 못한 까닭은 바로 안전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행은 그저 유행일 따름이니, 무조건 따라다닐 일이 아닌 모양이다.
2015-05-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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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2> '리스트'와 법
최근 ‘아무개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정치인만 돈을 받았으리라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정치에 돈 문제는 그 저변이 넓고 뿌리가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발각된 사람도 ‘나만 받았나?’ 하면서 돈 받은 행위 자체보다 허술하게 받은 부주의를 후회하는 웃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뇌물, 부정 부패 등 범법 행위에 대한 불감증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가히 국가적 위기상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 ‘일반사회’라는 과목을 배울 때부터, 나는 ‘법이란 거미줄 같아야지 매미채 같은 존재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의 처마 밑에 쳐 있는 거미줄을 향해 나는 날벌레는 예외 없이 거미줄에 걸리게 마련이다. 모든 날벌레에 있어서 거미줄은 공정한 규제이다.
반면에 매미채는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잡으려고 정한 날벌레를 쫓아가 잡는다. 어떤 벌레를 잡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매미채 주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따라서 매미채는 날벌레 입장에서 보면 전혀 공정하지 않은 규제인 것이다.
세상에 범법자는 많지만 극히 일부만 잡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의 법은 거미줄보다는 매미채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이다. 범법자 중 누구를 잡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사 당국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법률이 매미채 같이 운용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붙잡힌 범법자는 범법을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하필 나만 표적 수사 하느냐?’고 불만을 품는다.
그래서 모든 범법자는 반드시 단속되는, 거미줄 같은 법률체계나 단속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미줄이 쳐있는 곳을 지나가는 벌레가 반드시 잡히는 것처럼, ‘법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걸린다’는 인식이 상식이 되면, 모든 국민은 누가 뭐래지 않아도 법을 지키게 된다. 공정한 법의 권위가 살아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범법자가 너무 많아 현실적으로 모든 범법자를 다 잡아 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범법자의 수를 잡아 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모두가 철저한 준법 생활을 다짐하여야 한다.
지도층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세상 돌아 가는 모양을 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연목구어(緣木求魚)인 듯싶다. 차라리 일반 시민들이 먼저 나서는 편이 나을 듯해 보인다. 한심한 상황이다.
범법자 수를 줄이기 위한 두 번째 방편은 법규의 수준을 대다수의 국민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다. 적용하면 모든 국민이 다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실효성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법 당국은 일부 범법자만 단속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국민들은 ‘모든 사람이 법을 어기는데, 걸린 사람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며 법규를 경시하게 된다. 사법 당국도 부득이 법을 매미채처럼 자의적, 편의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 ‘준법 투쟁’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하철 노조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법을 지키는 것이 투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준법투쟁’이란 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관련 법규를 문자 그대로 지켜서는 지하철이 제대로 운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준법투쟁’, 세상에 이런 코미디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또는 앞뒤가 안 맞는 엉터리 법규는 마땅히 개정되어야 한다. 이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규제개혁’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하여 범법자의 수를 대폭 줄인 다음에는, 그 법규를 위반한 모든 범법자를 예외 없이 잡아내야 한다.
범법자 단속에 사법 당국의 ‘의도’가 개입될 여지를 없애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서 법의 공정성과 권위가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범법자의 수가 더욱 줄어드는 선순환 궤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라가 걱정이다. 하나님 보호하여 주소서.
2015-04-22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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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1> 3.1 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 학생들에 대한 신문 조서
지난 약창춘추 170에 조선약학교 학생 14명이 3.1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신문을 받은 바 있음을 소개하였다. 오늘은 그들 중 한 분인 박희창(朴喜昌)을 임의로 선택하여 당시의 신문 조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는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 13권 ‘3.1운동 III. 3.1 독립선언 관련자 신문조서’에서 발췌하였다. 검사의 심문조서 피고인 : 박희창. 위 피고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사건에 관하여 大正 8년 3월 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조선총독부 검사 山澤佐一郞과 총독부 재판소 서기 아무개가 열석한 후, 검사는 피고인에 대하여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다. 문) 성명•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지 및 출생지는 어떠한가?답) 성명•연령은 박희창, 21세. 신분•직업은 약학교 학생. 주소는 京城 蓮池洞 228, 崔守連方. 본적지는 慶尙北道 尙州郡 牟東面 壽峯里 5통 3호. 출생지는 慶尙北道 尙州郡 牟東面 壽峯里 5통 3호. 문) 위기•훈장•종군기장•연금•은급 또는 공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답) 없다. 문) 이제까지 형벌에 처해졌던 일은 없는가?답) 없다. 문) 피고는 금년 3월 1일에 군중과 함께 대한국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는가?답) 3월 1일에 남산공원에 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오포(午砲) 소리를 듣고 종로의 청년회관 앞에 갔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선언서를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도 군중 속에 들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곳 무교정 거리에서 대한문으로 가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그리고 나서 미국 영사관, 배재학당 앞, 그리고 다시 대한문으로 나와 황금정 1정목에서 종로 네거리로 와 거기서 흥화문 앞으로 해서 조선보병대로 갔고, 프랑스 영사관 앞, 서소문을 거쳐 대한문으로 나와 長谷川町을 지나 조선은행 앞에서 本町 2丁目까지 군중과 같이 각처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걸었다. 그리고 本町 2丁目 경찰관 파출소 앞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문) 그대가 얻었다고 하는 선언서는 이것과 같은 것인가? (검사가 「선언서」라는 제목의 한글을 섞어 쓴 손병희 외 32명 명의의 인쇄물을 보이다.) 답) 그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문) 그것을 읽었는가?답) 조금만 보고 전부 읽지는 못했다. 그 선언서는 각처를 돌아다니는 중에 어디엔가 버렸다. 문) 누구에게서 얻었는가?답) 군중 속의 사람으로,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것을 주울 때는 달려가면서 주었던 것이다. 문) 왜 대한국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답) 나도 조선인이므로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기에 기뻐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문) 총독정치에 대하여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가? 답) 학생이므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다. 문) 국민대회를 아는가?답) 그것은 모른다. 문) 국민대회에서 발행한 등사판 인쇄물을 본 일이 있는가? 답) 그런 것을 본 일은 없다. 문) 국장을 앞두고 만세를 부르는 것은 근신치 못한 것이 아닌가?답) 아무 생각도 없이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문) 종교는 무엇인가? 답) 나는 종교는 없다. 부친은 유교이며, 고향에서 농업을 하고 있다. 문) 학력은 어떠한가? 답)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고 경성의 중동학교 및 경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지금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 문) 파고다 공원에서 국민대회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가? 답)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다. (이상 조서 끝).
약창춘추 170에서 언급한 것처럼, 1918년에 설립된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 60명 중 무려 약 50명이 3.1운동과 관련되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3.1운동 중 살아남아 판결을 받아 신상 카드에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 등 약 20명 정도는 이름을 알 수 있으나, 나머지 30명 정도는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알 수 없다. 남의 나라의 압제 하에서 독립을 주창하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감옥에 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새삼 분노를 느낀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졸업을 하지 못한 선배님들께 지금이라도 졸업장을 드리는 것이 후배로서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2015-04-0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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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70> 조선약학교 학생들의 3.1운동
1. 친일파 강습소장/조선약학교장 우리나라 약학 교육기관의 뿌리인 조선약학강습소(1915년 6월 12일 개소)와 조선약학교 (1918년 6월 21일 개교)는 조선시대 약재상들의 계(契)인 장진계(長進契)를 모체로 한 조선약업총합소[소장, 이석모 (李石模)] 소속 약업인들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지만, 1910년에 일본에 병합된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친일파 조중응(趙重應, 1860∼1919, 외무 대신 및 농상공부 대신 역임)을 초대 강습소장 및 약학교장으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중응은 정미칠적 (丁未七賊, 7인) 및 경술국적(庚戌國賊, 8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한일 병합에 공을 세운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이었다. 약계의 인사들이 그를 학교의 대표로 내세운 것은 조선총독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약학 발전을 위하여 그 외에 큰 기여를 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지 1년이 채 못된 1919년 현직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후로는 쭉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중응이 초대 소장 및 교장이었다는 사실은 약학계의 후학들에게는 적잖이 아쉬운 일이다. 훌륭한 애국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친일파 인사가 아니었더라면 한결 당당하게 그 분을 교장이라고 내세우고 칭송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조무래기 친일파가 아니라 이완용 급의 거물 친일파인 조중응이 약학교의 초대 교장이다’라고 자학적인 자랑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2. 조선약학교생들의 3.1운동 참가이러던 차에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1919년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에 관련되어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을 받은 사람 362명 [손병희 (孫秉熙) 선생 포함] 중에 김유승(26), 김광진(21), 박준영(23), 박병원(23), 박흥원(23), 박희창(21), 오충달(24), 전동환(34), 김정오(22), 강일영(19), 김용희(19), 이인영(19), 정태화(24), 이용재(25) 등 조선약학교 학생이 14명이나 들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중 김용희, 이용재, 이인영, 전동환 등 4명에 대해서는 신문 카드(사진)도 입수할 수 있었다. 솔직히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1818년에 개교한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은 조선인이 60명, 일본인이 30명 정도이었는데 2년 후인 1920년에 제1회로 졸업한 조선인은 이호벽 등 1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신문을 받은 14명 중 3명은 한해 뒤인 1921년에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다.
나머지 47명은 졸업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3.1 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의 단속을 받은 영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47명 중 약 20명은 졸업생 명부와 상기 신문조서를 통해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분들에 대해서는 당시 학적부를 입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그 이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장한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조선약학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끓어 오르게 한다. 비록 조선약학교가 친일파의 이름을 빌려 개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선배님들의 속 마음은 결코 민족 정기(精氣)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삼가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사진. 3.1 운동에 참여한 조선약학교 학생들에 대한 일제(日帝)의 감시카드 (이인영의 예)
2015-03-11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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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9> 111년 전의 미국 약대 유학생 이관영과 선한약물학
1. 이관영(李觀永)
‘며칠 전 이관영씨가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이관영 씨는 몇 달 전 북미합중국에서 귀국한 의학사(醫學士) 이희경(李喜儆)씨의 종질(從姪, 사촌의 아들)이다. 두 사람 다 평안남도 순천군 출신이다.두 사람은 14년전(1904년, 필자 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관영 씨는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하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스 주립대학에서 무기화학, 유기화학, 유기화학, 정질분석화학, 응용화학, 생리화학, 생리학, 신체해부학, 약학 [약성(藥性), 약종(藥種), 약종재배법, 진가(眞假)분석법, 조제법, 복용법], 위생학, 미균학(미생물학, 필자 주), 현미기(응용법, 검사법), 제약화학을 위한 수학 등을 공부하여 졸업하고, 하와이 제당연합회 연구부 화학과에서 분석에 종사하였는데, 그 성적이 양호한 결과 이번에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현재 총독부에서 시행하는 면허 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청원(시험원서, 필자 주)을 제출하였다고 한다. 이런 학문을 공부한 사람은 이관영 씨가 효시(嚆矢, 최초)라 하더라’ (이상 매일신보 1918년 2월 11일자 기사).상세한 기록은 추후 더 찾아 봐야겠지만, 이처럼 이른 시기(1904년)에 미국 약대(학부)에 유학을 간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이관영 선생은 귀국한 1918년 10월 18일 치른 약제사 시험에 이응길 이란분과 함께 합격하여 이 두 분이 국내에서 최초의 한국인 약제사가 되었다. 한편 유세환(劉世煥)이란 분은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약학교와 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약제사가 된 후 1902년에 귀국, 1909년부터 지금의 서울대 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의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흔히 1920년 5월 면허를 취득한 이호벽 선생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약제사인줄로 잘못 아는 분들이 있는데, 이호벽 선생 등은 국내에서 수학(조선약학교 제 1회 졸업)한 후 국내에서 시행된 시험에 합격한, 말하자면 토종 약제사 중 최초라고 하는 것이 맞다.
2. 선한약물학(鮮漢藥物學)이관영 선생은 뒤에 경성 세브란스(世富蘭偲)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세브란스 병원 약국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이 때 ‘선한약물학’이라는 책을 감수하였다. ‘선한약물학’ 이란 조선의 한약학이라는 의미 같은데, 생약의 성분까지도 표시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생약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이 책의 저자는 세브란스 병원약국 주임인 한도준(韓道濬, 조선약학교 본과 6회 졸업)과 전 경성약학전문학교 조수 약제사 김수만(金壽萬, 조선약학교 7회 졸업)의 두 분이다. 이 책은 1931년에 행림서원에서 발행한 이후 1937년까지 6판을 찍었다고 한다. 운 좋게도 서울약대는 최근 이 책의 초판을 입수할 수 있었다.흥미로운 것은 김수만 선생은 1933년 12월 11일 서울시내 도렴동(都染洞)에서 경성약학강습소를 연 분이다. 이 강습소의 목적은 약종상을 양성하기 위한 수험 준비였다고 한다. 수업은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10개월간이었으며, 입학 자격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남녀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상 동아일보 1933년 11월 28일자 기사).유의해야 할 것은 이 강습소는 1915년 6월 12일 개교하였다가 1918년 6월 21일 조선약학교가 개교하면서 문을 닫은 ‘조선약학 강습소’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 경성약학강습소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는 불명이다.이 책의 머리말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인 일본인 이시도야(石戶谷勉)와 경성의학연구회장인 김명여(金明汝) 선생이 썼다. 이시도야는 현재 서울대 약대에 소장되어 있는 ‘이시도야 컬렉션’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한편 이 책의 제자(題字)는 전 조선총독이었던 사이또(齊藤實)가 썼다.대 선각자의 발자취를 하나 하나 찾을 때마다 신명이 나는 요즈음이다.
2015-02-25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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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8> 모창(模唱)대회와 ‘선택과 집중
그 동안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을 모방(模倣)함으로써 발전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선진국 따라 하기’는 일종의 미덕(美德)이었다. 그 ‘따라 하기’를 잘한 덕분에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 동안 모방할만한 것은 거의 다 모방한 느낌이다. 돌아봐도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모방에만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당황스런 상황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세가 둔화된 까닭은 이런 상황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이 상황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 같아 보인다. 국내 제약산업을 보더라도 그 동안은 선진국이 개발한 오리지널 약을 복제하는 것이 발전의 동력이었다. 외국약을 복제하기 쉽도록 제도를 고쳐야 된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복제약만 만들어서는 살 수가 없다. 이제 신약개발(新藥開發)이 아니면 우리나라 제약업에 활로가 없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우성이다.복제약 만들기는 일종의 모방 행위이다. 오리지널 약과 똑같이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약개발은 창조(創造) 행위이다. 보고 모방할 대상이 없는 것이 신약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은 모방이 아닌 창조에 답이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창조가 답인 것은 제약 분야만이 아닐 것이다. 과학, 기술,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가 모방에서 창조로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성장은 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모방에서 창조로 발상을 전환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모방은 노래 부르기로 치면 ‘모창(模唱)’이다. 노래를 배우는 첫 걸음은 기성 가수의 노래를 흉내 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모방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결코 훌륭한 가수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자기 나름대로의 창조적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가수는 ‘짝퉁 가수’에 불과한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일에 모방이 아닌 창조가 필요함을 느낀다. 문제는 창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창조에는 모방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인력, 자본 등이 소요된다. 그래서 창조는 가난한 나라나 회사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 동안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정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선택과 집중’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선진국을 모방하는 전략의 하나이었다. 문제는 패러다임이 모방에서 창조로 바뀐 현 상황에서도 ‘선택과 집중’이 가장 현명한 방법론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약회사나 나라에서 대형 과제 몇 개만을 선택하여 총력을 집중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모방의 시대에나 적합한 매우 리스크한 정책 같아 보인다.
창조를 위해서는 몇 개가 아닌 수많은 다양한 연구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구석에서 말없이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아이디어가 존중 받아야 한다. 그들이 자유 분방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국가는 최소한도의 연구비를 지원하여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지양하고 다양한 소규모 연구가 도처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씨를 뿌리고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개중에는 싹이 나지 않아 돈과 시간이 낭비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몇몇 대형과제를 국책 과제로 선택하여 집중 투자하였다가 실패하였을 때에 비해 훨씬 덜 심각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연구 결과가 꼭 연구비 규모에 비례하지 않으며, 또 여럿이 모여서 집단으로 연구를 해야 연구 효율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렇다고 당장 모든 ‘선택과 집중’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모방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가 앞으로의 살 길임이 확실하다면, 보다 창조적인 다양한 소규모 연구들이 활기를 띨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의 비중을 줄여야 할 것이다. 능력 있는 신인 가수는 대규모 모창 대회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2015-02-11 09: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