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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7> 영화 두 편
화제의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영화는 소문 그대로였다. 재미도 있었고 눈물 나도록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가혹하였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피난, 몸을 파고드는 추위와 두려움, 그리고 배고픔을 어찌 화면으로 다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 그리고 KBS의 이산가족 찾기 등은 내가 보고 들어 잘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60세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아프지만 그래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 앨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이 영화가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본다 해도 경험하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처럼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안타깝기도 하다.
얼마 전, 교회에서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이라는, 고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영화를 보았다.
손목사는 1948년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살인범을 양자로 삼고자 하자 손 목사의 딸은 “아버지, 그를 양자로 받으면 제가 그를 오빠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인범을
용서하는 것까지는 받아 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자로 삼는 것만은 절대 안됩니다”라고 절규하며 아버지에게 항변하였다.
그러자 손 목사는 “네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구나.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용서만 하라고 하셨더냐?”고 하며, 결국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손 목사 자신도 1950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나병환자 수용소(애양원)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영화는 사람이 어디까지 훌륭해질 수 있는가를 엄숙하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이었다. 손 목사는 작은 예수님이었음을 알았다.
이 두 영화의 시대 배경에는 공통으로 6.25 전쟁이 있다. ‘국제 시장’의 시작도 전쟁을 피해 월남하고자 흥남 부두에서 군함을
타는 장면이었고, ‘그 세상’의 모티브도 6.25 전쟁 당시 좌우 이념 대결이 남긴 살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억척스럽게든 또는 숭고하게든, 참으로 용케도 온갖
역경을 헤치고 나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들은 우리에게 스스로 감동해도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제 시장’의
주인공의 마지막 말처럼, “아버지,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 그런데, 저 정말 고생 엄청 많이 했어요”라는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한다.
그리고 때로는 젊은이들에게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으냐? 우린 세대는 정말 고생 엄청 하며 오늘날을
만들었다”며 자랑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득 우리나라의 발전이 과연 다 우리가 노력한 덕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6.25 전쟁 때에는 유엔의 깃발 아래 16개국이 참전하여 생명을
바쳤다.
물자를 지원해 준 나라까지 합치면 총 63개국(2011년 국방부 발표)이 우리를 도왔다. 왜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었을까? 만약 그들이 그 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또 서독이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받아 주지 않았으면, 또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태도에 분개한다. 잘못을
사과하는 않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신세 진 나라와 사람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잘못된 일이다. 문득 우리나라는 여러 형태로 우리를 도와 준 나라와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사의 표시를 하였는지 걱정이 된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룬 기적을 생각하면, 우리의 감사는 아무리 정중해도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조금씩이나마 여러 외국을 돕고 있다.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행여 은혜를 베푸는 태도로 그들을 도와서는 절대로 안될 일이다.
오히려 ‘예전에 진 빚을 일부나마 갚게 해 주십시오’하는 감사의 자세로 해야 한다. 그것이 빚진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게 하기 위한 최소 한도의 도리일 것이다.
2015-01-28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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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6>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부부에게는 큰 아들로부터 얻은 손녀가 셋, 작은 아들로부터 얻은 손자가 한 명 있다. 우리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서로 저부터 우리 품에 안기려고 경쟁적으로 달려든다.
마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짹짹거리는 제비 새끼들의 모습이다. 우리 부부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순간 누구를 먼저 안아 주어야 좋을지 몰라 잠시 행복한, 그러나 심각한 (?) 고민에 빠진다. 일등으로 안긴 아이는 좋아하지만 그러지 못한 못한 아이는 토라지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는 “아! 아이들은 누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구나!” 깨닫는다.
그런데 돌아보니 저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린 손주들뿐이 아니었다. 아들 며느리도, 부모님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사실은 어린 손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나도 손주들이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살짝 서운해진다. 아내도 똑 같은 심정이란다. 그래서 또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사랑 받기를 갈구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화초와 같은 식물들도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
그렇다면 사랑은 생명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예수님도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셨다 (막 12:31).
문득 하나님도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고 하셨고,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 (수 24:19)’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다시 한번 사랑은 미물(微物)에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든 생명의 전제 조건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문제는 우리가 그 중요한 사랑을 받기만 원하지, 남에게 잘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솔직하다’라는 미명(美名) 하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함은 종종 위험한 것이다. 솔직함보다는 오히려 아부가 더 유익할 때가 적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신혼부부에게 부부간의 솔직한 대화가 제일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직장인들에게는 상사에게 솔직히 말하지 말라고까지 조언한다.
상처를 줄 우려가 큰 솔직한 말 대신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관계 개선의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고 사는 어느 며느리에게 누군가가 귀뜸을 했단다. ‘석 달만 밥상에 계란찜을 올리며 “어머니 맛있게 잡수세요” 하며 웃으면 틀림없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고. 희망에 찬 며느리는 정성껏 그리 하였다.
석 달 후 어떻게 되었을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예뻐하게 되었고, 이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정말로 돌아가실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가짜 사랑(아부)이 고부(姑婦) 간의 갈등을 참 사랑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가짜 사랑이 이 정도일진대 참 사랑은 위력은 얼마나 막강하겠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나는 우리 교회의 많은 분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기’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감동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찔리고 부끄러워진다. 그 때마다 나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제 입술을 주장하사 상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사람은 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 글은 2014년 11월 2일 온누리 교회 신문의 장로순환 칼럼에 같은 제목으로 실은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015-01-1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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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5> 한국약학 100년- 5) 약학강습회 이후의 흐름 개관
1914년 7월 17일 사립장훈학교(현 중구 장교동 장교빌딩 자리)에서 최초의 약학강습회가 열린 다음해인 1915년 6월 12일 (약춘161의 6월 13일은 오류), 같은장훈학교에서 1년제 야간조선약학강습소가 개교되었다. 강습소는 3년 뒤인 1918년에 폐지되고,같은 해 6월 21일 2년제조선약학교 (신입생 99명)가 개교되었다.
조선약학교는약춘 164에 정리한대로 잠시 옛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와, 남미창정 284번지 (남대문시장 남쪽)를 거쳐 1919년 5월 23일 옛 훈련원 부지 (현 중구구민회관 부지)에 목조 기와집을 낙성하여 자리 잡은 후 1920년부터 매년 2년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4년부터는 매년 2년제 졸업생과 3년제 (본과라 부름)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즉 1924년 3월 22일에는 제5회 2년제 졸업생 (43명, 이중 한국인 14명)과 더불어 3년제 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다.그러므로 우리나라 근대약학교육에서 3년제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21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약학교는1926년11월 29일에는 연구실을, 1928년 5월 17일에는 강당을 신축 낙성하고, 1930년 4월 1일에는 3년제의 경성약학전문학교 (약전)로 승격 개교하게 되었다. 당시조선약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약전으로 편입시킨 후 다음 해인 1931년 3월 28일 제1회 약전 졸업생으로 졸업시켰다. 약전으로 편입하지 않은 학생들은 1931년 같은 날 제8회 (마지막회) 조선약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1933년에는 신축교사 낙성식 겸 문부성 지정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약학교가완전히 폐지된 것은 1932년 5월 1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자, 일본인 교장 등은 학교를 미군정에 넘기려고 하였다. 이에 반대한 학생들 및 도봉섭 (교장)과 이동선 (이사장) 등의 공으로 그 해 9월 학교를 인수받았다. 1946년 미군정이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기로 하자 약전도 그 이름을 (사립)서울약학대학 (3년제)으로고치게 되었다. 약전은 1947년 2월 5일 제17회로 마지막 졸업식을 가졌다.그리하여 1948년부터는서울약학대학의 이름으로 졸업생을 배출 (동년 6월 17일 제1회 3년제 졸업생 92명)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8.15) 후인 1949년, 제2회 (97명)와 제3회 졸업생 (94명)을 5개월 간격으로 배출하였다.
한편 1948년부터 서울약학대학은 전문부 (3년제)와 학부 (4년제)로 개편되어 희망자는 1년을 더 수학하여 총 4년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1950년 3월 11일 및 5월 11일에 각각 제1회 및 제2회 4년제 학부 졸업식 (각 11명)을, 5월 11일에는 제4회 3년제 서울약학대학 졸업식 (110명)을 거행하였다. 이미 1946년에약전에 입학한 학생 중 일부 희망자가 4년 후인 1950년 3월에 첫 4년제 졸업생이 된 것이다.
한편 이화대학 행림원(의약대학의 명칭)은 1945년에 3년제 약학교육을 시작한 후,1947년에는 편입시험을 통해 희망자에게 4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1949년 7월, 한국 최초의 4년제 약학사 55명을 배출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4년제약학사의 배출에 있어서 이화여대가 서울약학대학보다 8개월 앞서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과 9.28 수복을 거친 뒤인 9월 30일 한구동 등의 노력으로서울약학대학은 국립서울대학교 (초대학장 한구동)에 편입되었다. 한편 전시, 즉 부산 피난 시절에는 성균관대, 부산대, 중앙대, 숙명여대 등의 약학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 동안 을지로 6가에 있던 약학대학 교사는 서울대 음악대학 자리로 교사를 옮겼다가, 1959년 8월 17일 종로구 연건동 28번지로 다시 옮겨교사를 신축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6년 후인 1975년 8월 25일에는 다른 단과대학들보다 뒤늦게서울대 관악캠퍼스로 이전 합류하여 오늘의 관악 시대를 열게 되었다.
2014-12-17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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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4> 한국약학 100년- 4) 조선약학교
1. "시대가 요구하는 藥劑師, 이번에 새로 생기는 조선약학교"1918년 4월 28일자매일신보에위 제목 하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경성에 약학교가 생긴다 함은 이미 보도한바 있다. 이에 대하여 창립 고문인 총독부의원 약제관 요시끼 (吉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설립을 계획한 조선약학교는정말로 약에 대한 학문을 알아 상당한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다.종래 경성에는 사립 조선약학강습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16년4월에 조선약제사 시험규칙이 발포된 뒤에 조중응자작 이외 유력한 약업자의 주선으로 설립된 것이나 아직 완전한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로는 이번의 약학교가 처음이다.
그런데 강습소는 속성을 위주로 하여 극히 단기에 대강의 약학의 이론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못하여 여기를 졸업하더라도 약제사의 전기 (前期) 시험을 받을 자격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용의 문제로 후기 (後期)의 교육을 베풀 설비가 없었던 까닭이다. (중략)옛날부터조선에는한약이 비상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한 의술이들어오면서 양약을 사용하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시대의 진운 (進運)을 따라약업이 발달하는 것은 크게 치하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위험을 일으키는 자가 적지 않으니 이는 바로 약제사의 소양이 빈약하고 자격이 충분치 못한 결과로 매우 한심한 일이다.
(중략) 일본에서는 제약 산업이 발전하여 매우 훌륭한 약이 얼마든지 제조되고 있지만 조선에는제약산업이라고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략) 요컨대 지금 조선은 진실한 학문이 있고 자격이 있는 약제사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 생기는 약학교는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약제사를 양성코자 함이다”.
2. 조선약학교의 교사 (校舍)의 역사1914년 하기약학강습회 및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는 장교통에 있는 장훈학교 교사를 빌려 써야 했기 때문에 강습회는 여름방학에, 강습소는 야간에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체교사를 갖게 되었는데, 1989년 발간된 <일본식민지교육정책사료집성 vol. 50> 내에 있는 ‘경성약학전문학교 일람’으로부터조선약학교의 교사와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18년 6월 1일조선약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장소는 종로 5정목에 있는 [구 동대문 분서 (分署) 자리] 관청 소유의 건물을 빌린 가건물이었다. 동년 6월 21일 99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을 개시하였다.(2) 1918년 8월 1일에는 학교 위치를 남대문 시장 남쪽의南米倉町 284번지로 변경하는 인가를 받았다. 동년 10월 9일에는 총독부에서 무상으로 빌린 구 훈련원 부지 2000여 평 (황금정 6정목 18 번지, 현재 을지로 6가 중구구민회관 부지)에서 교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 (地鎭祭)를 거행하였다. (3) 1919년 5월 23일, 상기 황금정 6정목에 목조 기와집 (사진 1, 출처: 홍현오 저, 한국약업사, 약업신문사, 1972)을 낙성하여 학교를 이전하고, 동년 6월 2일 신교사에서 시업식을 거행하였다. 서울대 약대 동창회는 1991년 이 자리에 서울대 약대 교적비 (사진 2)를 세웠다.
2014-12-01 1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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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3> 한국약학 100년- 3) 조선약학교의 설립
1. 부산일보 기사
1918년 4월 20일자 일본어로 쓰여진 부산일보를 보면 경성의 유지들 사이에서 ‘조선약학교’가 설립된다는 기사 (사진 1)가 나온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학교의 전신 (前身)은?2년전 (즉 1915, 필자 주)부터 경성 장교통 (長橋通)에 경성약학강습소 (조선약학강습소를 칭하는 것일 듯; 필자 주)가 생겼는데 졸업연한은 1개년으로 4월에 입학하여 다음해 3월에 졸업하였다. 매년 조선인 50명과 일본인 30-40명이 졸업하였다. 이 강습소 졸업생은 약종상 (藥種商)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을 뿐이었다.
규칙의 발전그런데 우리 조선에 작년 (1917년, 필자 주)부터 ‘조선약제사시험제도’가 생김으로써 조선인에게 약제 (藥劑)에 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지인 (內地人, 즉 일본인, 필자 주)과 마찬가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시험의) 정도는 내지의 약제사 시험보다 약간 낮을지 모르지만 조선에서는 훌륭한 약제사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제사 양성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약제사를 양성하는 학교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 동안 경성의 유지들이 여러모로 걱정을 해 왔는데, 이번에 아라이 (新井虎太郞)와 야마기시 (山岸雄太朝)라는 두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약학교 설립 인가 신청을 해당 부서에 제출하게 되었다. 총독부도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인정하여, 아직 정식 인가가 나지는 않았지만, 연간 3000원의 보조금을 내려 보내기로 내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내용은?교사 (校舍)는 토지조사국의 옛 관사 (官舍)를 물려 받아 금년 6월경에 개교 (1918년 6월 21일 조중응을 교장으로 하여 창설하고 조선약학강습소는 해체함; 필자 주)하도록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학교의 졸업기한은 2개년으로 교수과목은 제1학년에는 수학, 어학, 물리학, 화학, 식물학, 생약학, 제약화학을 가르치고, 제2학년에는 제약화학, 분석학, 약국방 (약전학, 필자 주), 약품감정, 위생화학, 조제학 및 이들에 대한 실습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자격과 교원입학자의 자격은 내지인 (일본인)의 경우 고등소학교 (심상소학교; 필자 주), 조선인의 경우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로 한다. 제1회 입학생 수는 일본인과 조선인 합쳐서 약 50명으로 할 예정이다. 이 학교의 교장으로는 창립위원장인 조중응 자작이 취임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기타 고문 겸 이 학교의 교원으로는 약학사 (藥學士)인 고지마 (兒島高果), 요시끼 (吉木彌三)씨가 맡는다고 한다.
야간도 개교이 학교는 주간뿐만 아니라, 주간에는 바빠서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약업계의 종업원이나 책임자)을 위해 야간에도 가르치기로 하였다.
2. 매일신보 기사한편 1918년 4월 19일 매일신보 (사진 2)를 보면, “조선약학강습소는 1915년 6월 설립 이래로 졸업생 50인을 배출하였는데, 이번에 경성에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약종상 유지들이 사립약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자작 조중응씨를 설립위원장으로, 약학사 고지마 (兒島高果), 요시끼 (吉木彌三)를 설립 고문으로, 아라이 (新井虎太郞), 야마기시 (山岸雄太朝), 방규환 (方奎煥), 이응선 (李應善) 등 32인을 설립위원으로 하여 설립을 연구 중인데, 설립비 3만여원은 일본인 및 조선인 유지 등이 모은 기부금으로 충당하기로 하는 등 대강의 방침이 세워졌으므로, 이번에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 50명을 모집하고 오는 6월부터 수업을 개시할 예정이다. 당국에서도 매년 경비조로 보조금을 주기로 하였다. 또 모든 졸업생에게는 약제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2014-11-19 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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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2> 한국약학 100년- 2) 근대한국약학교육의 발상지 장훈학교(長薰學校)
1. 유래
1914년 여름 국내 최초로 약학강습회가 개최된 장소는 장훈학교 (사진 1)이었다. 또 1915년 6월 13일 국내 최초로 개교된 조선약학강습소의 장소 역시 장훈학교이었다. 그러므로 장훈학교는 우리나라 근대약학교육의 발상지인 것이다. 이 장훈학교는 이회영 등의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로, 약학강습소 이외에도 다양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강습소들에게 교사(校舍)를 빌려주어 야학(夜學)의 형태로 수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장훈학교는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있다. 현재 영등포에 있는 장훈고등학교의 홈페이지 (http://www.janghoon.hs.kr/?_page=11)를 보면 이 학교는 1907년 11월에 ‘사립 경성장훈학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장훈(長薰)’이란 교명(校名)은 학교 설립을 기획한 박헌정(朴憲正(憲榮))의 아버지인 충남의 유학자 박준근(朴駿根)이 당시 학교의 소재지였던 한성부 중부의 장통방(長通坊)과 남부의 훈도방(薰陶坊)의 첫 글자 ‘장(長)’과 ‘훈(熏)’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 이름에는 「새 시대에 적응할 새 교육을 실시하여 한민족의 도의적 향훈(香薰)을 장구하게 유지 발전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교사는 1950년 6•25전쟁시 파괴되었는데 수복(修復) 후 우여곡절을 거쳐 영등포구 신길동 2번지 (구 해군본부 내)에 새 교사를 건축하고 1955년 1월 정식으로 장훈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1962년 현재의 주소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로 64길 26번지)로 이전하였다. 1964년 1월에는 장훈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1971년 11월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었다.
2. 위치그러면 장훈학교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 학교는 당시 경성부 황금정 2정목 장교통 (京城府黃金町2丁目長橋通)에 있었다. 경성부란 지금의 서울특별시를, 황금정 2정목은 지금의 을지로 2가 (을지로 입구~을지로 3가 사이)를, 장교통(長橋通)은 중구 장교동과 종로구 관철동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다리인 장교(長橋,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長通橋라고 부름) 부근의 거리를 말한다.1914년에 발행된 <경성부시가강계도(京城府市街疆界図, 사진 2)>를 보면 이 장훈학교가 나와 있다. 장교통은 해방 후 장교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1년도 <부동산소유권이전등기청구사건 (서울고법 1961.11.30, 4292민222∼225)>의 판례를 보면 경성사립장훈학교의 당시 주소는 서울시 중구 장교동 39번지이었다. 1946년도에 제작된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해가며 추적해 본 결과, 이 주소는 현재의 장교빌딩 혹은 서울고용노동청이 있는 곳에 해당되는 것 같다. 조만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부기) 1918년 조선약학교가 설립되어 독립적인 교사를 갖기 전까지 우리나라 약학교육의 장도 (壯途)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당시의 장훈학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장훈학교의 홈페이지는 서울대 김진웅 교수의 수고로, 1914년의 지도와 장훈학교 사진은 금년 9월 1일부터 서울대 약학역사관 연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장윤이 선생의 도움으로 찾은 것임을 밝혀둔다.
(정정) 약춘 161에서 조선 최초의 약제사 시험이 1916년 8월에 시행되었다고 썼으나 동년 10월이 맞는 것 같다. 추후 확인하여 바로잡을 생각이다.
2014-11-05 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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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1> 한국약학 100년- 1) 조선약학강습소/약학역사관 개설
금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현대 약학 교육인 ‘약품취급하기강습회(夏期講習會)’가 개최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 내년인 2015년은 최초의 약학교육기관인 ‘조선약학강습소’가 개교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서울대 약대는 이를 기념하여 약 45평 규모의 ‘약학역사관(藥學歷史館)’의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내년에는 약학교육기관 개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때마침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회장 필자)도 금년 10월 23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제2회 한국약학사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약대학장 도봉섭(서울대 김진웅 교수), 약대입문자격시험 PEET의 역사(숙대 김희두 교수), 약학과 HPLC 등 기기의 역사(윤근성 인성크로마텍 사장) 및 117년 보국제약 동화약품(윤도준 동화약품 회장) 등이 주제로 다루어질 전망이다.
이에 우리나라 근현대 약학 교육 100년의 발자취를 몇 회에 걸쳐 되돌아 보고자 한다.
1. 1914년 약품취급 하기강습회 1914년 여름(7-9월로 추정됨)에 조선약업총합소(소장 이석모) 주최로 국내 최초의 약업자 및 종업원에 대한 약품취급 강습회(장소: 장훈학교)가 개최되었다(매일신보 7월 17일자 기사). 이 강습회는 약사법규, 매약제조법, 약품취급법, 약품시험실습, 기타 위생관념 및 전염병에 대한 주의 등을 3개월 간 교육하였다. 이 강습회에는 40명이 넘는 수강생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2. 1915년 1년제 조선약학강습소 개교조선약업총합소 인사 등의 노력에 힘입어 1915년 6월 13일(일요일) 오후 2시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公認) 약학교육기관인 ‘조선약학강습소’가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15년 6월 2일 매일신보(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와 학생모집 광고(사진)를 보면 조선약학강습소의 위치는 경성부 장교통(長橋通)에 있는 사립 장훈학교 내(內)이었고, 모집 정원은 100명(일본인과 조선인 포함), 수업 기한은 1년(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강의), 교육과목은 물리학, 화학, 약용식물학, 생약학, 화한약(和漢藥), 국어(일본어), 일본약국방, 조제기술, 약품감정법, 약품취급규칙 등이었다. 정원이 100명이라고 하였지만 1916년 4월 5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웬 일인지 제1회 졸업식(4월 3일)에서 졸업한 학생 수는 40명(조선인 35명, 일본인 5명) 뿐이었다. 또 4월 3일에 제3회 입소식도 동시에 거행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1915년과 1916년의 1년 사이에 한번 더 학생을 입학시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약학강습소의 소장은 조중응 자작, 고문은 일본인 약학사 2명, 간사는 이석모씨, 평의원은 일본인 3명과 조선인 6명(유한표, 이응선, 유세환, 최영철, 이철희, 최흥모), 강사는 일본인 약학사 2명과 일본인 약제사 3명, 그리고 조선인 2명(홍종철, 조병근 씨, 이상 약제사 추정) 등이었다.
한편 조선 최초의 약제사 시험은 1916년 8월에 시행되었는데 이 때 합격자 5인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약학강습소 졸업생들은 1916년 10월 11-20일에 개최된 조선 최초의 약제사 시험에 응시 (응시한 총 18명 중 3명이 조선인)는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으로 최초로 이 시험에 합격하여 약제사 면허를 받은 사람은 1918년 10월 18일에 면허를 받은 이관영과 이응길이었다.
아무튼 우리나라 최초의 근현대 약학 교육기관인 ‘조선약학강습소’가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내년은 우리가 모두 기념해야 할 중요한 해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2014-10-22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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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60> 지혜로운 삶
(에피소드 1)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러 모텔에 간 부인이, 역시 외간 여자와 바람을 피우러 온 남편과 모텔 복도에서 마주쳤다. 부인과 남편 둘 다 기겁을 하였지만, 부인은 재빨리 냉정을 되찾고 같이 온 외간 남자에게 “김형사님, 저 사람이 바로 제 남편입니다”라고 외쳤다. 그 결과로 남편만 외도 현장에서 잡힌 꼴이 되었단다. 부인의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기지(機智)가 놀라울 따름이다.(에피소드 2) 성경(왕상 3:26)을 보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가 엄마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을 재판한 솔로몬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솔로몬 왕은 “둘 다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하니 할 수 없다. 칼로 그 아이를 둘로 나누어 공평하게 갖도록 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자 한 여인이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닙니다.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이를 본 솔로몬은 아이를 양보한 여인이 진짜 엄마라고 판결하였단다. 이를 솔로몬의 지혜(智慧)로운 판결이라고 한다. (에피소드 3) 한편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갑이라는 사람은 을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린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을은 갑더러 빌린 돈을 갚으라고 억지를 쓴다. 심지어 자기가 갑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본 증인까지 있다며 소송을 걸었다. 난감해진 갑은 동네 어른을 찾아 가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지혜로운 어른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판사 앞에서 차라리 돈을 빌린 적이 있다고 해라. 그런 다음 얼마 전에 그 돈을 다 갚았다고 해라. 그리고 네가 돈 갚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며 네 편을 들어 줄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거라. 그렇게 하는 편이 안 빌렸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어른의 조언은 기지일까, 지혜일까? (토론) ‘기지’와 ‘지혜’는 둘 다 어떤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다. 사전을 준용하면, 기지란 ‘전혀 다른 관념을 서로 연결시켜 모순을 순간적 동시적으로,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내며 해결하는 고도의 지적 조작’ 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wit라고 한단다. 한편 지혜는 ‘사리를 분별하여 적절히 처리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결국 사전에 의하면 두 말에 큰 의미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지 보다는 지혜의 어감(語感)이 한결 좋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즉 기지에는 ‘잔꾀’의 이미지가 있는데 반하여, 지혜에는 동기(動機) 측면에서 순수하고 선한 뉘앙스가 있다. 또 기지는 순간적, 피상적(皮相的), 임기응변적인 느낌을 주지만, 지혜는 본질적(本質的)이며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진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약학적 표현으로 비약시켜 보면, 지혜가 유전형 (genotype)이라면, 기지는 발현형(phenotype)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9:10)”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지혜롭게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스스로 ‘지혜서(智慧書)’ 임을 자처하는 책들이 많다. 어떤 책은 ‘지혜롭게 사는 99가지 방법’ 이라는 류의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대부분은 삶의 몇 가지 기지(노하우)를 알려주고는 있지만, 삶의 본질에 대한 지혜는 결코 가르쳐 주지 못한다. 이는 내가 책을 잘 읽지 않는 핑계이기도 하다.
(결론) 신기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혹시 헌신(獻身)의 삶이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객지(客地), 벽지(僻地), 오지(奧地)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삶이 그 동안 내게 준 교훈이다. 그들의 헌신은 나에게 ‘기지를 넘는 지혜의 삶을 추구하라’고 경고(警告)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목사님은 ‘결혼은 서로 헌신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라도 가정 헌신을 통해 가정의 삶을 지혜롭게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은은한 가을 국화 향기 사이로 지난 삶을 되돌아 본다.
2014-10-08 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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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9> 아웃리치
우리 부부는 금년 7월 20여명의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아웃리치(outreach)를 다녀왔다.교회에서의 아웃리치란 선교 목적을 위한 일종의 봉사활동인데, 그 동안 나는 늘 마음은 있었어도 건강 때문에 참여해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더 늙으면 못 간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프놈펜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26일 아침, 교회가 마련해 놓은 북카페(book cafe)에서 도착 예배를 드렸다. 그 때 자기소개를 하던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이런 위로 예배는 처음이라며 울컥 눈물을 삼켰다. 이 모습을 본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쭉 선교사들과 눈물을 나눈 한마음 형제가 되었다. 리더인 M선교사는 캄보디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에, 밀물처럼 몰려와 선교를 하자는 도전을 주었다. 이어 근처에 있는 왕립 캄보디아 대학을 들렀다. 70년대 폴포트 대학살로 인하여 교수들 중 박사학위 소지자가 22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에는 대학살의 현장인 킬링필드와 뚜슬랭 감옥을 방문하였다. 캄보디아는 어디를 가도 젊은이들만 눈에 띄는데, 이는 대학살 때에 나이든 지식인들과 도시인들이 학살되어 어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란다. 킬링필드 전시관에 가득한 해골들은, 한 나라가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저녁에는 여섯 선교사 가족을 식당으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쁨으로 사역하고 있다는 그들의 간증을 들었다. 또다시 벅찬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둘째 날인 주일 아침, 메콩강을 배로 건너 M선교사가 개척한 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 교회는 시설이 매우 좋았지만, 다른 한 교회는 지붕과 마루만 덩그렇게 있는 원두막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교회에 우물과 전기시설, 그리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배 후에는 맨발로 찾아 온 어린이들을 한 명 한 명 포옹하면서, 볼에 페인팅을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고, 비누방울과 풍선을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유난히 예뻤다. 뒤이어 몇 개조로 나뉘어 현지의 형제 자매 리더들과 함께 인근 마을로 가가호호(家家戶戶) 전도에 나섰다.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캄보디아 인들이 우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주었다. 저녁 때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 와 안산의 M센터(동남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우리 교회가 만든 센터) 출신 캄보디아인 가족들을 식당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예기치 않은 초대와 열렬한 환영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몹시 반가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귀국 후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셋째 날에는 M센터 출신이 경영하는 한국어 학원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잠시 원어민(原語民) 선생이 되어 학원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노래를 가르쳤다. 이어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120여명의 학원생들이 경청하였다. 감동이었다. 문득 '한국어 학원'이 외국인 청년 전도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우리를 줄곧 안내하였던 G선교사 부부와 프놈펜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이름 없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노 선교사 부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에는 시엠립이라는 도시에 있는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관광하였다. 석조(石造)의 사원과 왕궁은 서양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돌무더기가 되어 버린 유적은, 마치 풀이슬 같았던 솔로몬의 영화(榮華)를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28:19) 란 말씀에 용기를 내어 우선 가고 본 4박 5일의 아웃리치였다. 가서 보니 과연 거기엔 감동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우리 인생의 참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해 보게 되었다. 아웃리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014-09-24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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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8>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라, 일본 (14) - 도시락과 쟁반을 좋아해
1. 일본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도 도시락(벤또)을 즐겨 주문한다. 반면에 우리는 학교 또는 소풍 갈 때에는 싸 가지만, 식당에 가서까지 도시락을 시켜 먹지는 않는다. 일본의 도시락은 값도 제법 비싸다. 예컨대 마꾸노우찌벤또는 다른 메뉴 못지 않게 값이 고가(高價)이다. 한마디로 일본 벤또는 우리나라의 도시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자랑한다. 왜 일본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까지 벤또를 즐겨 먹을까? 늘 궁금한 의문이었다.2. 또 일본의 대중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면, 종업원은 예외 없이 1인분씩의 음식을 직사각형의 작은 쟁반에 담아 와 주문자 식탁에 놓는다. 그러면 주문한 사람은 쟁반에서 음식을 꺼내지 않고, 받은 모습 그대로 식사를 한다. 음식이 쟁반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식사를 하는 법이 없는 우리나라와는 딴판이다. 왜 일본 사람은 쟁반에서 음식을 꺼내 놓지 않고 식사를 할까? 이것 또한 궁금한 일이었다.3. 일본 사람들은 상대방의 음식에 수저를 디미는 것을 꺼려한다. 공격적인(?) 행동으로 상대방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일본 메뉴에 찌개와 같은 공용 메뉴가 거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도시락이나 쟁반으로 식사를 하면 네 것 내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안전하게 내 것만 먹을 수 있다. 공연히 남의 음식에 수저를 디밀어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릴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여럿이 함께 식당에 가더라도 각자 자기 도시락이나 자기 쟁반에 담긴 음식만 먹는 것이다.4.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시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시락이란 부득이하게 싸 가는 값싼 간이 메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나라 사람은 절대로 쟁반째 음식을 놓고 먹지 않는다. 우리에게 쟁반은 음식을 운반하는 도구(food delivery system)에 불과하다. 우리는 쟁반에 담긴 음식을 다 내려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식사를 시작한다. 쟁반의 용도가 다르다 보니 모양과 크기도 일본과 다르다. 일본은 작고 직사각형이라 식탁에 놓기 좋지만, 우리는 크고 원형 또는 타원형이라 식탁에 놓기에 불편하다. 5. 우리나라 식탁에서는 밥과 국을 제외하면 네 음식 내 음식의 구분이 없다. 모든 반찬이나 별식들이 다 공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메뉴가 찌개이다. 찌개는 여러 명이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달랑 한 그릇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다들 좋다고 같은 그릇에 숟가락을 디민다. 비위생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해야 비로소 ‘같이 밥을 먹었다’고 믿는다.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술잔을 돌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에게 식사하기란 두려움이 아니라 정(情)을 나누는 자리였던 것이다. 위생은 정(情)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문제였다.6. 내가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막내 고모님은 내 밥상머리에 앉아, “얘, 이거 한번 먹어 봐라, 이것도 참 맛있더라” 하시면서 이것 저것을 집어 주셨다. 물론 내가 귀여워서였겠지만, 나는 그 참견이 성가셔서 짜증을 내곤 하였다. 지금도 나는 밥 먹을 때 누가 건드리면 짜증을 낸다. 아내는 식당에 가면 늘 나와 다른 메뉴를 시킨 다음, 식사 도중에 내 음식에 숟가락을 디민다. 서로 다른 걸 시켜 놓고 교대로 먹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나. 그러나 나는 내 맘대로 먹는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귀찮고 싫다. 7. 문득 일본 사람들의 식문화(食文化)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일본 사람들이 도시락을 좋아하고, 쟁반째로 먹기를 좋아하며, 찌개를 먹지 않고, 술잔을 돌리지 않는 것은,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먹음으로써 상대방을 귀찮게 만드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도시락과 쟁반이야말로 상대방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는 가장 편안한 식사 방식이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일본 사람들이 도시락과 쟁반 식사를 선호하게 만든 배경이지 않았을까?
2014-09-0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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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7>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라, 일본(13) – 수동태와 동명사가 많은 일본어
나는 약창춘추 67-76, 102 및 105 (총 12회)를 통하여 ‘일본 사람은 사람 (남)을 두려워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주장을 펴 왔다. 오늘은 이러한 특징이 일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주장을 추가하기로 한다. 즉, 일본어에서는1. 명사(名詞) 앞에 ‘오’나 ‘고’를 붙임으로써 말을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차(茶)를 ‘오차’, 스시를 ‘오스시’, 벤또를 ‘오벤또’, 주문(注文)을 ‘고주문’, 끼겐(기분)을 ‘고끼겐’이라고 하는 식이다. 남이 두려우니 말이 자연 부드럽고 예의바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2. 윗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되도록 간접적으로 묻는다. 예컨대, ‘언제 오십니까?’라는 직접적인 질문 대신, “언제 ‘보이심’이 됩니까?(이쓰 오미에니 나리마쓰까?)”라는 식으로 돌려 묻는다. 상대방에게 대 놓고 묻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의 움직임을 능동태(能動態)가 아닌 수동태(受動態)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수와레마쓰’나 ‘노마레마쓰’ 처럼 동작을 수동태로 표현함으로써, 각각 ‘앉으십니다’와 ‘마시십니다’를 의미하는 경어(敬語)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우리말에도 ‘언제 뵐 수 있을까요?’가 있고, 영어에도 ‘Be seated (앉으세요)’와 같은 수동태적 표현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이들의 목적 역시 말을 예의 바르게 하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말이나 영어는 일본어만큼 수동태 동사를 많이 쓰지는 않는 것 같다. 상대방의 심기(心氣)를 건드리지 않고 말하려고 애쓰는 일본인의 모습이 보인다.3. 유난히 ‘받습니다’란 표현이 많다. 우리 같으면, ‘맛있게 먹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일본인들은 ‘이따다끼마쓰(받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따다끼마쓰’를 ‘주십시오’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받겠습니다’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또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할 것을, 일본인은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쳐 받았습니다(오시에떼 이따다끼마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생님, 다음 주에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라고 하면 되지만, 일본인에게 그렇게 말하면 무례한 통보(通報)가 된다. 그래서 ‘다음주에 폐를 끼치게 해 받겠습니다(오자마사세떼 이따다끼마쓰)’라고 말한다. 일본 음식점은 여름 휴가철이 되면 입구에 ‘3일간 쉬게 해 받겠습니다(밋까깐 야스마세떼 이따다끼마쓰)’라고 써붙인다. 우리 같으면 그냥 ‘3일간 휴업’이라고 써 붙이면 될 일인데 말이다. 이북 출신의 고 이왕규 교수님께서는 생전에 ‘내가 가르쳤다’ 하시지 않고, ‘내가 배워주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해 주었다’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일본인은 거꾸로 ‘남으로부터 내가 무언가를 해 받았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상대방이 두렵기 때문에 ‘받았음’을 강조하는 어법이 고착된 것은 아닐까?4. 동명사(動名詞)를 많이 쓴다. 앞에서도 소개하였지만, ‘언제 오십니까?’를 ‘언제 보이심(오미에)’이 됩니까?’라고 묻는다. ‘오미에’는 동사(動詞)인 ‘보다(미루)’의 명사형이니 일종의 동명사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이쓰 오까에리 데스까?(언제 돌아옴이십니까? = 언제 돌아오세요?)’, ‘오스끼데스까?(좋아함이십니까? = 좋아하세요?)’, ‘고주문와 오끼마리 데스까?(주문은 결정입니까? = 주문은 결정하셨나요?)’ 등이 있다. ‘돌아오다, 좋아하다, 결정하다’라는 동사 대신 ‘돌아옴, 좋아함, 결정함’ 등과 같은 명사형 단어(즉 동명사)를 만들어 쓰는 것이다. 게다가 ‘오’라는 접두어(接頭語)까지 붙여서! 이는 아무래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직설적인 능동태 동사보다는 명사 형태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덜 불손(不遜)해 보인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어에서 ‘사람(人, 히또)’이란 ‘남(타인)’을 의미한다. 그만큼 일본인은 남, 특히 힘센 사람들을 내심 두려워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2014-08-20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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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6> 연구자의 장기근속 - 신약개발 성공의 급소
지난 6월 20일, 슈퍼박테리아를 타깃으로 삼은 동아에스티(ST)의 항생제 ‘테디졸리드(제품명 시벡스트로)’가 파트너사인 미국 큐비스트 사의 손을 통해 미국 FDA의 신약 승인을 받았다. 국산 신약이 FDA의 승인을 받은 것은 LG생명과학의 항균제 ‘팩티브’ 이래 11년 만의 경사이다.동아ST는 어떻게 이런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동아ST는 국내 제약기업 중 신약개발 능력을 갖춘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동아ST의 전신(前身)인 동아제약이 ‘박카스’로 돈을 벌 때 ‘제약회사가 물장사로 돈을 번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아는 그렇게 번 돈을 신약개발에 투자함으로써 오늘의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 경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제약기업이 신약개발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선은 돈일 것이다. 박카스든 제네릭이든 또는 개량신약이든 돈을 벌 수 있는 품목을 개발하여 돈을 버는 것이 급선무이다. 돈이 있어야 신약개발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부는 개발된 신약에 대해 적정한 약가(藥價)로 이윤을 보장해 줌으로써 신약 개발에 도전할 용기를 낼 수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제약산업이 규제가 많은 제약(制約)산업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친 제약은 산업 자체를 고사(枯死)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신약개발의 충분 조건은 아닐 것이다.나는 ‘장기근속(長期勤續)-이 신약개발 성공의 급소(急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신약개발은 10여 년에 걸친 꾸준한 연구의 결과로 간신히 수확되는 과실이다. 그래서일까? 신약개발 강국인 일본의 경우, 신약개발 관련 직원은 평생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다. 한편 대부분의 우리나라 회사에서는 2-3년이 멀다 하고 연구개발 직원이 회사를 옮긴다. 이래가지고서는 신약 개발 프로젝트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리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동아(쏘시오홀딩스 + ST)의 경우, 총 210여명의 연구자 중 10년 이상 근무자가 약 70명(20년 이상 16명, 30년 이상 3명), 즉 전체의 32%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국내 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장기근속자가 많은 것이다. 이쯤 되는 연구소라면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서 적어도 어이없는 실험을 하느라고 시간과 돈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통해 많은 경험을 축적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장기근속’이 바로 경쟁력인 것이다. 왜 동아에 다니는 직원들은 이직(離職)을 잘하지 않았을까? 1970년대에 동아제약 연구소에 근무하던 대학 동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회장님이 연구실에 나타나서는 ‘내가 약에 대해 무얼 압니까? 다 여러분들 연구의 결과로 회사가 굴러가는 거지요’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마치 옛날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날 저녁 갑자기 KIST를 방문하여 연구원들을 난롯가로 불러 놓고 커피를 권하면서 ‘우리나라의 앞날은 여러분 손에 달렸습니다’라고 격려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다. 이런 회사라면 직원들이 경솔히 이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심껏 연구에 정진하게 될 것이다.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신약개발을 지향하는 회사라면 연구직종사자들의 장기근속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구자들에게 정년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애사심과 연구의욕에 불을 지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다고 사주(社主)가 연구에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 간섭을 인격 침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장기근속자가 많은 기업에 어떤 형태로든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펴는 것이 좋을 것이다.끝으로 사족(蛇足) 하나. 약계(藥界)는 기업이 신약을 개발하였을 때, 총리를 모시고 좀 거창한 기념식을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 리베이트 등으로 얼룩진 국내 제약기업의 대 국민이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제고(提高)하는 것도 신약개발 환경을 만드는데 중장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4-08-06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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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5> “파든?”은 안돼!
1. 1988년 미국에 갔을 때 허리가 결려 의원에 갔더니 의사가 좀 절절 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이런 증상이 있었을 때 무슨 약을 먹어서 잘 고쳤다’고 경험담을 이야기 하자, ‘We have a cousin drug’이라며 비슷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잘 나갔는데, 그 다음에 의사가 내게 무슨 지시를 하는데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쓰면 된다고 한국에서 배운 대로 “파든?”이라고 해 보았다. 그러자 의사는 자기 설명이 부족해서 내가 못 알아 들은 줄 알고 아까보다 훨씬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그는 중간 중간에 나보고 “알겠느냐(OK)?”고 확인 차 묻는데 차마 못 알아듣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작은 목소리로 “예스” 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런 난처한 상황이 몇 번인가 반복된 후 의사는 마지막으로 “오케이?” 라고 물었다. 마음 속으로는 “노” 였지만, 그 긴 설명을 다 듣고 이제 와서 “노”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듯 “예스”라고 말하고는 의원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지만, 후회막급이었다. “파든” 이라고 할 게 아니라, “아까 한 말을 그대로 천천히 한번 더 반복해 주세요”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의원을 나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몰라 고민이 되었다. 할 수 없이 한 교민 장로님께 전화를 걸어 이실직고(以實直告)하고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얼마 후 장로님의 전화를 받아보니, 며칠 후 동네 간호사 사무실에 가서 오늘 찍은 엑스레이 사진 결과를 판독하고 오라는 내용이었단다. 엑스레이 결과를 동네 간호사 사무실에 가서 보고 오라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 그래서 그 나라 문화를 알아야 말도 들린다는 말이 있는 거구나’ 깨달았다. 우리말로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영어로 들었으니 잘못 알아 들을 만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부터 나는 “파든”을 남발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2. 하루는 퍼듀 대학 약대의 복도를 지나는데 한 여학생이 현관 밖에서 날보고 도서관에 좀 들어가면 안되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Why don’t you come in?” 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나보고 “땡큐” 하면서 들어 오는 것이었다. 나는 “와이 돈츄”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 늘 신기하여 언젠가 이 말을 한번 써 먹어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날 무의식 중에 이 말이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랬더니 미국 학생이 정말 “땡큐” 하면서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작은 성공에 오랫동안 흐뭇 하였다. 3. 미국에 온지 오래 된 여자 동기생이 미국 병원 약제부에 근무할 때에, 상사가 영어를 잘못 알아듣는다고 자기에게는 일을 잘 시키지 않더란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 직장을 그만 둔 일이 있었단다. 그녀는 자기 딸에게는 이런 설움을 겪게 하지 않으려고 집에서도 늘 영어만 쓰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단다. 그 결과 딸은 영어를 미국 사람처럼 잘 하게 되었는데, 그 대신 한국말을 잘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딸이 성장할수록 한국말을 안 가르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딸을 야단칠 때에도 영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제일 갑갑하였단다. 영어는 못해도 걱정, 잘 해도 걱정인 모양이다. 한국에 사는 엄마들은 자기 딸에게 한국말로 마음껏 욕설을 퍼부어 댈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미국 FDA에 다니고 있는 내 친구 P박사의 장남은 희한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완벽하게 잘한다. 나는 그에게 “옆구리가 욱신욱신 쑤신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냐?”고 물을 수 있다. 순수 미국 사람에게는 도저히 물을 수 없는 말이다. 이렇게 두 말을 다 잘하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결코 흔하게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이다.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원수(?) 같은 영어를 철저히 박살내서 세계를 한번 마음껏 휘젓고 다녀 보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여 내가 그럴까 봐 내게 유창한 영어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다.
2014-07-23 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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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4> 영어 교육 - 아엠어 보이?
내가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음식이 별로 내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은 잘 하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으나 영어는 아직까지도 거북하기 짝이 없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영어 교육은 실례지만 좀 웃기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영어 교사는 대개 회화를 할 실력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아는 어떤 젊은 영어 선생이 1년간 휴직하고 영국에 가 있었는데, 체류 중 가장 노심초사한 것은 자신이 한국에서 영어 교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이었다고 한다. 사실 영어권에 가서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보고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외국어를 제대로 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도 제법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외국어는 당연히 원어민이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원어민 선생을 채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니, 배부른 ‘원어민’ 타령은 이쯤에서 그만 두기로 한다. 대신 한국인 영어 교사가 가르치는 ‘우리식 영어 교육’으로 논점을 좁혀 보기로 하자. 누구나 느끼듯 우리의 영어 교육은 지나치게 문법 위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회화를 잘 하는 영어 교사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어 교육 중 회화 교육의 비중이 작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작은 회화 교육마저 내용이 매우 부실하였다는 점이다언젠가 대학 후배를 만났는데 자기는 학교 다닐 때 거의 영어 회화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몇 개 배운 회화도 ‘아이 엠어 보이, 유아러 걸’ 같은 실제 미국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사용할 일이 없는 말들뿐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걸 배우고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여태까지 미국 사람을 만나 ‘아이 엠어 보이’라는 말을 주고 받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를 말해야 알 사항이란 말인가? ‘몇 개 안 되는 회화라도 실제로 쓰임새가 있는 말을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 후배의 말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이었다. 며칠 전 우리말을 잘하는 어떤 외국인이 티브이에 나와, ‘한국인은 사람을 처음 만나면 몇 살이냐, 결혼했냐, 아이는 몇이냐? 등 서양 사람들은 여간 해서는 묻지 않을 질문들부터 한다며 이상해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심이 있지만, 미국인들은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영어부터 배우고 있는 셈은 아닌지 모르겠다. 1988년에 미국 인디애나주 라피엣시에 갔을 때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보건소에 전화를 걸 일이 생겼다. 큰 용기를 내서 걸었는데, 갑자기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데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당황하면 대개의 한국 사람들이 그러듯 나도 “예스” 하면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아마 ‘끊지 말고 기다려라 (홀드온)’고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겨서 할 수 없이 끊었었다. 미안하다’고 하며 태연한 척 변명을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미국에 이민 가서 20년 이상 텍사스 주의 한 병원 약제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친구와 함께 차를 탄 채로 맥도날드의 드라이브 스루 주문 창구에 들어 가 햄버거를 주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문을 받은 종업원 아가씨가 스피커를 통해 뭘 되묻는데 나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쟤가 지금 뭐라는 거냐?” 고 물었더니 이 친구 왈, 자기도 모르겠단다. “에?” 나는 놀라서 “아니 미국에 산지 20년도 더 된 친구가 이런 간단한 영어도 못 알아 듣냐?”고 했더니, 이 친구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야, 사실 나 못 알아듣는 영어 많아” 하는 것이 아닌가? 아!!결론은 우리나라 학교에서 “아이 엠어 보이” 따위를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참, 미국에 가 보니 ‘맥도날드’가 아니고 ‘맥 다널드’가 맞는 발음이었다. 으이구! 뭘 하나라도 제대로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끝으로 이상의 내용은 내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름을 밝혀두는 바이다.
2014-07-09 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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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3> ‘때문에’와 ‘덕분에’의 차이
1. “과일 중에서 가장 뜨거운 과일은?” 지난 봄 교회 수련회에 갔을 때 열린 퀴즈 대회에서 나온 문제이다. 순간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천도 복숭아”라고 외쳤다. 며칠 전 일곱 살짜리 큰 손녀 예나가 알려 준 적이 있어서 답을 알고 있던 문제였다. 조그만 상품을 타고 돌아 온 나는 예나를 만나 고마움을 표하였다. “예나야, 너 때문에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퀴즈를 맞혀 선물을 받아 왔다. 고마워”. 그랬더니 예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그런 때는 ‘예나 때문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예나 덕분에’라고 해야 하는 거야, 그것도 몰라?” 손녀한테 멋지게 한방 먹었지만 손녀 바보인 나는 ‘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까?’ 신통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2. 6월 8일 저녁,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주제가 바로 ‘때문에’와 ‘덕분에’ 이었다. 설교 내용은 신기하게도 예나의 말과 닿아 있었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과일인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었다. 이에 하나님이 노(怒)해서 물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쩌다가 그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제게 그 열매를 주어서 제가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브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이브가 답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뱀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인류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평생 수고하며 산 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3. 구약의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자신이 싫어하는 큰 성읍인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 명령을 피해, 욥바(현 텔 아비브)에 가서 배를 타고 다른 도시인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스라엘 땅에서만 유효한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요나가 탄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였다. 사람들은 왜 이런 풍랑이 일었을까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요나는 이 풍랑이 자신의 불순종에 기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함께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풍랑이 일어난 것은 나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져 버리세요. 그럼 풍랑이 잔잔해 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정말 사납던 바다가 곧 잠잠해졌다. 요나가 ‘나 때문’ 이라고 인정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너 때문이야’ 라고 둘러대니 온 인류가 화(禍)를 입게 되었고, 요나가 ‘나 때문이야’라고 인정하자 그 ‘덕분에’ 모든 승객이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혹시 이 말씀이 세월호 사고에도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 때문이야’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너 때문이야’라고만 하는 세상이라면 사고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성경에서 ‘덕분에’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신 ‘덕분에’ 온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받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덕분’은 실로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가 예수님의 전후(前後)로 BC와 AD로 갈라지게 된 것일 것이다.5. 끝으로 예나의 깨알 자랑 하나를 추가하기로 한다. 봄날 어린이 집 뜰에 핀 노란 꽃 하나가 쉽게 지는 걸 보고 아쉬워 하는 예나에게, 내가 위로의 말을 하였다. “예나야,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란다. 알겠지?” 그랬더니 예나가 바로 되물었다. “왜? 하나님 계시잖아?” “으윽” 나는 즉시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 드렸다. “하나님, 제 얕은 믿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손녀 손자와의 일상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뵙고 사는 요즘이다.
2014-06-25 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