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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2> 로봇 인간 시대
TV를 보면 인간들이 로봇과 세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영화가 종종 방영된다. 나는 그런 영화가 나오면 즉시 채널을 돌려버린다.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를 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교회의 장로수련회에서 한 미래학자의 특강을 들어 보니, 그 영화의 내용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란다. 30년 이내에 실제로 그런 시대가 오게 된단다. 즉 사람 몸의 일부가 로봇 장기(臟器)로 대체될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기능마저 갖춘 로봇 인간들이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그 강사는 그런 로봇 인간 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를 묻고 있었다. 강의를 들으며 잠시 세상의 변화를 되돌아 보니, 길지 않은 내 인생 66년 간에도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72년까지 내 고향 경기도 김포의 새텃말에는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깜깜한 저녁을 깜빡이는 등잔불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동네에 1985년엔가 전화가 가설되었다. 그것도 심지어 집집마다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었다. 영국 런던 출장 길에 시골집에 첫 전화를 걸었을 때, 그 먼데까지 또렷이 들리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약대 교수님이 여러분 계셨다.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당시에는 부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었다. 그러던 전화기가 1985년에는 드디어 우리 집에까지 설치될 정도로 보편화 되었다. 얼마 후에는 소위 ‘삐삐’라는 것이 나와 아무데서나 사람을 호출할 수 있게 되었다. ‘삐삐’는 뒤이어 나온 휴대폰에 밀려 짧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마침내 오늘 날에는 모든 사람이 개인용 전화기를 휴대하고 활보하는 문자 그대로 ‘개인 통화’의 시대가 되었다. 1979년 유학을 간 일본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에는 컴퓨터란 주로 계산을 하기 위한 기계이었다. 그러던 컴퓨터에 언제부터인가 인터넷 기능이 탑재되면서,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더욱 급속한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통신과 정보가 흘러 넘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기능은 지금 휴대폰에까지 탑재되었다. 그래서 휴대폰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전화기가 아니다. 터치만 하면 카메라가 되고 시계가 되며, 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신문, 방송, 영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 기계가 된다. 나만해도 요즘 휴대폰의 유튜브를 통해 온갖 가수들의 온갖 음악을 자유자재로 즐기고 있을 정도이다. 이제 휴대폰은 만능기(萬能機)나 전지전능기(全知全能機)로 그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말로 60년 전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대단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돌아보면, 앞으로 30년 이내에 로봇 인간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그 때에는 로봇 인간이 대통령이나 시장으로 뽑히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떻게 믿어야 할까? 혼란스럽기만 하다. 강사는 말하였다. “이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기독교는 변해서는 안될 본질(本質)은 굳게 지키되, 변해도 괜찮은 형식(形式)은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고.본질을 지키는 것이 어찌 종교에서만 중요한 일이겠는가? 문제는 형식에 가려 있는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형식은, 본질과 균형을 이루고 있기만 하다면, 결코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본질을 지켜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로봇 인간 시대의 도래(到來)로 상징되는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삶의 본질적 가치는 무엇이고, 또 받아들여야 할 변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방금 투표한 지방 선거는 이 질문에 무슨 대답을 줄 수 있을까? 그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간구해야 되겠다.
2014-06-11 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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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1> 국가복원력 (國家復元力)
1. 역주행 (逆走行)운전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주행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들이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자니,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뉴스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니 조심하세요”. 전화를 받은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그런데 한두 놈이 아니다”. 2. 빵 장수와 버터 장수어느 빵 장수에게 매일 아침 버터를 납품해 주는 시골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빵 장수는 버터의 양이 정량(定量)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농부를 법정에 고소하였다. 재판관이 농부에게 물어보니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어서, 농부는 그저 빵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 납품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빵 장수가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자신의 빵의 무게를 조금씩 줄였던 것이다. 농부는 줄어든 빵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잘라 납품하다 보니 자연 원래 계약된 양보다 적은 양의 버터를 납품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판관은 농부가 아닌 빵 장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3. 알았시유충청도 사람들은 유순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러나 결코 남의 말에 쉽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는 않는다. 충청도 사람을 조금 길게 설득하려 들면 거의 예외 없이 “알았시유”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성미 급한 상대방은 그 말을 ‘예스’로 받아 들여 기쁘게 돌아 간다. 얼마 후 상대방은 그 일이 진행되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충청도 사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진다. 그러면 충청도 사람은 “내가 언제 한다고 했나유? 그냥 알았다고 했지”라고 대답한다. 충청도에서 “알았시유”는 ‘예스’나 ‘노’가 아니다. 그냥 ‘당신이 말하는 취지는 알겠으니 이제 그만 말해도 좋겠다’는 뜻일 뿐이다. 오늘날 ‘알았시유’는 ‘답답해서 속 터지는’ 대답쯤으로 비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알았시유’는 ‘노’ 라는 거절보다는 한결 덜 매몰차고, ‘예스’라는 즉흥적 긍정보다는 한결 신중해 보인다. 4. 오뚜기오뚜기는 밀면 잠시 넘어지지만 곧 바로 다시 선다. 이런 현상을 보고 ‘복원력이 크다’고 한다. 복원력이 큰 것은 무게의 중심이 몸의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다면 한번 쓸어지면 다시 서지 못할 것이다. 태권도 등에서 대련(對鍊)시 하복부에 힘을 주라고 강조하는 것도 복원력과 관련 있지 않을까? (고찰) 첫 이야기는 자기가 역주행을 하면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부끄럽게도 나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세월호 사고를 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남의 잘못이 실은 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회개의 이야기이다.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를 친구가 보내주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알았시유’ 처럼 포용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소개하였다. 어쩌면 ‘알았시유’는 외교적인 수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우연일 뿐일까? 외교의 정점(頂点)인 유엔의 사무총장을 충북 출신의 반기문 씨가 담당하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낮은 무게 중심에 오뚜기의 높은 복원력의 비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후에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신속히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충청도 사람들의 오뚜기 기질 덕분이라고 하였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평형수(平衡水)를 덜 채워 정상 위치로의 복원력(復元力)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도 국가적 복원력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형수를 채워 넣어 정상(正常) 국가로의 복원력을 키울 수 있을까? 백가(百家)가 쟁명(爭鳴) 중이지만, 나는 ‘내가 아닌 남의 시각으로, 나부터 돌아 보고, ‘알았시유’의 포용력을 갖고, 오뚜기처럼 내 스스로의 무게 중심을 낮추는 것’이 한 방법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
2014-05-28 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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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50> 안전사고위험 신고전화 911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세월호 사고에 분노하고 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비인간적이고 어이없는 대처, 생존자 구출에서 보인 정부의 우왕좌왕함, 그리고 배 회사 오너의 비리 등 때문이다. 한편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고 희생자들의 빈소를 찾아 애도하고 있다. 우리는 역시 남의 불행에 함께 울고 함께 분개하기를 잘 하는 감성이 넘치는 민족인가 보다. 대통령은 사고 발생 후 20일도 지나지 않아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부기관이 없어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발표 역시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감성적 대처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큰 사고를 맞아 함께 울고 분노하는 것 같은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람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쪼록 이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에 빠져 있는 유족들과 국민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싸매지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앞으로 이러한 사고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사고의 재발은 이러한 감성적인 대응만 가지고는 막을 수 없다. 재발 방지 대책은 감성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같은 대참사를 겪고도, 합리적 대책을 수립하지 못 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떤 사안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데에 좀 서툰 민족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自愧感)마저 든다. 우리가 만약 이성적 대처에 서툰 민족이라면, 이를 부끄럽다고 감추려 들지 말고, 오히려 솔직히 드러내 놓고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그럼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성적 대처는 무엇일까? 나는 약창춘추 149를 통하여,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1) 각종 매뉴얼의 내실화와 (2) 매뉴얼 준수의 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안한 바 있다. 오늘은 ‘안전 사고 위험을 발견한 사람이 사전에 신고하는 제도(사전신고제, 事前申告制)’의 도입을 추가로 제안해 보고자 한다.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며칠 전 모 일간지에 쓴 기자의 말처럼, 각종 매뉴얼을 무시하고 살고 있는 안전불감증 환자 들이다. 그러면서도 “설마 재수없게 내가 탄 배가 침몰하겠어?” 와 같은 안일 (安逸)함으로 오늘을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가 국가적인 큰 사고가 발생하면 모두 일어나 사고를 일으킨 사람에게 돌을 던지곤 한다. 그러므로 이번 사고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첫 번째 교훈은, 남에 앞서 내 자신의 안전불감증부터 고치는 것이다. 한번 우리 집, 학교, 배, 버스, 전철, 병원 등 내 주변을 둘러 보자. 장담컨대 안전 사고 측면에서 보완하거나 고쳐야 할 곳이 도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의 학교 교실 문은 안에서 바깥쪽으로 아무데나 밀면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실 문은 반드시 손잡이를 찾아 돌려야 열리기 때문에, 불이 나 앞이 잘 안 보일 경우에는 사실상 문을 열기 어렵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지하에 있는 유아부는 출입구가 너무 비좁다. 수많은 가구가 몰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소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집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낸다. 그래서 안전 사고 위험이 있어 보이는 시설이나 상황을 신고할 수 있는 ‘사전신고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고가 났을 때 거는 전화 번호가 119 이니, 사고가 나기 전의 사전신고 번호는 911로 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 신고를 생활화 하기 위해서 신고자에 대해 보상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신고를 받은 당국은 즉시 전문가를 파견하여 위험도를 평가한 다음, 개인이나 기업, 공공기관, 지자체 또는 국가로 하여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사고를 마지막 기회로 삼아 각고의 노력으로 완벽한 사고방지책을 세워야 한다. 이에는 정부가 앞장을 서는 것이 좋겠지만, 국민들도 혼연일체가 되어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2014-05-14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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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9> 매뉴얼, 매뉴얼 !!
지난 4월 16일, 제주도 수학여행길의 고등학생들을 비롯한 승객 476명이 탄 배 ‘세월호’가 침몰하는 큰 사고가 발생하였다. 국민들은 우선 사고의 엄청난 크기에 놀랐다. 승선자 중 구조된 사람은 174명에 불과하였다. 무어라 사고 당사자 및 가족들을 위로할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다. 다음으로는 탈출을 진두 지휘했어야 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앞장선 도망 소식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우리의 민도(民度)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가? 끝으로 사고 일주일 째인 4월 22일 현재까지도 실종자의 대부분을 구조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 등 관계 당국의 우왕좌왕과 느린 구조에 분개하고 있다. 안전행정부가 있는 정부가 이 정도로 무능할 수 있는가? 그나마 작은 희망은 민간 잠수부를 비롯한 5천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현장에 모여들어 헌신적으로 인명 구조 등을 돕고 있다는 뉴스뿐이다.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철저한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방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매뉴얼(manual)’을 개혁하고 ‘매뉴얼을 지키는’ 것이 재발 방지책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매뉴얼이라고 하면 역시 ‘매뉴얼 공화국’인 일본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는 지진 등 예상되는 거의 모든 사고에 대비하는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대지진 사고를 당했을 때, 그들이 대처한 특정 방식은 우리에겐 사뭇 답답한 것이었다. 그것은 재난 지역 주민들에게 상당 기간 마실 물을 공급하지 않은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런 경우에 물을 공급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같으면 헬리콥터에 물병을 싣고 가서 하늘에서 떨어뜨리면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런 사고로부터 ‘비상시에는 매뉴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적당히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응을 해야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아! 아주 드문 천연재해까지 고려하여 매뉴얼을 보완해야겠구나’라는 정반대의 교훈을 얻었을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왜 그토록 매뉴얼을 중시(重視)할까? 첫째는 매뉴얼대로 대처하면 사고를 막을 수 있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음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티브이를 보니 ‘일본의 경우 작년 해난 사고의 구조율이 94%'라는 자막이 보인다. 매뉴얼 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의 것을 번역하는 식으로 매뉴얼을 급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매뉴얼을 만드는 자세부터 성실하게 배워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고 관련자들이 매뉴얼에 따라 조치한 경우에는 면책(免責)을 받지만, 제멋대로 조치하면 엄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매뉴얼은 그저 참고 사항일 뿐이었다. 매뉴얼대로 조치했는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그러므로 우리가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매뉴얼의 개혁’하고 ‘매뉴얼의 준수’ 해야 한다. 우선 매뉴얼의 개혁은 현장에서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현장에 근무하는 사람들 (이번 경우는 선장 및 선원들)의 의견을 100% 반영해서 정비해야 한다. 표현이 애매하거나 다른 규정 또는 매뉴얼과 상충(相衝)되는 매뉴얼은 고쳐야 한다. 현장에서 따를 수 없는 매뉴얼은 매뉴얼 경시 (輕視) 풍조를 낳을 뿐이다. 대책의 두 번째는, 사고 시 관계자가 매뉴얼대로 조치하지 않았을 경우 엄중(嚴重)하게 책임을 묻는 일이다. 다소 심하게 말하자면, 매뉴얼대로 조치한 경우에는 사고 규모가 아무리 커도 관계자의 책임을 가볍게 해 주지만, 반대로 섣부른 임기응변으로 조치한 경우에는 설사 사고 규모가 다소 작아졌더라도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매뉴얼을 따르는 버릇이 전 국민적으로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대형 참사의 슬픔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의 빛을 찾아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2014-04-30 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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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8> 규제개혁이 성공하려면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개혁을 강조하는 ‘끝장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매스컴들은 역대 정부치고 규제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정부가 없었지만, 그 모든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고 보도하였다.
나는 ‘규제개혁’이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는 철로(鐵路) 위로만 다니게 되어 있다. 다니는 길을 철로로 제한하였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규정(規定)은 기차의 운행에 대한 일종의 규제(規制)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로 밖에서 달렸다가는 전복 사고가 일어 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이 규정은 기차를 안전하게 다니게 해 주는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규정까지도 규제로 몰아 개혁하려고(없애려고) 시도한다면, ‘규제개혁’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식약청에 근무하던 시절, 같은 사안(事案)에 대해 지방청에 따라 정반대로 정책을 집행하는 사례가 있었다. 한 지방청에서는 ‘가능’하다고 보는 사안에 대하여 다른 지방청에서는 ‘불가’하다고 판단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규정의 서술이 애매하거나 다른 규제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갑(甲)의 입장에 있는 정부가 법률이나 규정(법규, 法規)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먼저 해당 부서가 법규의 안(案)을 만든 다음, 이 법규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을(乙), 즉 회사나 국민에게 일정 기간 입법예고(立法豫告)를 한다. 그 다음 을의 의견을 수렴 반영하여 법규를 확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흐름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만 법규의 안이 부실(不實)하게 만들어지는 점, 그리고 입법 예고 기간에 을로부터 적절한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 같다. 안(案)이 부실하게 만들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좀 말하기 거북하지만, 우리의 민족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우리는 모든 일을 대충 하는 버릇이 있다. 적어도 일본 사람들에 비해 보면 분명히 그렇다. 안(案)이 부실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일부러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게 만들어 놓아야 갑의 재량(裁量)의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란다.
법규가 부실하게 만들어지는 세 번째 이유는 을(乙)이 입법예고 기간에 잘 검토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민족성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장 자기 업무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규정을 미리 꼼꼼하게 검토하는 버릇이 없다. 그래서 입법예고 기간 중에는 “별 의견 없습니다”라고 회신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막상 그 규정의 적용을 받게 되면, 이미 발효된 규정이 “엉망이다. 지나치다. 다른 규정과 모순된다“ 등의 불평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공무원은 이미 발효된 규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규는 처음에 안을 만들 때부터 꼼꼼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가적인 캠페인을 해서라도 ‘대충대충’ 만드는 민족적(?) 버릇을 없애야 한다. 다음으로는 갑(甲)은 입법예고 기간을 좀 더 능동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법에서 정한 입법예고를 하였다는 소극적인 입장의 정당성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수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을(乙)을 찾아가 을의 의견을 정성껏 들어야 한다. 예컨대 을들로 하여금 일정 장소에서 일정 기간 동안 법규 안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잘 만든 규정은 장해물이 아니라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규정은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을에게 도움이 된다. 예컨대 세계적인 바이오 신약을 개발하려고 하는데 우리에게 승인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신약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규제개혁이란 뜻이 애매하고 모순투성이인 ‘나쁜 규제’를 뜻이 분명하고, 기존의 규제와 충돌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따를 수 있는 규정으로 정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규제 개혁이라면 실패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2014-04-16 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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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7> 베토벤과 신데렐라의 몰락
(사건 1) 지난 2월 7일 회사 업무로 일본 미야자키에 갔었을 때 일본 TV와 신문은 소위 ‘디지털 시대의 베토벤’ 사기 사건으로 법석을 떨고 있었다.일본에 사무라고치 라는 천재적인 작곡가가 있었다. 그는 후천적 귀머거리 행세를 하면서 ‘히로시마 교향곡 제1번’ 등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여, 수많은 일본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디지털 시대의 베토벤’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었다. 그랬는데 최근 모 방송국이 사무라고치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 음악대학의 시간 강사인 니이가키 라는 사람이 기자회견을 열고, ‘사무라고치는 귀머거리가 아니며, 그 동안 그가 발표한 음악들은 전부 자기가 대신 작곡해서 바친 것’이라는 폭탄성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년 동안 약 700만엔을 받고 20곡 이상을 작곡해 ‘베토벤’에게 받쳤다고 한다. (사건2) 지난 1월 28일 일본 고베(神戶)의 이화학연구소 소속 오보카타 하루코(30) 연구주임이 몰려든 기자들에 둘러싸인 채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이날 체세포를 약산성 용액에 25분간 담그는 것만으로,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어떤 세포로도 자라날 수 있는 만능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이를 ‘스탭(STAP•Stimulus―Triggered Acquisition of Pluripotency, 자극 유도만능) 줄기세포’라고 명명하였다. 이 줄기세포는 기존의 유도만능 줄기세포에 비해 암으로 변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데다 제작 방법도 간단해 인류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꿀 발견으로 평가 받았다. 이튿날인 29일에는 권위 있는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에 같은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 일본 언론들은 ‘만능세포 대변혁, 세계가 흥분’, ‘생물학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며 오보카타의 연구 성과를 대서특필하였다. 2011년 유도만능 줄기세포(iPS)로 노벨상을 받은 교토대학의 야마나카 신야 교수도 STAP 줄기세포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미모의 오보카타는 곧 ‘연예인급’ 명사가 되었다.상황이 반전된 건 불과 보름 만인 2월 13일이었다. 인터넷 과학사이트 등에서 “논문에 부자연스러운 이미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3월 10일에는 논문 공동저자인 와카야마 데루히코 [야마나시(山梨)대학] 교수마저 공개적으로 논문 철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환호했던 일본 여론이 싸늘하게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오보카타는 마침내 14일 논문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젊은 여성 과학자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일본판 ‘황우석 사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묵상) 사무라고치 사건을 듣고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18년이나 들키지 않고 귀머거리 행세를 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사람이 아무리 귀머거리 행세를 하려고 해도 무슨 소리가 들리면 무심코 반응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18년이나 들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가 대중들 앞에서 강연도 하였다고 하니, 그의 감쪽같은 연기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은 내 지론대로 일본인이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긴, 일본이니까 생길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아마 다른 나라 (특히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보는 사람이 하도 많아 결코 한 달도 귀머거리 행세를 지속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오보가타 사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경쟁심과 명예욕이 빚은 사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논문을 철회한 것은 사진이 중복으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사소한(?) 잘못 때문으로, ‘STAP 세포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라는 견해도 있는 모양이므로 사태를 조금 더 지켜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은 생전에 설교를 통해 “들킨 죄인은 감옥에 있고, 안 들킨 죄인은 여기에 계시다” 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 때 온 좌중이 다 크게 웃었지만, 나는 내심 가슴에 찔리는 바가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점점 더 깨달아 가는 요즈음이다.
2014-04-03 1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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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6> 세월이 약이겠지요
가수 송대관 씨가 부른 ‘세월이 약(藥)이겠지요’라는 노래가 있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지나야 회복되는데, 세월은 유수(流水)처럼 또는 화살처럼 빨리 흐르니 좀 참고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세월의 속도는 연령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젊어서는 느리게 지나갔던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은 20대에는 시속 20킬로로 지나가고 60대에는 시속 60킬로로 지나간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나이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소풍이나 방학 날을 기다리기가 몹시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릴 때는 방학도 무척 길었던 것 같다. 내가 일생 중 정말 시간이 안 가서 지루해 미칠 뻔 했던 것은 1971년 군대에 갓 들어 갔을 때이었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기성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제대 말년(末年) 고참병(古參兵)들이 내게 말하였다. “야, 너 제대하려면 얼마 남았냐? 군대 생활 무지 고되거든. 그래서 말인데 웬만하면 탈영해라” 고. 사실 그들도 지루함을 잊기 위해 나 같은 후임 병(後任 兵)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고참들의 놀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간은 지루함 그 자체이었다. 그 때 내무반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 달력에는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해가 되어 다시 걸린 새 달력 12장과, 그리고 또 그 다음해의 달력 12장도, 달랑 내 휴가일 외에는, 역시 내게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아, 그 지독한 무료 (無聊)함이란! 세월이 약이라면 그 때의 세월은 매우 오랫동안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약이었던 셈이다.
그 다음해인 1974년, 그 해 달력에는 드디어 내가 제대하는 날이 들어 있었다. 마침내 달력이 비로소 나와 상관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는 달력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제대할 날을 크게 동그라미를 쳐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며칠 남았나’를 세어 보곤 하였다.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는 ‘우리 제대까지 라면 몇 그릇 남았지?’ 하면서 희망을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군대의 매주 일요일 점심 메뉴는 라면이었다. 그래서 ‘제대까지 라면 열 그릇 남았다’고 하면, 이제 10주가 지나면 제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70일보다 열 그릇이 덜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라면 그릇 수’로 제대 날을 손꼽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훗날 내가 교수가 되어 보니 어느새 세월이 많이 빨라져 있었다. 어렸을 때와 달리 눈 깜작 할 사이에 방학이 지나버리는 것이었다. 요즘은 세월이 더 빨라진 느낌이다. 올해도 어느새 3월이란다. 나는 때때로 내가 어렸을 적 세월보다 요즘의 세월이 실제로 더 빨리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혹시 예전보다 지구의 자전(自轉) 속도가 빨라진 것은 아닐까?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외에 누가 절대시간을 완벽하게 알 것인가?
얼마 전 티브이에서 김종필 전 총리가 ‘내가 이제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 과정 중 병(病)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를 보니 세월이란 ‘생로병사’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연세가 고령이신 분들도 과연 ‘세월을 약’이라고 생각하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기독교에서는 믿는 사람이 죽으면 본향(本鄕)인 천국으로 돌아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발인(發靷) 의식을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歸去)’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죽으면 어디로 돌아 간다는 말일까?
어쨌거나 세월의 끝에 ‘본향으로의 돌아감, 즉 귀향(歸鄕)’이 기다리고 있다면, 세월이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완벽한 약’이 아닐까 한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2014-03-12 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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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5> 버킷 리스트
몇 년 전 교회에서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란 영화를 보았다. 우연히 같은 병실을 쓰게 된 늙은 두 남자는 죽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동안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일’, 즉 자신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일들을 해 보기 위해 병원을 뛰쳐나가 여행길에 오른다.
멋진 사냥하기, 문신해 보기, 카레이싱, 스카이다이빙,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을 해 보면서 리스트를 지워나가기도 하고 추가해 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두 사람은 인생의 기쁨과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대사 중에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후행로(死後行路, 천국 또는 지옥)가 결정된다는 이집트 속담이 소개되기도 한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아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사랑만큼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 아니었나 한다.
최근 미국 포틀랜드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K 목사님의 설교를 서울에서 들으며, 문득 내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생각해 보았다. 며칠 전 나는 온열(溫熱) 매트 한 개와 카메라 한대를 샀는데, 이것들을 사기로 마음 먹고 기다린 일주일이 매우 행복하였다. 그것은 결코 물건 자체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매트는 허리 아픈 데에, 카메라는 인증 샷 찍는데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보다는 오래간만에 ‘무언가 사고 싶은 게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사실 나는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새로운 버전의 휴대폰이나 카메라, 등이 발매되어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랬는데 최근 누군가의 유혹으로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긴 것이다.
내 버킷 리스트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니 우선 일본의 좋은 온천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 외에는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일들이 꼬물꼬물 떠오른다.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지만 명예욕과 재물욕도 리스트에서 발견된다. 자식들로부터 효도도 받고 싶다.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도 듣고 싶다. 무엇이 가장 큰 글씨로 리스트에 쓰여 있나 자세히 살펴 보니, ‘육신의 건강과 평강 나아가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버킷 리스트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리스트를 둘러보니 모두 ‘노력은 하지 않고 편안하게 누리고 싶은 것뿐’ 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약간의 허무주의 내지는 우울증에 빠진다. 그래서일까? 서운한 일도, 삐칠 일도 많아진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는지 예민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이 사람들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면서도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첫 성령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전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너는 내가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류를 위해 십자가마저 감당하실 수 있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것은 삶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지식이나 이성은, 사랑에 비하면, 쓰레기처럼 초라해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사랑은 종종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그 힘이 위대하다.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랑 결핍증 환자들’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 확신할 수 있다면, 마치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버킷 리스트는 과연 무엇일까? K 목사님 설교가 계속 귀에 맴돈다.
2014-02-26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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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4> 연구는 리-써치 (research)?
작년 8월 21일자 조선일보에 크게 게재된 바 있지만 서울약대는 전 세계 약대 중 교수 1인당 논문 발표 건수가 가장 많은 대학이다. 사실 서울약대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쭉 일등을 해 오고 있었다. 세계 1등이라!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내가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던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약학 논문이 국제 학술지에 실리는 일 자체가 꿈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약학 연구 수준은 그 정도로 형편 없었던 것이다.
1979년 동경대학 박사 과정에 유학을 가보니 동경대학에서는 이미 국제 잡지에 약학 논문을 많이 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당시에는 국제논문 게재가 매우 기쁜 일이었다. ‘제제학 교실’에서는 연말이 되면 대학원생 1명이 사용한 연구비와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수를 표로 만들어 공개를 할 정도이었다.
그 때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연구 논문을 ‘impact factor (IF)’를 가지고 평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제법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 학술지 평가 회사가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의 영향력을 비교하기 위하여 IF란 지표(指標)를 개발한 이후 상황이 급변하였다. IF는 학술지에 발표된 어떤 논문이 얼마나 많은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인용되었는가를 세어 봄으로써 그 학술지의 영향력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다. 학술지에 따라 IF의 값은 1 이하에서부터 20 이상에 이르기 까지 큰 편차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까지는 그저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를 가지고 연구자의 연구 역량을 평가하였다. 소위 양적(量的) 평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IF를 가지고 논문을 평가하게 되었다. 소위 질적(質的) 평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예컨대 IF 2인 학술지에 논문을 5편 게재한 것 보다 IF 10인 학술지에 논문 1편을 게재한 것을 더 알아주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IF로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 되었다. 연구자 집단이 작은 분야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이를 인용하는 연구자 수가 적기 때문에 자연 그런 학술지의 IF는 아무리 논문의 질이 높더라도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IF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도 끊임없이 개발 제안되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논문의 양보다 질로 연구자를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고, 더구나 논문의 질도 숫자로 정량화(定量化) 하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IF가 높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논문을 쓰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 ‘연구의 속성(屬性)’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연구를 영어로는 “리-써치 (re-search)”라고 하는데 이는 누군가가 한번 이상 뒤졌던 (search) 주제를 ‘다시 뒤지는 일 (re-search)’이 연구란 뜻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란 ‘넝마주이’처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뒤지는 일’이 ‘연구’라면 연구를 통해 정말 새롭고 쓸만한 발견을 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왜 남들이 이미 뒤졌던 주제를 리-써치 (다시 뒤지기) 하는가? 그것은 논문을 빨리 쓰라고 강요하는 주변의 끊임없는 압력의 때문이다. 그 압력은 때로는 승진(昇進)으로, 때로는 연구비로 나타난다. 심지어 연구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신설 약대마저 교수보고 논문을 내라고 들볶는다. 이제 논문을 쓰지 않는 과학자는 사라지게 되는 (Publish or Perish)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다못해 찌그러진 깡통 하나라도 찾아낼 가능성이 있는 쓰레기더미를 리-써치 할 수 밖에.
나는 우리나라의 약학 논문이 조만간 그 질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먼저 지나치게 논문 쓰기를 채근하는 연구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한다. 입춘(立春)이 지났으니 날씨도 곧 따듯해지지 않겠는가?
2014-02-12 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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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3> 시큰둥하게 맞이했다간 큰일
최근 어떤 노총각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 친구 (여친)와 부모 허락 하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후 여친 집에 정식으로 인사를 갔더니, 돌연 여친의 부모가 이것 저것 심문하듯 캐 묻더란다. 그리고 며칠 후, 결국 여친으로부터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 세대로서는 아연실색 (啞然失色)할 이야기이다.
문득 아내를 처음 우리 부모님께 인사 드렸을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속으로는 며느리 감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결혼은 중대사이니 신중하게 생각해라” 라고 조금은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아마 우선은 시아버지의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며느리 감이 마음에 들어도 시아버지가 대놓고 ‘좋다’고 하기는 좀 ‘거시기’ 한 것이 우리네 체면 아닌가? 게다가 좀 더 잘난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당시의 아버지로서는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모는 결코 그런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 (持論)이다. 오늘날의 부모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우선 부모들은 그 자리가 며느리 (사위)감을 보고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갑 (甲)의 자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건 아주 옛날 고리짝 이야기이다.
애들이 인사를 왔다면 이미 그들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이다. 요즘같이 결혼하기 어려운 시대에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런데 거기다 대고 감히 며느리 감이 어떠니 저떠니 함부로 (?) 부모 의견을 말해?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후의 일을 한번 미리 예상해 보자.
(경우 1) 부모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성사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천만 다행이긴 하지만, 부모는 자기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60대 할머니를 만났더니, 옛날에 자기가 첫 인사를 드렸을 때 시어머니 자리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는데, 그 생각만 하면 다 늙은 지금에 와서도 팔순 시어머니한테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식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어짜피 결혼을 시킬 요량이면 공연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후환 (며느리의 박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우 2)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 때에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요즘같이 결혼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 새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닥하면 내 자식이 끝내 결혼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못난 자식은 부모에 대한 반발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려 들기도 한다. 이 경우 부모는 자식이 결혼하지 못한 (또는 안 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된다.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혹시 운 좋게 새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경우에도, 처음 데리고 왔던 사람보다 부모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확률은 별로 높지 않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듯 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수도 있다.
(결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결혼의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부모가 첫 인사 온 며느리 (사위)감에게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아주 간단 명료하다. 보자마자 “아이구 이처럼 훌륭한 배우자 감을 데리고 나타나다니 내가 정말 복이 많구나.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열렬히 환영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선 보는 자리는 어찌 보면 부모가 사위 (며느리) 감에게 인사를 드리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부모는 을 (乙)이다. 부모는 내 자식이 누구를 데리고 나타나더라도 오직 ‘열렬히’ 환영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따야 한다. 그래야 여생 (餘生)이 순탄하다. 1인자에게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가 큰 화를 당한 북한의 누구처럼 되지 않으려면,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을인 부모는 갑인 아들 딸을 오직 “열렬히 환영” 하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 어쩌다 세상이 이리 되었나’ 하는 개탄은 자식들을 다 결혼 시킨 후 천천히 해도 결코 늦지 않다.
2014-01-29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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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2> 근하신년
지난 한해도 그야말로 다사다난, 즉 기쁜 일과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다시 이렇게 무사하게 새해를 맞게 되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믿는다.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우선 지난해 여름 학교를 정년퇴직하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1994년 5월 16일에 직장암 3기로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정년퇴직’이라는 것은 꿈만 같은 신기루였는데, 그 꿈이 작년 8월말에 실현된 것이다. 그야말로 “dreams come true”였다. 게다가 나는 제자들이 마련해 준 거창한 정년 기념연을 받기까지 했다. 기념연에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정년을 맞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 인사말을 했는데, 솔직한 내 마음의 표현이었다.
정년 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전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내 인생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앞으로의 인생에도 은혜가 함께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작년 9월부터 모 회사에 고문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능력이 부족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최선을 다 해 조금이라도 회사에 도움이 되도록 기도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 교회의 금년도 표어는 “은혜 (恩惠)와 진리 (眞理)”이다.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그 균형은 은혜와 진리가 50%씩을 차지하는 균형이 아니라, 각각이 100% 이면서 이루는 균형이라야 한단다. 은혜란 무엇일까? 아마도 죄인 또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진리란 무엇일까? 목사님은 옳은 것을 추구하는 의(義)라고 설명하였다.
은혜는 사랑이니까 참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의 모든 죄를 무조건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하나님께서 대신 감당해 주시는 것이라 한다. 자라는 아이의 잘못을 무조건 눈감고 용서하면 아이는 삐뚜로 자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고 은혜도 아니다. 아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무엇이 옳은 일인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는 진리보다 오피니언 (opinion)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라면 과학적 진리에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기 쉽지 않고, 어렵사리 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 진리를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피니언이라는 미명 (美名)하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주장이 진리를 대신하게 방치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종종 여론을 오도 (誤導)하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오피니언은 많은 경우 우리를 불편하게 구속한다.
2014-01-15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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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1> 走馬看藥- 달리는 말 위에서 약을 보다
지난 11월에는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KASBP(재미한인약학자협회, 15-16일)에 이어,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스기야마 특별연구실 (29일)에 다녀 왔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 두 가지를 소개한다.1. 신약개발 비용이 9년마다 2배로 늘어났다. KASBP에서의 한 발표에 의하면 1950~2010년까지 신약개발에 소요되는 비용(물가 보정 후)이 매 9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동안 조합화학 발전에 의해 케미칼 라이브러리가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DNA시퀀싱에 의해 새로운 타겟이 발견되었으며, X-레이 크리스탈로그래피 발전으로 인해 타겟의 구조 결정 능력이 50년 전보다 1,000배나 빨라졌고,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가 25년 전에 비해 300배 늘어 났으며, HTS에 의해 타겟 테스트 비용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컴퓨터를 이용한 약물 설계, 검색 기술 및 유전변형 마우스 기술)이 발명되고 질병에 관한 지식(질병 기전, 새로운 약물 타겟, 바이오마커 등에 대한)이 진보한 사실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이는 1960년대의 탈리도마이드 비극 이후,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 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일 것이다. 1987~2011년까지의 25년간 FDA가 승인한 신물질 신약(NME, new molecular entity)은 first-in-class, advance-in-class 및 addition-to-class를 모두 합쳐 645개이다. 흥미로운 것은 매년 승인되는 신약의 개수는 줄고 있지만 first-in-class 신약 갯수는 매년 8개로 일정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전체 신약 중 first-in-class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1987~2001년까지의 15년간에는 27%를 차지했으나 2002~2011년까지 10년간에는 39%를 차지하였다. 신물질 신약의 55%는 미국의 25개 큰 제약회사가 개발한 것이지만, 나머지45%는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것이다. 작은 회사들이 개발한 신물질 신약은 first-in-class 신약의 53%나 차지하였다. 작은 회사 파이팅! 글로벌화를 시도하는 우리나라 제약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였다.
2.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이 중요하다일본약학회의 의약화학부회가 발간하는 Medichem News(23, May 2013)의 표지에는 나의 35년 지기(知己)인 스기야마 박사의 연구 주제가 소개되어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요즘 미국 FDA를 중심으로, 생리학적약물속도론 모델(PBPK모델)을 사용하여 약물동태를 예측하고, 이로부터 임상시험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거나, 투여량을 설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 모델은 약물간 상호작용, 노인, 어린이, 신장해시 또는 간장해시의 약물동태 및 약효를 예측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사실 신약개발 시 다양한 환자 측의 인자 모두를 반영한 임상시험을 하라고 하면, 신약개발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기법이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PBPK 모델은 이미 50년 전에 미국의 연구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로, 인체에 투여된 의약품이 약효와 부작용을 나타내는 조직에 이행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생리해부학적 파라미터(조직부피, 혈류 등)와 생화학적 파라미터(혈중 및 조직 중의 단백과의 결합성, 생체막 투과성, 약물transporter 및 대사효소와 약물간의 상호작용 등)를 사용하여, 연립미분방정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식에 “약의 투여량, 투여빈도, 투여경로”와 “환자의 병태, 생리적 상태(나이, 성, 간과 신장의 기능)” 정보를 입력하면, “약물의 혈중농도 및 조직중농도 추이”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모델은 장차 약물상호작용을 피할 수 있는 의약품, 개체차 및 병태에 의한 영향을 덜 받는 의약품, 치료역이 넓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언제나처럼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주었다.
2013-12-24 1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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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40> “약학사 분과학회’ 신설을 꿈꾸며
우선 2013년 11월 30일부로 약교협에 제출할 ‘한국약학사’의 머리말로 내가 쓴 글의 일부분을 이하에 옮긴다.
“2012년 11월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이하, 약교협)로부터 ‘한국약학사’의 발간을 위한 집필 작업을 주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에 만용(蠻勇)이지만 맡기로 결심하였다. 감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고 김신근 교수님이 저술하신 ‘한국의약사(韓國醫藥史)’(2001, 서울대학교 출판부), 본인이 발표한 ‘한국약학사(약학회지, Vol. 51, No 6, 2007)’란 논문, 그리고 대한민국학술원이 발간한 ‘한국의 학술연구-약학편’(2008) 등과 같은 몇 가지 선행연구(先行硏究)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들어 가 보니 우선 ‘약학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과 만나게 되었다. 결국, 약학을 좁은 의미(狹義), 즉 약학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 연구만으로 정의하는 것 보다는, 제약기업에서의 신약개발 연구는 물론, 약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기술 및 연구를 전부 포함하는 넓은 의미(廣義)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약학의 범위를 이처럼 넓게 잡고 보니, 기존의 선행연구 결과물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책을 만들 수 없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신약개발이나 제약산업을 부실하게 다루는 등 그 관심 범위가 이 책의 범위보다 좁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책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제약산업과 신약개발 관련 역사를 집필해 줄 수 있는 탁월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광의(廣義)의 우리나라 약학사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을 크게, 단군신화에서 현대 약학까지의 의약제도 (제1장), 약학교육 및 연구 활동 (제2장), 한국약업 100년 (제3장), 신약개발 연구 동향 및 전망 (제4장)의 4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3장과 4장에는 각각 ‘한국제약기술발달사’와 ‘신약개발사’를 첨부하였다. (중략)
아무쪼록 이 책이 앞으로 우리나라 약학사 연구에 귀중한 받침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으로 ‘한국약학사’의 발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업을 후원해 주신 약교협(당시 이사장, 김대경 중앙대 교수)의 결단에 감사드린다.”
이상이다. 이 책은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지만, 우리나라 약학사 전반을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고 자부해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약학의 역사를 어찌 달랑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 더욱 내용이 충실해진 약학사 책이 속속 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아무래도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한국약학사 학회’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1972년에 고 홍문화 교수님이 ‘약사학(藥史學)연구회’(약춘 44 참조)의 발족을 시도하였으나 이 연구회는 사실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났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분야를 방치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 끝에 ‘한국약학사학회’를 만드는 대신, 대한약학회 안에 ‘약학사분과학회(藥學史 分科學會)’를 신설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도로 학회를 창립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행정 업무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분과학회의 신설을 추진하려고 한다. 뜻있는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 드린다.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약대 내에 ‘약학사’를 전공하는 연구실과 교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전공 교수들의 평생을 통한 연구가 있을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약학사 정리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아마추어 역사가들에게 약학사의 겉핥기를 시키고 있을 것인가?
약학사 뿐만이 아니다. 약대 내에 약사법규나 사회약학 같은 다양한 드라이랩들(약춘 110)이 설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약학은 사회와 정상적인 소통(疏通)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2013-12-04 1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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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9> ‘창약과학의 매력’의 번역판을 내면서
나는 2012년 3월에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을 통하여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고등학생이나 일반인 눈높이에서 설명하고자 저술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약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신약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책이었다. 이 방면에 관한 전문 서적이 워낙 없었던 탓인지 이 번역판은 연달아 3쇄를 찍을 정도로 독자들의 호평(好評)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신약개발에 관한 입문서(入門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신약개발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 하였다. 그러던 차에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창약과학(創藥科學)의 매력’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먼저 책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채워 주기에 충분한 수준의 책이었다. 즉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20여명의 국내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아마 내년 1월 초이면 이 책의 번역판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 쓴 머리말을 이하에 소개하기로 한다.“우리나라 제약회사는 그 동안 약 20개의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직 소위 블록버스터 급 신약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제 신약개발은 많은 국내 제약회사가 도전하고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과제(課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약개발 러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러한 시점(時点)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떤 연구를, 언제, 어떤 순서로, 또 어느 수준으로 수행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신약개발 지도자 (Decision Maker)가 아닐까 한다. 유능한 지도자 없이는 리스크가 큰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개발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신약개발의 전모(全貌)를 균형 있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약개발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배울 길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그 동안 우리의 아쉬움이었다. 물론 약학대학 등에 신약개발지도자 과정 같은 교육과정이 개설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그 내용은 체계가 잘 잡혀있지 못 하거나 때로는 개론(槪論) 정도의 수준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의사 결정 능력을 갖춘 신약개발 지도자의 양성은, 뜨거운 국내의 신약개발 열기에 비추어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그런데 마침 도쿄대학 대학원 약학과에서 신약개발의 전모를 높은 수준에서 설명해 주는 책이 발간되었다. 원저의 편집자인 스기야마(杉山) 교수로부터 이 책을 소개 받은 번역진은 바로 이 책이 유능한 신약개발 연구자들을 양성하는 좋은 교재(敎材)가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에 즉시 동경대약우회(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모임, 회장: 이은방)를 주축으로 일본에서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책의 번역에 착수 하였다. 모든 번역자들은 완벽한 번역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특히 여섯 명의 편집위원들은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1차 번역된 원고를 수차에 걸쳐 교정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마치고 보니 용어나 체제가 제대로 통일되지 않았고, 색인도 없는 등 미비한 점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이와 같은 미비점은 원저(原著)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점이었다. 그래서 편집위원들은 ‘원 저자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싸이언스 자체만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번역을 마무리하였지만, 아무튼 독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부탁드린다.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나라 신약개발 연구자들, 약학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의 교수 및 대학원생들, 그리고 신약개발 정책을 담당하는 전문가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3-11-20 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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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38> 뭘 나까지 찍어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사진하면 당연히 흑백 사진이었다. 1970년 봄, 제주도로 단체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이 평생 처음으로 찍어본 유일한 칼라사진(당시는 총천연색 사진이라고 부름)이었다. 칼라사진은 필름이나 인화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기념으로 한 장 밖에 찍을 수 없었다. 사실 당시는 흑백사진도 아무나 찍을 수 없었다.
카메라(당시는 사진기라고 부름)는 일반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싼 사치품이었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는 밥술이나 먹는 집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카메라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부자로 사시는 이모부 댁에 카메라를 빌리러 갔다. 이모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카메라(아마 ‘캐논’)를 내 주셨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귀중한 물건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그러나 그 때는 그런 무례가 예사(例事)로 있던 시절이었다. 이모는 내가 그걸 고장을 내거나 잃어버릴까 봐 내심 불안하셨을 것이다.
내가 결혼한 1975년 전후(前後)에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면 사진 앨범부터 내놓는 것이 관례이었다. 신혼 부부가 열심히 사진 설명을 하면, 방문한 사람은 흥미가 없더라도 예의상 “멋지다, 예쁘게 나왔다” 같은 호의적 감탄사를 적당히 섞어가며 앨범을 ‘봐 주어야만’ 하였다. 1979년 동경 유학 시절, 일본인 부부 집을 방문하였다가 혼이 난 생각이 난다. 일본인 부부는 자기들이 유럽여행 중에 찍은 8미리 영화를 보여주었다. 방의 불까지 끄고 1시간 가량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동영상을 보느라 좀이 쑤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당시는 비디오 카메라나 8미리 촬영기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로망이었다.
세월이 흘러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자 사진을 무한대로 찍어도 돈이 들지 않게 되었다. 또 흑백사진이냐 칼라사진이냐 하는 말이 사라질 정도로 사진하면 당연히 칼라사진을 의미하게 되었다. 누르기만 하면 찍히는 자동카메라가 등장하고부터는 사진을 찍는데 아무런 기술이 필요 없게 되었다.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도 예전에 비해 엄청 줄어들었고, 덩달아 카메라 가격도 엄청 싸졌다. 막말로 이제는 개나 소나 마구 사진을 찍어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래저래 칼라사진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고 보니, 그에 따라 사진의 존귀함도 덩달아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번거롭게 사진을 인화해서 보지도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수많은 사진(영상)을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감상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사진이 지천(至賤)으로 넘쳐나다 보니 이제는 신혼 부부 집에 놀러 가도 사진 앨범을 내놓지 않는다. 해외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도, 또 보려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아들 며느리조차 부모님의 해외 여행 사진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가끔은 “좋은 구경 많이 하셨어요?” 하면서 사진 몇 장이라도 보는 척 해 주면 좋을 텐데. 사진이 흔해진 만큼 우리는 더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이 흔해져서 인지 무조건 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특히 늙어가는 사람에 많다. 그 바람에 사진 찍는 시간만 길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말한다. “얼른 찍히고 빨리 가자, 어차피 찍혀도 사진 안 줄 텐데 뭘 걱정해”. 그리고는 덧붙인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야, 나중에는 지금보다 더 늙을 테니까 차라리 지금 한 장 찍혀 주고 얼른 가자”
과거 결혼식장에 가면 예식이 끝나고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앞에서 외치곤 하였다. “이모, 고모 사진 찍게 빨리 나오세요” 그러면 객석에 앉아 계시던 이모 고모 할머니는 “뭘 나까지 찍어”하며 사양하며 느릿느릿 나온다. 속으로는 불러주는 것을 고마워 하면서 말이다.
사진 찍히는 호강을 사양하며 좋아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사진 경시 풍조(?)는 살짝 씁쓸한 느낌이다. 아 옛날이여!
2013-11-06 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