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약국] <134> 우유대체품에 대한 고민
미래에는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일이다. 칼로리를 계산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성인이 하루에 섭취해야 하는 열량을 2000kcal라고 가정한다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중 열량 밀도가 제일 높은 지방으로 환산해도 222g이 필요하다. 지방으로 1그램 알약을 만들어도 하루 200알 넘게 먹어야 한단 얘기다. 식사대용식의 주류가 알약이 아닌 음료가 되는 이유이다. 하루에 알약 200알을 삼킨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고역이지만 동일 열량을 음료로 섭취하는 건 어렵지 않다.전에는 그런 대용식의 기본이 우유였다. 하지만 요즘은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두유, 아몬드, 귀리, 헤이즐넛, 완두콩으로 만든 대체우유 중에 골라 마실 수 있다. 씨리얼을 말아먹기도 좋고 커피에 타서 마시기도 괜찮다. 바리스타용으로 나온 제품을 뜨겁게 거품 내어 커피에 올리면 식물성 카페 라떼가 된다. 귀리우유는 이렇게 커피에 우유 대신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여 미국에서 대인기를 끌었다.특히 뉴욕의 하이엔드 커피샵부터 공략한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음식의 세계에서 뭔가가 쿨하고 트렌디하게 보이는 건 확산에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우유 대신 대체우유를 마시면 북유럽 감성에 빠져든다고? 그럴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귀리우유와 완두콩우유 브랜드가 모두 스웨덴에서 시작했으며 제조사들이 그런 사실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원래 스웨덴은 우유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한 나라다. 스웨덴인 한 명이 1년에 마시는 우유가 90리터, 유제품을 다 합하면 섭취량이 300kg이 넘는다. 이렇게 우유 소비가 많으니 그만큼 건강이나 환경 문제에도 예민하다. 2014년 10월 하루에 우유를 3잔 이상 마시면 사망 위험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도 스웨덴 연구팀이다.물론 이런 식의 관찰 연구로는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 우유와 사망률에 별 연관성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다수 있다.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며 모두에게 권장하던 과거와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유가 건강에 해로운 식품도 아니다. 우유와 유제품은 건강 식단의 구성요소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닌 식품이다.하지만 환경 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온실가스 배출이나 물 소비 면에서 우유보다 대체우유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작다. 소에게 사료를 먹여 젖을 짜는 방식보다는 사람이 곡물로 만든 음료를 직접 먹는 방식이 식품 생산에 소모되는 에너지 비용 면에서 더 나은 선택이다.다만 모든 식물성 대체우유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동일하진 않다. 아몬드밀크는 생산 과정에서 배출하는 온실 가스가 매우 적지만 물이 많이 소비된다. 귀리, 콩과 같은 곡물은 온실가스 배출량, 물 소비량이 적은 편이고 추운 지역, 덜 비옥한 땅에서도 재배하기 쉽다. 환경 면에서는 귀리, 콩으로 만든 대체우유가 더 나은 선택이다.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픈 사람도 있다. 성인이 되면 우유 속 유당을 분해하는 소화효소가 잘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당을 분해하거나 제거한 우유를 마시면 그런 증상이 덜하다. 두유, 귀리우유, 완두콩우유 같은 대체우유를 마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대체우유는 곡물이 주성분이므로 우유와 영양 구성이 동일하진 않다. 식물성 대체우유에 칼슘, 비타민을 강화하는 이유다. 뒤집어 생각하면 칼로리나 영양성분을 조절하기 쉽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흰 우유는 무지방, 저지방, 일반 우유처럼 지방 함량에 따라 열량이 달라지는 정도이지만 대체우유는 나에게 맞는 영양 구성에 가까운 종류를 골라 마실 수 있다. 단백질 섭취를 늘리고 싶다면 두유, 장 건강 면에서는 베타글루칸 같은 식이섬유가 풍부한 귀리우유가 좋다. 베타글루칸과 같은 수용성 섬유질은 장에서 콜레스테롤 재흡수를 막고 혈당을 천천히 높이며 배변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지구상 인류 대부분이 유당불내증인데도 전 세계 80억 인구 중 60억 이상이 우유 또는 유제품을 소비한다는 건 우유에 그만큼 영양학적 이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구 환경을 보존하려면 지금처럼 우유를 많이 소비하기 어려운 것도 맞다. 우유와 대체우유의 공존 속에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많다.
2023-06-23 02:51 |
[약사·약국] <133> 약은 다 똑같지 않다
겉모양으로 약을 판단하지 말자. 25년 전 어느 날 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서 몸으로 배운 교훈이다. 약국에서 발포정을 씹어 삼켰던 것이다. 변명하자면, 향긋한 과일향의 납작한 알약은 새내기 약사였던 내 눈에는 츄어블 비타민제처럼 보였다. 미리 물에 녹여서 마시는 대신 알약을 씹어 삼키고 물을 마시면 마찬가지일 듯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발포정 속 탄산수소나트륨은 위산과 만나 쉴 새 없이 이산화탄소 기체를 만들어냈고, 꿉꿉한 거품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 속을 채웠다. 약국에 누가 오기라도 할까 걱정하며 물을 더 마셔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입 속 거품이 전부 사라지기까지는 삼사 분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그날 내가 발포정을 씹었던 건 약간의 게으름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약을 삼키기 어려워서 부득이하게 씹어 삼키거나 가루로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알약을 갈아 먹어도 될까? 답은 약마다 다르다. 코팅하지 않은 일반 정제는 가루로 만들거나 씹어 먹어도 무방하다. (대신 맛은 보장할 수 없다.)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골다공증 약처럼 식도 점막을 손상시킬 수 있는 알약은 씹거나 입에서 천천히 녹여 먹어서는 곤란하다. 서서히 약성분을 방출하도록 특별히 설계된 알약은 쪼개 먹으면 안 된다. 약성분이 한 번에 너무 많이 흡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장에서 녹도록 특수하게 코팅한 알약도 갈면 안 된다. 그대로 복용해야 한다. 알약을 삼키기 어려울 때는 자르거나 갈아서 복용해도 되는지 약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다.가루약을 복용할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방식은 위험하다. 식도로 들어가야 할 가루약이 기도로 들어가면 호흡 곤란이나 흡인성 폐렴을 일으킬 수 있다. 가루약은 복용 직전에 소량의 물에 타서 복용하는 게 좋다. 구강붕해정, 구강용해필름처럼 입에서 바로 녹는 약, 물 없이 사용 가능한 약도 있다. (다만 이들 제형이라고 약물 흡수가 더 빠른 건 아니다.) 알약을 삼키기 어려운 경우 붙이는 패치, 좌약, 또는 주사제를 쓸 수도 있다.약을 물 대신 차나 커피와 함께 복용해도 될까?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반드시 맹물이 아니어도 된다. 물 대신 다른 음료를 마셔도 괜찮다. 역삼투압 정수기로 거른 물이나 미네랄워터만큼이나 보리차나 옥수수차도 무방하다. 약을 위장까지 시원하게 쓸어내려 보내기 위해 한 컵을 쭈욱 마시면 된다.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음료는 한 번에 마시기 어려우니 피해야 한다.홍차나 커피와 같은 카페인 음료는 어떨까? 이 경우도 대체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몇몇 예외가 있다. 복합진통제, 감기약처럼 카페인이 들어있는 약을 커피와 같은 카페인 음료와 함께 먹으면 한 번에 너무 많은 카페인을 섭취하게 되어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다. 커피를 여러 잔 마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메스꺼운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갑상선 호르몬제와 골다공증 약도 커피, 홍차, 콜라는 피하는 게 좋다. 이들 약은 카페인 음료와 함께 복용하면 흡수가 줄어들어서 약효가 떨어진다.약을 과일 주스와 함께 마시는 것도 대개 무방하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고지혈증 치료제로 사용되는 스타틴 계열의 약을 복용 중일 때 자몽주스는 금기다. 자몽 속의 쓴맛 성분이 알약 한 알의 부작용을 2.5알 복용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높이기 때문이다. 자몽주스를 약과 다른 시간대에 마시는 것도 안 된다. 자몽주스가 약에 미치는 효과는 72시간까지 지속된다. 반대로 자몽, 오렌지 및 사과주스는 항히스타민제 펙소페나딘의 흡수를 방해하여 효과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앞서 스타틴의 경우와는 반대로 알약을 한 알 먹었는데, 효과가 반 알로 줄어들게 된다. 유기음이온 운반체(OATP)를 통한 약물 흡수를 저해하기 때문이다.복잡해서 머리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쓸 약에 대해서만 알아 두면 충분하고, 잘 모를 땐 물어보면 된다. 약은 다 똑같지 않다. 저마다 사용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약마다 그에 맞게 대해 주자. 용법과 주의사항을 잘 알고 쓰는 게 입에 거품을 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2023-05-31 08:46 |
[약사·약국] <132> 효소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요리는 본래 불로 익히는 행위를 말한다. 가열 과정에서 꼬인 단백질은 풀리고 변성되고 전분은 물을 흡수하여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되면 소화효소가 접근하기 쉬워지므로 소화가 더 쉬워진다. 결국 어떤 식재료를 요리한다는 건 소화라는 업무의 일부를 불에게 외주로 맡기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발효는 미생물에게 소화 과정의 일부를 외주로 맡기는 것이다.잘 발효시킨 음식을 먹고 속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미 미생물에 의해 일부 소화가 일어난 뒤이기 때문이다.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가 불로 가열하는 것보다 소화하기 더 쉬운 결과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삶은 콩을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더부룩하며 배에 가스가 찬다. 콩 속에 들어있는 소화하기 어려운 탄수화물 때문이다.인체의 소화효소로는 분해하여 흡수할 수 없으니 이들 난소화성 탄수화물은 대장까지 그대로 내려간다. 장내 미생물이 이들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스와 복통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콩을 발효시켜 만든 된장, 간장과 같은 식품은 이런 문제를 훨씬 적게 일으킨다. 발효로 만드는 과정에서 미생물에 의해 난소화성 탄수화물이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콩을 소화할 수 있는 미생물과 효소에게 외주를 주어 사람이 더 소화하기 쉬운 식품을 만들어낸 셈이다.발효와 효소는 다르다. 발효는 식재료에 유산균, 이스트(이걸 효소와 발음이 비슷한 효모로 번역하지만 않았더라면 덜 헷갈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와 같은 살아있는 미생물을 넣어 식재료 속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과정이다. 효소는 이들 미생물이 식재료 속 유기물을 분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효소는 미생물에게만 있는 도구가 아니다.모든 효소가 소화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체에는 생명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효소를 만들어낸다. 미생물이 아닌 원물에 들어있는 효소를 이용해서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군고구마가 생고구마보다 맛이 달고 속에 편안하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고구마에 들어있는 다당류 분해효소와 관련된다.녹말 자체는 아무 맛이 없다. 하지만 고구마 속 효소가 녹말을 당으로 쪼개주면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군고구마는 효소가 활성화하여 일하기 좋은 온도(50~60℃)에서 천천히 가열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러니 원물보다 더 달콤하고 풍미가 진하다. 밥을 입에 넣고 여러 번 씹으면 단맛이 느껴지는 것도 다당류 분해효소 덕분이다. 사람의 침 속에는 알파-아밀레이스, 고구마에는 베타-아밀레이스라고 불리는 효소가 들어있다. 이름은 달라도 하는 일은 비슷하다.곡물에 미생물을 넣어 배양하여 만든다는 곡물 효소도 꾸준한 인기다. 콩을 발효시켜 된장을 만드는 것처럼 현미, 메밀, 보리 등의 곡물에도 미생물을 넣어서 발효시키면 날것보다야 소화가 더 잘 된다. 미생물에게 미리 일부 소화를 시켜둔 셈이니까 말이다. 발효 과정에서 미생물이 비타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김치 속 유산균이 원래보다 1.5~2배로 많은 비타민B군을 생성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만 미네랄은 다른 이야기다. 철분,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은 기본적으로 흙 속의 금속 성분이다. 이들은 발효로 만들어낼 수 없다. 발효 과정에서 원물로 사용된 곡물 속에서 미네랄 흡수를 방해하는 피트산이 줄어들 수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누군가 발효로 미네랄 함량을 높였다고 말한다면 신빙성을 의심하는 게 좋다.곡물효소 제품 중에는 식이섬유나 유산균, 프락토올리고당을 추가로 배합한 것들도 있다. 먹고 나서 변비가 덜 생긴다는 경험담은 이렇게 추가한 성분들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곡물효소를 먹는다고 해서 효소를 보충할 수는 없다. 효소는 덩치가 커다란 단백질이다. 장 점막을 통과해서 체내로 들여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미생물이 효소를 통해 곡물을 분해해서 만들어낸 당류, 비타민은 흡수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 사용한 도구인 효소는 인체가 그대로 들여올 수 없다. 전부 다 아미노산으로 쪼개서 소화, 흡수한다. 효소의 운명은 그걸로 끝이다. 그냥 인체가 필요한 데 쓴다. 효소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장에서 소화를 일부 돕는 정도 외의 다른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특정 제품이 체내 효소를 보충해준다는 식으로 광고한다면 과장된 것으로 여기고 거르는 좋은 이유다. 잊지 말자. 스토리가 좋다고 다 사실은 아니다.
2023-05-17 09:32 |
[약사·약국] <131> 썩지 않는 햄버거의 진실
썩지 않는 햄버거는 거의 매년 화제가 된다. 2012년 JTBC <미각스캔들>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다. 2019년에는 아이슬란드 남부의 한 숙박시설에서 10년 전에 사서 보관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상하지 않았다는 뉴스가 국내 여러 방송에 소개됐다.과거에 일부 전문가는 보존료를 넣어서 안 상하는 게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햄버거가 이렇게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 것은 수분 제거로 인한 현상일 뿐이다. 보존료 없이도 수분을 충분히 제거하면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생명체는 성장을 위해 물을 필요로 한다. 인체의 절반 이상은 수분이다. 수분이 부족하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음식을 부패시키는 미생물도 마찬가지다. 수분 없이는 세균이나 곰팡이도 성장할 수 없다.감기약 시럽과 같은 설탕 시럽의 경우에는 수분이 있긴 하지만 고농도의 설탕에 붙잡혀 있어서 미생물이 이용가능한 수분이 없다. 그래서 시럽은 별도의 보존제 없이도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다. (냉장고에 시럽을 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면 이런 과정에서 응결된 물 때문에 시럽의 일부가 희석되어 세균 번식이 일어날 수 있다. 따로 표시가 없는 한 시럽은 실온 보관이 원칙이다.)건조는 인류가 식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봄나물은 냉장고에 둬도 장기 보관하기 어렵지만 생으로 말리거나 끓는 물에 삶거나 데친 다음 건조하여 묵나물로 만들면 겨울에도 나물을 즐길 수 있다. 예부터 정월 대보름에 묵나물을 삶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건조 기술을 활용한 덕분인 것이다. 그냥 말리기도 하지만 삶거나 데쳐주면 식물 세포 속의 산화 효소를 불활성화하여 갈변과 항산화물질의 파괴를 막아준다.하지만 가열 과정에서 나물 속의 비타민과 항산화물질이 파괴될 수도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55-70°C에서 가열하면서 열풍 건조하는 방법이 자주 쓰인다. 과일을 말릴 때 갈변을 막기 위해 황 화합물을 뿌려 주기도 한다.식품을 건조할 때 갈변을 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녹차는 가열하여 갈변 효소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건조하지만 우롱차, 홍차를 만들 때는 갈변 효소의 반응을 이용하여 색깔과 향을 낸다. 이렇게 하여 잎을 말려주면 차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마실 수 있게 된다. 녹차를 가열 건조할 때도 수증기로 찌느냐 뜨거운 가마솥에서 덖어주느냐에 따라 색깔과 향이 달라진다.음식을 건조할 때 표면을 너무 빠르게 말리면 겉이 딱딱해지면서 속의 수분은 대부분 그대로 남게 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을 구울 때는 이렇게 말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식품을 오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조할 때는 너무 빠르게 겉면을 말려서는 안 된다. 식품 속 수분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고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식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수분의 이동은 열전도에 비하면 매우 느린 편이어서 고르게 수분을 제거하여 건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수분을 날려 건조한 식품은 원래보다 영양소 함량이 높아진다. 가끔 방송에서 열 배, 스무 배라며 호들갑 떠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저 물이 빠져나간 만큼 영양소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적은 양을 먹어도 고열량을 섭취할 수 있으며 무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우니 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들에게 건조식품은 훌륭한 비상식품이 된다.대신 칼로리가 높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말린 망고 같은 과일을 집에 두고 먹을 때 자칫하면 평소 먹을 과일 양의 여러 배 칼로리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조식품은 원래의 영양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풍미가 좋으며 오랫동안 두고 즐길 수 있어 오랫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햄버거가 상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는 일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2023-04-26 09:19 |
[약사·약국] <130> SNS와 건강
유튜브 쇼츠와 같은 짧은 동영상이 계속 인기다. 보고 있으면 허무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 때우기에 이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보의 질은 떨어지는 동영상이 많다. 60초 이내 짧은 동영상 소셜 미디어의 원조격인 틱톡에서 인기몰이 중인 것톡이 그렇다. 것톡(guttok)이란 장(gut) 건강에 대한 틱톡(tiktok) 동영상을 말한다. #guttok으로 장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짧은 동영상 조회수가 무려 8억8천만 뷰가 넘는다.것톡 동영상은 대체로 복통, 가스, 변비, 설사 같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 증상을 다룬 게 많다. 이전에 그런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인플루언서가 나와서 알로에 베라 주스, 올리브유 같은 특정 식품을 먹고 씻은 듯이 나았다며 씩 웃는다. 이삼십 초 밖에 안 되는 짧은 동영상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심지어 광고 홍보성 동영상인데도 이끌린다.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블랙 워터라는 음료를 들고 나와서 이 제품이 치아에 안전한지 보자는 동영상 조회수가 무려 1,000만이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세다. 2011년에 의사이며 영양사인 크리스틴 게브스타트가 블랙 워터에는 특별한 효과가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의 팩트 체크는 부질없다. 소셜 미디어 셀럽의 한마디에 묻혀 버린다. 나는 2014년에 첫 책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에서 해독주스에 기대할 만한 실제 해독 효과가 없다고 썼다. 영국 BBC에서 디톡스 다이어트의 효과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실험을 방송했고 영국 영양사 협회에서 ‘해독 다이어트가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낸 거짓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고 썼다. 해독은 해독주스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몸의 간과 신장에서 하는 일이다. 솔직히 그런 글을 쓰면 뭐하나 싶다. 디톡스는 2023년 현재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인스타그램에만 봐도 디톡스 태그로 79만, 디톡스주스로 12만 7천, 디톡스워터로 4만4천 개의 게시물이 올라있다.별 효과가 없을 것 같은 제품도 인플루언서가 집어들면 즉시 화제가 된다. 누구든 카톡,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으로 정보를 퍼나르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미디어 기술이 진보했다고 팩트체크 기술까지 좋아진 건 아니다.2021년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가짜 정보가 범람하자 틱톡은 관련 동영상에 코로나19백신 정보를 클릭해볼 수 있도록 배너를 붙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의 씽크탱크 전략대화연구소(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 배너가 붙은 동영상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백신에 관한 동영상 6천 개 중 58%에는 배너가 붙지 않았다.소셜 미디어는 정보를 유포하는 데는 혁신적 기술 발전일지 몰라도 팩트 체크 면에서는 기존 언론 매체보다 나은 점이 없다. 그 결과 SNS에는 키가 173cm였던 성인이 특정 제품을 먹고 180cm로 컸다는 식의 영상 광고가 버젓이 돌아다닌다. 여드름, 탈모, 불면증 따위는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동영상부터 자신의 물광 피부, S라인 몸매 비결이 특정 제품인 것처럼 증언하는 인플루언서들의 포스팅까지 다양한 형태의 광고가 시선을 자극한다.필요하니까 속는다. 하수구가 막혀서 고생하는 사람은 하수구를 뚫는다는 제품 홍보 포스팅에 속기 쉽고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사람은 늘 반신반의하면서도 새로운 다이어트 제품에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냥 사진과 텍스트만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보고 목소리를 듣다보면 대상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것톡이 인기를 끄는 것은 아무한테나 꺼내기 힘든 장 건강 이야기를 대중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변비로 고생하다보니 그저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기만 하면 장 건강에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그렇다고 굳이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는 제품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적게 먹으면 변비가 생기기 쉽다. 해결책은 쉽다. 음식을 충분히 먹거나 섬유질이 풍부한 과일, 채소 섭취량을 늘리면 된다. 전보다 적게 먹는 쪽으로 식습관을 바꾸는 중이라면 전보다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줄어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기억하자. 건강에 관한 한 정답이 있는데 따르기 싫다고 신비로운 해결책을 찾아 헤매는 건 굳이 안 써도 될 돈만 낭비하는 길이다.
2023-04-12 09:33 |
[약사·약국] <129> 잠과 음식 이야기
상추는 졸음 유발의 누명을 쓴 대표적 음식이다. 200여 년 전에 이미 상추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1800년 <승정원 일기>에는 사람들은 상추가 졸린다고 하는데 의서에는 잠이 잘 안 온다고 쓰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 상추를 먹으면 졸린지 그렇지 않은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추는 졸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생종이 아닌 재배종이기 때문이다.
야생의 상추는 졸음을 유발한다. 야생상추에는 진정 효과가 있는 락투신, 락투코피크린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다. 2009년 4월 <BMJ 케이스 리포트>에는 이들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야생상추를 먹었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 이란인들의 사례가 실렸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상추는 야생상추와는 다른 종이다. 야생상추를 지금의 상추로 육종하는 과정에서 쓴맛 성분이 크게 줄어들었고, 따라서 졸음, 진정 효과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승정원 일기>에서 ‘알 수 없음’이란 결론을 내린 것을 보면 이미 조선 시대에 재배하던 상추도 야생상추와 성분상 차이가 컸던 듯하다. 상추 자체의 졸음 유발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보니 아마도 어떤 음식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진정 효과에 대해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음식 속 어떤 성분이 졸음을 유발하며 어떤 성분이 잠을 깨우는가는 아직 불분명하다. 2016년 스크립스(Scripps) 연구소 실험 결과 단백질, 염분이 초파리에서 식후 졸음을 유발했다. 사람에게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심증만 있을 뿐이다. 과식한 뒤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목이 마르다. 짜게 먹고 잤기 때문이다. (소금과 단백질이 문제인지 아니면 과식이 자체가 문제인지 둘 다 문제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일부러 음식을 짜게 먹진 마시길. 2019년 초파리 연구에서는 초파리에게 고염식을 주면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MSG가 졸음을 유발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다. MSG를 먹어도 뇌 속으로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글루탐산은 우리 뇌에서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다. 식사로 섭취한 글루탐산은 혈관-뇌 장벽을 통과해 들어갈 수 없다. 1960년대 중국음식증후군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이후 60년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MSG 때문에 졸리거나 두통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추와 MSG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상추나 MSG를 단독으로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음식과 함께 먹기 마련이다. 이들을 먹고 졸린 이유는 그저 음식을 먹고 난 뒤의 졸음, 즉 식곤증일 가능성이 높다.
잠이 안 온다고 술을 마시면 수면의 질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술을 한두 잔 마시면 빨리 잠드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알코올은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깨뜨린다. 처음에는 졸음을 유발해서 깊은 잠에 빠지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알코올이 대사되면서 뇌가 과잉으로 활성화한다.
이에 더해 알코올은 저혈당을 유발하여 악몽을 꾸게 할 수도 있다. 알코올은 이뇨제로도 작용한다. 술 마신 날 자다가 한밤중에 자다 깨는 이유가 이렇게 여러 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자는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위험하다. 숙면하지 못하니 더 과음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침에도 개운치 않다. 그러니 커피를 더 찾게 되고 그 결과 밤에 잠을 청하기 더 어려워진다. 숙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오후에는 커피와 카페인 음료를 피하는 게 좋다.
자기 전 흡연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니코틴 부작용으로 생생한 꿈 또는 악몽을 꾸게 될 수 있다. 너무 배가 고파도 잠이 오지 않지만 과식도 숙면에는 방해가 된다. 반대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날 과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루 섭취 칼로리가 400-500kcal까지 늘어날 수 있는데 특히 지방 섭취가 늘어난다. 2016년 연구에서는 섬유질이 적고 지방, 당분 함량이 높은 식사를 할수록 수면의 질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면에 필요한 것은 특정 음식이나 영양성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전체 식습관이다.
2023-03-30 09:12 |
[약사·약국] <128> 제로칼로리 식품 정말 위험한가?
에리스리톨이 심장마비, 뇌졸중과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2월 27일 권위있는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실린 논문이다. 관련 뉴스를 보고 ‘그럼 그렇지’ 제로칼로리 음료를 더는 마시지 말아야 하겠다며 다짐하는 글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여럿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살펴볼 점이 있다.
우선 <네이처 메디신>에 실린 논문의 제목 ‘인공감미료 에리스리톨’이란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에리스리톨은 자연에 존재하는 당알코올이다. 과일, 채소, 발효식품에도 들어있다. 수박, 멜론, 포도, 간장, 와인에도 에리스리톨이 들어있다. <솔직한 식품>의 저자 이한승 박사는 그러니 인공감미료가 아니라 설탕대체재라고 써야 맞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안 먹어도 우리 몸에서 소량의 에리스리톨이 만들어진다. 심혈관 질환 또는 당뇨병으로 인해 인체에 과도한 산화적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에리스리톨이 더 많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 연구 결과에서 나타난 상관관계가 실은 역 인과관계(reverse causality)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번 연구 참가자들은 이미 위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평균 연령 65세에 이미 고혈압인 사람이 72.2%, 당뇨병 환자가 22%였으며 심근경색 전력이 있는 사람도 46.3%나 됐다. 게다가 평균 체질량지수(BMI)가 29.2로 과체중, 비만인 참가자가 많았다. 따로 섭취하지 않아도 에리스리톨 혈중 수치가 높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단 얘기다. 에리스리톨 수치가 높은 게 심혈관 질환 위험을 높인 게 아니라 심혈관 질환이 에리스리톨 수치를 높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식물에서 추출하는 식으로는 대량 생산이 어려우므로 에리스리톨은 미생물을 이용해서 만든다. 포도당 시럽을 발효해서 만들기 때문에 수소첨가반응으로 제조 가능한 다른 당알코올보다 값도 비싼 편이다. 설탕의 70-80% 감미도인데 시판 가격은 설탕의 4-5배에 달한다. (소비자 가격 기준 설탕 1kg은 2천원, 에리스리톨 1kg은 1만원대에 형성되어 있다.) 에리스리톨은 다른 당알코올과 마찬가지로 녹을 때 열을 빼앗아서 서늘한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에리스리톨은 제로쿠키, 제로소주, 제로칼로리 음료에 사용된다. 칼로리는 거의 제로(0.4kcal/g)이면서 열에 대한 안정성이 높아 열에 불안정한 아스파탐 같은 대체감미료보다 과자 굽기에 유리하다. 설탕 대신 에리스리톨을 써도 결과물의 부피와 물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에리스리톨은 솔비톨, 말티톨 같은 다른 당알코올과 달리 분자 덩치가 작고 흡수가 잘 되어서 복부팽만, 설사 부작용이 덜하다는 장점도 있다. 80%가 장에서 흡수되고 장내에 남은 20%도 미생물이 발효시킬 수 없어서 거의 대부분 그대로 체외로 배출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할 것은 양의 문제이다. 이번 연구에서 에리스리톨이 혈전증을 증가시키거나 혈액 응고를 유발한다는 것을 동물실험을 통해 발견하긴 했다. 하지만 투여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연구에서 사람 8명 대상으로 하루 30그램을 주었을 때 동물실험에서 위험했던 수준 혈중 농도( 45 μM)가 2일 정도 지속되었다. 이 정도면 국내에 판매 중인 제로 쿠키로는 하루 750그램을 먹어야 섭취 가능한 양이다. 쿠키 하나를 14그램으로 잡으면 53.5개에 해당한다.
요즘 인기 있는 제로 소주에도 에리스리톨이 사용된다. 정확한 함량은 비공개여서 알 수 없으나 소주 한 병에 과당 1.5그램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에리스리톨로 대체하면 약 2그램 안팎으로 추정된다. 실험에서 사용한 만큼이 되려면 하루 소주 15병을 마셔야 한단 얘기다. 물론 이 정도면 대체감미료보다 알코올 때문에 사망할 위험이 크다. 음료 중에는 제로칼로리 사이다에 에리스리톨이 사용된 제품이 있다. 하지만 역시 함유량이 많지 않다. 제품에 따라 250ml 30캔(천연사이다 제로) 또는 500ml 30병(스프라이트 제로)을 마셔야 이번 실험에 사용한 양과 동일한 정도이다.
아쉽게도 이번 연구 결과를 다룬 국내 언론 대다수의 기사 내용과 제목은 불필요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번 연구 때문에 패닉에 빠질 이유는 없다. 그저 뉴욕 타임스 기사 제목 정도면 충분하다. “설탕 대체재와 심장 문제 상관성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 전문가들 '걱정마라.' Study Suggests Possible Link Between Sugar Substitute and Heart Issues. Experts Say, Don’t Panic.”
2023-03-15 09:50 |
[약사·약국] <127>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
차를 운전해서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로를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평균 경사도 29.3%로(16.33°) 기네스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뉴질랜드 두네딘의 볼드윈 스트리트보다 더 경사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눈길이었다. 차가 가다가 설 때마다 불안했다. 하지만 의아했다. 왜 숨이 차지? 나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을 뿐이고 힘을 쓰는 건 내가 아니라 자동차 엔진일 텐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꿈이었으니까. 그렇다. 나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나는 평소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꿈을 꾸는 건 2~3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이렇게 생생하게 꿈을 꾼 이유는 뭘까? 음주로 인한 저혈당이 왔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뒤에 와인을 세 잔 마시고 잤고 이로 인해 혈당이 떨어지다가 결국 새벽4시쯤 가벼운 저혈당이 왔다. 이걸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프리스타일 리브레라는 연속 당 측정기를 사용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돈내산으로 제조기업과는 아무 관계 없이 쓴 글이라는 점을 우선 밝힌다.
내가 사용한 연속 당측정 시스템은 무채혈 방식이다. 자세히 보면 제품명이 연속 혈당 측정 시스템이 아니라 연속 당 측정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혈액이 아니라 피하지방 세포간질액의 당 수치를 측정하기 때문이다. 세포간질액이란 세포와 세포 사이이 체액을 이루는 액체를 말한다. 혈액으로부터 받은 산소와 영양분을 세포로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세포간질액의 당 수치를 보면 혈당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다. 직접 혈당을 측정하는 건 아니고 세포간질액을 통해 간접적으로 혈당치를 확인하는 방식이지만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다.
센서 착용은 쉬운 편이다. 자세한 사용방법은 제품 설명서에 나와 있지만 여기서 몇 가지 주요점을 살펴보자. 센서는 14일 동안 작동한다. 센서를 부착하면 한 시간 동안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센서는 1분마다 당 수치를 측정하고 15분마다 이를 저장한다. NFC 기능을 지원하는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한 다음 센서 가까이에 대면 신호음이 들리거나 진동이 느껴진다. 이 때 스마트폰으로 그 시점의 측정치와 함께 전에 저장된 당 수치가 함께 전송된다. 센서는 최대 8시간까지만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어서 최소한 8시간에 한 번은 이런 식으로 스캔을 해줘야 한다. 특히 취침 전에 스마트폰으로 한 번 스캔을 하는 게 좋다.
당 측정을 위한 센서에는 바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위팔 뒤쪽 피부에 500원 동전보다 조금 크고 동전 2.5개를 겹친 두께의 센서를 삽입기구의 도움을 받아 부착하도록 되어 있다. 삽입기구를 보면 길고 가는 바늘이 하나 보이는데 이 바늘은 당 측정을 위한 더 가느다란 필라멘트가 피부 아래까지 삽입되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이다. 삽입기구와 함께 다시 빠져 나오는 거라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불행히도 설명서에서 이런 디테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늘이 센서와 함께 내 위팔에 남아있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면서 찾아본 결과 확인한 정보이다. 팔에 필라멘트만 삽입된 상태라는 걸 알고 나니 통증이 사라졌다.
이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당뇨 환자를 위한 것이며 제조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사용을 권하지 않는다. 나는 당뇨가 없다. 직업상 연속 당측정 시스템을 써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한 번 테스트해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매일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 핏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당뇨 환자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채혈하지 않고 피부에 부착한 센서로 당을 측정하면 아프지 않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에 더해 24시간 연속 당 수치를 그래프로 보여주니까 더 쉽고 분명하게 자신의 혈당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내가 이번에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음주가 저혈당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다가 저혈당으로 악몽을 몸소 체험하는 것은 그런 지식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이용한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경험하고 나니 다르다. 건강과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행동을 바꾸는 데 제일 어려운 것 하나가 인과성을 납득시키는 일 아닌가. 이제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개인이 스스로 그런 인과성을 이해하고 건강을 관리하게 되는 그런 시대가 왔다. 그렇다면 약사로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때다.
2023-02-22 09:24 |
[약사·약국] <126> 건강기능식품 소비기한 이야기
기한이라고 다 같은 기한이 아니다. 원래부터 약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약에 표시된 기한은 사용기한이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은 판매도 할 수 없지만 사용해서도 안 된다. 유통기한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식품에도 유통기한이 아니라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그렇다면 건강기능식품은? 건강기능식품도 식품이다. 이제부터는 건강기능식품에도 소비기한이 표시된다.
소비기한이란 식품에 표시된 보관방법에 따라 보관할 경우 먹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한다. 유통기한은 80년대의 유산이다. 그때는 냉장 유통, 진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식품이 지금보다는 쉽게 상했다. 지금은 다르다. 냉장고에 개봉하지 않고 넣어둔 식품은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멀쩡할 때가 많다. 음모론에 끌리는 사람은 요즘 식품에 전보다 보존제를 많이 넣어서 그런 거라고 의심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식품의 제조, 유통, 보관 기술이 좋아졌을 뿐이다. 소비기한은 품질변화시점까지 기간을 100%라고 하면 그 80-9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유통기한은 식품 품질변화시점까지의 60-70%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유통기한을 버리고 소비기한을 채택한 것은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유통기한은 영업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파는 사람은 더 이상 팔 수 없는 기한이다. 하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유통기한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는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처럼 생각한다. 유통기한만 지나면 버리는 사람이 많단 얘기다. 소비자에게 유통기한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그냥 용어를 바꾸는 게 이번 변화의 핵심이다. 소비기한은 소비자 중심의 표시제이다. 명시된 기간까지만 소비하고 그 날짜가 지나면 버리라는 거다.
정리해보자. 약은 사용기한, 건강기능식품은 소비기한이다. 용어가 다르지만 소비자 관점에서 의미는 같다. 기한이 지나면 버리면 된다. 약은 환경을 생각하여 그냥 버리면 안 되고 약국이나 보건소에 가져다 줘야 한다. 언론 보도와 블로그에는 보건소나 약국, 주민센터에 비치된 별도의 전용수거함에 버리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약국에 그런 전용수거함을 갖춘 곳은 드물다. 건강기능식품은 식품이니까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면 정확한 규정이 없다. 우리 대부분은 환경에 예민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둔감한 사람들이다. 포장지나 용기에서 알약만 꺼내서 봉투에 따로 담아 버리는 것조차 귀찮아한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이나 소비기한이 지난 건강기능식품을 버리고 나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폐기에는 과정이 필요하며 비용이 든다. 불필요한 폐기를 줄이기 위해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꾼 건 잘한 일이다. 이제는 그래도 발생하는 약품과 건강기능식품 폐기를 어떻게 제대로 다룰 것인가 논의해야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맘껏 소비만 하고 지르면서 살던 시절은 잊자. 자고 일어나면 언제 또 감기약, 해열제조차 구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조금 꺼림칙하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버리기 전에 정말 버리는 게 맞나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에 변경된 소비기한은 건강기능식품에 해당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약은 사용기한이다. 그런 약의 사용기한을 설정할 때는 장기보존시험과 가속시험 결과를 사용한다. 장기보존시험은 의약품의 저장조건에서 사용기간을 설정하기 위해 실제로 오래 보관시 안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속시험은 그런 저장조건을 벗어나 단기간에 조금 더 가혹한 조건에서 안정성이 어떤지 보는 거다. 가속시험 결과와 다르게 장기보존을 해보면 오랫동안 별다른 변화없이 약효를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코로나19로 의약품 품절대란에 시달린 세계 각국에서 정부가 나서서 일부 의약품의 사용기한을 연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도,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보관한 약품은 사용기한 이후 15년이 지나도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는 미국 FDA 연구 결과를 참고할 만하다. 약이나 건강기능식품은 주방이나 화장실처럼 습도가 높은 곳을 피해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선반에 보관하는 게 좋다. 약의 사용기한이나 건강기능식품의 소비기한은 모두 개봉하기 전의 이야기다. 개별 포장된 제품을 제외하고는 개봉 뒤에는 기한이 줄어들 수 있다. 보관과 기한 문제에 더 진지한 관심을 갖자. 아껴야 잘 산다.
2023-02-08 10:45 |
[약사·약국] <125> 약에 관한 흔한 오류 정리
이 칼럼을 쓴 지 5년이 넘었다. 내가 쓴 글 덕분인지 알 길이 없지만(딱히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약에 대해 잘못 전해지던 이야기 몇 가지가 바로잡힌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자몽과 약에 대한 설명은 이제 조금 정리되어 간다. 2018년 10월 10일 포도와 약에는 그런 상호작용이 없다고 지적하는 글을 썼다. 아직도 가끔 그런 틀린 설명이 나오는 블로그가 눈에 띄지만 관련기사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다만 아직도 잘못된 설명이 방송에 종종 나온다. 자몽주스를 마시고 두세 시간 띄어서 약 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다. 자몽과 약의 상호작용이 있을 경우에는 24~72시간까지 지속되므로 웬만큼 시간 간격을 두어도 상호작용을 피할 수 없다. 혈압약 중에도 펠로디핀 성분의 약처럼 자몽, 자몽주스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 모든 약이 자몽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자몽을 너무 좋아해서 꼭 먹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몽과 상호작용이 없는 약으로 바꿀 수 있는지 의사, 약사와 상담하길 권한다.
쿨파스, 핫파스는 냉찜질, 온찜질과 다르다. 냉찜질은 혈관을 수축시키고 붓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온찜질은 48시간 뒤에 부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 해야 한다. 온찜질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며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파스는 다르다. 쿨파스는 냉감각, 핫파스는 온감각을 자극하지만 실제로 해당 부위를 덥히거나 식히지는 못한다. 쿨파스 속 멘톨이 냉감각을 자극한다고 해도 그 부위의 혈관이 수축하진 않는다. 혈관은 오히려 확장한다. 멘톨 함유 젤을 바르거나 스프레이를 뿌리면 시원한 느낌에 더해 피부가 차가워질 때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젤에 들어있는 알코올이 증발하거나 스프레이가 기화하면서 열을 빼앗기 때문이지 멘톨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얼음팩과 온찜질을 함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핫앤쿨파스는 존재한다. 이런 파스는 반대자극제이다. 냉온감각을 함께 자극하면 그런 자극으로 인해 뇌가 바빠져서 반대로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운동하다가 다쳐서 통증이나 부기가 심할 때는 병원에 먼저 가야 한다. 설명이 복잡해서인지 아직도 냉온파스를 냉온찜질처럼 쓰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방송에 자주 나온다. 단순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틀린 이야기는 빼버리거나 아니면 조금 복잡하더라도 제대로 설명하는 게 낫다.
혈압약과 바나나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한 경우다. 혈압약을 복용 중인 사람은 바나나를 먹으면 안 된다는 설명이 있다. 반대로 혈압약으로 이뇨제가 사용될 경우 바나나를 먹어야 한다는 설명이 있다. ‘일부’라는 수식어를 빼버리면 이렇게 불필요한 혼동을 유발한다. ARB(안지오텐신II 수용체 차단제)라고 불리는 계열 혈압약은 우리 몸에서 칼륨이 빠져나가는 것을 억제한다. 칼륨이 덜 빠져나가니까 칼륨 함유 식품을 너무 많이 먹으면 곤란하다. 바나나, 오렌지와 같은 과일, 대부분의 채소에는 칼륨이 많이 들어있다. 평소 먹던 대로 먹으면 보통 큰 문제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좋다는 방송을 보고 녹즙, 해독주스, ABC 주스를 마시면 혈중 칼륨 수치가 너무 높아져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고혈압 약이 여기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ARB 계열 고혈압약(발사르탄, 텔미사르탄, 칸데사르탄, 로사르탄 등)이 대표적이고 국내에서는 적게 쓰는 ACEI 계열 혈압약도 비슷하다. 이뇨제 중에서도 칼륨을 보존하는 성격을 띄는 것들(스피로노락톤, 에플레레논, 트리암테렌, 아밀로라이드 등)을 복용 중일 때는 칼륨 섭취 과잉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티아지드 계열 이뇨제(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HCTZ), 루프 이뇨제(푸로세미드)를 복용 중일 때는 반대로 칼륨 배출이 늘어나서 체내 칼륨이 부족해질 수 있다. 이럴 때는 칼륨 섭취를 늘리기 위해 매일 바나나 1개 또는 오렌지주스 1잔을 마시는 게 도움이 된다.
방송가는 아직도 중학생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 중학생 수준에 맞춰 얘기해달라는 주문이다. 이야기가 조금만 복잡하면 시청자들이 힘들어한다며 정색한다. 이는 중학생에 대한 모독이다. 어른이 되면 마치 공부 안 해도 창피하지 않은 자격을 얻게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냥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조금 복잡하다고 무시하고 살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공부는 현실이다, 누구에게나.
2023-01-26 09:41 |
[약사·약국] <124> 소염제와 해열제 어떻게 다른가
소염제와 해열제 중에 뭐가 나을까? 일상에서 이 둘을 용도에 따라 구분해서 써야 할 일은 거의 없다. 해열, 진통을 목적으로 사용할 때 약을 하루에 두 번 또는 세 번, 시간과 회수를 지켜가며 여러 날 꾸준히 복용하는 경우라면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보통 병의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통제를 처방받을 때다. 일상에서 가벼운 두통이나 근육통으로 진통제를 찾을 때는 소염제, 해열제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대표적 진통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해열진통제와 해열소염진통제다.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 같은 해열진통제는 열을 가라앉히고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지만 염증에는 효과가 없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구입 가능한 해열제는 아세트아미노펜 한 가지다.) 애드빌, 부루펜(이부프로펜), 낙센, 탁센(나프록센)과 같은 해열소염진통제는 해열, 진통에 더해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소염제(NSAID)면 해열진통효과도 있는 거지 염증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다. 보통 용어를 축약해서 해열제, 진통제, 해열진통제, 소염진통제 등으로 이야기하니까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약 성분에 따라 체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달라서 같은 소염진통제여도 지속시간이 6~8시간인 이부프로펜은 하루 3번, 최대 12시간까지 지속되는 나프록센은 하루 2번 복용해야 한다.
가정상비약으로 해열제와 소염제를 용도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로 용량 때문이다. 약국에 이부프로펜은 200mg, 400mg 두 종류가 있다. 보통 하루 400mg으로 세 번을 복용한다. 그러면 하루 복용량은 1200mg이 된다. 이 정도를 복용할 경우에는 염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크지 않다. 이부프로펜을 하루 2400mg 복용하면 항염 작용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정도 용량에서도 해열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과 효과 차이가 크지 않다. 무작위 이중맹검 임상시험으로 아세트아미노펜 4000mg/일, 이부프로펜 저용량 하루 1200mg/일, 이부프로펜 2400mg/일을 4주 동안 복용하도록 하고 무릎 골관절염 증상 완화를 비교한 결과 세 그룹 간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4주라는 기간은 이러한 임상시험 기간으로서는 짧지만 실제 가정에서 이 약을 사용할 때는 해당하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이부프로펜 사용설명서 상에 표시된 기간을 보자. 감기에 복용할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5일, 의사 또는 약사의 지시 없이 통증에 사용하는 기간은 성인 10일, 소아 5일, 발열에는 3일 이상 복용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을 일반적 복용법에 따라 사용할 때 해열제인 아세트아미노펜과 소염제인 이부프로펜이 유의미한 차이를 내긴 어렵다. 예외적으로 생리통(월경통)의 경우에는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같은 소염제가 해열, 진통만 있고 소염 작용이 없는 아세트아미노펜보다 낫다. 생리통을 겪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프로스타글란딘 혈중 수치가 2-4배 정도 높은데 소염제는 이들 염증매개물질이 더 적게 만들어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버틸수록 통증유발물질이 증가한다. 초기에 약을 복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방송에서 자주 보여주는 약에 대한 설명이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 소염제를 먹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 해열제를 먹어야 할까 용도에 따라 구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복용 방법 상 주의사항과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게 좋다. 소염진통제는 빈속에 먹으면 속이 쓰리거나 복통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위장관계 부작용은 하루 1200mg을 복용할 경우보다 2400mg을 복용할 때 좀 더 자주 생긴다. 식후에 바로 복용하는 게 제일 좋고 공복일 때는 우유나 요거트라도 함께 먹는 게 낫다. 해열제는 빈속에 먹어도 무방하다. 소염제 복용 뒤에 피부 붉어짐, 두드러기, 안면부종(얼굴 특히 눈이나 입술 주변이 붓는 것) 같은 과민반응이 있었던 사람은 사용을 피해야 한다. 특히 술 마신 다음 날은 이런 부작용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드물지만 해열제에도 과민반응이 있는 사람이 있다. 신장, 심장 기능이 손상되거나 심부전이 있었던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 없이 소염진통제 복용을 피해야 한다.
2023-01-12 11:21 |
[약사·약국] <123> 빈속에 먹는 약 이야기
왜 어떤 약은 빈속에 먹어야 할까? 이유는 약마다 다르다. 어떤 약은 다른 약이나 음식과 함께 먹으면 흡수가 덜 되기 때문에 빈속에 먹어야 한다. 갑상선 호르몬제,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소장은 십이지장, 공장, 회장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약물은 소장이 시작되는 부분인 십이지장에서 흡수된다. 하지만 갑상선 호르몬제라고 부르는 레보티록신은 주로 공장(jejunum)에서 흡수된다. 위에서 레보티록신이 흡수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아무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 머무는 동안 위산과 접촉하면서 알약 속 약성분이 녹아나온다. 지난해 이탈리아 연구진은 리뷰논문에서 이렇게 위에서 알약이 붕해되고 약 성분이 용해되는 과정이 갑상선 호르몬제 흡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위의 산도에 영향을 주어 약 성분이 용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장에서 갑상선 호르몬이 흡수될 때 경쟁해 약 성분이 덜 흡수되게 할 수 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주로 아침 빈속에 30분~1시간 식전에 복용하도록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약을 먹고 나서 30분~1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전 복용이 어려운 사람은 저녁 식후 2시간 간격을 두고 자기 전에 복용해도 효과에 큰 차이가 없다는 2020년 메타분석 연구결과가 있다. 아침 식전 복용이 제일 안정적이지만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은 의사, 약사와 상의해 복용 시간대를 바꾸는 것도 고려 가능하다. 다만 매일 동일한 시간에 식사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복용해야 약이 흡수되는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칼슘보충제, 철분제와 같은 약은 갑상선 호르몬제와 결합해 흡수를 방해한다. 제산제, 위산억제제(PPI)도 갑상선 호르몬제의 흡수를 저해한다. 이런 약을 복용 중일 때는 갑상선 호르몬제와 최소한 4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복용하는 게 좋다.
어떤 약은 위산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식전에 복용해야 한다. 페니실린 계열의 일부 항생제는 위산과 반응해 약효를 잃어버린다. 이런 약은 위산과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로 할수록 흡수가 잘 된다. 음식과 함께 복용하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2~3시간으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에 오래 머물면 위산이 약물 분자와 반응해 약효를 잃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프로바이오틱스도 식전에 복용 또는 섭취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위산과 접촉을 막는 코팅 공정을 거쳐 제조한 프로바이오틱스는 식후에 복용해도 별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위산에 취약한 약물이어도 장용정처럼 위에서 녹지 않도록 코팅을 한 경우에는 식후에 복용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특수 코팅을 한 알약은 부수거나 갈면 안 된다.
흡수가 잘 안 되는 약은 빈속에 복용해야 그나마 최대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골다공증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비스포스페이트 계열의 골다공증 약물은 빈속에 먹어도 겨우 1% 정도밖에 흡수되지 않는다. 음식이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흡수율이 더 낮아진다. 알약으로 삼켜서는 아예 흡수가 되지 않는 약도 있다. 덩치가 너무 큰 약물 분자가 그렇다. 아미노산 여러 개가 결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펩타이드는 먹어서는 흡수되지 않으므로 통상 주사하는 방식으로만 투여 가능하다. SNAC(sodium N-(8-[2-hydroxylbenzoyl] amino) caprylate)와 같은 흡수촉진제를 쓰면 덩치 큰 펩타이드 약물이 위장관에서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당뇨치료약 세마글루티드는 SNAC와 함께 만든 알약으로 먹어서 복용이 가능하다. SNAC는 위에서 국소적으로 pH를 높여서 약물 흡수를 높이고 위산에 약물 분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준다. 대신 복용방법은 까다로운 편이다. 아침 식전 30분에 다른 어떤 약보다 앞서 복용해야 한다. 물도 반 잔(120mL)만 마셔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흡수촉진제 성분이 희석돼 약 성분의 흡수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용해도 흡수되는 약 성분은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주사하는 대신 먹을 수 있는 알약이라는 건 커다란 장점이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제형, 새로운 성분의 약이 늘어난다. 약사는 역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
2022-12-28 15:52 |
[약사·약국] <122> 치매신약 이야기
지난 9월 말 알츠하이머 병 치료제 레카네맙 3상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면서 개발사인 바이오젠 주가가 40% 이상 뛰었다. 18개월 동안 초기 치매환자 1,795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임상시험에서 약을 투여한 쪽이 위약보다 인지기능 저하가 27%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의 효과에 대해 제약회사에서 내세우는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위험감소(RRR)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라시보 그룹보다 27% 감소라지만 실제로는 치매 증상을 평가하는 18점 척도에서(CDR-SB) 겨우 0.45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절대위험감소(ARR)로 보면 다소 애매한 수치다. 초기 치매환자는 임상시험에 사용한 척도를 기준으로 1년에 0.5~1.4 정도씩 점수가 낮아진다. 영국 런던대학에서 치매를 연구하는 론 하워드 교수는 1년에 최소한 1점의 차이를 내야 약효가 의미 있다고 본다. 18개월에 0.45점은 임상적으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만한 결과이다.
게다가 2B상 임상시험에서 이미 결과가 편향됐다. 약물을 고용량으로 투여하다보니 치매위험인자인 APOE4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투여군에서만 중도에 탈락했고 그로 인해 위약군은 치매위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71%로 투여군(30%)에 비해 높았다. 이렇게 되면 약효 때문에 차이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양쪽 그룹에 치매위험도에 차이가 있어서 결과가 다르게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다. 12개월에 비해 18개월로 투여 기간이 늘어나자 약효가 줄어드는 듯 보였다는 걸 지적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신약의 효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전문가도 많다. 초기 알츠하이머 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기간을 보통 평균 6년으로 본다. 레카네맙의 효과가 6년 이상 지속된다면 그 기간을 19개월 더 늘릴 수 있다. 아직까지 알츠하이머 병 치료에 효과적인 약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효과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안전성이다.
지난 11월말 뉴 잉글랜드 의학저널(NEJM)에 연구 결과가 실리면서 이번 임상 3상 시험 데이터가 공개됐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사람 2명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개발사인 에자이는 이들 사망자가 레카네맙 때문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밝혔다. 하지만 레카네맙이 작용하는 기전을 살펴보면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레카네맙과 같은 항체치료제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환자의 뇌와 혈관에서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 덩어리를 제거한다. 항체가 이들 단백질에 달라붙으면 인체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쉽게 말해 혈관에 달라붙은 베타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청소되면서 혈관이 약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혈관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뇌출혈이 생기기 쉽다. 이번 임상시험 레카네맙 투여군에서는 13명이 뇌출혈이나 뇌졸중 증상이 나타난데 반해 위약군에서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경우는 2명에 불과했다. 뇌졸중 치료나 예방을 위해 혈전 용해제나 항응고제를 사용할 경우에는 레카네맙 투여시 뇌출혈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내년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레카네맙을 신약으로 승인하더라도 이 약을 누구에게 사용할 것인가 까다롭게 기준을 정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대단한 성공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아밀로이드 플라크를 방치해도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질 수 있다. 아밀로이드 단백질에 직접 작용하는 항체 대신 플라크 속 아포지단백 E (ApoE)에 결합하는 항체를 사용하여 단백질 덩어리를 제거하는 항체(HAE-4)도 연구 중이다. 동물실험에선 플라크를 없애면서도 염증으로 뇌가 붓거나 뇌출혈이 생기는 부작용이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 알츠하이머 병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되는 타우 단백질이 엉겨 붙는 것을 막는 신약(hydromethylthionine mesylate, HMTM)도 개발 중이다. 이 약은 경구, 즉 먹는 약이라는 점에서 주사제보다 편리하다. 임상 3상 시험에 실패하긴 했으나 위약으로 사용한 물질(메틸렌 블루)에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개발사측 설명도 일리 있다. 과학은 이렇게 실패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2022-12-16 16:54 |
[약사·약국] <121> 약을 안전하게 쓰는 법
약으로 인해 사고가 날 때가 있다. 원인은 다양하다. 효과 없는 약을 잘못 사용하거나 약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약을 과용하거나 반대로 너무 적은 양을 쓰거나 또는 약과 약의 상호작용 때문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의사, 약사, 간호사, 환자 모두 사람이니 실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약과 관련된 실수는 치명적이다. 의료진이 실수하지 않도록 체계를 잘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환자의 능동적 참여도 강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환자참여를 중요시한다. 환자가 그저 주는 대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일 게 아니라 의사, 약사와 함께 팀을 이룬 것처럼 적극적으로 치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올 때도 간단한 확인 절차를 통해 약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우선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인해야 할 이름은 두 가지다. 처방전과 조제된 약이 자신의 것이 맞는지 체크하고 처방전에 기록돼 있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도 자신의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생각보다 동명이인이 많다. 두 번째로 자신이 받은 약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 두는 게 중요하다. 특히 부작용이나 알레르기를 경험했을 때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어떠한 약성분이 원인이 됐는지를 꼭 확인하여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나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지 함께 기억해두면 좋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도 자신이 알레르기나 부작용을 경험한 약 이름은 평생 기억해두는 걸 습관으로 하길 권한다. 상품명이 성분명보다 더 기억하기 쉽다. 암기하기 어려울 때는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좋다.
약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상호작용 위험도 커진다. 같은 약이 중복 처방되는 경우를 DUR 시스템으로 거르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모든 약이 처방약은 아니다. 처방약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한 일반약이 중복될 수도 있다. 약사라고 내가 집에 어떤 가정상비약을 두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 자신이 복용중인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약의 상호작용이나 부작용, 그리고 중복 투약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골 약국 한 곳에서 '약력(藥歷) 관리'를 받는 것도 좋다. 약력이란 내가 사용 중인 약의 전체 리스트를 말한다. 현재 의료체계상 의사, 약사라도 내가 어떤 약을 복용 중인지 전체 리스트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본인이 복용 중인 처방약(또는 처방전), 일반약(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 가능한 약), 건강기능식품을 한 곳에 모아두고 사진을 찍어두면 유용하다.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약들을 약국에 가져가서 약사와 환자가 함께 리뷰하면서 혹시 모르고 있는 약과 관련한 문제들이 있는지 점검하는 서비스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주기도 한다. 2019년 네덜란드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약 관련 문제를 한 건 찾아낼 때 무려 1100만원(8270유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약사와 환자의 만남을 두 전문가의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약사는 약의 전문가이고 환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문가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는 본인이 제일 많이 알고 있다. 환자 본인이 그런 개인 정보를 의료진과 공유하고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알약의 색깔이나 이름이 바뀌었을 때 의도적인 것인지 실수인지 환자가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질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말자. 의사나 약사가 질문을 기피하는 경우에는 더 좋은 병의원이나 약국을 찾아가자. 미래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길이다.
약의 올바른 복용방법과 부작용을 알아두는 것도 환자 스스로 챙겨야 할 몫이다. 아무리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도 약의 실제 사용자인 환자가 그걸 기억못하면 소용이 없다. 약의 보관방법과 사용기한에 대해서도 잘 알아둬야 한다.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게 약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2-11-24 22:44 |
[약사·약국] <120> 혈압 측정이 중요한 이유
겨울이 오고 있다.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집에서 혈압을 체크해보는 것이다. 가정용 혈압계가 아직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비용을 절약해서라도 하나 구입하는 게 좋다. 나에게 고혈압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혈압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008년 분당서울대병원 연구 결과 노인 고혈압 환자 33.9%는 자신이 고혈압인 줄 모르고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미국 연구 결과도 이와 비슷하여 성인 35.3%가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40~49세 성인이 자신이 고혈압인줄 아는 비율은 44.8%에 불과하다. 이삼십대 환자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고혈압인 줄 아는 사람 비율이 17.4%밖에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혈압이 상승한다. 수축기 혈압이 20 mmHg, 확장기 혈압이 10 mmHg 올라갈 때마다 심장병, 뇌졸중 위험이 두 배로 높아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 있다. 고혈압을 방치하면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치매 위험이 높아진다. 신장에도 부담을 주어 신장 기능이 저하되고 신장병을 앓게 될 위험이 커진다. 혈관 내피에 지나친 압력이 가해지면 미세한 손상이 생긴다. 손상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으면서 지방, 콜레스테롤, 칼슘이 쌓여 플라크가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고 혈압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좁아진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기 십상이다. 2015년 독일 연구에 따르면 24시간 동안 기온이 2.9°C 내려가면 뇌졸중 위험이 11% 높아진다.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사람의 경우는 무려 30%가 높아진다.
불행히도 증상으로는 자신이 고혈압인지 알 수 없다. 고혈압이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니 응급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신의 혈압을 정기적으로 체크하는 것이다. 혈압에 쓰이는 용어는 알고 보면 쉽다. 흔히 수축기 혈압은 위쪽 혈압, 확장기 혈압은 아래쪽 혈압이라고 부른다. 위쪽 혈압이 더 중요하다. 2021년 미국심장협회지에 실린 성인 107,599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위쪽 혈압이 심장병 사건이나 사망 위험을 예측하는데 더 중요한 지표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쪽 혈압은 50세 미만일 경우에 추가적 의미가 있다. mmHg는 수은 밀리미터라고 읽는데 과거에 수은을 이용한 혈압계를 사용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단위이다. 요즘에는 환경 문제로 인해 수은 혈압계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장한다.
집에서 혈압을 재면 병의원에서보다 5에서 10 정도 낮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면 긴장하여 혈압이 높게 나오기 때문인데 이를 가리켜 백의(white coat) 고혈압이라고 부른다. 음식을 먹거나 커피나 술을 마신 뒤, 운동 직후에도 혈압이 높게 나온다. 흡연도 마찬가지다. 이런 활동 뒤에는 최소한 30분 또는 1시간 뒤에 혈압을 측정해야 한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팔을 탁자에 받치지 않고 늘어뜨려도 혈압이 높게 측정될 수 있다. 편안한 의자에 등을 받치고 양발은 바닥에 평평하게 대고 앉아서 5분 정도 기다렸다가 혈압을 재는 게 좋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혈압을 재기 전에 다녀와야 측정에 영향이 없다. 혈압을 재는 도중에는 조용히 있자. 말하면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 커프가 너무 느슨하거나 꽉 조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끔 양팔 혈압을 모두 재어 보는 것도 좋다. 2020년 연구 결과 양팔 측정치가 10 mmHg 이상 차이가 나면 사망 위험이 10%까지 더 높아질 수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양팔 혈압 측정치가 다를수록 동맥 혈관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혈압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측정하는 게 좋다. 1-2분 간격을 두어 두 번 이상 측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집에서 혈압을 쟀는데 고혈압이 의심된다고 해서 자가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까운 병의원에 방문하여 상담 뒤에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2022-11-11 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