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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2> 2단계 약사국시(안)-II
2단계 약사국시안에 대해 중론(衆論)이 모아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은 나는 답답한 마음에 2012년 11월 13일 몇몇 교수님들께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국시 2단계 도입안에 찬성합니다.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메일 내용(이하 일부 생략)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나라에서 의사 고시 등은 기초과목을 배제하고 직능 시험만으로 면허를 주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조만간 약사고시에도 적용될 수 밖에 없는 흐름임. 이렇게 되면 약학의 기초과목들은 존폐가 우려됨. 그러나 주지하는 대로 약학은 의학과는 달리 기초과목도 매우 중요함. 만약 약사고시를 1단계로만 보면 결국 기초과목이 조만간 없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2단계로 보도록 제도화 해 놓아야 기초과목의 존치(存置)를 보증할 수 있음. 즉 약학의 기초과목 존치를 위해서도 약사고시를 반드시 2단계로 나누어야 함.
2. 약사고시를 1단계로만 보면 임상약학 과목과 기초과목 공부를 다 해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으므로 결국 기존의 4년제를 단순히 6년으로 늘인 것과 효과가 비슷해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함. 6년제 시행 이유는 임상약학 강화가 일차 목적인데, 임상 약학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기초과목을 공부하느라고 임상에 전념할 수 없어, 결국 지금의 4년제 약사 고시와 비슷한 시험을 보고 면허를 따게 되므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6년제를 도입한 의미가 거의 없어지게 됨.
3. 약사고시를 2단계로 보면, 1단계 합격자는 과거 4년제 약사 면허 취득자와 비슷한 대(對) 국민 이미지를 갖게 되고, 2단계 합격자는 정말로 임상약학 전문 약사(팜디)의 이미지를 갖게 되어 약사의 직능에 대한 대외 (대 국민 및 의사 등) 이미지 개선을 확실히 도모할 수 있음. 반면에 1번만 시험 보면 이러한 약사 이미지 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움.
4. 2단계로 보면 행정업무가 번거로워 진다는 우려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상 더 번거로울 것 없다는 반론이 많음.
5. 학생들에게 2번이나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하나, 한번만 시험 보게 할 경우, 여러 과목을 공부하느라 더 고생하게 됨. 즉 2단계 시험제도가 반드시 더 가혹한 제도라고 할 수 없음. 또 애써 약대에 들어 온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약사 대접을 받게 해 주어야 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오히려 2단계 방안이 학생들을 더 배려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음.
6. 끝으로 공청회 등을 통해서 약대 교수들이 이 건과 관련하여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여야 한다고 생각함. 이상입니다”.
이 메일을 보낸 후 두 분의 약대 교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한 분은 원로 학장님이셨는데, 그 분의 의견을 감히 대폭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단계 시험 실시 시 학년별 교과목 편성, 졸업자격 등과 같은 중요 부분에서 약학대학의 자율성이 크게 제한되며 약학 교육이 약사국가고시에 지나치게 종속될 우려가 있다.
2. 2단계 시험 제도 하에서 1단계 시험 불합격자는 대학 졸업자(약학사)조차 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교육적 측면에서 2단계 안은 재고되어야 한다.
3. 현재 약대 재학 중인 학생들이 어차피 1회의 약사국시를 치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3년간 약사법에 규정된 약사직무 수행에 관련된 표준교과과정을 재정비하고 실무실습도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약대생들에게 합당한 교육을 하여 졸업시킨 후, 그 결과를 가지고 심도 있는 재논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다른 한 분은 기초약학 위에 서 있지 않은 임상 지식의 위험성을 언급하면서, 필기시험을 모두 묶어 1단계에 보고, 2단계에서는 실습에 관한 내용만 시험 보게 한다면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의견을 주셨다.
최근 의사고시도 2단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의과대학에 의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약학과 약사 직능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2단계 약사국시안이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3-03-27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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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1> 2단계 약사국시(안)-I
2015년 2월이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6년제 약대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그들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시험 (이하 약사국시)에 합격해야 약사 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된다. 6년제가 실시된 이래 6년제 졸업생들에게 어떠한 시험을 통해 면허를 줄 것인가가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많은 논의 중 오늘은 소위 ‘2단계 약사국시안 (이하 2단계안)’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이하 국시원)은 이미 6년제 시행 전부터 ‘약사직무 분석 및 평가 영역 분류 연구 (‘04-‘06)’와 ‘약사국시 과목 개선 실행 방안 연구 (’10. 9~’11. 9)’를 수행한 바 있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국약학교육협의회 (35개 약대 학장으로 구성됨, 이하 약교협)의 약사시험위원회 (제1차, ’12.2, 이하 시험위원회)는 약사국시를 4개의 대 영역으로 합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시험위원회에서 처음으로 2단계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2단계안이란 원래 서울대 약대의 정진호 학장이 2012년에 제안한 아이디어로, 요점은 약대 본과 3학년을 마친 학생들에게 기초과목들 (기존의 약사국시 과목들)에 대한 자격시험 (1차 시험)을 치르게 하여 이를 통과한 학생들에게만 현장실습 (약국, 병원약국, 제약회사 등)에 나갈 수 있게 하고, 현장 실습을 마친 학생들에게는 임상약학 시험 (2차 시험)만 치르게 하여 이에 합격한 학생들에게 약사 면허를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1차 시험에서는 약학 고유의 기초과목에 집중할 수 있고, 2차 시험에서는 임상약학에 집중하여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자 약교협은 그 해 3월 교육과학기술부 (이하 교과부), 국시원 및 대한약사회 (이하 약사회) 관계자로 구성된 ‘약사국시 연구회’를 조직하여 ‘2단계 약사면허 국가시험 도입 방안 (’12.3~12.5)’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2년 6월에 열린 제2차 시험위원회에서는 약사국시 4개 영역의 명칭이 생명약과학 (기본약학), 산업약학, 실무약학 (임상약학), 보건의약관계법규 및 사회약학으로 수정하기로 하는 외에, 2단계약사국시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해 9월 국시원과 약사회는 각각 이와는 상충되는 의견을 교과부에 제시하였다. 즉 약사회는 4개 과목명에 특정 세부 지식명을 추가해야 한다고 하였고, 국시원은 ‘2단계 국시 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건복지부 (이하 복지부)는 이해 관계자들의 간담회 (’12. 7.18)를 갖고 이들의 의견을 개별적으로 청취 (’12. 9.3, ’12. 9.4, ’12. 9. 10)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약교협도 이 2단계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 (’12.11.16)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찬성 5, 반대 28, 기권 2로 압도적으로 많은 학장이 2단계안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복지부는 부득이 2단계안의 추진을 일단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2단계안이 기초약학과 임상약학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절묘한 방안임과 동시에, 많은 비용을 감수하고 실시하는 6년제 교육 본래의 목적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이 2단계안을 정학장으로부터 들었을 때“이 안은 정학장이 추진하는 어떤 정책 들보다 백배 천배 중요한 아이디어이니 반드시 성취시켜주기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 때만 해도 이 아이디어가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나라 정부 (교과부와 복지부)가 약사를 위해 전례가 없는 제도를 만들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도 이 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로소 2단계 시험안에 대해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은 약교협 자신이었다. 스스로의 반대에 의해 2단계안의 추진이 일단 좌절된 것이다.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다음 호에 계속).
2013-03-13 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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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20>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013년 1월 9일, 약제학 전공 대학원생들과의 신년하례 모임에서 학생들의 새해 소감과 각오를 들어 보았다. 그들의 말들을 요약하면 ‘지난 1년은 연구에 시행착오(施行錯誤)가 많았는데 올 한해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그리고 가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기획할 때에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초조할 때가 있는데, 앞으로는 매사에 좀 더 부지런을 떨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덕담(德談)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첫째, 시행착오는 그 끝에 성공이 붙어 있을 경우에 한(限)해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이 성공적이지 못 한 시행착오는 안타깝지만 빛을 발(發)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세상은 역경(逆境)을 딛고 일어선 사람에게는 박수를 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러나 끝내 일어서지 못한 소위 루-저(loser)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여러분은 세상사가 이처럼 냉혹하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하여야 한다. 물론 나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루-저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따듯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둘째, 여러분들이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정년을 앞둔 내 시각으로 보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대학 동기인 C군보다 2년 후에 유학을 떠난 나는 당시에는 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보다도 2년이나 뒤에 유학 길에 오른 대학 동기 Y군을 보고는 그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돌아 보니 결국 세 명이 다 똑 같이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국 출발 시점의 2-4년 차이는 전체 인생의 시간 틀 속에서는 사소한 시간 차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속도, 즉 너무 작은 시간 스케일로 인생을 보지 말기를 바란다셋째, 열심히 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잘 하는’ 한 해를 맞고 싶다고 말한 학생이 있었는데, 부디 모두 그리 되기 바란다. 그러나 ‘잘 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열심히 하면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살기 바란다.넷째,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세우기를 바란다. 최근 조 아무개라는 야구 선수가 자살한 뉴스를 들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인기 배우 겸 탤런트인 고 C씨와 결혼했다 이혼한 사람이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 그들에게 이와 같은 불행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종말은 그저 사소한 일들이 거듭 어긋난 결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크고 작은 선택의 결과가 여러분의 인생의 결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갈림길에 설 때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처럼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문제는 매번 올바른 길을 선택할 지혜가 사람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지혜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늘 밝고 떳떳한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양심에 비추어 보면 대개 그 길을 알 수 있다. 크리스챤은 이에 더하여 기도를 드린다. 아무튼 갈림길에서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인생은 마치 작은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항해와 같다. 노를 성실히 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항해 중에 순풍(順風)을 만나는 것이다. 큰 풍랑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순풍(順風)의 항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2013-02-27 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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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9> 진작 말하지
내가 1967년 약대 1학년이었을 때 1,2학기에 걸쳐 문화사(文化史)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해야 했다. 문화사 강의를 담당하신 유 아무개 교수님은 외부 강사이셨는데, 작지만 뚱뚱한 체구에 늘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셨다. 그 분은 강의 중에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허풍을 떠시곤 해서 어떤 학생 하나가 ‘선생님 도대체 집권할 가능성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던 적도 있다. 1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교수님은 ‘모든 학생들은 방학 중 리포트를 써서 개학 전에 제출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는 출석부를 보고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아무개 군은 인천 개항사(開港史)”, 아무개 군은 차이나타운의 역사, 아무개 군은 조선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라는 식으로 학생마다 다른 주제를 과제로 주셨다. 어찌나 빨리 주제를 불러 주시는지 학생들이 받아 적기가 바쁠 정도이었다.
그리고 1학기말이 되어 시험을 보았는데 나는 나름 잘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A학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2학기 개학을 해서 성적표를 받아보니 어럽쇼? 내 문화사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2학기 첫 수업 후 교단 앞으로 교수님을 찾아가 ‘왜 제 학점이 안 나왔습니까? 제 답안지를 한번 보여 주시죠’ 라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교수님 왈, “학생에게 답안지나 보여 주고 그러는 사람이 교수인줄 아나?” 하시는 것이었다. 이상한 반격이었지만 감히 반박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야 그건 말이야, 술 한 병을 사 들고 교수님 댁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려야 되는 거야”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청주[淸酒, 당시 말로 ‘정종 (正宗)’] 큰 것 한 병을 사 들고 원효로에 있는 교수님 댁을 방문하였다. 혼자 갈 용기는 없었는데 고맙게도 친구인 최응칠 군과 고 공영식 군이 동행해 주었다.
유교수님 댁은 약간 초라하였다. 우리 셋은 교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술 한잔씩을 따라 올리며 학점 이야기를 꺼내었다. 교수님은 생뚱맞게 “여러분에게 나누어 준 방학 숙제 주제를 내가 기억할 것 같은가?” 물으셨다. 그리고는 ‘사실은 출석 부르며 즉흥적으로 주제를 주었기 때문에 교수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지엄하신(?) 교수님이 이런 허술한 이야기를 하시다니’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학점 이야기를 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번에는 “자네 어느 고등학교 나왔나?”고 물으셨다. 내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교수님은 바로 “야, 그럼 진작 말하지, 나는 인천중학교 나왔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물포고등학교에 딸린 인천중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곧 이어 “야, 학점 걱정하지 마라, 2학기 학점도 걱정하지마” 하셨다.
교수님은 끝내 동문(同門)으로서의 의리(?)를 지키셨다. 실제로 나는 2학기 말에 1학기 문화사 학점을 A로 소급해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 2학기 학점까지도 A를 받았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에서 동문(同門)이 얼마나 중요한 인자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모르긴 해도 같은 고등학교 동문인 최군도 그 때 아마 A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이 이야기를 절친한 친구인 대웅제약 이종욱 사장에게 들려 주었더니 그는 한 수 더 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약대에 들어 와서 보니 S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P선생님이 대학국어 강의를 담당하고 계셨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가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도 반가워 하시면서 “야,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이름 다 적어와” 하셨단다. 그 후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성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이 사장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茶飯事)로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이런 이야기가 미담(美談)으로 치부 (置簿)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다.
2013-02-06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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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8> 꼴찌와 농땡이
1. 꼴찌가 일등?
1971년 경의 일이다. 서울 약대 4학년에 B라고 하는 한 복학생이 있었다. 그의 4학년 1학기까지의 학업 성적은 클래스에서 거의 꼴찌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4학년 2학기에 거의 올A를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대학을 졸업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4학년 2학기 시험이 끝나자 마자 B군은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자기 생각에 2학기 성적도 클래스에서 꼴찌가 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담당 교수님들을 연차적으로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부탁 드렸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교수님 과목의 학점을 조금 올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조금만 올려 주시면 제가 졸업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간곡한 부탁을 들으신 교수님들은 대개 “그래? 그거 안되었네. 어때, 내 과목을 한 C나 B 정도로 올려 주면 되겠나?” 라고 반응하셨다. 그러나 B군은 한걸음 더 나가 이렇게 부탁 드렸다. “교수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B나 C를 주시면 제가 졸업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올려 주시려면 눈 딱 감으시고 A를 주셔야만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살려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어이가 없어 하시면서도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특별히 A를 줄 테니 졸업해서는 성실하게 살게나” 하셨단다.
그는 모든 교수님 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렸다. 결과는 대 성공이어서 약물학 (담당교수 김낙두) 한 과목을 빼 놓고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4학년 2학기 성적은 클래스에서 일등이 되었고, 마침내 그는 무사히 (?)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꼴찌가 일등이 된 것이다. B군의 이런 능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졸업 후 약사고시에 잘 붙어, 약국도 잘 하고 있다고 한다.
2. 농땡이 모범사병?
내가 군인 (10781-1974)이었을 때 K란 동기 사병이 있었다. 그가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열명이 한 조가 되어 함께 장애물을 통과하는 훈련을 받는 도중에, 이 친구 혼자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 나가 숲 속에 들어 가 하루 종일 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9명은 ‘한 명을 어디에 팔아 먹었느냐?’고 훈련 조교로부터 혹독한 기합을 받았다. K군에게 그런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힘든 훈련이 끝나 모든 병사들이 연병장에 다시 모일 때쯤 그는 슬그머니 그리고 무사히 (?) 귀환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훈련에서 빠져 하루 종일 숨어 있는 것이 더 불안했을 터이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의 담대함 (?)에 그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K 군의 농땡이가 성공하는 걸 지켜본 다른 병사 몇 명이 다음날 덩달아 비슷한 흉내를 내다가 조교에게 걸려서 혼 줄이 났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아, 농땡이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구나. 우선 농땡이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타이밍을 알아내는 천부적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하고, 둘째 무엇보다도 농땡이를 치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을 배포 (또는 속칭 깡다구)를 타고 난 사람이라야 농땡이를 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그래서 얻은 교훈은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냥 내 식대로 살아야지 어설프게 K를 흉내 내다가는 인생을 망치기 십상이겠구나’ 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 중 하이라이트는 그가 우리 부대의 ‘모범사병’으로 뽑혀 표창을 받은 사건이다. 최고의 농땡이가 모범 사병으로 선정된 것이다. K는 제대 후 사회에 나가 박사가 되고 모 대학의 교수까지 되었다. 훗날 안타깝게 간이 나빠져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아직도 전우들은 K의 농땡이 기질이 가히 천부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꼴찌가 가짜 일등도 될 수 있고, 농땡이가 가짜 모범 사병으로 뽑힐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이다. 그러나 그건 나처럼 능력도 배포도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부러워할 일들이 아니다.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성실히 살아야지’, 새해 아침 추억의 앨범 한 장을 넘겨본다.
2013-01-23 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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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7> 군대 이야기 세가지
1. 최소한 지지는 않을 수 있었는데.
1974년 봄 원주의 한 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옆 부대와의 축구 시합에서 1:0으로 지고 난 우리 부대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부대 간부는 전 중대원을 식당에 ‘집합’시켜 바닥에 무릎을 꿀렸다. 일종의 기합이었다. 그리고는 인사계를 맡아 보면 이 상사님이 훈시를 시작하였다. 긴 잔소리가 있었지만 요점은 ‘너희들 요새 군기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요샛말로 빠져도 ‘너~무” 빠졌다는 말씀이었다. 까닥하면 연병장 집합으로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분에 못 이겨 이 말 저 말을 반복하던 이 상사님이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심병장, 자네 생각에는 왜 우리 부대가 축구 시합에 졌다고 생각하나?” 라고 물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 그랬는지, “예, 저는 아무래도 우리가 골을 먹었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골만 먹지 않았으면 최소한 비길 수는 있었던 시합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순간 식당 안은 웃음 바다가 되었다. 그 엄숙 (?) 했던 분위기가 일순에 깨진 것은 물론이다. 이 상사님도 이미 웃음 바다가 된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 들 일어나 내무반으로 헤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해서 그 기합은 끝이 났다. 내 재치로 기합에서 풀려난 동료들은 모두 나를 고마워 했다. 그 후 이 상사님은 나만 보면, “심병장, 뭐 우리가 골을 먹어서 졌어? 나 참!” 하면서 웃곤 하였다. 군대 시절 드물게 좋았던 추억의 한 조각이다.
2. 누굴 장기판의 졸 (卒)로 보나?내가 군인이었을 때 유신 헌법으로의 개정에 대한 찬반 투표가 있었다. 투표 용지를 보니 “나는 대통령의 중요 정책을 (1) 지지한다 ( ), (2) 반대한다 ( )” 라고 써 있는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질문 내용은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투표를 앞두고 닭고기를 실컷 먹었던 이야기를 잠시 회고하고자 한다. 투표일을 닷새쯤 앞두고부터 식당엘 가면 매일 삶은 닭 한 마리씩이 나왔다. 그것도 혼자서 다 먹기 어려울 정도도 큰 닭이…. 평소에는 겨우 고기 몇 점씩을 구경하던 사병들은 “야, 군대 참 좋아졌다. 이 참에 우리 말뚝 박자”고 좋아라 하였다. 며칠간 지겹게 닭고기를 먹는 중에 투표일이 지났고, 이와 함께 닭고기도 식단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도 너~무 오랫동안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이상해서 취사 담당 최상병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최상병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금년 내내 먹을 닭고기를 지난 닷새간에 다 먹은 겁니다” 라고. 이 말을 들은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아무리 군대의 졸병이지만, 누굴 장기판의 졸 (卒)로 보나? 그럼 여태까지 내 닭을 당겨 먹고 좋아한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한 추억이다. 참고로 당시 최상병은 훗날 우리나라의 연극 영화계의 스타가 된 최종원씨였다.
3. 왜 이러시나?원주 38사단에서 신병 교육을 마친 우리 일행 몇 명은 하루 반쯤 군용열차를 타고 경남 사천에 있는 육군 항공학교에 가게 되었다. 특과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육군항공학교에 들어서니 최상병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반갑게 마중하면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라고 경어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이러시나? 이러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빳다를 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온갖 욕설과 거친 말을 들어 온 우리들에게 경어는 오히려 가장 공포스러운 어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상병의 경어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알고 보니 최상병은 기독교 군종 사병이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최상병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까? 어느덧 나는 항공학교 안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지나고 보니 다 아련한 군대의 추억들이다.
2013-01-09 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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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6>주례 육태 (主禮六態)
1. 내 결혼식 때 주례는 한관섭 명예교수님이 해 주셨는데 얼마나 주례사가 짧았던지 5분 늦게 식장에 도착한 우리 육촌 형님이 내 결혼식을 보지 못하였다. 결혼식 사회를 본 친구 최응칠 교수는 그 주례사가 자기가 본 주례사 중 가장 짧았다고 회고한다. 한 교수님은 “잘 먹고 잘 살라는 말 이외에 뭐 할 말이 있어?” 하셨지만, 그 사건(?) 이후 나는 ‘주례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 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 반면 내가 경험한 가장 긴 주례사는 고 한구동 선생님의 주례사이다. 1975년, 지금은 고인이 된 대학 동기 K군의 결혼식에서였다. 짠돌이 K군은 경비를 줄이려고 종로의 한 예식장을 30분간만 빌렸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한교수님은 “끝으로”와 “마지막으로”를 반복하시면서 무한정 주례사를 하셨다. 그래서 주례사의 후반부는 K군의 하객이 아니라 다음 결혼식 하객들이 듣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3. 최응칠 교수는 이미 30대의 나이에 결혼식의 주례를 본 일이 있다. 대학원 제자가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최교수가 현장에 가보니 옛 은사이신 주례 선생님이 갑작스런 병환으로 결혼식장에 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최교수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미 당시에 머리가 허연데다가 키도 큰 최교수는 누가 봐도 주례를 보기에 무리가 없는 풍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최교수는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수많은 결혼식 사회를 본 경험이 있는 최교수에게 주례는 별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일을 ‘최교수가 일생에 걸쳐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4. 최교수가 대타(代打)로 주례를 본 일이 한번 더 있다. 중앙대 약대 천영진 교수의 결혼식 주례를 보기로 되어 있던 내가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어 주례를 볼 수 없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부득이 최교수에게 내 대신 대타로 주례를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최교수는 흔쾌히 들어 주었다. 천영진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에게도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5. 얼마 전 우리대학을 정년 퇴임한 J교수가 한 제자의 주례를 봤을 때의 일이다. J교수는 주례를 서기 위해 단상에 올라 섰다. 사회자는 ‘지금부터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라고 안내 멘트를 하였다. 그런데도 한동안 J교수의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J교수는 하얘진 얼굴로 주머니만 뒤적이고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들마저 ‘무슨 일인가’ 하며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J교수는 단상을 내려와 식장을 가로질러 식장 입구에 있는 접수대로 달려가더니 허겁지겁 축의금 접수통을 뒤지는 것이었다. J교수는 식장에 들어 갈 때 축의금 봉투 대신 그만 주례사 봉투를 내미는 실수를 했던 것이었다. 간신히 주례사 봉투를 찾은 J교수는 식은 땀을 닦으며 단상으로 돌아가 무사히(?) 주례를 마쳤다고 한다. J교수가 주례사 봉투를 찾아 단상으로 돌아 올 때까지 하객들은 긴장되어 거의 죽을 뻔 했다고 한다.
6. 우리대학의 K명예교수님이 현역 시절 어떤 제자의 주례를 보게 되었는데, 당일 그만 깜빡 잊고 식장에 가지 않으셨단다. 그러다 혼주(婚主)의 전화를 받고서야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달려 갔다. 그 동안 혼주는 하객들에게 “식사부터 하신 다음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라는 간단한 안내 방송을 하고 있었다. ‘주례 선생님이 늦으시기 때문’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하객들은 “요즘에는 식사부터 하고 식을 올리기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식장에 도착한 K교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무사히 주례를 마쳤다고 한다. 혼주와 주례 중 아무도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객들은 끝내 상황을 눈치챌 수 없었다. 혼주와 K교수의 임기응변이 돋보였던 사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주례가 좀 심했다 싶은 해프닝이었다.
2012-12-19 1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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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5> 주책바가지
1974년 5월에 제대한 나는 대학원 1학년 2학기 복학을 기다리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던 나는 심심하면 동아제약에 다니는 대학 동기 두 명 (K군과 W군)이 한 방에서 살고 있는 용두동 근처의 하숙집을 찾곤 했다. 하숙집에는 흔히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밥상을 디밀어 주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별로 예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씨는 비교적 괜찮은 아가씨라서 가끔 찾아 간 나에게 여러 번 밥을 주었다.
어느 날 그 집에 가보니 충청도 공주 출신의 K군이 내게 편지 한 통을 내밀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내용인즉 고향 공주에 계신 K군의 아버지께서 K군에게 보낸 편지인데, ‘참한 처녀가 있으니 이 참에 내려와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혹시 그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참한 처녀도 많으니 아무튼 꼭 내려와 선을 보라’는 내용이었다. K군은 나더러 공주까지 같이 내려 가자고 하였다. 딱히 할 일도 없던 터라 나는 그러자고 하였다. 며칠 후 둘이 버스를 타고 공주 K군의 집에까지 가게 되었다.
친구 집에 도착하자 친구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요컨대 내일 시내 다방에서 신부감을 만날 터인데 나도 거기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가서 신부감을 보고 난 다음, K군더러 ‘색시감이 좋으니 결혼을 하라’고 부추기라고 당부하셨다.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드렸다. 다만, ‘제가 봐서 신부감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제법 신중한 답변을 드렸다.
다음날 공주 시내에 있는 모 다방에 갔다. 신랑 측에서는 K군과 그의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총 4명이 나가 앉았고, 신부 측에서는 신부감만 혼자 나왔다. 내가 보니 신부감은 첫 눈에 미인이었다. 나는 K군에게 결혼하라고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부모님은 이내 자리를 비켜주셨다. 그리고 K군과 신부감은 공주천 뚝방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순간 나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면 얼마나 멋쩍고 어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데이트에 동행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맹세컨대 당시 나는 엄청난 희생 정신을 발휘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뚝방길을 걷는 내내 동행하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재담으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두 사람은 얼마 후 결혼하게 되었는데, 나는 내가 이 두 사람의 결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큰 사례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지도 제법 세월이 흘러 간 어느 날, 나는 그 두 사람이 나를 전혀 고마워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실망하였다.
두 사람에게 들어 보니 공주천 뚝방길을 걸을 때, 함께 따라 나선 나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귀찮았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공명심(功名心)이 무참히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K군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살신성인 (殺身成仁)의 심정으로 데이트에 동행했던 것인데…. 다만 친구 부인은 내 공 (功)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실토하였다. 즉 나 때문에 자기 남편이 그렇게 키가 작은 줄 당시에는 몰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키가 K군의 결혼에 도움이 된 사실을 위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아내는 지금도 그 때의 나를 ‘주책 바가지’라고 비판한다. 친구가 선보는 자리에 나간 것부터 뚝방길 데이트에 동행한 것까지의 모두가 주책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의 비판이 백 번 옳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일을 계기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내는 친구의 약혼식에 신부의 친구 자격으로 나왔다가 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회상하면 그래서 늘 기분이 좋다.
2012-12-05 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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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4>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내가 섬기고 있는 온누리 교회의 올해 슬로건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이다. 1. 함께 즐거워 하기 : 오래 전 은사 (恩師)이신 모 교수님이 내게 물으셨다. “당신이 잘 되면 누구 누구가 좋아할 것 같소?” “글쎄요” 하며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당신 부인, 부모님 그리고 자식들은 분명히 좋아할 것이요. 하지만 형제만 해도 심정이 복잡해 질 것이요. 친구나 이웃들은 진심으로 기뻐하기가 더욱 쉽지 않을 것이요”. 냉정한 표현 같지만 많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었다. 내가 잘 되면, 더구나 그 일로 내가 잘난 척을 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나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 코드는 ‘겸손’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잘 나가는 사람의 교만은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시 교만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사람의 외모, 머리, 심지어 성격까지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일 뿐인데, 마치 제 공 (功)인 것처럼 자랑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찬송가 가사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인 것이다. ‘겸손’이라는 말 자체가 교만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는 크리스챤은 마땅히 남의 잘 됨을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과거를 돌아 보니 나는 돈 잘 버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다만 교수가 되고 나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 업적을 내면 살짝 배가 아프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후배 교수들이 좋은 연구 업적을 내서 상을 받고 큰 연구비를 받아도 배가 아프지 않다.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이가 좀 든 탓일 것이다. 이런걸 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인가? 아무튼 남의 성공을 배 아파하지 않게 된 자신이 스스로 대견스럽다.
2. 함께 울기 : 성경의 욥기란 책을 보면 하나님을 잘 믿는 욥이란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식들이 다 죽고 재산이 다 없어지는 참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 욥을 위로하기 위해 몇 친구들이 찾아 왔다. 어떤 친구는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벌을 받았을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쏟아 붓는다. 친구들의 말을 들은 욥은 위로는커녕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욥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이 벌을 받는가?’를 사람이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남의 비극을 앞에 두고 하는 섣부른 훈계는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욥의 친구들이 훈계 대신 욥을 붙들고 함께 울었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그 것이 욥에게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18년 전 내가 직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와, “형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동생이 울었을 때에 큰 위로를 받았었다. 세상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끝내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절은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난은 절망스러운 환경일 뿐이다. 이 지구상에 깨끗한 물과 세끼 밥을 먹으면서 입시나 정치 문제를 가지고 투덜거릴 수 있는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국내에도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국내외에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이야기이다.
국가와 사회, 특히 교회는 성공한 사람, 또 역경을 딛고 일어 선 사람을 보고는 ‘함께 즐거워’ 해야 하지만, 고난 중에 재기하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붙들고는, 우선 ‘함께 울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울기’가 참 사랑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연말이다.
2012-11-21 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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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3> ‘한국 약학사’
2006년 은사 (恩師)이신 이상섭 교수님의 강권에 못 이겨 일본에서 찾아 온 약학사 (藥學史) 연구 그룹에게 우리나라의 5000년 약학사를 약 90분에 걸쳐 소개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는 고 김신근 교수님이 쓰신 책 1) 을 대충 정리하여 슬라이드를 만들어 발표하였다. 7-8명의 일본 학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방 벽에 슬라이드를 비추어 가며 설명하였는데, 나름대로 그들에게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해인 2007년 4월 14일에 ‘일본약사 (藥史) 학회’ 총회에 초청을 받아 같은 제목으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7년에 우리나라 약학회지 2) 에, 그리고 2008년에 일본약사학잡지(藥史学雜誌) 3) 에 한국약학사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의반타의반 (自意半他意半) ‘약학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의 관심사는 옛날 약학사가 아니라 근세 약학사이다. 옛날은 차치 (且置)하고 근세의 약학에 관한 기록도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한국약학대학교육협의회 (藥敎協)의 김대경 이사장으로부터 ‘한국약학사’ 를 편찬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걱정이 되었지만 사명감 때문에 ‘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해 보겠다’ 라고 대답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2008년에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학술연구-약학’ 이란 책 4) 을 잘 보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이 책은 학술원 회원이신 이상섭 박사님이 편집책임을 맡으시고, 역시 학술원 회원이신 김낙두, 김영중 두 박사님과, 이승기, 심창구, 박정일, 김진웅 교수가 집필 및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여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은 학술원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학인 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약학의 현황을 나름대로 잘 정리하고 있다. 부탁을 들은 며칠 후 이상섭 교수님을 경유하여 이 책을 ‘참조’하여 새로운 책을 만들 때에 문제는 없는가에 관한 학술원의 조언을 들은 다음, 한번 발간의 책임을 맡아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 후 10월 15-20일에 미국약학회 (AAPS, 시카고)에 다녀 오며 이 책의 발간에 관해 좀 더 깊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때 떠 오른 아이디어는 G7 프로젝트 이후 우리나라 제약기업이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를 정리하면 우리나라 신약 연구의 흐름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마침 학회에 참석하신 ‘신약개발연구조합’의 이강추 회장님과 여재천 상무님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대 찬성이었다. 여상무는 한걸음 더 나가 조합의 역사, 신약개발 관련 법규의 제정 배경 등에 대해서도 정리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우리나라와 재미 (在美) 한인 약학자 간의 교류 모임인KAPSA나 SBR, 또는 KASBP 같은 모임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우리나라 약학과 미국 약학의 상호작용을 알아 보자는 것이었다. KAPSA에 대해서는 전 회장인 성균관대 박은석 교수에게, 그리고 SBR 과 KASBP에 대해서는 각각 안창호 박사와 현 회장인 BMS의 한용해 박사에게 글을 부탁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편 미국 약대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한인 약학자들, 미국 FDA (안혜영 박사) 와 NIH (김희용 박사)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 약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내친 김에 한국 약학자의 미국 (김병각), 유럽 (문창규, 권순경) 및 일본 (이은방) 유학사까지 정리한다면 우리나라 약학과 해외 약학과의 교류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 같았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도가 제법 높은 ‘한국 약학사’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1) 김신근, 한국의약사 (韓國醫藥史),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울 (2001)2) 심창구 외, 한국약학사, 약학회지, 51(6), 361-382 (2007)3) 沈昌求 外, 韓國の 藥學, 藥史学雜誌, 43(2), 128-139 (2008) 4) 이상섭 외, 한국의 학술연구, 자연과학편 제9집 –약학, 대한민국 학술원 (2008)
2012-11-07 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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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2> 새로운 약의 창조 5- 타깃 단백질의 구조
약이란 대개 몸 안에 있는 특정한 단백질에 무언가 작용을 함으로써 약효를 나타내는 물질이다. 따라서 신약개발에 있어서 첫 번째 관심사는 '어떤 단백질에 작용하는 약을 개발할 것인가'이다. 개발의 대상이 되는 단백질을 타깃 단백질이라고 한다. 두 번째 관심사는 타깃 단백질의 입체구조이다. 단백질의 구조를 알아야 그에 작용하는 약물분자를 찾아내거나 설계할 수 있고 나아가 약물분자의 작용 기전을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관심사는 타깃 단백질과 후보약물 간의 결합체 (복합체)의 입체구조이다. 원자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입체 구조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X선 결정구조 해석법을 써서 대략 1cm의 1억분의 1 (1A 또는 0.1nm) 정도 (즉 수소 원자 크기) 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단백질은 체내의 화학 반응을 가속(촉매)하거나 정보를 전달(수용체)한다. 이러한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단백질의 입체 구조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처럼 연결된 물질이다. 이런 구조의 화합물을 폴리펩티드라고 부르는데, 분자량이 수만 이상인 폴리펩티드(대략 아미노산이 100개 이상 연결)를 특별히 단백질이라고 부른다. 폴리펩티드의 사슬을 주(main) 사슬이라고 부르고, 주 사슬에서 삐져 나와 있는 부분을 옆사슬(side chain)이라고 부른다. 주 사슬은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는 아미노산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하지만, 옆사슬은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는 아미노산의 종류에 따라 구조가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단백질의 액성(산성 또는 염기성), 친수성 및 크기 등도 구성 아미노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며, 이에 따라 단백질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도 다양해 진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20가지나 된다. 따라서 그 조합의 수도 매우 많다. 아미노산이 줄처럼 배열된 것을 단백질의 1차 구조라고 부른다. 각 단백질은 DNA에 쓰여 있는 명령에 따라 자기에게 고유한 아미노산 배열을 한다. 펩티드의 주사슬은 분자 내부의 원자 간 상호작용(특히 수소결합)에 의해 특정한 구조를 만든다. 이를 2차 구조라고 한다. 수소결합이란 수소 원자를 사이에 두고 질소나 산소처럼 극성이 강한 극성분자끼리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직접적인 화학결합(공유결합)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2차 구조에는 α-헬릭스(α-helix)와 β-쉬트(β-sheet) 구조가 있다. α-헬릭스는 펩티드 주사슬의 아미드기(-NH)와 카르보닐기(-C=O)가 2개 건너마다 수소결합을 한 모습이다. β-쉬트는 β 사슬(펩티드 주사슬이 늘어 난 모습)이 옆에 있는 β사슬과 수소결합을 하여 1장의 쉬트 모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단백질을 주택에 비유하자면 α-헬릭스는 기둥, β-쉬트는 벽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2차 구조가 조합된 것을 3차 구조라고 한다. 3차 구조를 형성함에 있어서는 펩티드의 옆사슬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3차 구조까지는 1가닥의 폴리펩티드 사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러 개의 사슬(subunit)이 회합하여 1개의 분자를 이루고 있는 단백질이 있다. 예컨대 4개의 subunit로 구성된 헤모글로빈은 몸 안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인데 4개의 폴리펩티드가 회합하여 하나의 분자를 만들어, 산소를 효율적으로 결합, 해리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런 모습을 4차 구조라고 부른다. 4차 구조를 형성할 때에도 3차 구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미노산 옆사슬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백질의 입체구조를 표시하는 방법에는 각 원자를 철사로 연결한 것처럼 보이는 ‘와이어 모델’, 각 원자를 원자 반경만한 크기의 공으로 나타낸 ‘CPK모델’, 개개의 원자보다 분자 표면의 울퉁불퉁함을 이미지화한 ‘분자표면도’, 리본 모양으로 나타낸 ‘리본 모델’ 등이 있다. 각 표시법에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적당한 모델을 선택하여야 한다. 다음 회에는 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규명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2012-10-24 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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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1> 일본약제학회의 시민공개강좌
오늘은 지난 9월 25일 일본 약제학회가 주최한 ‘의약분업 추진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에 가서 발표하고 온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국제 심포지움 이라고는 했지만 나를 제외한 7연사가 모두 일본인이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연자가 일본어로 발표를 하는 자리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심포지움은 공익사단법인인 일본약제학회가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하는 ‘시민공개강좌’이었다. 이 학회가 사단법인에서 공익사단법인으로 바뀐 것은 올해 봄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반 시민을 상대로는 심포지움을 열지 않는 그간의 국내외 학회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심포지움은 다소 신기한 것이었다.
학회가 열린 곳은 동경 시내의 황궁 (皇宮) 근처에 있는 일본교육회관의 8층 회의실이었다. 심포지움은 오후 1시 정각에 시작되어 저녁 5시에 끝났는데, 놀랍게도8명의 연자가 모두 1분의 착오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 발표를 마치는 것이었다. 좌장의 안내도 정확했지만 연자 모두 좌장의 지시에 순종하는 태도가 보기 좋았다.
강연회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개회사 (일본약제학회 고문, 고니시 박사), 학회장 인사 (홋까이도대학 약학부, 하라시마 교수), ‘인류 영지 (英知)의 결정이며 세계의 표준인 의약완전분업에 대하여’ (나가이 기념약학국제교류재단이사장 겸 학회 명예회장, 나가이 교수), ‘한국은 어떻게 세계표준의 의약완전분업을 달성하였나?’ (필자), 과거의 약해대국 (藥害大國) 일본과 약제사 (조사이대 약학부 초빙교수 기무라), ‘국민의 안전과 약해 (藥害)’ (탈리도마이드 피해자회 회장 마미야), 세계약제사의 역할 (동경도약제사회 회장겸 보생당 약국장 야마모토), 앞으로의 일본약제사의 역할 (우에다시 약제사회 회장 이이지마), 약제사회에 바라는 것 (1. 의사의 입장에서, 츠쿠바대 의학부 교수 마에노; 2.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호시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운드디스커션, 의 순이었다. 심포지움을 연 목적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완전의약분업을 아직도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약제사를 비롯한 일반 시민들의 분발 및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비록 참석자는 60명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참석자 모두 시종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발표를 경청하였다. 일반 신문사 기자의 취재도 있었다고 한다. 발표 내용은 예상을 크게 뛰어 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의사의 반대로 분업을 실시하지 못하는 답답함, 그리고 컨비니언트 스토어가 넘쳐나는 이 시대의 약국이 살아남을 방도 등에 대한 의견 제시가 주류이었다. 참고할 만 했던 것은 ‘강제분업’과 ‘임의분업’이라는 용어는 어감도 안 좋고 부정확하기도 하니 ‘완전분업’과 ‘불완전분업’으로 바꾸어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우에다시 (上田市) 약제사회장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지역밀착’형 건강도우미 역할을 철저히 할 때에만 약국이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분은 얼마 전 경기도약사회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 왔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의약분업 추진에 있어서 시민단체의 이니시어티브와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이 큰 몫을 하였으며, 의약분업의 목표가 의약품의 안전사용에 있다고 볼 때에 우리나라 의약분업 12년의 성과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표를 하였다. 이날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탈리도마이드 환자인 마미야 (間宮 淸)란 분이 직접 나와 1963년 경 일본의 의약품의 안전 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가? 그리고 당시 의사와 약사는 제 역할을 다 했는가 등에 관해 문제 제기를 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일본제약이 이소민이라는 이름으로 이 약을 판매하였는데, 피해자가 일본 내에서 9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분은 두 팔이 발달하지 않아 손을 쓸 수 없었는데도 매우 성실한 자료 준비로 훌륭한 강의를 해 주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의 피해자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끝으로 여비와 숙박비 외에 2012 렉춰 쉽 상 (lectureship award, 6만엔)을 부담해 준 나가이 재단에 감사드린다.
2012-10-10 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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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10> 미래의 약학의 약학을 위한 드라이랩
일제 하 1914년 1월에 한국인 다수가 참여한 '조선약학회(朝鮮藥學會)'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회원은 99명, 초대 회두(會頭)는 다까사또란 일본인이었다. 이 학회는 1921년 1월 ‘조선약학회회보’를 창간하였는데, 이 회보는 1926년 제6호부터 ‘조선약학회잡지’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후인 1946년 4월 13일 '조선약학회(회장, 도봉섭)'를 재창립하였다. 2년 뒤인 1948년 3월에는 ‘약학회지(藥學會誌)’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조선약학회잡지’는 20여 년간의 수명을 마치고 자연히 소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조선약학회의 활동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1951년 12월 16일 부산 시청에서 '대한약학회(大韓藥學會)'를 재창립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재창립이라고 했지만, 실은 ‘조선약학회’의 이름을 고친 것에 불과하였다. 학회의 회지명(會誌名)도 예전의 ‘약학회지’라는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그래서 ‘약학회지’가 ‘대한약학회’ 보다 세 살이 많게 되었다. 2012년 현재 ‘대한약학회’는 53세이고, ‘약학회지’는 56세 (Vol. 56을 발간 중)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 약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최근만 보더라도 2000년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이 시작되었고, 2009년부터는 소위 2+4년제의 약학교육이 시작되었으며, 2011년부터 타 학과에서 최소 2년 이상 공부를 마치고 약대 입시에 합격한 학생들이 약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6년제 시행과 더불어 신설된 15개의 약학대학들은 각각 10-20여명 규모의 교수들을 채용하기 시작하였고, 이 바람에 전국 약대 교수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약학 연구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약학의 연구 방향도 과거와 달리 신약개발학과 임상약학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지향하게 되었다. 드라이랩신약개발학과 임상약학은 분명히 약학의 핵심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핵심적 가치도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세포에서 가장 중요한 DNA 정보는 세포핵 (核, Nucleus)에 들어 있지만, 세포가 생존, 분화하기 위해서는 세포핵 주위에 세포질과 세포막이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약개발학이나 임상약학도 사회약학이나 약사법 같은 주변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세포핵이 고사하면 뒤이어 세포 (약학) 자체도 죽게 되는 것이다.근래 주로 실험을 하는 연구실을 웻랩 (wet laboratory)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비하여, 주로 실험을 하지 않고 연구하는 연구실을 드라이랩 (dry laboratory)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미 120여 년 전에 동경대학에 ‘위생재판화학 강좌’가 개설된 이래 현재 약 60개의 약대에서 다양한 이름의 사회약학 계열의 드라이 랩이 개설되어 있다.
의약정책학, 의료경제학, 파마코비지니스인벤션, 의약품정보학, 국제보건약학, 의약품안전성평가학, 약제정보분석학, 국제임상개발규제과학, 의약품개발구상, 의료정보해석학, 정보계량약학, 지역약국학, 구급약학, 의약품리스크관리학, 사회약학, 보험약국학, 임상통계학, 의약개발학, 의료심리학, 약사관리학, 약사법제도, 지역의료약학, 약제역학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사회약학 영역의 드라이랩이 우후죽순 (雨後竹筍)처럼 생겨나는 이유는, 신약개발학이나 임상약학 같은 핵심적 가치 (DNA)를 갖는 웻랩들의 생존과 발달에 웻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약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도 일본에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약학에도 사회약학 영역의 드라이랩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고려대, 동국대 등 몇몇 신설 약대에 드라이랩이 개설되기 시작하였지만, 필요성의 절실함에 비하면 그 규모는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다양한 전공의 드라이랩을 개설하는 일은 약학계는 물론 제약업계와 약사회 나아가 사회로부터도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미래 약학의 블루오션이 될 전망이다.
2012-09-19 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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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09> 새로운 약의 창조 4- 프로세스 케미스트리
창약 연구 중 ‘제조’ 분야도 시대의 변화 또는 사회의 요청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1992년 미국식품의약품청(FDA)이 “Racemic Switch”라는 지침을 발표한 것과, 1992년 UN 환경개발회의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Agenda 21’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라세믹 스위치 - 약물 중에는 키랄(chiral) 구조를 갖는 것이 있다. 키랄 구조란 오른손과 왼손처럼, 결합을 자르지 않는 한 서로 겹쳐지지는 않지만,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입체구조가 같은 ‘경상이성체(鏡像異性體, 거울이성체)’ 구조를 말한다. “라세믹 스위치” 지침에 의하면 키랄 구조를 갖는 의약품의 경우 두 가지 경상체(enantiomer)가 혼합된 채로 판매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약효가 있는 한 가지 경상체만을 함유하도록 순수하게 만들어 판매해야 한다. 만약 두 가지 경상체의 혼합물을 약으로 시판하고자 한다면 불필요하게 혼입되어 있는 한 가지 경상체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이 지침이 발표된 후 세계의 유기합성화학자들은 오른손계 화합물 또는 왼손계 화합물만을 선택적으로 합성하는 ‘부제합성 (不齊合成, asymmetric synthesis)’ 연구에 열정을 쏟게 되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001년 노벨상을 수상한 R. Noyori 박사 등은 BINAP-천이금속 촉매반응법을 개발하여 멘톨과 카바페넴계 항생물질 등을 부제합성할 수 있었다.녹색화학 - 한편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고 하는 개념은 자원이 없어지고 환경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환경을 해치지 말고 물건을 만들자’는 ‘녹색화학(green chemistry)의 12원칙’을 따르자는 것이다. 프로세스 케미스트리 - 약을 합성하는 연구에는 프로세스 케미스트리(process chemistry)라고 부르는 분야가 있다. 약을 빠르고, 안전하게, 대량으로, 싸게 합성하는 제조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교토대학의 다께모토 교수 등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지침을 동시에 따르기 위해서는 생물에서 일어나는 생체반응을 합성에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환경에 무해한 방법으로 부제합성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생물인 점에 착안한 것이다. 사실 옛날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생물에서의 반응을 모방하여 인공 생체분자를 설계하고 합성하고 싶어하였다. 다께모토 등은 프로테아제(protease)라고 하는 효소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효소는 분자량이 수만 내지 수십만인 거대 분자이지만 실제로는 효소의 극히 일부분만이 생체반응에 관여하여 기능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분자량이 커서 합성하기 어려운 효소 대신, 효소의 기능은 갖고 있지만 분자량이 작은 유기분자의 구조를 알아낸다면 그 물질을 인공적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프로테아제 효소에 비해 분자량이 훨씬 작고 (분자량 413) 촉매활성이 매우 뛰어난 유기분자 촉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두 가지 기질을 톨루엔이라고 하는 유기용매에 녹여 이 촉매를 소량 첨가하고 실온에서 저어주었더니 가열이나 냉각 같은 조작을 하지 않고서도 목적으로 하는 생성물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이 인공 촉매는 (1) 매우 안정하기 때문에 반응 후에 회수하여 다시 이용할 수 있으며, (2) 반응 시 가열하거나 냉각할 필요가 없어서 에너지가 절약되며, (3) 합성이 쉽고 가격이 싸기 때문에 경제성이 뛰어나며, (4) 사용시 복잡한 조작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하기 쉽다고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실제로 현재 시판되고 있는 바클로펜 (baclofen)이라고 하는 의약품은 이 촉매를 이용하여 단 3개의 공정만으로 부제합성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복용 후 인체에 안전한 약을 개발하면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약의 제조 과정도 사람에게 안전하고 지구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약을 개발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새로운 약을 창조하고자 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2012-09-05 1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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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08> 짚신도 짝이 있다구요?
1. 결혼은 특권층의 행사
나의 대학 동기들 (평균 나이 65세) 9명이 모이는 ‘함춘약우회’의 자녀는 총 16명인데, 현재 8명이 결혼을 못 하였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40대의 17%가 결혼을 하지 못했고, 2010년 현재 서울에 사는 35-49세 남자 5명 중 1명이 결혼을 해 보지 못 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혹시 처녀는 돈 잘 버는 총각만을 원하고, 총각은 예쁜 처녀만을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총각 처녀가 다들 그런 바램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서로 만나도 결혼이 성사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제 가죽신은 모를까, 짚신은 짝을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러다가는 머지 않아 결혼이란 일부 특권층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대선 후보님들! ‘짚신도 짝이 있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라고 공약하세요. 그럼 틀림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나무꾼과 선녀: 애기 셋 낳을 때까지는…
운 좋게(?)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도 안심은 이르다. 여기저기서 이혼 소식이 들려 오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후딱 하면 이혼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요즘 부모들이 자녀의 이혼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 갔다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의 옷을 감추는 바람에 선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서 틈만 나면 옷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나무꾼은 ‘아이가 셋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옷을 돌려 주어서는 안된다’는 산신령의 경고를 어기고 둘째 아기를 낳은 후 어느 날 선녀의 옷을 돌려 주었다. 그러자 선녀는 두 아이를 양품에 껴안고 하늘 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혼한 신부는 문득문득 결혼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아내로, 엄마로, 그리고 며느리로까지 살기가 고생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셋 정도 낳고 길러 어느 정도 결혼 생활에 이골이 나기 전까지는, 결코 결혼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까지 부부는 온갖 정성과 주의로 상대방을 돌보아야 한다. 마치 인큐베이터에 넣어 기르는 자신의 애기를 돌보듯이. ‘아이를 셋 낳기까지는 결코 결혼 생활이 안정되었다 방심말라.’ 혹시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큰 아들이 결혼 하였을 때, 최근의 이혼 풍조를 걱정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 ‘만약에 고부 (姑婦)간에 갈등이 생긴다면 너는 네 처 편을 들어라. 나는 네 엄마 편을 들겠다. 만약에 갈등이 심각해져 누군가 갈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상황이 된다면, 너는 부모와 갈라지는 선택을 해라. 부모와 자식이 갈라질 수는 있으나 부부간에 갈라지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라고.
3. 감히 시집살이를 시켜?부모들은 흔히 ‘요즘 애들은 얼마나 좋아’ 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엄청 행복하게 사는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치열한 무한 경쟁, 맞벌이, 육아 등 지금보다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미래 때문에 우리 부모 세대들 보다 더 깊은 고민을 하며 산다. 부모들은 우선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혼수 타박이나 며느리 구박 같은 행태는 박물관에서도 내다 버려야 할 시대착오적인 바보짓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떻게 감히 며느리를 시집살이 (또는 사위를 구박) 시킬 수 있겠는가? 부모들이 온갖 정성으로 신혼 부부를 보호해 주어도 어려운 게 신혼 생활이다. 이쯤에서 부모 세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나는 아이들의 결혼 생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모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모인가? 그 어려운 영예의(?) 결혼을 해 준 우리 자녀들이 부모 때문에 불행해지거나 이혼을 생각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새삼 나와 똑 같은 생각으로 두 며느리를 품고 사는 아내가 더욱 고마워 진다.
2012-08-22 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