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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91> 심방세동 있어도 커피 괜찮을까?
정재훈 약사.심방세동이 있으면 커피는 끊으라고 권고하는 경우가 많다. 카페인이 심박수를 올리니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악화시킬 거란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심방세동은 심계항진(두근거림)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심부전, 혈전, 뇌졸중을 유발한다. 그런데 커피가 오히려 심방세동 발생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새로운 연구가 나왔다. 2025년 11월 미국심장협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미국의학협회지(JAMA)에도 게재된 DECAF 임상시험 연구 결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와 호주 애들레이드대학교 공동 연구진은 카페인이 든 커피를 하루 한 잔 마시도록 배정된 그룹은 커피를 마시지 않은 그룹에 비해 심방세동 재발률이 39% 낮았다고 발표했다.연구진은 카페인 함유 커피 섭취가 재발성 심방세동(AFib) 발병 위험에 유익한, 해로운, 또는 중립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보기 위해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무작위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 병력이 있어 증상이 해결되었거나 치료를 받아서 리듬이 정상적인 200명의 환자를 6개월간 추적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은 매일 최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른 그룹은 모든 카페인을 끊었다.결과는 통념과 달랐다. 커피를 마신 그룹의 심방세동 재발률이 47%였던 반면, 커피를 끊은 그룹은 64%였다. 커피를 마신 사람들이 오히려 39%나 낮은 재발 위험을 보였고 첫 재발까지 걸린 시간도 커피 섭취군에서 더 길었다.사실 이런 결과의 단서는 이미 있었다. 이번 연구를 이끈 그레고리 마커스(Gregory Marcus) 교수팀은 2021년 발표한 다른 연구에서 UK Biobank의 수십만 명 데이터를 분석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실수록 심방세동 발생 위험이 낮았던 것이다.2023년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발표된 CRAVE 연구도 비슷했다. 100명의 건강한 지원자에게 웨어러블 기기(Fitbit)와 심전도 패치를 착용시키고 24시간 단위로 커피를 마시거나 끊게 했다. 그 결과 커피가 심방세동의 강력한 예측인자인 조기 심방수축(PAC) 횟수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마커스 교수는 커피가 이런 효과를 내는 이유로 다섯 가지 추측을 제시한다.첫째, 미주신경 억제 효과다. 심방세동의 상당수는 미주신경 긴장이 높아질 때 발생하는데 카페인이 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이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둘째, 심방 재분극 연장 효과다. 동물실험에서 카페인은 항부정맥제인 아미오다론처럼 심방의 재분극 시간을 늘려 부정맥을 일으키는 작은 전기 파동들이 형성되지 못하게 한다.셋째는 신체 활동 증가다. CRAVE 연구에서 커피를 마신 날 걸음 수가 유의하게 늘었다. 운동이 심방세동을 줄인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므로 커피가 운동량을 늘려서 심방세동을 줄일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넷째, 혈압 감소 효과이다. 카페인이 혈압을 올릴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커피의 이뇨 작용으로 혈압이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피 이야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항염증 효과이다. 커피에 풍부한 플라바놀과 같은 항산화물질은 항염증 작용을 하는데, 염증이 심방세동의 중요한 위험인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로 인해 커피가 심방세동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연구 결과는 이미 커피를 즐기는 심방세동 환자라면 굳이 끊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방세동이 있는 사람이 일부러 커피를 마실 필요는 없다. 커피를 마시지 않던 사람이 마시는 게 좋은지 알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커피를 마신 후 명확하게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라면 당연히 피해야 한다.또한 이번 연구는 지난 5년 내 커피를 마신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 포함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심방세동이 생겨서 끊은 사람들은 애초에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연구 참여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가 커피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안심할 수 있다는 근거가 생겼으니 다행이다.
2025-11-27 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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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90> 멜라토닌 논란, 어떻게 봐야하나
정재훈 약사.천연 수면보조제로 알려진 멜라토닌 복용이 심부전 위험을 90% 높일 수 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여러 매체에서 이 결과를 인용하며 멜라토닌에 대한 경고성 기사를 쏟아냈다. 11월 초 미국심장협회(American Heart Association) 연례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이지만 아직 동료평가(peer review)를 거치지 않은 미출간 예비연구이며 학회 초록 형태의 발표이다. 위험이 90% 증가한다니 차이가 매우 커 보이지만 관찰연구이므로 연관성만 보여줄 뿐,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연구진은 건강기록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불면증 진단을 받은 전 세계 성인 130,828명(평균 55.7세, 여성이 61.4%)의 5년간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 중 65,414명이 최소 1회 이상 멜라토닌 처방을 받았으며, 최소 1년 이상 복용했다고 보고했다. 이들을 비복용군(의료기록상 멜라토닌 복용 기록이 없는 사람)과 비교하여 이후 5년 동안 두 그룹의 심부전 발생 위험을 추적했다. 이미 심부전 진단을 받았거나 다른 수면제를 복용한 사람은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연구진은 멜라토닌 복용군과 비복용군의 특성을 최대한 일치시켰으며, 심부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건강 요인들을 보정했다.그 결과, 멜라토닌 복용군의 심부전 발생률은 4.6%, 복용 기록이 없는 그룹은 2.7%로 나타났다. 멜라토닌 복용자는 심부전 위험이 약 90% 높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이들은 심부전으로 입원할 가능성이 약 3.5배, 모든 원인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2배 가까이 높았다.이번 연구를 이끈 에케네딜리추쿠 은나디(Ekenedilichukwu Nnadi) 박사(뉴욕 브루클린 소재 SUNY 다운스테이트 의과대학 내과 수련의)는 “멜라토닌은 일반적으로 매우 안전한 보충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장기 복용이 심부전·입원·사망률 증가와 연결된다는 건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일부 언론에서 ‘멜라토닌이 심부전을 일으킨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한 것은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보다 경고가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마 은나디 박사가 국내 기사 제목 “잠 잘 자려고 열심히 먹은 멜라토닌...심장 공격하고 있었다”를 본다면 크게 한숨을 내쉴 것이다.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연구에는 한계가 많다. 그 중 하나는 의사 처방을 통해 멜라토닌을 복용한 사람만 복용군에 넣었다는 점이다. 영국과 유럽연합 일부 국가에서는 멜라토닌을 처방 없이 구입할 수 없지만,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는 처방 없이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다. (참고로 국내에서도 멜라토닌은 처방약이다. 식물성 멜라토닌이라며 광고하는 제품들이 있지만 효과나 순도를 보장하기 어려운 일반 식품이다.) 이런 이유로 멜라토닌 비복용군에도 실제로는 멜라토닌을 복용한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구진은 비처방 멜라토닌 복용자에 대해 따로 조사하지 않았으므로 명확한 비교가 어려워진다.또한 이 연구에는 멜라토닌 복용량과 불면증의 중증도(severity), 복용 후 수면 개선 여부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멜라토닌은 뇌의 송과선에서 저녁 시간대에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이제 잘 시간이라는 신호를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멜라토닌의 효과에 대한 근거는 일관되지 않고 제한적이다. 시차 적응이나 교대 근무로 인한 수면 리듬 장애에는 소량의 멜라토닌 복용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만성 불면증에는 사용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다.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더 생긴다. 만약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처방약 멜라토닌이 필요했는데, 실제로 효과가 없었다면, 불면증 자체가 심부전 위험을 높인 요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면이 부족하면 교감신경계가 과도하게 활성화하여 심박수와 혈압이 높아지고 고혈압, 심근경색을 포함한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아진다.아직까지 멜라토닌이 심부전 위험 증가와 연관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 연구에서는 멜라토닌이 관상동맥질환 예방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일부 연구에서는 심부전 환자의 경우에도 긍정적 효과를 보여줬다. 도발적 연구이지만 추가 연구 없이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곤란하다.
2025-11-19 0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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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9> 알고도 효과를 내는 플라시보
정재훈 약사.가짜 약이라는 걸 알려줘도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을까? 그렇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독일 연구팀은 편두통 환자 120명에게 플라시보임을 공개한 알약을 3개월간 복용하게 했다. 그 결과 두통 발생 빈도 자체는 줄지 않았지만 환자의 삶의 질은 개선됐고 두통으로 인한 장애 정도도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약효 성분이 없다는 걸 알고 먹은 공개 라벨 플라시보(Open-label placebo, OLP)의 효과였다. 참가자 평균 연령은 34세, 여성이 86%였다. 이들 대부분(85%)은 한 달에 두통 일수가 15일 미만으로 나타나는 삽화성 편두통, 나머지는 만성 편두통이었다. 이 연구는 10월 8일 JAMA Network Open에 온라인으로 게재되었다.참가자의 약 절반인 58명은 일반적인 예방 요법 외에도 "플라시보 — 활성 성분 없음"이라고 명확하게 표시된 용기에 담긴 OLP 알약을 하루 두 번 복용했다. 나머지 62명은 표준 치료만 계속했다. 전체적으로 약보다 비약물 예방법을 사용한 사람이 많아서 편두통 예방약을 복용한 사람이 1/3, 나머지 2/3는 운동, 이완 기법과 같은 비약물적 방법을 사용했다. 이 비율은 공개 라벨 플라시보를 받은 쪽이나 그렇지 않은 쪽이나 비슷한 수준이었다.3개월 후, 두 그룹 모두 두통 빈도와 강도가 개선됐지만 OLP와 일반 치료를 병행한 그룹과 일반 치료만 받은 그룹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급성 치료약 사용 일수도 비슷했다. 두통이 절반 이상 줄어든 환자 비율(50% 반응률)도 두 그룹에서 차이가 없었다.그러나 부차적 지표에서는 OLP가 분명한 이점을 보였다. 신체적 삶의 질 점수는 약 4점 상승했다. (편두통에 관해서는 아직 기준이 없지만 다른 통증 질환에서 3.3점 이상이면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로 본다.) 통증 관련 장애 점수는 약 6점 감소했으며, 두통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소폭이지만 유의미하게 줄었다. OLP를 복용한 사람들의 거의 절반(47%)이 자신의 상태가 개선되었다고 평가한 반면, 일반 치료만 받은 사람들은 24%로 거의 두 배 차이가 났다. 쉽게 말해 오픈 라벨 플라시보가 편두통 빈도와 같은 객관적 지표에는 효과가 없지만 주관적 불편감을 개선하는 데는 가치있다는 의미이다.플라시보라는 걸 알고 먹어도 효과가 나는 이유는 뭘까?이전에는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면 긍정적 기대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공개 라벨 플라시보 연구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플라시보 연구를 해온 테드 캅추크 하버드의대 교수는 이런 플라시보 반응이 뇌가 감각을 자동 조절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저 나아질 거라는 기대만 효과를 내는 게 아니라 안전과 돌봄의 신호를 감지한 상태에서 뇌가 불쾌한 감각의 볼륨을 낮추기 때문이란 것이다.이번 연구를 진행한 독일 연구진의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비활성이라고 공개된 플라시보 알약을 복용하는 행위 자체가 환자가 자신의 질환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편두통 발작 횟수가 변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편두통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연구는 코로나19 시기에 진행되다 보니 원래 목표로 했던 150명에 비해 참가자 수가 12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공개 플라시보의 효과에 대한 이전 연구와 결을 같이한다.이론적으로 플라시보 효과는 의사-환자 관계에 뿌리내린 치유 의례(healing ritual)에서 생겨난다. 실제로 의사-환자 관계는 플라시보 효과를 증강하는 데 핵심이라는 근거가 많다. 이번 연구에서는 대면 상호작용을 최소화하고, 사전 포장된 약과 표준화된 동영상 설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의사-환자의 관계적 요소가 더 적었을 수 있고 그 결과 이전 연구들에 비해 OLP 효과가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물론 편두통 예방약을 플라시보로 대체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떤 약을 왜 먹는지, 약 먹고 나서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치료의 체감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2025-11-17 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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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8> 트럼프가 미는 약 효과있을까?
정재훈 약사미국발 건강 뉴스가 세계를 뒤덮고 있다. 지난달 트럼프 행정부는 타이레놀이 자폐 아동 출산 위험을 높인다는 주장을 펼쳤다. 동시에 대중에게는 생소한 류코보린(leucovorin)을 잠재적인 치료제로 내세웠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자폐 아동 치료를 위해 부모들이 류코보린 칼슘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하기까지 했다. 처방약인 류코보린의 의약품 라벨을 개정해서 의사가 처방하기 쉽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해결책이 정말 자폐 아동 치료에 도움이 될까?류코보린은 비타민 B9, 즉 엽산(folate)의 한 형태이다. 엽산은 DNA와 새로운 세포를 형성하는데 필수적이어서 조직이 빠르게 성장하는 태아, 영아에게 중요하다. 엽산은 시금치 같은 녹색 잎채소나 콩, 감귤류 과일 등 다양한 식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만 가임기 여성에게는 태아의 신경관 결손을 예방하기 위해 엽산 보충제 복용을 권장한다. 류코보린은 일반적 엽산 보충제와는 다르다.본래 항암 치료를 받는 일부 암 환자에게 투여되는 약이다. 일부 항암제는 암세포를 죽이지만 엽산을 필요로 하는 건강한 세포에도 해를 끼칠 수 있는데, 류코보린은 이럴 때 엽산보충제 역할을 수행하여 건강한 세포가 회복하는 것을 돕고 부작용을 줄여준다. 5-FU 같은 항암제는 류코보린을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증강되기도 한다. 류코보린이 자폐 아동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은 아직 초기 단계인 일부 연구에 근거한다.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일부 사람은 신경 발달에 필수적인 엽산을 뇌로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류코보린이 뇌로 엽산 전달을 도와줄 수 있다는 가설이다. 임신 중 낮은 엽산 수치가 자폐증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류코보린이 자폐 아동의 부분적 증상 개선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연구들이 상당한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더 큰 규모로 재현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뇌에서 엽산이 결핍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에, 엽산 보충이 자폐스펙트럼장애 환자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관점에서는 자폐의 원인도 해결책도 매우 간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폐는 복잡한 질환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되지만 그중에서도 유전적 요인이 가장 큰 것으로 추측된다.자폐과학재단의 설립자이며 회장인 앨리슨 싱어가 자폐와 관련한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에 가장 가치있는 길은 유전학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내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 아동 수의 증가가 마치 임신부의 타이레놀 복용 때문인 것처럼 몰아가려 하지만, 과학자들은 진단 기준의 확대와 선별 검사의 발달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자폐로 진단되지 않았을 경계선상의 아동이 이제는 진단 범위에 포함되면서 전체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번 발표의 파장은 컸다. 미국에서는 류코보린과 동일 성분이 저용량으로 들어간 보충제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일부 온라인 쇼핑몰에서 품절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는 과학자들의 신중한 언어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확신에 찬 말 사이의 간극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류코보린의 효과가 과장되었을 수 있으며, 주류 치료법이 되기 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단호한 표현을 선호한다.“효과가 없다”는 말은 명쾌하지만 “효과가 과장되었을 수 있다”는 말은 모호하게 들린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은 마치 연구를 더하면 효과가 입증될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학계의 이런 조심스런 표현은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다. 애초에 엽산 결핍이 원인인 경우가 극히 드문데 엽산 보충이 증상 완화에 큰 도움이 될 리 없지 않은가.이해관계도 의심스럽다. 이번 발표에 트럼프와 함께 한 메디케어의 수장 메멧 오즈는 과거 보충제 판매사인 아이허브의 홍보 담당자이자 지분 보유자였다. 타이레놀 관련 발표에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 조언한 것으로 알려진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 학장 안드레아 바카렐리는 관련 소송에서 증인으로 활동하며 15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보건의료분야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헛발질은 계속될 것이다. 그럴수록 더 많은 전문가가 비과학적 주장에 맞서 단호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5-11-03 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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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7> 음식 소음을 잡는 비만 신약
정재훈 약사.피자를 해치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치킨 냄새에 마음이 흔들린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이 난다. 배불리 먹고 나서도 아이스크림 콘이 자꾸 떠오른다. 단짠단짠의 루프를 24시간 내내 돌릴 수 있다. 이렇게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끊임없이 음식에 대해 반추하는 현상을 음식 소음(food noise)이라고 한다.과체중·비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음식 소음을 경험하며, 이는 충동적 섭취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그런데 위고비 같은 비만 신약을 사용한 뒤 음식 소음이 조용해졌다는 경험담이 2023년 6월 21일자 뉴욕타임즈 기사로 실렸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런 효과가 일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일어나는 반응이라는 연구 결과가 유럽당뇨병학회(European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Diabetes) 연례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다.노보노디스크 연구진은 체중 감량 목적으로 오젬픽·위고비(세마글루타이드)를 사용 중인 550명을 조사했다. 참가자 평균 나이는 53세, 여성이 86%였다. 대부분의 참가자(81%)는 최소 6개월 이상 세마글루타이드를 사용해 온 상태였다. 약 사용 전에는 참가자들 중 62%가 음식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다고 답했지만, 사용 후에는 16%만 그렇게 느꼈다.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다는 응답은 63%에서 15%로, 통제할 수 없는 음식 생각은 53%에서 15%로 줄었다. 음식 생각 때문에 삶에 부정적 영향이 있다는 비율 역시 60%에서 20%로 떨어졌다.식욕과 함께 정신도 달라졌다. 참가자 대부분은 약을 복용한 뒤 정신 건강이 나아졌고(64%), 자신감이 높아졌으며(76%), 더 건강한 습관(80%)을 갖게 됐다고 보고했다. 다만 이런 변화가 음식 소음 감소 때문인지, 단순히 체중이 줄어든 덕분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인과 관계를 입증하려면 무작위 대조시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는 GLP-1 계열 약물이 단순히 먹고 싶은 욕구를 꺼뜨리는 수준을 넘어, 뇌가 음식과 대화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동일 학회에서 발표된 또 다른 연구는 GLP-1 약물이 음식 맛을 느끼는 방식을 변화시켜 식욕과 음식 섭취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줬다.독일 바이로이트대학의 오트마 모저 교수 연구팀은 최소 3개월 이상 오젬픽, 위고비, 또는 마운자로를 사용 중인 과체중·비만 성인 411명을 설문 조사했다. 평균 연령은 39세, 여성이 70%였다. 조사 결과, 참가자의 약 20%는 음식이 전보다 더 달게 혹은 짜게 느껴진다고 답했다. 쓴맛과 신맛은 변하지 않았지만, 단맛·짠맛에 민감해진 사람들은 식욕이 줄고, 더 빨리 배부르며, 음식에 대한 갈망(craving)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참가자의 58%가 배고픔을 덜 느끼고, 64%가 더 빨리 포만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연구를 주도한 모저 교수는 GLP-1 수용체가 미뢰세포와 중추 미각 경로에서도 발현되므로 기전상 미각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GLP-1 수용체 작용제 치료 중 보고된 단맛과 짠맛 인식의 변화가 조기 포만감, 식욕 감소, 음식 갈망 감소 등 식욕과 관련된 긍정적인 결과와 연관이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의 미각 변화가 체중 감소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맛의 변화는 특정 음식이 순간적으로 얼마나 만족스럽거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에 영향을 미쳐 식욕 조절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체중 감량에는 신진대사·장기 식습관·신체 활동 등 훨씬 더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미각 변화만으로 체중 감소를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모저 교수의 설명이다. 이 연구 역시 참가자가 설문조사에 답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인과관계를 알 수는 없다. 참가자의 20%에서 나타난 미각 변화 또한 주관적 답변에 의존한 것으로 실제 증명된 것은 아니다. GLP-1 호르몬을 모방한 비만 신약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아직 모르는 게 많다. 후속 연구가 이어져 음식과 식욕, 미각의 복잡한 과학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길 기다린다.
2025-10-27 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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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6> 매일 소금물을 마셔야 할까?
정재훈 약사.소금물을 마시는 것이 새로운 건강 트렌드로 제법 인기를 끌고 있다. 2019년 트위터 CEO 잭 도시(Jack Dorsey)가 공개한 소금 주스 루틴이 출발점이다. 그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주말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간헐적 단식을 실천하고, 매일 걸어서 출근하며 아침마다 물에 히말라야 소금과 레몬을 타 마시는 루틴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한때 이 음료는 트위터 전 세계 사무실에서도 제공될 정도였다.아침에 물에 히말라야 소금과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시는 것은 과연 우리 몸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또 다른 건강 미신에 불과할까?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은 소금물이 단순한 물보다 수분 보충에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냥 맹물만 마신다면 제대로 수분 보충이 되는 게 아니라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소금물이 수분 보충뿐만 아니라 소화 개선, 몸의 해독에도 도움을 준다며 새로운 아침 루틴으로 홍보하고 있다.건강한 사람이 소금물을 조금 마신다고 해서 크게 해롭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일부 인플루언서가 권하는 소금의 양은 지나치게 많다. 물 한 잔에 소금 두 숟가락을 넣는 정도인데 이렇게 되면 나트륨 3,360mg으로 하루 권장량을 1,000mg 이상 초과하는 양이다.영양학적 관점에서 이렇게 소금물을 마시는 것은 아무런 이점이 없다. 물만으로도 충분히 수분 보충이 가능하며, 이런 식으로 소금을 더하면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일반적인 식생활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권장 섭취량 상한선인 5g의 소금(나트륨 2,000mg)을 충분히 섭취한다. 운동선수나 저혈압 환자, 영양 결핍 상태가 아닌 한 일반인에게는 특별한 소금 음료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미국심장협회에 따르면 단기간 나트륨 과잉 섭취만으로도 부기, 복부 팽만, 체중 증가가 발생할 수 있고 수면에도 방해가 된다. 장기적으로는 혈압 상승으로 인한 뇌졸중과 심장마비 위험이 높아진다. 고혈압 환자라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 소금물 유행의 근원에는 과도한 전해질 집착이 있다.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같은 전해질이 몸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전달되면서, 마치 추가로 섭취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하지만 전해질은 일반적인 음식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섭취하는 식품에 이미 나트륨은 충분하다. 햄, 소시지, 치즈, 감자칩, 빵, 시판 소스류, 냉동식품 등 우리가 자주 먹는 음식들에는 이미 상당량의 나트륨이 포함되어 있다. 과일, 채소, 우유를 통해서도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의 전해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추가 전해질 보충이 필요한 경우는 마라톤이나 장거리 사이클 같은 고강도 운동을 하는 경우, 혹은 약물로 인해 저나트륨혈증이 생긴 경우에 국한된다. 굳이 소금물로 보충할 필요가 없다.소금물이 몸을 해독한다는 주장 역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우리 몸에서 해독은 간과 신장이 하는 일이다. 소금물이 해독을 도와줄 수 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유행했던 해독주스에 해독 효과가 없는 것처럼 소금물 역시 해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금물이 소화를 돕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인체가 하루에 내뿜는 소화액이 7리터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 불필요하다. 분비된 소화액을 대부분 재흡수하여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소화를 위해 물을 마셔야 하거나 반대로 소화액이 희석될까봐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소금물도 마찬가지다.건강한 삶을 위해 복잡한 루틴이나 특별한 음료가 필요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하지만 건강 문제에 관한 한 대개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은 답이다. 만약 정말 물에 소금을 넣고 싶다면 자신의 하루 나트륨 섭취량을 고려하여 소량으로 제한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냥 깨끗한 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통해 필요한 영양소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소셜미디어에 유행하는 화려한 건강 트렌드를 따르는 것은 건강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비록 지루해보일지라도 적절한 식사, 충분한 휴식, 규칙적인 운동 정도면 충분하다. 건강한 삶의 비결은 남들은 모르는 특별한 비법이 아닌 일상의 균형에 있다.
2025-10-20 0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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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5> 임신 중 타이레놀 먹어도 될까
정재훈 약사.두통이나 발열이 있을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 중 하나가 타이레놀이다. 타이레놀의 주성분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해열진통제이며, 임신 중에도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최근 이 약의 안전성에 대해 우려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5년 8월 미국 마운트사이나이 의대 연구팀이 46개 연구, 10만 명 이상의 데이터를 종합 분석한 결과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노출이 자폐스펙트럼장애 발생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고품질 연구일수록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노출과 자폐스펙트럼장애 위험 증가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임신부의 절반 이상이 복용하는 약이라는 점에서, 위험 증가가 아주 작더라도 공중 보건 차원에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게 연구진의 지적이다. 또한 연구진은 아세트아미노펜은 태반을 통과할 수 있으며 산화 스트레스 유발, 호르몬 교란으로 태아 뇌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기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인과관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2024년 미국 의학협회지(JAMA)에 발표된 스웨덴 연구는 250만 명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사용과 아이들의 자폐스펙트럼장애 사이에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스웨덴 연구의 핵심은 형제자매 비교분석으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을 비교함으로써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도 처음에는 아세트아미노펜에 노출된 아이들이 노출되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약간 높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형제자매 쌍을 비교하면 그런 위험 증가는 사라졌다. 이렇게 상반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외부 변수가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경발달 장애가 있는 부모가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자녀도 신경발달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이는 약 때문이 아니라 유전적 요인 때문이다. 또한 낮은 사회적 계층, 임신 초기 높은 체질량지수(BMI), 임신 중 흡연, 정신과적 장애가 있는 부모일 경우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형제자매는 유전적 배경을 공유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들 외부 변수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낮다. 이런 이유로 스웨덴 연구의 결론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운트 사이나이 연구팀은 스웨덴 연구팀의 방법론에 한계점이 있다고 반박한다. 250만 명을 조사했지만 실제 분석에는 형제자매 쌍만 포함되어 표본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계적 검정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율이 현저히 증가한 것은 진단 기준과 사회적 인식 변화 때문일 수 있지만, 같은 시기 아세트아미노펜이 임신부의 표준 진통제로 자리 잡은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연구진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임신 중 열이 나거나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할까? 무조건 약을 피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마운트사이나이 연구팀도 “임신부들이 의사와 상담 없이 약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통증이나 발열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태아에게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약이 아닌 다른 방법을 먼저 시도해보고, 꼭 약이 필요한 경우라면 최소 용량을 짧은 기간 사용하며 반드시 의사, 약사와 상의하는 편이 안전하다.어쩌다 한 번 해열진통제 한두 알을 먹는다고 해서 위험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가벼운 두통에 무조건 약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는 우리가 익숙한 약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약사는 늘 새로운 근거를 살펴보고 지식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무조건 안전하다고 혹은 무조건 위험하다고 단정짓기보다 최신 지식에 기반해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약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서 약사는 공부를 멈출 수 없다.
2025-09-10 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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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4> 항노화 인플루언서 믿어도 될까
정재훈 약사.젊음을 되돌려주겠다는 말보다 강력한 마케팅 도구도 없다.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 브라이언 존슨과 하버드 유전학자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바로 그 욕망을 상품으로 만든 대표 주자다.존슨은 18세의 몸으로 돌아가겠다며 1년에 27억 원을 쏟아붓는다. <노화의 종말>이란 저서로 유명한 싱클레어는 "노화는 질병이며 치료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전 세계 팬덤을 구축했다. 국내 언론도 이 둘을 자주 소개한다. 하지만 화려한 슬로건과 달리 그들이 내세우는 사례와 숫자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결론이라기보다 세련된 홍보 문구에 가깝다.월스트리트저널은 이미 2024년 4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싱클레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공동 창업한 여덟 개 회사 중 절반은 파산하거나 사업을 중단했고, 나머지도 인간 대상 대규모 임상시험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적포도주 성분 레스베라트롤을 기반으로 항노화 약물을 개발한다며 설립한 서트리스다. 이 회사는 거대 제약사 GSK에 7억 달러 이상에 인수됐지만, 안전성 문제로 임상이 중단되고 2013년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싱클레어는 여전히 레스베라트롤을 먹고 있다.고령 여성의 난자 에너지를 회복시킨다는 기술을 내세운 오바사이언스는 한때 주가가 53달러까지 치솟았지만, 효과 부재가 확인되자 1달러 미만으로 폭락했다. 비만과 지방간 질환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했던 코바 역시 안전성 우려와 실망스러운 결과로 2022년 주요 약물 개발을 중단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공동 창업한 회사의 강아지용 항노화 간식이 노화를 역전시켰다고 주장했다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자신이 설립한 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싱클레어가 학계의 명성을 무기로 삼았다면 브라이언 존슨은 소셜미디어를 무대로 삼았다. 그는 자신을 실험체로 삼아 하루 8시간 수면, 수십 종의 보충제, 주기적인 의학적 시술을 포함한 극단적 건강 루틴을 실행하고 전 과정을 공개한다. 이런 방식은 과학적 실험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100개가 넘는 개입을 동시에 진행하니 어느 하나의 효과를 구분할 수 없고, 대조군도 없으며, 데이터와 방법론 역시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재현성 없는 개인 체험담은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전문가들이 그의 프로토콜은 실험조차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유다.이들 항노화 인플루언서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하다. 소규모이거나 부실한 연구를 과장하고, 동물실험 결과를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며, 개인 경험을 일반화한다. 여기에 상업적 이해상충까지 겹친다. 자신이 투자하거나 창업한 회사의 제품을 과학적 검증 없이 홍보하고, 부정적 결과나 부작용은 축소한다. 그러면서도 대중의 불안을 자극한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고, 곧 해결책이 나온다는 희망을 판매한다.그러나 진정한 항노화 연구는 훨씬 더 느리고 지루하다. 게다가 많은 비용이 든다. 적절한 대조군과 충분한 표본, 장기 추적 관찰, 독립적인 기관의 검증이 필수다. 긍정적 결과뿐 아니라 부정적 결과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연구 설계와 원시 데이터는 엄격한 동료평가를 거쳐야 한다.인플루언서들의 과장된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먼저 화려한 홍보 문구보다 실제 데이터를 살펴보고, 한 사람의 체험담이 아닌 다수의 임상시험 결과를 참고해야 한다. 새로운 약물이나 시술을 고려한다면 자격 있는 의료 전문가와 상담하고,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는 것이 안전하다. 무엇보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사,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관리는 이미 검증된, 가장 확실하고 지속 가능한 항노화 전략이다.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과학은 기적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걸리더라도 검증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진실을 추구한다. 우리의 건강과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만큼은, 유튜브 영상 속 매혹적인 약속보다 학술지에 실린 차가운 데이터를 믿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노화를 늦추는 길은 화려한 마케팅이 아니라, 느리지만 단단한 과학의 길 위에 있다.
2025-08-18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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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3> 변비약 밤에 먹어도 될까
정재훈 약사.보통 변비약은 밤에 복용하고 다음 날 아침 화장실을 가는 것을 권장한다. 변비만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밤에 푹 자고 싶은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최근 공개됐다.캐나다 몬트리올 대학교 연구팀은 심리학 수업을 듣는 대학생 1,082명을 대상으로 수면의 질, 식습관, 그리고 그 연관성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이와 함께 참가자들의 정신적・신체적 건강 상태와 음식에 대한 태도도 평가했다. 그 결과, 유당불내증과 악몽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응답자의 약 3분의 1은 정기적으로 악몽을 꾼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꿈을 더 자주 기억하고 수면의 질이 낮으며 악몽을 경험할 가능성도 높았다. 음식 알레르기나 불내증을 보고할 가능성도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참가자의 40%는 밤늦게 먹거나 특정 음식을 섭취하면 수면에 영향을 준다고 느꼈고, 약 25%는 특정 음식이 수면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건강하지 않은 식단을 유지하는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꿈을 더 자주 꾸고 꿈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음식이 꿈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이들은 주로 단 음식, 매운 음식, 유제품을 지목했다. 전체 응답자의 5.5%만이 음식이 꿈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지만, 이 중 많은 이들이 유제품이나 단 음식이 꿈을 더 불안하거나 기묘하게 만든다고 느꼈다.연구팀은 이를 뒷받침하는 세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째는 특정 음식 성분이 뇌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음식 특이적 효과, 둘째는 위장에 불편을 주는 음식이 악몽을 유발한다는 음식 고통 가설, 셋째는 커피나 술처럼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는 음식이 간접적으로 꿈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수면 효과 가설이다.특히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두 번째 가설이 유력하다. 유제품 섭취 후 발생하는 복통이나 팽만감 등 위장 증상이 수면 중 뇌의 수면 회로에 영향을 미쳐 악몽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뇌 축(gut-brain axis) 이론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장은 단순한 소화기관이 아니라 면역, 신경, 호르몬 기능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뇌와 쌍방향 소통을 주고받는 주요한 감각기관이다. 장내 환경은 장신경계와 미생물 대사산물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분, 감정, 수면 패턴에 영향을 줄 수 있다.유제품 때문에 배가 아프면 악몽을 꾸기 쉽고 그러면 숙면을 취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변비약(하제)도 같은 식으로 수면을 방해할 수 있을까? 2023년 캐나다 연구 결과, 변비약은 실제로 수면의 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변비약을 복용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면 효율이 7.1% 낮고, 깨어 있는 시간이 25.5분 길며, 총 수면 시간도 30분 가까이 짧았다. 특히 자극성 변비약(stimulant laxative)을 사용하는 사람은 삼투성 변비약(osmotic laxative)이나 변 완화제(stool softener) 사용자에 비해 불면 증상을 보고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자극성 하제는 장 연동운동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복통, 경련, 갑작스러운 배변 욕구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신체 자극은 수면 중 각성 시스템을 자극하고 깊은 수면을 방해한다. 음식 고통 가설을 적용하면 이런 불쾌한 감각은 꿈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수면은 위장, 음식, 감정, 약물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힌 복합적인 결과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이나 약물은 잠의 깊이뿐 아니라 꿈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제품과 자극성 변비약은 수면의 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야식도 숙면에 방해가 된다. 앞서 소개한 몬트리올 대학 연구에서 야식을 자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악몽이 더 흔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기억하자.잘 자고 싶다면, 가볍게 먹고 자는 습관은 기본이다. 이에 더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음식과 약을 파악하고, 복용 시간도 수면 리듬에 맞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비약을 밤에 먹고 자는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닐 수 있다. 특히 자극성 변비약은 필요할 때만 짧게 사용하는 게 좋다. 수면을 위해서도 그렇다.
2025-07-23 1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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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2> 더위에 주의해야 하는 약
정재훈 약사.더울 때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은 더 조심해야 한다. 약이 우리 몸을 더위에 민감하게 만들고 위험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약과 더위는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첫째, 약이 우리 몸의 체온 조절을 방해하여 더운 날씨로 인한 피해 위험을 증폭시킨다. 둘째, 고온이 약 성분을 분해하거나 손상시킬 수 있다. 셋째, 약물이 피부를 햇빛에 더 민감하게 만든다. 모든 약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만 흔히 쓰이는 약 중에도 우리 몸을 더위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는 일부 사람에게 땀을 과도하게 나게 만들 수 있다. 세로토닌은 기분 조절뿐만 아니라 체온 조절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시상하부의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삼환계 항우울제는 땀이 덜 나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면 탈수 위험이 증가하고 반대로 땀이 너무 적게 나면 체온을 낮추기 어려워져 인체가 과열될 수 있다.항우울제 복용 중에 과도하게 땀이 나는 부작용(발한 장애)을 경험하는 사람 비율은 전체 사용자의 4%에서 최대 22%까지 이른다.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SNRI)나 조현병 치료제에서도 발한 장애와 이로 인한 체온 조절 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약 복용 중에 평소보다 땀이 너무 많거나 적게 느껴진다면 의사, 약사와 상담해보는 게 좋다. 무더위가 계속된다고 약 복용을 스스로 중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갑작스런 중단은 우울, 불안 증상을 악화시켜 더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혈압약으로 널리 쓰이는 이뇨제도 인체를 더위에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뇨제는 말 그대로 소변을 통해 수분을 배출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체액이 줄어들면서 탈수, 저혈압, 심박출량 감소와 그로 인한 실신, 낙상 위험이 커진다. 변비약(완하제)도 배변을 유도하면서 장내 수분을 배출하여 탈수 위험을 증가시킨다. 베타차단제는 심장 박동을 느리게 하고 일부는 혈관 확장을 감소시켜 열 발산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탈수를 방치하면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와 같은 신독성 약물로 인한 신혈류 감소 및 신장 손상 가능성도 커진다.여름에는 탈수를 막기 위해 적절한 수분 섭취가 중요하지만 약 복용 중에는 더 중요하다. 일부 이뇨제, 혈압약(ACEI, ARB) 복용 중에는 갈증에 둔감해져서 물을 적게 마시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탈수가 심해지면 신장을 통해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하는 약물이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해 독성이 증가할 수 있다. 리튬처럼 혈중 농도가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약이 특히 위험하다.뜨거운 여름 햇빛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일부 항진균제(플루시토신, 그리세오풀빈, 보리코나졸)와 항생제(메트로니다졸, 테트라사이클린, 플루오로퀴놀론)는 피부를 자외선에 민감하게 만들어 일광화상과 같은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 이뇨제, 소염진통제, 여드름 치료제 중에도 유사한 부작용을 가진 약이 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외우기보다 내가 사용 중인 약이 광과민성과 관련되는지 확인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이 경우에도 약 사용을 중단할 수는 없으므로 햇빛 노출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모자와 긴 소매 옷을 착용하고, UVA와 UVB를 모두 차단하는 SPF 30 이상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것을 습관으로 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게 좋다.더위는 약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온에 노출되면 약물 전달 장치가 손상되거나 약 성분이 분해될 수 있다. 천식 치료용 흡입기는 차 안처럼 뜨거운 환경에서 터질 수 있다. 아나필락시스 때 응급처치로 사용하는 에피펜과 같은 약물 전달 장치는 더위에 노출되면 오작동하거나 약물(에피네프린)을 적게 전달할 위험이 있다. 인슐린처럼 냉장 보관해야 하는 약은 고온에 방치되면 효과가 떨어진다.폭염은 누구에게나 위험하지만 약 사용자에게는 더 큰 위협이다. 여름을 무사히 나기 위해 복용 중인 약의 부작용에 대해 잘 알아두고 내 몸이 보내는 이상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다.
2025-07-11 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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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1> 페니실린 이야기가 감춘 진실
정재훈 약사.페니실린하면 플레밍부터 떠올린다. 어느 날 창문을 열어둔 실험실에 우연히 날아든 곰팡이가 세균 배양접시에 떨어졌고, 플레밍 박사는 그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후 항생제의 시대가 열리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절반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신화에 가깝다.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1928년 시골 집에 휴가를 다녀온 플레밍은 포도상구균 배지가 곰팡이로 오염되고 그 주변이 말끔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겼다. 플레밍은 곰팡이에서 무언가 항균 물질이 나와 균을 죽이고 있다고 추측했고, 그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하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창문을 열고 날아든 곰팡이” 장면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과학 저술가 키스 베로니즈는 <약국 안의 세계사>에서 당시 플레밍의 연구실이 창문을 열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거의 닫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히려 플레밍의 아래층에 있던 곰팡이 연구자 C. J. 라투슈(La Touche)의 실험실에서 공기를 타고 페니실리움 포자가 올라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투슈가 플레밍에게 항균력 테스트를 위해 다른 곰팡이 샘플을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투슈가 실험실에 페니실리움 곰팡이 샘플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신화에 가려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1944년 타임지는 플레밍을 표지에 싣고 “페니실린은 전쟁이 앗아가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했을 뿐 이를 실제 약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페니실린은 너무 불안정해서 순수하게 추출하거나 정제하는 데 어려움이 컸고, 플레밍도 결국 이를 포기했다. 1929년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에 대해 논문을 썼지만, 당시 과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의 논문이 재조명되고 약으로 개발되기까지는 그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페니실린을 진짜 약으로 만든 건 옥스퍼드의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 노먼 히틀리, 에드워드 에이브러햄이었다. 1938년 체인과 플로리가 플레밍의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본격적으로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에이브러햄은 분자 구조를 밝혀내고 히틀리는 분리 정제와 대량생산에 기여했다. 연구팀은 동물실험과 인체 투여를 통해 마침내 페니실린의 효과를 입증했다.이 과정에서 미생물학, 화학, 약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했고, 미국 정부와 제약회사의 대규모 지원도 필수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플레밍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닌 여러 사람의 공로였다.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덮어두고, 플레밍 혼자 우연히 약을 만든 이야기만 기억하고 있을까? 플레밍은 1945년 플로리, 체인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상은 3명까지만 공동 수상이 가능하다는 정관 때문에 히틀리와 에이브러햄은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언론은 우연한 발견이라는 감동적인 서사를 중심으로 수상자 중에서도 플레밍만 집중 조명했다. 덕분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는 위대한 천재 과학자로 남게 되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역사에서 잊혔다.페니실린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이야기에서 팩트가 왜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과학은 우연이나 영감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 검증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과학을 마치 한 사람의 직감으로 탄생하는 마법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신화다. 흥미 위주의 과학 스토리텔링은 의심하고 탐구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결국 과학을 질문의 대상이 아닌 맹목적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다.페니실린의 진짜 이야기는 알려진 것보다 복잡하다. 페니실린은 우연히 발견된 기적의 약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집요하게 사실을 추적한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업이 만든 성취다. 현대 과학이 믿을 만한 것은 멋진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치는 감동 스토리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얻을 수 있다.
2025-06-30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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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80> 커피 마시면 건강하게 늙을까
정재훈 약사.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노화를 늦추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이를 시사하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아직 정식으로 출판된 논문은 아니고 2025년 6월 2일(현지시간) 미국영양학회 연례학술대회 Nutrition 2025에서 공개된 연구 결과이다.하버드 대학교 공중보건대학원 사라 마다비 박사 연구팀이 수행한 이번 연구에서는 '간호사 건강 연구(Nurses’ Health Study)'에 참여한 여성 간호사 47,513명을 30년간 추적 관찰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45~60세일 때의 카페인 섭취량을 조사하고, 2016년 그들이 70세 이상이 되었을 때의 건강 상태를 평가했다.이번 연구에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건강한 노화를 정의했다. 70세 이상까지 생존하면서 암, 2형 당뇨병, 심장병, 신부전, 파킨슨병 등 11가지 주요 만성질환이 없고, 신체 및 정신 건강이 양호하고 인지 장애, 기억력 장애가 없는 상태를 모두 충족한 경우에만 건강한 노화로 간주했다. 이를 만족한 여성은 3,706명에 불과했다.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가장 많은 카페인을 섭취한 그룹(하루 약 7잔의 커피, 한 잔은 240ml)은 가장 적게 섭취한 그룹(하루 1잔 미만)보다 건강한 노화를 경험할 확률이 13% 높았다. 커피 한 잔을 추가로 마실 때마다 건강한 노화 가능성이 약 2%씩 증가했다.하지만 일반 커피만이 건강한 노화와 연관성을 보였으며, 디카페인 커피나 차에는 그런 연관성이 없었다. 참가자들이 전반적으로 디카페인 커피나 차 섭취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연관성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한편 콜라 섭취는 오히려 건강한 노화 확률을 20%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커피가 건강한 노화에 도움이 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고 있다. 동물 실험에서 카페인은 기억력을 개선하고 뇌세포를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효과를 보였다. 또한 커피에는 수백 가지의 생리활성 화합물이 들어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염증을 줄이고 세포 손상을 방지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다른 여러 연구들에서도 커피 섭취는 심장병, 당뇨병, 파킨슨병, 간질환, 골다공증, 일부 암의 위험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커피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상관성을 제시할 뿐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커피 소비가 건강에 유익하다는 결과가 다수의 연구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데다가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흡연이나 운동 부족 같은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고도 긍정적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커피 자체가 실제로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는 오래된 통념은 최근 연구들에 의해 점점 힘을 잃고 있다.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를 모두가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번 연구에서 디카페인 커피는 건강한 노화와 상관성이 없었지만 다른 연구들에서는 디카페인 커피도 2형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사망률 위험 감소와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페인 대사는 개인차가 크다. CYP1A2 유전자 변이로 인해 카페인 대사가 느린 사람은 커피를 마셔도 건강상 유익을 얻지 못할 수 있고, 오히려 부작용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또한 이번 연구는 주로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인종이나 남성에게도 같은 결과가 적용될지에 대해서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커피가 수면을 방해하거나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고, 일부 약물과 상호작용할 가능성도 있어 만성질환 치료 중인 사람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실 커피를 마음놓고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건강한 사람이란 뜻이므로 커피와 건강에 대한 연구 결과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커피를 마시지 않던 사람이 이번 연구 결과만 보고 새로 마시기 시작할 필요는 없다. 균형 잡힌 식단,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 활발한 사회생활 등 건강한 삶을 위한 확실한 방법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블랙 커피를 마시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이번 연구 결과 덕분에 아침 커피 한 잔을 더 즐겁게 마실 수 있을 듯하다.
2025-06-23 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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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79> 혈당 조절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이유
정재훈 약사.혈당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연속혈당측정기(CGM)를 착용하고 식사 때마다 혈당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체크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혈당치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혈당을 잘 관리하면 망박병증, 신장병증과 같은 미세혈관합병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혈당치를 낮게 유지하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성인과 중년 당뇨병 환자는 혈당을 엄격히 관리해서 목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좋지만 고령자의 경우에는 다르다. 철저한 혈당 관리로 인해 얻는 이득이 생각보다 크지 않고 오히려 저혈당 위험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혈당을 목표치 이하로 낮게 유지하려다보면 혈중 포도당 수치가 너무 낮아지는 저혈당 위험이 커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혈당이 70mg/dL 이하일 경우 저혈당으로 간주한다. 저혈당 초기에는 식은땀이 나고 떨리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증상이 나타나고 더 진행되면 시야가 흐려지고 집중력이 저하되며 말이 어눌해질 수 있다. 심하면 의식 저하, 경련, 혼수까지 겪게 되는 응급상황이 올 수 있다. 운전 또는 기계 조작 중에 의식을 잃거나 혼란스러워진다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특히 위험하다.저혈당은 혈당을 낮추는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고령일수록 더 자주 발생한다. 저혈당 증상 또는 위험 신호를 자각하거나 대처할 능력이 줄어들고 식욕이 줄거나 식사를 거르기 쉽기 때문이다. 약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인슐린, 설폰요소제와 같은 약물을 사용하고 있을 경우 저혈당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메트포르민, GLP-1 작용제(오젬픽, 마운자로와 같은 신약이 여기 속한다), SGLT-2 억제제(자디앙, 포시가)와 같은 약은 저혈당 위험이 덜하다. 고령이며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은 사람이라면 과거부터 더 오래 사용되어온 약인 설폰요소제, 인슐린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저혈당 GLP-1 작용제, SGLT-2 억제제와 같은 더 새롭고 안전한 약으로 바꾸는 문제에 대해 의사와 상의해볼 수 있다. 고령자가 혈당을 어느 정도로 관리하는 게 최적인가에 대한 대규모 임상연구는 부족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수의 임상 가이드라인에서 전문가 합의의 형식으로 혈당조절 목표를 높이고 있는 추세이다. 2013년 미국 노인의학회(American Geriatrics Society)는 대부분의 고령 당뇨 환자에게 당화혈색소(A1c) 목표치를 7.5~8.0%로, 여러 만성질환을 앓고 기대수명이 짧은 사람에게는 8.0~9.0%로 제시했다.우리나라 2023 당뇨병 진료지침 제8판에서 제시하는 노인 당뇨병 환자의 혈당조절 목표 또한 당화혈색소 7.5% 미만이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개인별 상황에 맞게 달라질 수 있다. 인지기능이 정상이고 독립적 일상생활이 가능한 경우이며 저혈당 위험이 높은 약물을 쓰고 있지 않은 노인의 경우 당화혈색소 7.0% 미만을 목표로 할 수 있고 저혈당 위험이 높은 약물을 사용 중인 경우는 7.0~8.0%를 목표로 할 것을 권한다. 경도인지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경우는 저혈당 위험이 높은 약물 사용 여부에 따라 목표치가 7.5% 미만 또는 7.0~8.0%로 달라진다. 중등도 치매, 일상생활 기능장애, 중증 기저질환 또는 요양시설에 거주하는 노인이 저혈당 위험이 높은 약물을 사용 중일 때는 목표치가 7.5~8.5%로 높아진다.고령이어도 아주 건강한 사람이라면 젊은 성인과 비슷하게 혈당을 관리하는 게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만성질환이나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고령자의 경우 혈당을 잘 관리해도 얻는 게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 엄격하게 혈당을 관리해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혈당을 낮게 관리하는 이점보다 저혈당의 위험이 더 큰 사람의 경우라면 저혈당 위험을 낮추는 게 더 중요하다. 건강뉴스나 유행을 따라가기 전에 먼저 나는 누구인지 되돌아보는 지혜를 잊지 말자.
2025-06-16 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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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78> 도파민은 억울하다
정재훈 약사.요즘 유행하는 말 중 하나가 도파민 디톡스다. 영상, 게임, 단 음식, 심지어 친구와의 대화까지 줄이면 삶이 다시 즐거워질 거라고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극적인 세상에서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비돼 뇌가 무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도파민이 현대인의 모든 중독과 불행의 주범이라도 되는 듯하다.하지만 도파민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건 억울해도 한참 억울한 일이다. 도파민은 직장인이 아침에 졸음을 이겨내고 출근하도록, 학생이 지루함을 견디고 공부를 계속하도록 만드는 뇌 속의 조용한 추진력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성취하도록 돕는 신경전달물질이다.‘도파민 터진다’는 말도 도파민에 대한 오해를 보여준다. 도파민이 단순히 쾌락을 주는 물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달콤한 케이크를 맛보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좋아요’가 쏟아지거나 또는 게임에서 승리했을 때 흔히 ‘도파민이 폭발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도파민이 쾌감을 유발한다는 개념은 관련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였던 1970년대에 나온 것이다. 생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에서 도파민이 보상과 관련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하지만 1990년대 이후 관련 연구가 진전되면서 도파민이 보상 그 자체보다 기대와 예측, 그리고 동기 부여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파민은 무언가를 얻기 직전, 그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순간에 가장 활발히 분비된다. 케이크를 한 입 먹기 직전, 스마트폰을 열기 직전, 선물 포장을 뜯기 직전에 분비되어 우리를 행동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정작 보상을 받는 순간에는 도파민 활동이 줄어들 수 있다. 도파민은 특정 활동의 결과 자체보다는 기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결과가 예상보다 좋으면 도파민 뉴런이 강하게 반응하고 결과가 예상보다 나쁘면 반응이 감소한다. 결과가 예상대로일 때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도파민은 쾌락을 주는 물질이 아니라 보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행동을 유도하는 신호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다른 신경전달물질의 작용과 더 깊이 관련된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를 붙들고 있게 만든 건 도파민이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우리가 움직이고 기억하고 주의를 유지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파민은 ‘중독의 화학물질’, ‘현대인의 타락을 부추기고 디지털 노예로 만드는 주범’으로 비난받는다. 이렇게 도파민을 단순화하여 악당처럼 몰아가는 과정에서 나온 게 도파민 단식이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모든 활동을 끊으면 뇌가 회복되고, 다시금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이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도파민은 끊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침에 커피를 떠올리는 순간, 메신저 알림이 울리는 순간, 또는 반가운 얼굴을 보는 순간에도 도파민이 작동한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만으로도 도파민은 분비된다. “도파민을 끊겠다”는 말은 사실상 “기대와 동기를 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도파민 단식의 전파자 중 한 사람인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 창업자 제임스 싱카는 뉴욕 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도파민을 끊겠다며 다른 사람과 눈 맞춤마저 피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대만으로도 분비되는 도파민을 의식적으로 줄이거나 리셋할 수는 없다.약으로 도파민의 작용을 일부 조절할 수는 있다. 뇌에서 도파민 수치를 높이는 약물로 레보도파와 같은 파킨슨병 치료제, 반대로 도파민 작용을 낮추는 약물로 조현병 치료제가 있다. 하지만 도파민 자체를 조절해서 중독을 치료하려는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해왔다. 강박 행동과 중독의 원인은 다양하며 이를 오직 도파민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도파민은 우리가 몰입하고, 배우고, 도전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뇌의 필수적 도구 중 하나이다. 이 신경전달물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과학도, 예술도, 사랑도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파민 디톡스가 아니라 잘못된 건강정보로부터의 해독이다.
2025-06-12 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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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약국] <177> 먹는 비만치료제 신약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정재훈 약사.비만과 당뇨를 치료하는데 위고비, 오젬픽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먹는 알약이 곧 세상에 나올 것 같다. 오포글리프론(orforglipron)이란 약물을 함유한 알약이다. 이 약은 분자 크기가 작으며 먹어서 효과를 낸다. 기존의 GLP-1 유사체는 주사해야 하고 값도 비싼 편이며 냉장 보관을 필요로 하지만 먹는 알약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냉장 보관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물류, 유통 면에서도 용이하다. 사용자 관점에서도 먹는 약이 주사약보다 매력적이다.오포글리프론의 개발사인 일라이 릴리의 최고 과학 책임자인 다니엘 스코브론스키 박사는 앞으로 수십 년 내에 전 세계적으로 7억 명이 2형 당뇨병을, 10억 명이 비만으로 고생할 거라며 “주사제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을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주일에 한 번 주사하더라도 연간 플라스틱 주사 장치 884억 개가 필요하다. 먹는 약으로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주사제보다 환경 면에서나 비용 면에서 훨씬 나은 해결책이다.미국 현지시간으로 4월 17일 일라이 릴리가 발표한 임상 3상 결과에 따르면 먹는 당뇨/비만치료제의 효과는 오젬픽, 마운자로와 같은 주사제와 비슷한 수준이다. 2형 당뇨병이 있는 참가자 559명을 대상으로 40주 동안 신약 또는 위약을 복용하도록 한 임상 시험 결과 신약을 복용한 사람들의 혈당치(A1C)는 평균 1.3~1.6% 감소했다. 체중 감소 효과도 나타나서 연구 종료 시점까지 최대 7.3kg이 빠졌다. 부작용은 주사형 약물과 비슷하게 설사, 소화불량, 변비, 구역(오심), 구토였다.먹는 약으로 주사형 약물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슐린, GLP-1과 같은 펩타이드 호르몬은 덩치가 제법 큰 분자여서 먹어서는 흡수가 잘 되지 않는다. (보통 2~50개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분자는 펩타이드, 이보다 많은 아미노산이 연결된 분자는 단백질로 분류한다.) 오젬픽, 위고비의 약성분인 세마글루티드의 경우 흡수촉진제(SNAC)를 써서 먹어도 약성분이 흡수되도록 설계한 알약(리벨서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고작 1%가 흡수되는 정도여서 나머지 99%의 약성분이 낭비된다는 단점이 있다. 흡수촉진제가 희석되어 흡수에 영향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공복에 물 반 컵(120ml 이하)와 함께 약을 삼켜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이번에 임상 시험 결과가 발표된 오포글리프론은 저분자화합물 신약으로 식전 또는 식후에 복용할 수 있다.고분자화합물 바이오 신약이 개발되고 나서 저분자화합물 신약이 개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편두통 예방에 효과적인 바이오 신약 에레누맙이 2018년 5월에 미국에서 승인된 뒤 2019년 편투통 치료 신약 우브로게판트(Ubrogepant)이 세상에 나왔다. 에레누맙과 같은 단클론항체로 CGRP(Calcitonin Gene-Related Peptide) 경로를 차단하는 게 편두통 병태 생리학에서 핵심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면 더 작은 분자로 동일한 경로를 차단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노력에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오젬픽, 마운자로와 같은 주사제 신약의 성공 뒤에 많은 제약회사가 같은 효과를 내는 먹는 비만치료제 신약 개발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저분자화합물은 덩치가 작은 만큼 먹어도 흡수가 잘 되는 장점이 있지만 원하는 수용체 부위에만 착 달라붙지는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타겟을 벗어나 다른 곳에 약물이 작용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화이자가 지난 4월 14일(현지시간) GLP-1 계열 경구 비만치료제 다누글리프론의 임상 시험을 중단하며 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임상 시험에서 약물로 인한 간 손상 가능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분자화합물 약물인 텔카게판트(Telcagepant)도 간 독성 부작용으로 인해 개발이 중단된 바 있다. 표적이 되는 인체내 단백질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어야 이를 조절하는 약물의 분자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자물쇠의 구조를 제대로 알아야 열쇠를 만들 수 있다. 신약 개발은 기초과학부터 임상시험까지 종합적 투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2025-06-02 10: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