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약학] <113> 스타틴을 복용한 후 다리가 심하게 아픈 환자
스타틴을 복용한 후 다리가 심하게 아픈 환자 “부학장님, 문자 연락받고 연락드립니다.”“토요일인데 전화해 줘서 고마와요. 스타틴에 대해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내 친척이 지난 달 초에 UCSF 대학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진단받고 퇴원했어요. 그 뒤 한 이주 정도 재활원에 있다가 지난달 말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리가 심하게 아프고 힘이 없어 걷기조차 힘들다고 하네요. 그 친척이 스타틴을 복용하고 있는데 혹시 스타틴때문인가 해서...”“어떤 스타틴을 복용하고 계신가요?”“아토바스타틴 (atorvastatin) 80 mg입니다.” 스타틴 (statin)은 심근경색을 겪은 환자에게 심근경색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이 효과는 고용량의 스타틴에서 더 잘 나타나기 때문에 아토바스타틴 40~80 mg, 로수바스타틴 (rosuvastatin) 20~40 mg이 흔히 이용된다. 부학장님이 계속 말씀하신다.“내 친척은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이런 사람에게 고용량을 쓸 수 있을까?”“75세 이상의 환자들은 심근경색을 방지하는 스타틴의 효과를 확인한 임상시험들에 많이 참여하지 않아서, 고용량의 스타틴이 이러한 환자들에게 정말 더 나은지 뚜렷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 환자들에게서는 약물에 의한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죠. 그래서, 미국 심장학회 치료지침서는 환자의 상황에 따라 고용량 또는 이보다 약한 스타틴을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환자가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낮으면 고용량을, 크면 이보다 낮은 용량을 쓰란 말이군요.”“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스타틴에 의한 부작용의 위험이 크지 않기 때문에 UCSF 대학병원은 이러한 환자들에게 고용량의 스타틴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스타틴이 근육 부작용을 일으키잖아요.”“네, 맞습니다만 근육 통증은 여러가지 이유로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진짜로 스타틴에 의해 발생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임상시험에 따르면, 스타틴에 의해 근육 부작용을 겪었다는 환자들 중 진짜로 스타틴 때문에 근육 통증이 발생한 경우는 50%미만인 것으로 보이거든요. 그런데, 친척 분의 다리 통증은 한쪽 다리에서만 나타나나요? 아니면 두 다리 모두에 나타나고 있나요?”“그건 내가 물어 보지 않았네요.”“스타틴에 의한 근육통이 다리에 나타나면 보통 양다리에서 동시에 발생합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는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니까 일단 혈중 크레아틴 키나제 (creatine kinase)의 양을 측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근육 세포가 죽게 되면 근육 세포내의 단백질 중 하나인 크레아틴 키나제가 혈액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스타틴을 복용하면서 근육통을 호소하던 환자의 혈중 크레아틴 키나제 양이 높아져 있으면 스타틴에 의해 근육 세포가 죽었다 –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 - 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약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으로 확인되면 일단 스타틴을 중단해야 합니다. 혈중 크레아틴 키나제 양이 심하게 높고 횡문근 융해증 (rhabdomyolysis)이 일어난 경우 스타틴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고요. 그렇지 않다면, 크레아틴 키나제 양의 양이 정상 수치인 30~170사이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타틴의 용량을 낮추거나 다른 종류의 스타틴으로 바꿔서 다시 시작하고요. 친척분은 최근 심근경색증을 앓았기 때문에 횡문근 융해증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스타틴을 다시 시작해야 할 거예요.” 횡문근 융해증은 스타틴에 의한 근육 부작용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많은 근육 세포가 죽어버려서 심한 근육통과 코카콜라 색깔과 같은 오줌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뿐만 아니라 죽은 근육 세포들이 신장에 쌓여 신장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잘 알았고, 고마와요. 그런데, 의사를 만날 수 있어야지. 담당 심장내과의사의 클리닉에 며칠 전 연락을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답이 없고 일차의료제공자는 다음 주 화요일에나 만날 수 있나봐요.” 미국에서 환자들이 담당의사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담당의사의 클리닉에 전화하거나 아니면 전자차트로 의사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보통 대학병원 의사는 매일 환자를 보지 않기 때문에 의사가 클리닉에서 근무하지 않는 날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연락할 가능성이 낮다. 의사가 클리닉에서 근무하는 날이라 할 지라도 그날 예약된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에게서 온 메시지는 의사가 판단하기에 급한 경우가 아니면 빨리 응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나기까지 아직 3일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월요일에 동네 의사라도 찾아갈 수 있지만 미국은 일차의료제공자가 진료의뢰를 넣어주어야만 다른 의사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의사를 당장 만나고 싶을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응급실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응급실에 가더라도 다리 아픈 것은 당장 생명에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진료의 우선 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오래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하는데 80세 넘은 노인에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부학장님과 나는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일 크레아틴 키나제를 측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으로 동의하였다. 다음 주 수요일, 즉 친척분이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난 다음 날, 부학장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혈중 크레아틴 키나제 양이 34,000이라네요. 횡문근 융해증이 의심되어 입원했어요.’ 안타까왔다. 만약 그 친척분이 의사를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었으면 이렇게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예는 환자가 필요로 할 때 의료제공자와 제때에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현행 미국 의료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9-04 10:54 |
[약대·약학] <112>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일까?
“25번 문항의 정답률은 9%로 매우 낮습니다.”“변별력 지수와 point biserial지수는 얼마인가요?”“각각 0.1 와 0.05입니다.”“25번 문항을 학생들의 시험 성적에 포함시키기 전에 그 문항에 오류가 있거나 학생들에게 오해를 일으킬 만한 부분이 있는지 검토해야겠습니다. 또 이 문항에서 평가하려고 한 내용이 잘 가르쳐 졌는지도요.”우리학교는 모든 시험에서 채점 후 학생들에게 시험성적을 공지하기 전에 교육 부학장 주재로 시험성적기준 평가회의(standards setting meeting)를 열어서 시험 성적을 확정짓는다. 이 회의에서 담당과목 교수는 학생들이 시험의 각 문항(item)에 대해 어떤 성적을 내었는지 분석해서 발표한다. 이 문항 분석(item analysis)의 목적은 개별 문항의 질을 검토하고 이에 따라 각 문항을 시험전체 성적에 포함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만약 문항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 그 문항은 전체 성적 계산에서 제외한다.시험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시험에 출제되는 문항들이 디자인되고 쓰여져야 한다. 우리학교는 크게 세 가지 정책을 통해 양질의 문항이 시험에 출제되도록 하고 있다. 첫째, 출제자는 워크샵 등을 통해 과학적 연구 결과에 근거한 출제방법을 습득한 뒤 문항을 출제하도록 하고 있다. 둘째, 문항이 시험에 최종적으로 출제되기 전에 적어도 두 명의 교수가 그 문항을 검토한다. 세째, 시험 후 결과를 학생들에게 공지하기 전에 문항분석을 하여 양질로 입증된 문항만으로 시험성적을 계산하도록 확정하는 것이다.문항의 양질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몇 가지 지표가 사용된다. 난이도, 변별력 지수, point biserial 등이 그것이다. 난이도(difficulty)는 정답률, 즉 몇 퍼센트의 학생들이 그 문항을 정확하게 맞추었느냐를 말한다. 흔히 난이도가 높으면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잘 변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난이도가 높다는 것, 즉 정답률이 낮다는 것은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조차도 그 문항을 맞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답을 맞춘 학생들의 수가 너무 적으면 이들이 제대로 알고 맞추었는지 운좋게 찍어서 맞추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변별력을 판별하기에 좀 더 적절한 지표는 난이도보다 변별력 지수와 point biserial지수이다.변별력 지수(discrimination index)는 학생들을 전체 시험 성적 기준으로 상위와 하위 그룹으로 나누고 이 두 그룹 학생들의 그 문항에 대한 정답률의 차이를 구한 것이다 (보통 상위 27%, 하위 27%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상위 그룹 학생들의 정답률이 70%이고 하위 그룹은 30%라면 변별력 지수는 0.4 ( = 0.7–0.3)이다. 따라서 변별력 지수가 높을수록 문항의 변별력은 높다. 반면 변별력 지수가 음수이면 하위 그룹이 상위 그룹보다 그 문항을 더 많이 맞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문항의 질을 의심해야 한다.Point biserial지수는 특정 문항 성적과 전체 시험 성적간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즉 특정 문항을 맞춘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전체 시험 성적이 더 높다면 그 문항은 변별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특정 문항을 맞춘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전체 시험 성적이 더 낮으면 – 즉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그 문항을 더 많이 맞추었다면 - 문항의 질을 의심해야 한다.일반적으로 문항의 난이도, 즉 정답률이 0.45-0.75이고 변별력 지수와 point biserial지수가 각각 0.2이상이면 시험성적으로 포함되기에 적합한 정도의 변별력을 갖춘 양질의 문항으로 간주한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킬러문항, 준킬러문항은 모두 양질의 문항이 아니다. 또, 대학수학능력고사, 약사고시 등 아주 중요한 시험의 경우 문항의 변별력 지수와 point biserial은 0.3이상이어야 한다). 만약 문항분석 지표가 이보다 낮으면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문항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혼동되기 쉽게 쓰여졌다면 학업성적도가 우수한 학생들도 틀릴 가능성이 높다. 또 수업시간에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거나 학생들에게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은 내용을 문항이 평가한다면 이는 학생들에게 공정(fair)하지 않다 (이런 문항들은 학업성적도가 우수한 학생들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변별력이 낮다). 따라서 이러한 문항들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전체시험성적에서 제외해야 한다.이상과 같이 우리학교는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시험에 출제된 문항들의 변별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시험의 본질은 공정한 변별력일까?이에 대한 답은 시험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험의 목적이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우기라면 변별력 자체가 시험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반면 학생들이 최소한의 학업성취의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시험의 목적인 경우 변별력은 문항이 양질이었는지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약대와 같이 건강관련 전문직역을 길러내는 학교의 경우 후자가 시험의 목적이다. 학교가 배출할 모든 약사들이 환자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학교는 학생들이 이에 관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시험은 학생들이 이런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따로 줄을 세울 필요가 없다. 요구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은 재교육과 재시험을 통해 그 능력을 갖출 기회를 다시 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학교는 A, B, C, D, F학점을 사용하지 않고 통과(pass)/불통과(no pass)로 성적을 처리한다. 그리고 불통과 판정을 받은 학생들에게 재교육과 두 번의 재시험 기회를 제공한다.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생들을 시험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것은 문제점이 많다. 첫째, 다른 학생들을 협력할 동료라기 보다 경쟁자로 보기 쉽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학생때부터 협력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중요하다. 둘째, 배움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게 된다. 학교를 다니는 목적은 배우기 위한 것이지 성적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면 학교를 다니는 목적은 좋은 성적을 받는 것으로 바뀌기 쉽다. 그래서 배우는데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좋은 점수를 따는 전략, 예를 들어 효율적으로 문제푸는 방법 등에 더 집중하게 된다. 또 성적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단기암기에 집중하기 쉬워지고 시험이 끝나면 공부한 내용을 바로 잊기 쉽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게 되면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 배운 것을 이용하고 적용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시험 성적은 학생이 성공적인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요소 중 일부 (지식)만을 보여줄 뿐이다. 가령 약사나 의사가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환자와 효과적으로 소통할 줄 모르면 그 많은 지식은 환자치료에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다.이와같이 시험의 본질은 학생들이 최소한의 학업성취의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학교는 교육을 시키는 곳인데 비교육적인 방법을 써서야 되겠는가? 사회에 나가면 학교 때 무슨 성적을 받았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환자가 의사나 약사에게 학창시절 A 받았느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시험 성적은 학생의 전체 능력의 일부일뿐이다.시험은 교습자가 세운 학습목표(learning objectives)를 학생들이 달성했느냐 – 학업성취도 - 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학교는 모든 수업에 교수가 설정한 학습목표를 학생들에게 미리 공지하고 교수는 학습목표에 따라 강의, 수업 자료를 만든다. 뿐만 아니라 교수가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 각 문항은 어떤 학습목표를 평가하는지 명시해야 하며 학생들에게 교부하는 시험성적표에 이를 포함시키고 있다.이처럼 학습목표는 중요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강조되어야 하지만 수업시간의 제약으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을 수 있다. 또, 학습목표에 관련된 내용이 복잡하여 학생들에게 충분한 공부의 기회 (예를 들어, 자습문제)를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발생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학생들이 그 학습목표를 달성했는지 평가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공정 (fair)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문항의 난이도가 높거나 변별력 지표가 낮은 경우 그 항목은 전체 시험 성적에서 제외한다.<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8-01 10:27 |
[약대·약학] <111> 지역사회간호에 관한 논의에서 빠진 것 – 일차의료제공자
지역사회간호에 관한 논의에서 빠진 것 – 일차의료제공자 “AS님, 병원 차트에서 지난주 흉골 골절 진단을 받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거동이 많이 불편하실텐데 다음주에 예약된 재진전에 병원에 직접 오셔서 혈액검사를 받으실수 있으신지요?”“약사님,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AS는 50대 환자로 폐에 혈전이 발생하여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될 수 있는 폐색전증(pulmonary embolism)을 두 번이나 앓았다. 폐색전증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 항응고제인 와파린 (warfarin)이라는 약을복용 중이다.와파린은 정기적인 혈액검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와파린의 효과가 너무 약하면 혈액응고가 생기기 쉽고, 효과가 너무 세면 출혈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와파린은 사람마다 적절한 용량이 다른데 혈액검사를 통하지 않고는 이를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와파린은 음식, 같이 복용하는 약, 동반 질환 등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와파린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6~12주마다 정기적인 혈액검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AS가 흉골 골절로 인해 병원을 방문해서 혈액검사를 받을 수 없다면? 난감했다. 이때, 난 병원 차트 시스템상에서 아직 안 읽은 메시지를 발견했다. AS의 일차의료제공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약사님, 함께 협진하고 있는 환자인 AS건으로 연락드립니다. AS가 지난주 흉골 골절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AS가 회복할 때까지 가정방문 간호사가 AS의 집에 직접 방문해서 혈액을 채취하도록 오더를 내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위의 AS 사례에서 보듯이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가정방문 간호사를 두고 있다. 이 간호사들은 환자의 집을 직접 방문해서 채혈을 할 뿐만 아니라 간호에 관련된 다른 일, 예를 들어 혈압측정, 상처관리 등을 수행한다. 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는 복합적 케어관리팀 (complex caremanagement team)을 별도로 운영한다. 간호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팀은 여러 동반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 중 병원에 자주 입원하거나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환자들의 케어를 돕는다. 예를 들어, 복용하는 약이 너무 많거나 복잡해서 환자가 혼란스러워 하면 이 팀은 직접 환자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약 복용을 도와준다. 또, 환자가 재진 약속에 나타나지 않는 일이 잦으면 재진 약속에 맞추어 그 환자의 집을 직접 방문해 병원에 데리고 오기도 한다. 가정방문 간호사나 복합적 케어 관리팀이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오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의사의 오더가 있어야만 간호사는 환자의 집을 방문하고 그 오더에 따라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오더를 내는 의사는 AS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차의료제공자(primary care provider)이다. 일차의료제공자는 이 컬럼의 다른 글에서 소개했듯이 환자 치료의 콘트롤 타워 역할을 맡는다. 즉, 환자 치료에 필요한 다른 전문의와 직역에 진료의뢰를 요청하고 이들간 협력을 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의 케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일차의료제공자는 가정방문 간호나 복합적 케어관리 오더를 내고 이들의 역할을 모니터한다. 우리나라도 상급종합병원들은 가정방문간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가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한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의사들이 자기 진료과 소관이 아닌 질환에는 가정간호 의뢰서 발급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기내과에서 폐렴 치료를 받고 퇴원한 환자가 자택에서 욕창이 생기면 욕창 처치를 위한 방문간호 의뢰서를 써주지 않아 환자는 성형외과 등에서 새로 진료를 봐야 하고 이에 따른 외래 예약에만 2주 이상 걸려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호흡기내과 등 병원입원팀은 폐렴과 같이 입원이 필요한 특정 질병의 치료만을 담당한다. 그 입원팀은 환자가 입원하기 전에는 그 환자를 돌본 적이 없을 수 있다. 그래서 입원중 담당했던 의료팀이 환자의 퇴원 후까지 효과적으로 돌봐 줄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반면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를 오랜기간 보아온 주치의로서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일차의료제공자가 퇴원후 환자의 돌봄을 주도하고 조정하는 책임을 맡는 것이 효과적이다.따라서, 위의 폐렴 치료를 받고 퇴원한, 욕창의 위험이 높은 환자에게 일차의료제공자가 있다면 일차의료제공자의 판단하에, 또는 입원팀과의 협의하에 가정방문간호 오더를 내고 욕창발생 여부를 모니터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AS의 일차의료제공자가 채혈을 위해 가정방문간호 오더를 내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일차의료제공자의 역할은 상급병원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미국은 간호사들을 고용한 사설 가정돌봄간호서비스 (home care nursing service) 업체들이 많다. 환자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의사의 의뢰서, 즉 오더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오더를내는 의사는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이다.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가정돌봄간호 서비스 업체들이 있고 (우리나라는 이를 방문간호라고 부른다)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의사의 오더가 필요하다. 그런데, 환자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의료행위별로 수가를 주는 현행 우리나라 건강보험 지불제도하에서 어떤 병원이 직접 관련이 없는 간호업체에 방문간호 서비스를 의뢰한다면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하여 병원 수익이 줄어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는 일차의료제공자가 없다는 것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환자가 병원내 가정방문간호 서비스와 병원외 사설 가정간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오더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오더는 환자를 가장 잘 알고 환자 치료의 콘트롤 타워인 일차의료제공자가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따라서, 가정간호 등 지역사회 간호 서비스가 활성화되어 환자의 치료결과를 증진시키기 위한 논의에 일차의료제공자 제도의 도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6-30 17:46 |
[약대·약학] <110>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
무거운 표정으로 참석자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학장님이 말씀하신다.“조사결과를 말씀해 주세요.”오늘 회의는 내 과목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사건에 대한 조사결과에 따라 관련된 학생들의 징계수위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다. 보통 부정행위가 일어났을 경우 교육관련 부학장님과 해당과목 교수가 학칙에 따라 징계를 결정하지만 이번에는 학장님과 학사관련 부학장님까지 모였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들의 수가 전체 학급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일으킨 것은 수업전에 보게 되어있는 온라인 퀴즈에서였다. 내 과목은 ‘거꾸로 교실 (flipped classroom)’이라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즉, 수업에 오기 전 학생들은 미리 녹화 된 강의를 온라인으로 본다. 그리고,수업 중에는 교수의 지도하에 환자치료에 대한 토론을 한다. 이와같은 ‘거꾸로 교실 (flipped classroom)’이라는 수업방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필요한 지식을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이를 수업 시간동안 여러 환자 케이스에 적용해 보는 것이 수업시간에 필요한 지식을 배운 다음 집에서 혼자 환자 케이스에 적용하는 것보다 학습에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교실이 성공하려면 학생들이 수업전에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해 오지 않으면 토론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를 해 오도록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퀴즈, 즉 시험을 내주는 것이다.내 과목에서 퀴즈는 총 열한 번 있다. 그리고 각 퀴즈는 객관식 10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퀴즈가 전체 과목성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이고, 각 퀴즈는 1%를 차지한다 (학생들은 11개의 퀴즈 성적 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을 성적 계산에서 제외할 수 있다). 과목이 반쯤 지난 어느날, 나는 동료의 부정행위를 의심하는 학생들의 제보를 받았다. 일부 학생들이 퀴즈 본 것을 제출하기 전에 웹사이트를 통해 다른 학생들에게 정답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시작한 조사는 무려 한달 이상 걸려서야 끝났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웹사이트를 통한 공유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배로부터 받은 퀴즈의 정답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공유하거나, 선배의 아이디를 빌려 그 전년도의 과목 웹사이트에 가서 퀴즈의 정답을 얻은 다음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우리학교는 부정행위의 여부를 학교의 교칙과 강의계획서에 기록된 윤리규정에 따라 판정한다. 이에 따르면, 퀴즈 문제나 그 답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수 없으며 또, 본인의 의도에 관계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학생이 부정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부정행위이다. 따라서, 정답을 공유한 학생들과 이를 이용한 학생들 뿐만 아니라 퀴즈의 정답을 후배에게 준 선배, 그리고 자신의 아이디를 빌려준 선배 모두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건강관련종사자는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 환자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높은 윤리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학교 학생들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때부터 윤리기준을 준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급전체의 3분의 1 이상이 이를 어기고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와같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에 대한 징계로 우리학교는 그동안 학생의 해당과목 학점을 F로 처리하고 다음해에 재수강하도록 해왔다. 그런데 같은 방식의 징계를 내리는 데에는 학교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학교가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구 교과과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아직 과정을 모두 마치지 않았으므로 학교는 구 교과과정과 새로운 교과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일어난 내 과목은 구 교과과정에 속해 있었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해서 더 이상 개설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부정행위를 한 학생들에게 F학점을 주면 다음 해에 내 과목을 다시 개설해야 한다.무엇보다 실습과정 스케줄을 짜는 것이 큰 문제였다. 구 교과과정과 신 교과과정의 마지막 1년은 병동, 클리닉, 약국 등 환자를 만나는 곳에서의 실습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구 교과과정은 4년과정인 반면 새로운 교과과정은 3년과정이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두 교과과정의 학생들이 동시에 실습을 받아야 한다. 즉, 실습에 나가는 학생들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그동안 새로운 실습장소를 구하고 실습 스케줄을 조정하는 등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부정행위로 징계를 받아 내 과목을 다음 해에 다시 수강해야 한다면 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실습을 두 달 늦게 시작하게 될 상황에 놓인다. 한두 명의 실습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학급의 3분의 1 이상이나 되는 많은 수의 학생들의 실습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은 학교에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이러한 학교 사정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F학점을 주는 대신, 과목 전체에서 퀴즈가 차지하는 비중인 10%를 모두 0%로 감점처리해서 학점을 주는 것으로 징계하자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이런 학장님의 질문에 학사관련 부학장님이 대답하신다.“학교가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대체 징계안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과거에 비슷한 사안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들에게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학교는 퀴즈, 숙제, 시험 등에 관련된 부정행위에 대해 모두 F학점을 주는 징계를 택했습니다. 또, 소수가 걸리면 중징계, 다수가 걸리면 경징계를 받는다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정행위를 계획하는 학생이 혹시 걸리게 되면 경징계를 받기 위해 다수의 학생들을 끌어들이려고 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학교가 일관성있는 징계정책을 써야 학생들이 건강관련종사자에게 기대하는 높은 윤리기준을 준수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학교 사정에 따라 징계수위가 달라지게 되면 학생들은 윤리기준을 사정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학생들, 미래의 건강관련종사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학사부학장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교육부학장님께서 말씀하신다. “일관성있는 징계 정책으로 부정행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제가 실습스케줄을 담당하는 교수를 직접 도와 이 학생들의 내년 실습 스케줄을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저도 부정행위를 한 학생들에게는 모두 F학점을 주고, 내년에 제 과목을 다시 개설하겠습니다.”학교 사정이 매우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원칙에 따라 일관성있는 정책을 결정한 이 회의가 UCSF약대에서 일한다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순간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높은 기준을 준수하기를 요구한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교수와 학교부터 이를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5-31 15:44 |
[약대·약학] <109> 술은 혈당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축하합니다. 드디어 당화혈색소가 6.9%로 목표치에 도달했습니다.” 50대 중반 남성인 A는 금년초부터 당뇨병 약물치료를 위해 내 클리닉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오고 있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당화혈색소는 10.9%로 목표치인 7% 미만보다 훨씬 높았다. 이처럼 당화혈색소가 10%가 넘는 경우, 경구용 당뇨병 치료제를 여러 개 쓰더라도 목표치인 7% 미만으로 내리기 힘들다. 그래서 첫 방문때 인슐린을 시작했다. 인슐린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환자가 혈당을 집에서 정기적으로 측정해야 한다. 하지만 CD는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해서 혈당을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슐린을 곧 중단해야만 했고 메트포민 (metformin),글리피지드(glipizide),엠파글리플로진(empagliflozin), 리라글루티드 (liraglutide) 등 네 가지 약물을 처방받아 사용하고 있다. “복용하고 계신 약들을 가지고 오셨나요?”“여기 있습니다.” 나는 환자들이 약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반드시 확인한다 1)라벨에 적혀 있는 약국에서 교부받은 날짜와 약의 수량2)약병내의 내용물 (즉, 정제나 캡슐)과 그 숫자3)약병 겉에 붙어 있는 라벨을 가리고 약병 뚜껑을 열어 환자에게 내용물을 보여 주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용하는지 (예, 하루 한 번, 하루 중 언제 등) 질문 내가 이러한 사항을 확인하는 이유는 환자의 복약순응도 – 환자가 약을 처방받은대로 복용하는 정도 –를 평가하기 위해서다. 약국에서 교부받은 날짜와 약의 수량, 그리고 현재 약병내에 남아있는 내용물의 숫자를 비교해 보면 환자의 복약순응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 간혹 어떤 환자들은 한 약병내에 여러 약을 함께 담아 두기도 한다. 이때 각각의 내용물을 동정해서 이들이 처방받은 약들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도 복약순응도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약을 어떻게 복용하는지 물었을 때 많은 환자들이 라벨에 적혀 있는 복약지시사항 (예, 하루에 한 번 복용)을 그대로 읽어 대답한다. 라벨을 가리고 내용물만을 보여주면 환자가 실제로 집에서 어떻게 복용하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가 가져온 각각의 약병에는 단 한 종류의 내용물만이 들어 있었다.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는 각각 90일치를 6개월전에 약국에서 교부받았다. “이 약병들이 가장 최근에 약국에서 교부받은 것인가요?” 그는 남미출신으로 영어로 말할 줄 모른다. 그런데, 영어를 읽을 줄 모르는 일부 환자들은 첫번째 받은 약병에 자신들이 쓰는 언어로 복약지시사항을 따로 적어 놓은 다음, 약국에서 약을 새로 교부받을 때마다 내용물을 그 약병을 옮겨담기도 한다. “예.”따라서, 그가 오늘 가져온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는 6개월전에 약국에서 교부받은 것들이다 “선생님 메트포민을 어떻게 복용하세요?”나는 메트포민 한 알을 하루에 두 번 복용하도록 처방했었다. “하루에 한 알을 두 번 복용합니다. 아니. 하루에 한 번 복용합니다.”“하루에 한 번 복용하세요 아니면 두 번 복용하세요?”“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지난 일주일동안 약 복용하는 것을 몇 번 잊으셨나요?”“가끔 복용하지 않았습니다.”“혹시 약에 대해 우려사항이 있으신지요?”“그런 것은 없고요. 술을 마실 때 같이 복용하면 안 될 것 같아 술을 마실때에는 약을 복용하지 않았습니다.”“술을 얼마나 자주 마시나요?”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떤 술을 주로 마십니까?”“맥주를 마십니다.”“한 번에 얼마나 마십니까?”“여섯 병 마십니다.” 나는 그의 당화혈색소가 왜 낮아졌는지 깨달았다. 술과 그의 생활환경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음주량과 당화혈색소 수치는 일반적으로 서로 반비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음주량이 많을수록 당화혈색소는 떨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콜 자체가 칼로리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알콜은 1그램당 7킬로칼로리를 낸다. 그런데, 설탕 1그램이 4킬로칼로리를 공급하므로 알콜이 훨씬 더 많은 칼로리를 공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배 나왔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맥주 1병은 약 360 ml로 약 150킬로칼로리의 열량을 낸다. 맥주 6병이 내는 열량은 약 900 킬로칼로리이다. 성인 남성이 하루에 필요한 열량은 보통 2000 킬로칼로리이다. 따라서, 그는 하루에 필요한 열량의 거의 반을 술로부터 얻어왔던 것이다 (물론, 이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경우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음주량을 줄여서 말하고운동량은 과장한다). 그런데, 술에서 얻는 열량이 모두 알콜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술은 탄수화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탄수화물의 양은 술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와인 150 ml에는 단 4그램만의 탄수화물이 들어있는 반면, 맥주 한 병에는 13그램이 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술 중 소주는 일반적으로 탄수화물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고 막걸리는 100 ml당 2 그램이 들어 있다. 이처럼 많은 종류의 술이 아주 적은 양의 탄수화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당뇨병 환자들은 술을 마실때 저혈당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저혈당을 직접 일으킬 수 있는 설포닐우레아계 약물이나 인슐린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 더욱 그렇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 술에 포함된 탄수화물의 양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안주의 종류와 양(즉, 탄수화물이 포함된 안주와 그 양)을 결정해야 한다. 또 인슐린의 용량을 줄이거나 잠시 중단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처럼 맥주 6병을 마신다면 약 80그램의 탄수화물을 술로부터 얻는 셈이다. 이는 물론 안주를 제외한 것으므로 안주의 종류에 따라 탄수화물로부터 얻는 총열량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달리 서구는 안주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경우 술을 마시는 동안 섭취하는 탄수화물의 양은 80 그램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당뇨병 환자들은 식사당 약 45~60 그램의 탄수화물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따라서, 약 80그램의 탄수화물의 양은 적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당화혈색소는 어떻게 떨어졌을까? 이는 아마도 그가 많은 열량을 술로부터 얻어서 탄수화물이 포함된 다른 음식을 따로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보통 술이 깬 다음 식욕이 떨어지는 것도 다른 음식 섭취를 줄이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의 현재 생활환경도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그는 특별한 직업이 없고 친구들 집에서 산다. 그래서, 집에 여분의 음식이 있느냐에 따라 하루에 먹는 식사량이 달라지곤 했다. “선생님, 술의 양이 좀 많습니다.”“저도 압니다. 하지만, 여러 어려운 상황을 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또 고국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생각이 날 때도 그렇고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어려운 상황을 견디면서 본인의 미래와 가족들을 위해 생활하고 있다. 특히 적은 액수의 수입임에도 이를 쪼개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분들을 보면 이들의 의지와 가족사랑이 얼마나 큰 지 느껴진다. “저는 환자분의 건강이 많이 걱정됩니다. 이처럼 술을 많이 드시면 간 등 여러 장기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술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현재 상황을 잊기 위해서 술이 필요합니다.”“제 생각에는 아버님, 어머님, 형제들 모두 당신이 술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바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노력 해 보겠습니다.” 진료실 문을 나서는 그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는 복약순응도 확인에 대한 중요성이다. 만약 그의 당화혈색소 수치가 좋다고 복약순응도에 대한 확인을 건너 뛰었다면 그의 수치가 좋아진 것에 대해 엉뚱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검사결과가 좋건 나쁘건 복약순응도에 대한 확인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째는 건강관련종사자로서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그의 현재 처한 상황이 술을 마시도록 만든 원인이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가 술을 완전히 끊기는 힘들 것이다. 이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야만 그의 건강이 좋아질 수 있는데 나는 여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환자의 건강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5-02 15:27 |
[약대·약학] <108> 혈중 중성지방을 약으로 낮추면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줄어들까?
2022년 11월 미국 의학잡지인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혈중 중성지방을 약으로 낮출 때 심근경색 등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하는 위험이 줄어드는지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중성지방은 우리 몸에서 생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산을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운송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혈액 속의 중성지방의 양이 많으면 동맥경화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혈중 중성지방의 양을 약으로 낮추면 이 위험이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PROMINENT라고 불리는 위의 임상시험에서 사용한 약은 현재 신약으로 개발 중인 피마피브레이트 (Pemafibrate)이다. 이 약은 중성지방을 낮추는 용도로 널리 쓰이는 피브레이트 (fibrate)라는 계열의 약이다. 이 계열의 약으로 현재 임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로는 페노피브레이트 (fenofibrate)와 겜피브로질 (gemfibrozil) 등이 있다. 피마피브레이트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혈중 중성지방을 낮춘다. 첫째, 혈액속의 중성지방을 분해해서 근육 등의 조직이 사용하도록 돕는다. 둘째, 중성지방은 간에서 만들어지는데, 이 약은 간이 중성지방을 만드는 것을 줄인다. 요약하면, 피마피브레이트는 중성지방이 만들어지는 것을 줄이고, 혈액 속을 돌아다니는 중성지방을 분해하여 혈액으로부터 없애는 것이다.PROMINENT 시험의 대상자들은 2형 당뇨병을 가지고 있고, 혈중 중성지방의 수치가 200-499 ml/dL이며, 혈중 고밀도 콜레스테롤 (HDL-cholesterol; 좋은 콜레스테롤이라고 불림) 수치가 40 mg/dL이하, 그리고 혈중 저밀도 콜레스테롤 (LDL-cholesterol; 나쁜 콜레스테롤이라고 불림) 수치가 100 mg/dL이하인 환자들이었었다. 즉, 2형 당뇨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혈중 중성지방의 양은 높지만 나쁜 콜레스테롤과 좋은 콜레스테롤의 양이 모두 적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셈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연구한 이유는, 이전에 발표된 페노피브레이트를 이용한 FIELDS라는 임상시험 분석결과, 혈중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었을 때 이런 조건의 환자들의 심순환기 질환 위험이 낮아질 가능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PROMINENT 시험은 총 10,497명의 환자를 모집, 피마피브레이트군과 위약군에 무작위로 배정하여 약 3년반동안 심순환기 질환이 발생하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때, 추적한 심순환기 질환은 심근경색증, 뇌경색증, 막힌 관상동맥을 뚫기 위한 관상동맥 우회술 등의 시술여부, 그리고 심순환기 질환에 의한 사망 등이다. 전체 환자의 삼분의 이가 시험에 참여하기 전 이미 심근경색증 등의 심순환기 질환을 앓았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시험참가자의 대부분은 고위험군이었다. 시험을 시작할 때 측정한 참가자들의 혈중 저밀도 콜레스테롤 평균 수치는 79 mg/dL이었고, 참가자의 95%이상이 저밀도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스타틴을 복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험참가자들의 저밀도 콜레스테롤은 잘 조절되고 있었다. 반면, 이들의 중성지방의 평균 수치는 273 mg/dL로 높은 편에 속했다.예상대로, 피마피브레이트는 위약과 비교했을 때 혈중 중성지방을 26.2%나 더 떨어뜨렸다. 하지만,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에 대한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달랐다.표.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에 대한 결과위의 표에서 보듯이, 피마피브레이트군에 배정된 5240명 중 572명에게, 위약군에 배정된 5257명 중 560명에게서 심순환기질환이 발생하였고, 이는 각각 연간 100명당 3.60명과 3.51명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환산되었다. 그런데, 이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도로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즉, 피마피브레이트는 위약과 비교했을 때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더 낮추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숫자만 보면 피마피브레이트군에서 심순환기 질환의 발생률이 오히려 더 높았다)이러한 PROMINENT시험 결과 - 혈중 중성지방의 양을 떨어뜨렸는데도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은 위약과 다르지 않은 것 – 는 지난 10년동안 보고되어 온 중성지방의 양을 떨어뜨리는 약의 심순환기 질환의 예방효과를 검증한 임상시험들의 결과와 다르지 않다. 임상에서 사용하는 혈중 중성지방의 양을 떨어뜨리는 약들로는 피브레이트 계열, 오메가-3 지방산, 그리고 니아신 (niacin) 등이 있다. 그런데, 임상시험에서 이들은 위약과 비교했을때 혈중 중성지방을 20-30% 정도 더 떨어뜨렸지만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낮추지 못했다. 특히, PROMINENT시험은 기존에 발표된 임상시험 결과에 따라 혈중 중성지방을 낮추었을 때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가장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예상한 환자군을 대상으로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기존의 임상시험결과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이와같은 임상시험 결과는 무엇을 시사할까? 첫째, 혈중 중성지방의 양이 500 mg/dL미만인 환자들의 대부분은 현재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성지방을 낮추는 약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혈중 중성지방을 낮추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약이든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데 심순환기 질환의 위험을 낮추지 않는다면 복용할 필요가 있을까? 그 대신, 스타틴을 이용해서 저밀도 콜레스테롤의 양을 낮추어야 한다. 그리고, 지방, 탄수화물, 알콜 등의 섭취를 크게 줄이고 운동을 늘리는 생활습관개선요법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임상시험을 통한 검증의 중요성이다. 특히, 건강기능식품, 예를 들어, 오메가-3 지방산 등은 혈중 중성지방을 낮춘다든가 면역기능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등의 건강기능 지표에 대한 자료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상품들을 복용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심순환기 질환, 감염증, 암 등을 예방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임상시험들이 보여준 것처럼 건강기능 지표가 좋아진다고 해서 복용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상품들은 심순환기 질환, 감염증, 암 등을 예방한다는 것이 검증된 다음 복용해도 늦지 않다. 건강기능식품을 살 수 있는 여윳돈이 있다면 차라리 그 돈으로 운동이나 여행 등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필자소개>-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4-03 13:21 |
[약대·약학] <107> 환자를 우롱하는 미국 건강보험
“약사님, 이 약을 꼭 복용해야 하나요?”
Mr. T가 당뇨병 치료제인 엠파글리플로진(empagliflozin; 상품명: 자디앙) 약병을 집어들고 물어본다. 75세인 그는 작년 여름 엠파글리플로진을 처방받은 이후 아무 부작용없이 잘 복용해 오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네. 지난 주에 약국에 가서 한달치를 받아 왔는데 160달러(우리돈으로 약 20만원)를 본인부담금(copay))으로 내야 했어요. 작년에는 한달치가 30달러(우리돈으로 3만8천원)였는데 금년에 너무 비싸져서 경제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매년 초, 나는 Mr. T와 같이 그동안 복용하고 있던 약에 대해 본인이 내야 하는 금액이 갑자기 크게 증가한 환자들을 본다. 이는 미국 건강보험제도의 문제점에 기인한다.
Mr. T와 같이 65세 이상의 환자들은 미국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공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어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달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가입자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통합하여 운영한다. 즉, 건강보험 가입자는 보험증 하나로 병원과 약국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의 메디케어 가입자는 병원 진료와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병원 진료에 대한 보험만 가지고 있고, 처방약에 대한 보험이 없으면 가입자는 처방약값 전액을 자비로 내야 한다.
이처럼 메디케어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유는 정부가 사보험에 메디케어 가입자를 위한 처방약 보험상품의 개발과 판매를 위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건강보험이 직접 지불해 준다. 반면, 미국의 처방약 보험의 경우, 가입자는 일단 메디케어의 승인을 받은 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그리고, Mr. T처럼 가입자가 처방약을 구매하면 사보험은 정부로부터 받은 돈으로 지불해 준다. 즉, 정부는 사보험에 처방약 보험에 대한 외주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디케어의 처방약에 대한 지불 구조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이론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처방약에 대한 다양한 보험 상품이 개발될 수 있다. 가입자는 자신의 형편과 상황에 맞는 상품을 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전국적으로 801개의 메디케어 처방약 보험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둘째, 처방약 사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사보험은 처방약에 대한 지불을 적게 할수록 이익을 더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사보험은 사전승인(prior authorization) 등 여러 제도를 이용하여 처방자들이 약을 함부로 처방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이와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영에서는 단점이 훨씬 더 많다. 왜냐하면, 사보험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사보험은 가입자의 건강보다는 이익을 더 우선한다. 그 좋은 예가 Mr. T의 경우이다. 그리고, Mr. T의 사례는 사보험인 실손보험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우리나라에 타산지석이 될 지도 모르겠다.
Mr. T가 그동안 복용해 오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증가한 이유는 그가 가진 사보험이 금년부터 다른 약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사보험은 메디케어 처방약 중에 지불해 주는 약들의 목록 (formulary)을 매년 새로 정한다. 정부의 규정에 따라 비슷한 종류의 약들 중 두 개를 선택해서 지불해 주어야 한다. Mr. T가 가진 사보험은 금년에 엠파글리플로진과 더불어 다파글리플로진 (dapagliflozin; 상품명 -포시가)을 지불해 준다. 그런데 작년과 달리 그의 보험은 다파글리플로진을 우선적으로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마도 다파글리플로진을 제조, 판매하는 제약회사와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보험사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을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기 위해 엠파글리플로진에 대한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린 것이다.
다파글리플로진과 엠파글리플로진은 당뇨병 치료 효과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처방약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알아보니 한달치 다파글리플로진에 대한 Mr. T의 본인부담금은 89달러 (우리돈으로 약 11만원)으로, 여전히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러면, 왜 같은 종류의 약에 대한 본인부담금이 갑자기 크게 올랐을까?
Mr. T가 처방약 보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보험들이 써 왔던 상술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약국에서 약을 교부받을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첫째,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입자는 매달 보험료를 내야 한다(영어로 이를 premium이라고 부른다). 사보험의 월보험료는 무료부터 40~50달러 (우리돈으로 6만원)에 이르기까지 상품마다 다르다.
둘째, 가입자는 매년마다 보험이 약값에 대해 지불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 금액을 본인이 먼저 부담해야 한다 (영어로 이를 deductible이라고 부른다). 이 deductible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에는 없지만 자동자 보험에 널리 사용되는 자기부담금과 같은 것이다. 즉, 자동차 수리를 할 때 가입자가 우선 자기부담으로 일정금액 (예를 들어, 50만원)을 내고 나면 나머지 수리금액에 대해 자동차 보험이 지불을 해 주듯이 미국 사보험 가입자도 약관에 정해진 일정금액을 먼저 약값으로 낸 뒤에야 보험이 그 해 나머지 기간동안 지불을 해준다. 따라서, 보험 가입자가 연간 처방약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총비용은 본인부담금, 월보험료, deductible 세 개의 합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생략하지만 이 세 개의 합은 환자가 어떤 약들을 복용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와같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입자들은 이를 잘 모른다. 가입자들은 당장 매달 지불해야 하는 월보험료를 보고 보험상품 가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Mr. T의 월보험료를 보면 미국 전체에서 판매되고 있는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3달러 (우리돈으로 약 4만원) 보다 훨씬 낮은 13달러 (우리돈으로 약 만6천원) 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낮은 월보험료를 가진 상품들은deductible이나 본인부담금이 비싼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낮은 월보험료는 가입자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 것이다.
Mr. T의 보험은 deductible이 103달러 (우리돈으로 약 13만원)로 처방약 보험들의 평균인 약 384달러 (우리돈으로 약 48만원)보다 훨씬 쌌다. 따라서, 이 보험은 비싼 본인부담금으로 돈을 버는 상품이었다. 그런데, 엠파글리플로진의 본인부담금이 작년에는 저렴했던 것으로 보아 Mr. T가 가입할 때에는 월보험료, deductible, 그리고 본인부담금까지 모두 저렴했던 것 같다.
작년 말 보험을 갱신하는 시기가 되어 올해의 월보험료를 기존 가입자에게 알려줄 때, Mr. T는 월보험료가 비싸지 않자 보험을 바꾸지 않고 같은 회사의 것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보험이 올해 월보험료를 알려줄 때 인상된 본인부담금도 명시했었겠지만 여러 정보와 섞여 있어 혼동되기 쉽고,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 계산법을 숙지한 가입자가 아니라면 이를 잘 눈여겨 보지 않는다.
Mr. T의 보험은 싼 가격으로 일단 가입자들을 유인한 다음, 가입자들이 처방약에 대한 총비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해 다음 해의 본인부담금을 크게 올림으로써 이익을 내는 상술을 쓴 것이다.
메디케어 처방약 사보험은 계약기간이 매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이다. 따라서, 일부 저소득층을 제외한 일반 가입자들은 연중에 다른 회사의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즉, Mr. T는 본인부담금이 아주 비싼 현재의 보험을 연말까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 주 측정한 그의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6.2%로 아주 좋았다. 그래서 비싼 엠파글로플로진을 당분간 중단하고 기존에 복용하고 있던 메트포민 (metformin)와 글리피지드 (glipizide) 등 본인부담금이 싼 제너릭 약들만 계속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만약 헤모글로빈 A1c 수치가 다시 높아지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만 할 뿐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3-08 14:45 |
[약대·약학] <106> 환자에게 현실적인 희망을 주어야
“오늘은 환자 보는 것을 직접 주도해 보면 어떨까?”
미라는 내 클리닉에서 외래환자 실습 (ambulatory care)을 수련중인 졸업반 학생이다. 외래환자 실습을 포함한 우리학교의 모든 실습 과목은 6주 동안 진행되는 과정이다. 나는 학생의 실습을 지도할 때 실습 첫 주에는 학생으로 하여금 내가 환자 보는 것을 관찰하도록 한다. 그리고 두번째 주에는 역할을 바꿔 학생이 환자를 주도적으로 보고 나는 학생을 관찰하면서 필요하면 도와준다. 물론 학생이 내가 환자 보는 것을 좀 더 관찰하고 싶어하는 경우에는 두번째 주에도 역할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미라처럼 내 클리닉에 실습을 오기전에 벌써 다른 실습과정 네 개를 마친 학생들은 보통 2주차부터 환자를 주도적으로 보도록 기회를 준다.
“네, 해 볼께요.”
“첫 환자인 Ms. Z가 좋을 것 같다. 환자 차트는 다 보고 왔지?”
“예. 50대인 이 환자는 일차의료제공자로부터 당뇨병 치료를 의뢰받아 오늘 처음으로 우리를 방문하는데요. 동반질병으로 고지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월초에 측정한 헤모글로빈 A1c수치가 12.5%로, 목표치인 7%미만보다 꽤 높습니다.”
“그래, 메트포민 (metformin)과 글리피지드 (glipizide) 두 종류의 약을 지난 12월부터 처방받아 오고 있지.”
“그런데, 인슐린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장 최근에 측정한 헤모글로빈 A1c 수치와 목표치가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인슐린이 필요해. 아, 환자가 왔나 보다.”
간호사가 Ms. Z를 진료실로 데리고 들어 온다. 미라가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어서 오세요, Ms. Z님. 저는 UCSF 약대 학생인 미라이고 이 분은 제 프리셉터인 닥터 S입니다. Ms. Z님의 의사선생님께서 저희에게 Ms. Z님의 당뇨병 조절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셔서 오셨죠?”
“네.”
“혹시 집에서 복용하고 계시는 약을 모두 가져 오셨나요?”
“아니요. 제가 깜박 잊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당뇨병약을 복용하고 계신지 기억하시나요?”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 두 종류를 처방받았습니다. 그런데, 복용을 시작하자마자 설사를 하는 등 몸이 별로 안 좋아져서 현재 아무것도 복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작용을 겪으신 것 같군요. 메트포민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분들이 설사 등 위장관 부작용을 겪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해서 부작용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다시 복용해야 하나요?”
“네. 그런데, 혹시 최근에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헤모글로빈 Ac1 수치에 대해 상담받으셨는지요?”
“받은 적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시간이 없으셨나 봅니다. 아시다시피 헤모글로빈 Ac1 수치는 최근 석달동안 혈당이 얼마나 잘 조절되었는지 알려줍니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혈당이 잘 조절되지 않고 있는 것이구요. Ms. Z님의 경우, 지난달 측정한 것이 가장 최근 수치인데 12.5%로 목표수치인 7%미만보다 5.5%나 더 높습니다.”
“그러면, 약을 다시 복용해야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 인슐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s. Z는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저는 인슐린을 사용하기 싫습니다. 당뇨병 환자인 제 친척 중 한 분이 인슐린을 사용하다가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를 다시 복용하셔서 헤모글로빈 A1c수치가 목표치에 도달하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관찰을 멈추고 개입해야 했다. 왜냐하면, 두가지 문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첫째,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지 않았다. 인슐린은 다리를 절단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둘째, 환자에게 비현실적인 희망을 주고 있었다.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만으로는 헤모글로빈A1c수치를 5.5%이상 낮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환자가 인슐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너무 단호하게 말하니까 아마도 미라는 환자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인슐린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더 이야기해 봐야 환자가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Ms. Z가 인슐린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슐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건강정보에 대한 환자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건강관련종사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건강관련종사자는 환자에게 과학적 데이타에 바탕을 둔 정확한 건강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환자에게 비현실적인 희망을 주어서 결국에는 환자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임상연구에 따르면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는 각각 헤모글로빈 A1c 수치를 1~1.5% 정도 낮춘다. 즉, 두 약을 최고 용량으로 쓰더라도 최대한으로 낮출 수 있는 헤모글로빈 A1c 수치는 3%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약으로 Ms. Z가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만약 우리의 말을 믿고 두 약만 복용하고 있다가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Ms. Z는 우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희망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 대신 듣기 좋게 바꾸어 전달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초기 우리나라 정부는 방송을 통해 ‘이번 주말이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고비’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었다. 아마도 국민에게 팬데믹 종식의 희망을 주고, 방역에 대한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선의에서 사용한 표현이었겠지만, 궁극적으로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건강관련종사자가 환자에게 질병과 치료방법에 대한 정보를 줄 때도 마찬가지이다. 환자가 듣기에 불편하더라도 과학적 데이타에 바탕을 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환자에게 신뢰를 얻고 궁극적으로 좋은 치료결과를 낳는 방법인 것이다.
나는 Ms. Z에게 친척이 다리를 절단하게 된 것은 인슐린이 아니라 아마도 당뇨병이 잘 조절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또, 메트포민과 글리피지드를 복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만으로는 현실적으로 헤모글로빈 A1c 목표치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슐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인슐린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s. Z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분이 전문가이니까 두 분 말씀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1-31 13:24 |
[약대·약학] <105>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항상 이러세요.”
진료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며 졸고 있는 환자를 보면서 딸과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딸이 설명을 더 보탠다.
“어머님은 밤 2시쯤 주무셔서 아침 10시쯤 일어나세요.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시자 마자 마루에 있는 소파로 가셔서 바로 누워 버리세요. 그리고는 하루종일 저렇게 졸고 계십니다.”
82세의 이 환자는 가족이 있는 두 나라에서 생활한다 - 일년에 절반은 엘살바도르에서 지내고 나머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다. 환자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딸의 집에 머무른다. 그래서 딸이 처방약을 주는 등 어머니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다.
환자는 지내는 나라에 따라 다른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즉 엘살바도르에서 지낼 때에는 그곳에 있는 신경과 의사를,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에는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를 보고 있었다. 환자는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 당뇨병, 고혈압 등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치매, 우울증, 불면증, 만성통증은 엘살바도르의 신경과 의사가, 당뇨병과 고혈압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와 가족은 2주전 가정의학과 의사를 방문했었다. 이 때, 환자와 가족은 환자가 낮에도 매우 졸려한다고 호소했었다. 가정의학과 의사는 그 이유를 환자가 우울증과 불면증 치료를 위해 복용하고 있는 약들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의사가 나에게 약물사용에 대한 협진을 의뢰하여 환자와 가족이 나를 방문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처방받아 어머님이 복용하고 있는 약들입니다.”
딸이 내게 건내 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약들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에게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 용량과 복용횟수는 생략한다):
쿼티아핀 (quetiapine; 쎄로켈): 정신병 치료제
멀타자핀 (mirtazapine; 레메론): 우울증 치료제
멜라토닌 (melatonin): 수면제
가바펜틴 (gabapentin; 뉴론틴): 진통제
모다피닐 (Modafinil; 프로비질): 각성제
도네페질 (donepezil; 아리셉트): 치매 치료제
시티콜린 (citicoline; 미국에서 허가된 약은 아니며 우리나라에는 주사제로만 사용): 기억력 증진
이 약 리스트를 보니 환자가 낮에도 졸려 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무려 네 개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 많이 필요했던 것을 보니 환자의 불면증이 꽤 심했던 것 같다.
리스트를 다시 찬찬히 보고 있을 때 모다피닐이라는 약이 눈에 띄였다. 모다피닐은 낮에 갑자기 졸음이 오는 기면병 (narcolepsy)의 치료를 위해 허가받은 약이다.
“혹시, 어머님이 기면병의 진단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이로 미루어 보아 모다피닐은 환자가 낮에도 졸려하니까 이를 치료하려고 처방한 것 같았다. 즉, 다른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다.
이와같이 먼저 처방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을 처방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prescribing cascade라고 한다. Cascade는 원래 시작은 하나인데 궁극적으로 여러 개로 갈라져 떨어지는 폭포처럼 하나의 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prescribing cascade는 처음 시작한 약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 약을 더하지만 새 약도 새로운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다스리기 위해 다른 약을 계속 추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기인 셈이다.
모든 약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은 꼭 필요한 적응증에만 사용해야 한다. 특히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약을 분해하고 배설하는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노인은 여러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가지 약을 함께 복용하고 있어 약물간 상호작용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따라서 노인에게 약을 쓸 때에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다시 위 환자로 돌아가자. 비록 모다피닐이 다른 약들의 부작용인 졸음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중지하면 졸음이 더 악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졸음을 유발하는 약의 숫자를 줄이고 그 다음 모다피닐을 중지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들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 보였다.
쿼티아핀, 멀타자핀, 멜라토닌, 가바펜틴 등 환자에게 졸음을 유발하는 네 개의 약 중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중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쿼티아핀은 정신병 치료에 주로 사용하지만 우울증을 치료할 때 어떤 치료제 단독으로 우울증이 잘 조절되지 않은 경우 보조제로 더해지기도 한다. 즉 이 환자의 경우 아마도 처음에는 우울증 치료제인 멀타자핀을 처방받았지만 이것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이 잘 조절되지 않자 쿼티아핀을 추가한 것이다. 지금은 졸음의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졸음을 유발시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우울증 치료 보조제도 있으므로 굳이 쿼티아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또, 가바펜틴은 주로 신경손상에 의해 찌릿찌릿하거나 불에 닿는 듯한 느낌을 주는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쓰이며 졸음을 가장 잘 유발하는 통증약 중 하나다. 환자는 이러한 종류의 통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바펜틴은 졸음이라는 부작용을 이용하여 환자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졸음을 유발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통증 치료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아세트아미노펜, 타이레놀).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을 동시에 중단하면 불면증이 악화될 수 있다. 또, 뇌에 작용하는 약을 중단할 때 갑자기 중단하면 금단증상이 생길 수 있다. 용량을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줄여야 한다. 쿼티아핀과 가바펜틴의 용량을 동시에 줄이게 되면 환자와 가족이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를 먼저 줄여서 중단한 다음 불면증에 문제가 없으면 다음 것을 줄이고 중단하는 것이 안전해 보였다.
“일단 쿼티아핀을 중단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드시고 계신 양의 반인 하루 50 mg을 2주동안 주셔 보세요. 이동안 불면증이 악화되면 다시 원래 용량인 100 mg을 주십시요. 만약 불면증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면, 2주 뒤부터는 주시지 마시고요.”
“만약 중단한 다음 불면증이 악화되면요?”
“하루 50 mg을 다시 주시기 바랍니다.”
딸이 혼동될까봐 나는 글로 적어서 건네 주었다.
“쿼티아핀을 중단한 다음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3주 뒤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3주 뒤면 쿼티아핀을 성공적으로 중단한 다음 일주일이 지난 때이니까 환자의 상태를 보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지요.”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3-01-02 18:42 |
[약대·약학] <104> 집에서 측정환 혈압이 병원보다 낮은 이유
“약사님, 이 약이 뭐예요?”
SN이 약병을 내게 주면서 묻는다. 약병 라벨을 보니 지난 주에 약국에서 교부받은 것으로 개봉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암로디핀 (amlodipine)이라는 고혈압 약입니다. 아직 복용을 시작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제 담당의사가 지난 주에 혈압을 재어 보라고 하셔서 클리닉에 잠깐 왔었어요. 고혈압 진단을 받은 환자들을 위해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혈압을 측정하는 클리닉 말이예요. 그런데, 간호사가 혈압이 좀 높다면서 약국에 가서 약을 새로 받으라고 해서 받아 놓은 것이예요. 그런데, 무슨 약인지 잘 몰라서 그동안 복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SN은 60대의 여성환자로 고혈압 치료를 위해 내 클리닉에 한 달전 처음으로 방문했었다. 당시, SN은 리시노프릴 (lisinopril)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hydrochlorothiazide) 등 두 종류의 고혈압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릭닉에서 측정한 혈압은 142/93으로, 목표혈압수치인 130/80미만보다 높았다. 그런데, SN은 2주 뒤 자궁수술이 예정되어 있어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마음이 긴장하게 되면 혈압도 올라가게 된다. 왜냐하면, 혈압을 상승시키는 교감신경이 흥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일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평소의 혈압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집에서 정기적으로 측정한 혈압 수치가 있으면 평소 혈압이 어떤 지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SN은 혈압측정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클리닉에 비치하고 있던, 집에서 측정할 수 있는 혈압측정기와 혈압수치를 적는 표를 SN에게 주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즉, 아침에 혈압약을 복용하기 전과 저녁 식사 전에 혈압을 측정하고 이를 적어 재진때 가지고 오라고 부탁했다. 또, SN에게 혈압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방법에 대해 설명도 해 주었다.
“SN님, 그동안 혈압을 집에서 측정하셨나요?”
“예. 혈압수치를 적은 표를 가져왔어요.”
자궁수술을 마친 후, 지난 2주 동안 SN이 집에서 측정한 수축기 혈압은 대부분 120대였으며 이완기 혈압도 70대가 주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수축기 혈압이 110대인 적도 몇 번 있었다. 반면, 오늘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은 146/88로 높았다.
“SN님, 리시노프릴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는 어떻게 복용하세요?”
“하루에 한 번씩 복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혹시 복용을 잊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혈압약을 드셨나요?”
“오늘 아침에 복용했습니다.”
고혈압 약은 복용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걸린다. SN은 클리닉을 방문하기 3시간 전에 고혈압약을 복용했으므로 클리닉에서 혈압을 측정했을 때 약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SN이 집에서 측정한 혈압은 클리닉에서 측정한 것보다 훨씬 낮다. 그러면, 클리닉에서 측정한 SN의 혈압은 왜 높은 것일까? 또,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으니 SN은 혈압약을 하나 더 복용해야 할까?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은 현상을 백의 현상 (white coat effect)라고 부른다. 그리고,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고혈압으로 판정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백의 고혈압 (white coat hypertension)이라고 한다. 이 용어들에 백의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와 간호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과 UCSF 대학병원의 경우, 여러 이유로 의사와 간호사가 하얀 가운을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집보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이 높은 이유는 심리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 오면 긴장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혈압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 “ 오늘 측정할 혈압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은 평소의 혈압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혈압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오르기 시작해서 오후에 최고점에 올랐다가 밤에 잠자는 동안 가장 낮아지는 등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뿐만 아니다. 혈압은 감정 상태, 통증 등의 신체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병원에서 한 번 측정한 혈압 수치는 이와 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혈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환자가 하루 두 번씩 집에서 측정한 혈압이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보다 환자의 평소 혈압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환자가 집에서 하루에 여러 번 측정한 혈압 수치를 이용하는 것이 고혈압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SN님, 지난주와 오늘 클리닉에서 측정한 혈압이 좀 높기는 합니다. 하지만, 집에서 매일 측정하신 혈압이 좋기 때문에 새로 받으신 혈압약인 암로디핀을 복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기존에 복용하던 리시노프릴과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만 복용하면 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해 오신 것처럼 매일 하루 두 번씩 혈압을 측정해서 적어 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11-29 10:37 |
[약대·약학] <103> 짠음식을 많이 먹은 다음 물을 많이 마시면 ‘희석’되어 혈압을 낮출 수 있을까?
짠음식을 많이 먹은 다음 물을 많이 마시면 ‘희석’되어 혈압을 낮출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음식을 짜게 먹었어. 그런데 소금이 혈압을 올리잖아. 그래서 이를 희석해보려고 물을 평소보다 많이 마셨는데. 잘 한 거지?”
가깝게 지내던 한국인 어른께서 물어 보신다. 이 분은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의 병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혈압약으로 암로디핀 10 mg을 하루에 한 번, 당뇨병약인 메트포민 500 mg을 하루 두 번, 그리고 고지혈증 치료를 위해 아토바스타틴 20 mg을 하루 한 번 복용하고 계신 중이다.
“무슨 음식을 드셨어요?”
“오늘 오랜만에 한국 마트에 가서 청국장을 사와서 끓여 먹었어. 김치하고. 자네도 내가 청국장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잖아.”
“맛있었겠네요. 그런데, 혈압은 재어 보셨어요?”
“아니. 혈압계 쓰는 게 좀 귀찮아서. 대신에, 아까 말했듯이 물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어. 그러면, 희석되지 않을까해서…”
소금은 크게 세 가지의 방법으로 혈압을 높인다: 혈액의 양을 증가시키고, 혈관을 수축시키며, 혈관을 뻣뻣하게 만든다.
우리몸의 혈액은 혈관을 통해 이동한다. 그리고 이 혈액을 이동시키는 원동력은 심장이 제공한다. 즉, 심장이 수축할 때 만들어지는 압력이 혈액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온 몸의 혈관을 통해 흐르다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혈액은 폐쇄회로 (closed circuit)안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왜 혈액의 양이 혈압에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심장을 모터펌프, 혈관을 파이프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모터펌프와 파이프로 이루어진 폐쇄회로안에 물(혈액)이 흐른다고 하자. 이때, 물의 양이 증가하면 모터펌프는 더 많은 압력을 가해야 물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물의 양이 증가하면 파이프가 받는 압력이 증가한다. 만약 심장에서 나간 혈액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서 대부분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즉 열린 회로인 경우, 혈액양이 늘어나도 혈관에 걸리는 압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혈액은 심장과 혈관으로 이루어진 폐쇄회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회로안을 흐르는 액체인 혈액의 부피가 증가하면 혈관이 받는 압력이 증가한다.
그러면, 소금은 어떻게 혈액의 양을 증가시킬까?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혈액내 소금의 농도가 높아진다(정확하게는 삼투압이 높아지지만 이해의 편이를 위해 소금의 농도로 표현하기로 한다). 그런데, 혈액내 소금의 농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세포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몸은 신장과 뇌를 통해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즉,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되는 소금과 물의 양을, 뇌는 우리가 물을 마시게 하는 신호를 조절함으로써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되는 소금의 양을 증가시킨다. 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뇌의 도움을 받아 오줌으로 배출되는 물의 양을 줄인다. 그래서, 짠 음식을 많이 먹으면 오줌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오줌으로 나가는 소금의 양은 늘리고 물의 양은 줄임으로써 신장은 혈액을 '희석'시켜 혈액내 소금의 농도를 낮춘다.
그런데,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뇌는 갈증을 유발하여 물의 섭취를 늘린다. 그래서,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물을 마시고 싶게 되는 것이다. 또, 뇌는 항이뇨호르몬 (antidiuretics hormone)도 분비한다. 이 항이뇨호르몬은 신장에 작용하여 물이 오줌을 통해 배출되는 것을 줄인다. 즉, 뇌는 물의 섭취를 늘리고 오줌으로 나가는 물의 양을 줄임으로써 혈액을 희석시켜 소금의 농도를 낮추는 것이다.
이처럼 신장과 뇌는, 소금의 섭취가 늘었을 때 궁극적으로 혈액내 물의 양을 증가시켜 소금의 농도를 낮춘다. 그런데, 혈액내 물의 양, 즉 혈액의 양이 증가했기 때문에 혈압은 높아진다.
또, 소금은 혈관을 직접 수축시킴으로써 혈압을 높인다. 혈압은 혈관이 넓을 때 (이완)보다 좁을 때 (수축) 더 높다. 마치 파이프가 좁을 때보다 넓을 때 압력이 덜 걸리는 것처럼. 우리몸은 필요할 때 혈관을 이완시키는 물질 (즉, 산화질소)을 만들어서 혈압을 조절한다. 그런데, 소금은 혈관을 이완시키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과 이 물질이 혈관을 이완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혈관을 뻣뻣하게 만든다. 심장이 혈관에 압력을 가할 때 혈관이 탄력성이 높으면 받는 압력을 완충시킬 수 있다. 하지만, 혈관이 뻣뻣하면 심장이 가한 압력을 그대로 받는다. 앞에서 예를 든 모터펌프와 파이프로 비유해 보자. 만약 파이프가 잘 늘어나는 고무로 만들어졌다면, 모터펌프가 압력을 가할 때 파이프는 압력을 덜 받을 것이다. 하지만, 파이프가 탄력성이 전혀 없는 쇠로 만들어졌다면 모터펌프가 가한 압력을 그대로 받을 것이다. 즉, 소금은 혈관을 쇠로 만든 파이프처럼 만들어 혈압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물을 더 마셔서 희석이 되더라도 혈압은 올라가는 거야?”
“네. 물을 더 마시면 신장은 오줌으로 배출해야 하는 물의 양을 크게 줄일 필요가 없어지죠. 그래서, 오줌으로 나가는 물의 양이 상대적으로 더 늘어납니다. 그런데, 물을 더 마시면 이것만 달라질 뿐 혈압은 여전히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혈관내 혈액의 양이 늘어난데다 혈관은 좁아지고 뻣뻣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안타깝지만 비법은 없습니다 -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금이 왜 혈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시고, 소금 섭취의 양을 줄이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10-31 18:03 |
[약대·약학] <102> 일차의료제공자 제도: 우울증을 효율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
일차의료제공자 제도: 우울증을 효율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컨트롤 타워
집사님의 형수님이 첫번째 자살 시도를 했을 때 입원치료를 받았었다. 그런데 퇴원후에는 우울증에 대한 외래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물론 본인이 치료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외래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가 퇴원 후 외래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우울증 환자를 제때에 적절하게 치료하는 데 있어 여러 문제점이 있다는 보여준다.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형수님이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면 어떤 돌봄을 받았을까? 자살시도와 같은 중증 우울증 환자의 입원치료를 담당했던 팀은 환자가 퇴원할 때 두 명의 외래 의사에게 진료예약을 해준다. 하나는 정신과 전문의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 (primary care provider)이다. 이 둘 중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국의 대부분의 건강보험들은 가입자들이 반드시 일차의료제공자를 선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모든 환자들도 자신이 선택한 일차의료제공자를 가지고 있다.
일차의료제공자는 일차의료 (primary care)를 제공하는 건강관련종사자이다. 미국에서 일차의료제공자 역할을 하는 건강관련종사자는 가정의학과 및 일반내과와 산부인과 의사, 전문간호사 (nurse practitioner), 의사보조사 (physician’s assistants)들이다. 그러면, 일차의료제공자는 어떻게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할까?
일차의료제공자는 크게 네 가지 일을 수행한다. 첫째,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가 의료시스템을 접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의료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환자가 아프면 증상에 따라 동네에 있는 여러 의사들 중 하나를 만날 수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는, 응급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차의료제공자를 먼저 만나야 한다. 일차의료제공자는 우울증을 포함한 흔한 질병들을 진단, 치료할 수 있도록 수련받은 의료진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환자가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 (예를 들어, 우울증과 같은 흔한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의 건강을 일회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돌본다. 이들은 환자를 아플때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랜기간동안 보기 때문에 환자들에 대해 잘 알고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세째, 일차의료제공자는 치료뿐만 아니라 환자의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을 도모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환자를 위해 건강검진 오더를 내고 예방접종도 주도한다.
마지막으로, 일차의료 제공자는 다른 의료 제공자들과의 협진을 연결하고 조정한다. 이들은 환자가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가 필요할 경우 전문의에게 진료의뢰를 요청한다. 그리고, 환자가 여러 의료제공자들의 돌봄이 필요한 경우 이들의 역할을 조정한다. 이처럼 일차의료제공자는 환자의 특정 질병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문제를 종합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돌봄에 대한 콘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담당하는 팀은 환자가 퇴원한 후 2주내에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날 수 있도록 진료예약을 해 주는 것이다. 즉, 환자가 입원하는 동안 입원팀이 환자돌봄을 책임지지만, 외래에서는 일차의료제공자가 이 책임을 맡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퇴원하더라도 우울증이라는 질병에 대한 치료가 일차의료제공자의 주도하에 계속 지속될 수 있다.
물론, 집사님의 형수처럼 돌봄을 아예 거부해 버리면 외래에서 치료가 지속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이런 경우 나는 일차의료제공자가 환자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자주 본다. 예를 들어, 작년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환자들 중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접종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이 때, 일차의료제공자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등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이들의 접종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환자의 일차의료제공자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 환자가 치료를 거부해 버렸을 때 이들에게 다가가 설득할 수 있는 의료진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일차의료제공자 제도는 환자가 사회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을 꺼릴 때에도 환자의 우울증 치료가 지속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일차의료제공자 자신이 정신과 전문의의 자문을 받으면서 직접 환자의 우울증을 치료하면 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처럼 모든 환자들이 일차의료제공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 모든 환자들이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나야 하므로 환자가 일차의료제공자를 만나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처럼 특별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차의료제공자가 우울증을 치료하게 되면 환자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우울증을 제때에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는 사례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일차의료제공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가장 큰 약점이다. 환자돌봄의 컨트롤 타워가 없기 때문에 특히 입원에서 퇴원처럼 환자돌봄의 책임을 담당하는 의료진이 바뀔 때 치료의 지속성이 떨어지기 쉽다. 그리고 이 약점은 그 형수님의 예처럼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일차의료제공자 제도는 단기간 내에 확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차의료를 담당할 의료인들을 양성하고 의료서비스 제공체계를 바꾸는 등 자원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차의료제공자의 부재로 인한 의료자원의 비효율적인 운영과 환자들에게 미칠 치명적인 결과들을 고려할 때 일차의료제공자 제도의 도입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9-30 16:52 |
[약대·약학] <101> 대형종합병원에서 근무중 뇌출혈으로 사망한 간호사 사건 – 당근과 채찍을 병용해야
대형종합병원에서 근무중 뇌출혈으로 사망한 간호사 사건 – 당근과 채찍을 병용해야
지난 7월말 서울의 한 대형종합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뇌출혈으로 사망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당시 간호사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쓰러졌음에도 당일 그 병원에는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아무도 없었다. 이 병원에는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두 사람 있었지만 사건 당일 한 사람은 해외학회에, 다른 한 사람은 지방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호사는 수술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사망한 것이다. 의료시스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조차도 의사가 없어서 적기에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할 수밖에 없다면 의료시스템에 접근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일반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내 주변에서도 벌어졌었다. 경기도 남부에 사시던 친척어른께서 추석 이틀전 뇌출혈으로 쓰러지셔서 근처에 위치한 큰 대학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었다. 하지만 그 병원에 수술할 의사가 없어서 어르신은 경기도 북부의 다른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고 이 바람에 수술시기를 놓쳐 약 6개월간 의식을 잃고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이 두 사건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대형병원은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필수의료인력이 모두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과 무관한 일반회사도 회사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부서의 인력은 공백이 없도록 하는 것이 기본적인 운영원칙이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니... 더욱 심각한 것은 그 간호사와 친척어른의 예로 보아 이는 어느 특정한 병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많은 병원들에 만연한 문제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원인으로 낮은 의료 수가와 의사들의 필수의료 기피현상을 드는 것 같다. 의료 수가가 원가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병원이 비용은 많이 들고 이를 보전하기 힘든 부서의 의료인력, 예를 들면,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들을 적게 둔다는 것이다. 또 의료인력도 수련기간은 상대적으로 길지만 업무량과 위험도가 높고 수가가 낮아 수입은 적은 신경외과와 같은 분야로 진출을 꺼린다는 것이다. 나도 낮은 수가와 필수의료기피현상이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의료 수가를 현실화하고 의료진이 필수의료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당근만으로는 병원들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인력을 고용하고 배치하는 관행을 충분히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이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의료사고에 대해 병원이 받아야 할 징계와 벌칙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교할 때 의료수가가 낮지만 징계와 벌칙도 낮다. 어쩌면 징계와 벌칙의 정도는 수가에 비해 훨씬 더 낮은 지도 모른다. 의료기관이 정부가 운영하는 보험 (즉, 우리나라의 건강보험과 미국의 메디케어)에 고의로 부당청구해서 받는 징계와 벌칙의 예를 들어 보자. 이 경우, 우리나라와 미국 모두 해당 의료기관이 민사와 형사소송을 당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징계와 벌칙의 수준은 우리나라가 미국에 비해 훨씬 낮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기관은 부당청구한 금액 또는 일부를 되돌려 주고 형사처벌로 3년이하의 징역이나 최대 3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의 의료기관은 일단 부당청구한 금액의 세 배에 달하는 금액까지 정부에 돌려 주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부당청구건당 벌금을 따로 내야 한다. 즉, 부당청구가 10건 있었으면 각 건에 대해 벌금을 따로 내야 하는 것이다. 또 형사처벌로 징역형, 벌금형, 또는 둘 다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징역형 또는 벌금 중 하나만을 받지만 미국은 둘 다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해당 의료기관이 일정기간동안 정부보험을 가진 환자들을 받지 못할 수 있다.
65세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메디케어 가입자이기 때문에 의료기관이 이들을 받지 못하게 되면 큰 시장을 잃게 된다. 이처럼 정부보험에 대한 부당청구관련 벌칙과 징계가 중하기 때문에 미국의 의료기관 중 일부는 의료기관 내부종사자가 정부보험에 청구를 요청했을 때 그 내역에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감사부서를 자체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
또, 미국의 의료기관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환자의 가족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지게 되면 금전적 배상을 해야 한다. 이 금액도 상당해서 우리돈으로 10억원이 넘는 금액을 배상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만약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상주시키지 않아 간호사가 사망한 우리나라의 대형종합병원이 15억을 배상해야 한다면? 아마도 병원은 자진해서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의료진을 키우고 고용할 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문제를 징계와 벌칙 같은 채찍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병원이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적을 위해 운영하는 것을 제어하려면 수가인상과 같은 당근과 더불어 채찍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채찍은 병원의 재정적 상태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런 황당한 일로 환자가 사망하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을 막을 수 있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8-23 15:29 |
[약대·약학] <100> 우울증도 당뇨병과 같은 “질병”입니다.
<100> 우울증도 당뇨병과 같은 “질병”입니다.
“네? 극단적 선택을 하셨다고요?”
교회 집사님 형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집사님의 형님 부부는 한국에 살고 계셨다. 형수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악화되어 두 달 전에 자살시도를 하였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형수는 병원에 일주일 입원하였고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였다. 형수의 자살시도 후 집사님의 형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부인을 돌보는데 전념하였다.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으로 들었었는데 며칠 전 집사님 형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형수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두 달전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어떻게 치료를 받으셨어요?”
“외래 정신과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어.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했나봐 – 자기는 정상이라고. 아직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어서 본인이 정신과에 가는 것을 꺼려했던 것 같아.”
이 안타까운 이야기에서 나는 우울증에 대한 두 가지 이슈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회적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다. 이번 글에서는 사회적 편견에 대해 다루기로 하겠다.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는 “우울증은 정신력이 약해서 생긴다”, “정신과 치료받는 환자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등의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들은 질병이다. 왜냐하면, 정신질환들은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뇌세포들은 뇌의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 서로 긴밀하게 소통한다. 이 때 이들은 여러가지 화학물질을 만들어 이용하는데 이를 신경전달물질 (neurotransmitter)이라고 부른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가바 등이 신경전달물질의 예이다.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에는 이러한 신경전달물질들의 양이 정밀하게 균형을 이루어 조절된다. 정신질환은 이 균형을 잃게 되면 발생한다. 우울증의 경우 주로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양의 균형이 무너져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신질환의 발생과정은 다른 질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1형 당뇨병은 인슐린이라는 물질의 양이 줄어들어 발생한다. 즉,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인슐린 양의 균형이 무너져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 암은 세포의 증식을 조절하는 물질들이 균형을 잃어서 생긴다. 따라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은 당뇨병, 암과 같은 질병인 것이다.
정신질환들과 비정신질환들은 발생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면의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당뇨병, 암과 같은 만성질환들의 원인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지 않듯이 정신질환들도 현재 그 원인이 완전히 확인되어 있지는 않다. 다행인 점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경우, 현재 부작용이 적으면서 치료효과가 우수한 여러 종류의 약들이 나와 있다. 따라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병은 완치되거나 많이 좋아질 수 있다.
모든 질병은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있다 (natural history of a disease). 그리고 이 진행과정에 따라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결과가 있다. 당뇨병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오랜 기간동안 진행되면 대부분 신장질환, 실명, 신경질환 등이 나타나고 심근경색, 뇌경색 등이 발생하여 사망할 수 있다. 암도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진행하여 결국 사망에 이를 확률이 높다. 즉, 당뇨병과 암의 자연적 진행과정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대부분 사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의 자연적 진행과정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이는 자살이다 – 우울증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악화되면 결국 대부분 자살하고 만다.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자연적 진행과정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자살이라는 것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우울증 환자들은 삶과 죽음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진행의 결과로 자살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에 따른 자살을 언론 등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속시키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극단적인 선택”은 자살의 순화된 표현이기는 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은 우울증 환자 본인의 의지로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어 죽음의 책임을 환자에게 돌리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암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망이 암환자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암이라는 질병의 궁극적인 진행결과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을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우울증에 따른 사망”과 같이 표현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2020년 현재 인구 10만명당 약 25명이 자살하는 등 전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우울증 치료율은 전체 환자의 10%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처럼 낮은 치료율의 원인 중 하나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뇨병과 같이 우울증도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우울증은 정신력이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당뇨병의 경우처럼 몸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물질들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치료를 요구하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또 자살은 환자의 선택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진행과정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우울증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환자와 사회가 우울증에 대해서도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병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조기에 진단,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7-25 17:24 |
[약대·약학] <99>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 환자
“어서 오세요.”
GL이 아무 말없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지난 주 초진때처럼 검은색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약들을 모두 가져오신 것 같군요.”
그녀는 약병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네. 이 약들이 제가 복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63세의 GL은 최근 당뇨병이 크게 악화되었다. 2021년초만해도 그녀의 당화혈색소 수치가 6.7%로 당뇨병이 잘 조절되었지만 2022년 2월에 측정한 것은 무려 14.7%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뇨병이 조절되지 않자 그녀의 일차의료제공자는 나에게 당뇨병 치료에 대한 협진을 의뢰했던 것이다.
지난 주 초진때 GL은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가져 오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은 환자들이 클리닉을 방문할 때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모두 가져오도록 한다. 그 이유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진료와 치료를 위해 환자의 치료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환자가 집에서 복용하고 있는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잘 알고 있으면 진료와 치료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GL처럼 잘 모르는 경우에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진료 및 치료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재진때 복용하고 있는 약들을 꼭 가져오도록 요청한다.
GL이 가져온 약들은 다음과 같았다:
메트포민 (metformin) 1000 mg 하루 두 번
엠파글리플로진 (empagliflozin) 10 mg 하루 한 번
프라바스타틴 (pravastatin) 40 mg 하루 한 번
로사탄 (losartan) 50 mg 하루 한 번
약병을 살펴보니 약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약들은 모두 4개월 전에 약국에서 받은 것들이었다.
“이 약들은 모두 3개월치 분인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네요. 혹시, 이 약들에 대해 우려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요.”
GL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GL의 표정을 살펴보니 좀 피곤하고 어두워 보였다. 낮은 복약순응도, 표정, 행동 등을 고려할 때 우울증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은 슬픈 기분 이외에도 잠자는 패턴과 식욕이 변하는 등 다른 증상을 동반한다.
“혹시, 잠은 잘 주무세요?”
“잘 못 잡니다.”
“식욕은 어떠신가요?”
“잘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무게가 5 kg 빠졌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슬프신가요?”
“네.”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GL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3년전, GL은 남편과 사별했다. 자신에게 정성을 다해 잘 해 주었던 남편을 잃은 이후 그녀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식들이라도 가까이 살면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들은 멀리 텍사스 주에 살고 있었다. 주변에 사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기분과 상황을 여러 번 이야기해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해서 그녀는 더 외롭게 느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누구나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에 지남에 따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GL처럼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울감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우울증과 관련된 다른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치료를 필요로 한다.
나는 약사이므로 진단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가정의학과 클리닉 주치의 (attending physician)에게 가서 GL의 상황을 알리고 공식적인 진료를 요청했다. 주치의는 나와 함께 진료실로 와서 기다리고 있던 GL을 만나보았다. 그 동안 나는 다른 진료실에서 다른 환자를 보고 있었다. 곧 주치의가 나를 불렀다.
“약사님, GL에게 우울증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울증 약인 설트랄린 (sertraline)을 처방해서 약국으로 보냈고 인지치료 (cognitive therapy) 의뢰도 넣었습니다. 또, GL의 일차의료제공자도 이를 알고 있어야 하므로 GL이 일차의료제공자를 빠른 시간안에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GL이 그동안 처방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았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약사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복약 순응도가 높지 않다. 기분이 우울하면 자기 자신을 잘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제 시간에 약을 복용하기 위해 필요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GL은 약을 처방대로 복용하지 않았고 당뇨병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우울증이 호전된 다음에야 당뇨병 등의 다른 동반질환의 치료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GL님,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겠지만 우울증은 약물과 인지치료를 통해 호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 선생님이 처방하신 것들을 꼭 따라 주십시요. 그리고, 당뇨병은 우울증이 호전된 다음 본격적으로 같이 치료하기로 합시다.”
*****
6주 뒤, GL이 다시 내 클리닉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GL이 진료실을 들어설 때 나는 이전 두 번의 만남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미소였다. 오늘은 당뇨병 치료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
<필자소개>
-서울대 약학대학, 대학원 졸업
-University of Florida Doctor of Pharmacy-University of Miami Jackson Memorial Hospital Pharmacy Practice Residency
-Universityof Florida Cardiovascular PharmacogenomicsFellowship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임상약학과 교수
2022-06-27 1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