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약학] <21> 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
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군대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낫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자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이라면, 그것도 단순한 복무가 아니라 치열한 교전의 현장이라면 더더욱 가기 꺼려지게 마련이다. 1951년 3월 26일, 미국의 22세 청년 E. J. H.도 그랬다.이 청년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라는 징집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 청년은 순순히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여러모로 반항을 하기 쉬운 나이지만 당시 이 청년이 택했던 방식은 좀 더 극단적이었다. 바로 자살. 입대하기 싫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자살은 좀 심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청년은 한반도에서의 죽음 대신 자택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그는 ‘디콘(d-con)’이라는 약을 먹고 죽기로 했다. 당시 갓 나와서 대대적으로 팔리던 쥐약이었다.그런데 정작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서 화가 났던지, 그는 다음날 다시 그 쥐약을 복용했다. 이번엔 마쉬멜로우처럼 약간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든 다음날 아침 그는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엿새 밤에 걸쳐 대략 공기밥 반 공기에 해당하는 113그램의 쥐약을 먹고도 그는 죽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도 운명이라며 그는 체념하고 입대했다. 4월 4일 이 신병을 상담하던 의사가 이러한 사례를 듣고 이듬해인 1952년 이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해당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도대체 디콘은 어떤 쥐약일까? 성분명 와파린(warfarin)이라는 이 물질은 1940년대 중반 위스콘신 대학의 약화학자 칼 링크(Karl P. Link)라는 사람이 만든 혈액응고억제제다. 개발의 계기가 된 물질은 디쿠마롤이라는 쿠마린 계열의 식물독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 흉년이 겹치자 북부지방에선 소 사료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당시 농부들은 한해 전에 남겨뒀던 사료들도 마지못해 먹이곤 했는데 이런 사료를 먹었던 소들은 어김 없이 출혈로 죽어 나가곤 했다. 이 지역에서 근무하던 링크 교수는 상한 사료에서 원인이 되는 물질을 추출하고 순수하게 화학적으로 합성해 결과를 확인하였다. 이때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병합하고 영국이 전쟁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하던 바로 그 시기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링크 교수도 전쟁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후속 물질을 연구했는데 이때 연구비를 댄 곳이 위스콘신 동문 연구기금(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WARF)이다. 와파린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링크가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만들려 했던 물질이 부상병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지혈제일지, 적군을 암살하는 데 쓰일 출혈제일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든 와파린은 혈액응고억제제였다. 혹시 모른다. 전장에서 살상용으로 쓰일지. 그런데 어느덧 전쟁이 끝나버렸다. 더 이상 용도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던 이 물질, 와파린을 가지고 링크가 찾아 낸 시장이 바로 쥐약이다. 생각해 보면 쥐 때문에 우리 인류가 얼마나 고역을 겪었던가. 보건 위생부터 시작해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까지, 쥐는 우리 인류에게 그닥 반가운 동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링크 교수는 이 물질을 쥐약으로 개발했고 쥐는 와파린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작은 상처에도 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갔다. 그렇게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다 어느덧 군대 가기 싫은 청년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쥐는 잘 죽는데 사람은 왜 안 죽는 걸까?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람은 체내에서 지혈 효과를 담당하는 물질이 많이 있다. 가령 비타민K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 혈액응고제다. 따라서 약간의 와파린이 들어와도 하지만 상쇄해낼 수 있다. 소동물인 쥐는 혈액응고체제가 사람만큼 강력하지 못 하다. 그래서 죽는다. 앞서 언급한 논문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했던 청년에게도 부작용은 있었다. 코피가 났다. 와파린의 효과와 정확하게 부합한다.혈액 응고 억제 효과가 탁월하고 코피 정도의 부작용이 있다면, 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활용 가치가 높은 것 아닐까? 이런 사례가 보고되면서 수술 시의 혈액 응고를 막는다거나 혈전 생성을 억제하기 위해 와파린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수술에 사용될 정도였으니 쥐약으로 쓰던 시절에 비하면 괄목상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 약이 개발된, 내가 아는 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9-24 11:45 |
[약대·약학] <20> 독가스와 항암제(2)
독가스와 항암제(2)이탈리아를 장화처럼 생긴 나라라고 하는데, 그 장화의 발뒤꿈치에 위치한 도시가 바리(Bari)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이탈리아 중심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유럽여행에서 소외되기 일쑤고 심지어 폼페이나 나폴리같은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통해서도 가지 못하는 도시지만,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풍경과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기후가 더해져서 현지인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반도 수복을 위한 연합군의 주요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2일, 바리 항에 수상한 전함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연합군이 점령했던 곳이고 지리적인 특성상 각종 전쟁 물품을 선적하던 장소였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적군의 주요 항구에 들어오는 물품이 무엇이든 간에 본인들에게 도움되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함을 포착하는 순간 나치 폭격기들은 성실하게 폭탄을 투여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 비에 전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전함들은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원통하게도 바다에 가라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선적품이 있다. 바로 질소겨자가스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전장에서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저항력 없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전투 목적으로 사용한 기록은 없다. 생산은 했지만, 사용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대체적으로는 연합국의 화학무기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추론하는 정도다. 어쨌든 냉전시대의 핵무기처럼 당시는 화학무기를 서로 생산만 하고 사용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그런데 연합국의 상징인 미군이 연말에 몰래 질소겨자가스를 전장에 들여오고 있었다. 어쨌든 화학무기는 국제적으로 사용금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동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발생할 것도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적물 중 질소겨자가스와 같은 화학무기가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둔 상태였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해야 해당 선박인 존 하비호의 일부 승무원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나치의 공습과 함께 현장에서 즉사했다. 화학무기는? 안타깝게도 화학무기는 바람을 타고 코앞에 있던 바리항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후 파도를 타고 바리 해안가로 들어온 질소겨자가스까지, 바리항은 폭격 이후 더 큰 참사를 겪어야 했다.이때 바리항의 참사가 커진 것은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화학무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라도 대응을 했을 터인데 현장에서 수습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하긴, 미군이 몰래 독가스 들어오려다 나치한테 걸려서 유출되고 아수라장이 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공표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수습에 더 큰 시간이 걸렸다. 가령 해안가로 들어온 부상병을 치료하려면 의사들이 부상병을 옮겨야 하는데 이때 의사들도 함께 독가스에 노출되었다. 12월의 추위를 이겨내려면 부상병에게 이불을 덮고 따듯하게 해줘야 하는데 이때 질소겨자가스가 피부를 통해 더 빠르게 흡수되었다. 알면 대처를 하는데 모르면 속수무책이다. 당시 2,0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진주만 습격의 2,400명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망자였다. 그리고 진주만 습격과는 다르게 의료진들의 피해가 컸다는 게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그런데 이처럼 질소겨자가스가 대규모로 유출되자 역설적으로 생존자들에 대한 검사 결과도 늘어났다. 비교적 가볍게 노출되어 회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혈액 중 백혈구 수치가 감소한 것도 알 수 있었다. 질소겨자가스의 고유한 특징이긴 했지만 대규모 임상시험에 돌입하기에는 여러모로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바리항의 대참사가 발발하면서 의료계 관계자들은 질소겨자가스에 대해서 한층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후 군의관이자 약물학자였던 알프레드 길만은 또다른 약물학자 루이스 굿맨과 함께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이 백혈병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물질은 질소겨자가스 그 자체였다. 단지 농도를 다르게 해서 약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 연구진은 이후 질소겨자가스를 다른 구조로 변화시킨다. 처음 질소겨자가스가 개발될 당시 질소의 세 번째 치환지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메틸(CH3)기였지만, 어느덧 다양한 치환기를 바꿔가며 약으로서 변신을 거듭해가기 시작했다. 사이클로포스파미드(Cyclophosphamide)와 같은 약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발한 대표적인 약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8-14 09:41 |
[약대·약학] <19> . 독가스와 항암제
독가스와 항암제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서 수상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독일군이 염소(chlorine) 가스의 실린더를 열어버린 것이다. 그전부터 화학무기를 발사하는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규제가 가해지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화학무기를 ‘발사’하지는 않고 공기 중에 풀어놓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동풍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후 바람을 타고 조조군을 물리친 제갈량의 화(火)공처럼, 독일군의 화(化)공은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서쪽의 연합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화학무기가 더욱 강력해진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유황겨자가스(sulfur mustard)가 나오면서다. 이 물질은 가스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녹는점이 14도 정도인 액체다. 이 무시무시한 액체를 분무하는 방식으로 연합군에게 사용하면, 손쓸 방도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가령, 초기에 사용하던 염소 가스는 방독면을 착용하거나 적절한 중화제를 부직포에 덧대는 방식으로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유황겨자가스는 이런 연합군의 전략을 비웃듯이 호흡기 외에 일반적인 피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적 없는 세상을 만난 생태계 외래종마냥 우리 몸을 휘젓고 다녔다.그리고 1년 뒤인 1918년, 전쟁의 막바지에서 유황겨자가스는 다시 질소겨자가스(nitrogen mustard)로 변신한다. 여기에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질소를 잘 다루는 자였던 질소의 왕,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관여한다. 하버는 당시 하버법을 통해 반응성이라고는 1도 없던 공기 중 질소를 반응시켜서 암모니아로 전환하는 방법을 개발한 터였다. 이 암모니아는 반응성이 뛰어나 화학비료에도 쓰고 화약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독가스로도 사용한 것이다. 얼마나 질소가 풍부하면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한 차원 앞선 기술이었음이 분명하다.유황겨자가스에 비해 질소겨자가스가 가지는 차이점은 화학적 다양성이다. 황은 일반적인 화학결합을 두 개까지 하지만, 질소는 세 개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독가스의 구조를 다양하게 할 수 있고 독성도 극대화할 수 있다. 물론 초기에 사용하던 질소겨자가스는 질소가 가지는 추가적인 치환기를 화학적으로 가장 간단한 구조인 메틸(CH3)기로 제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한 살상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에 졌다. 독가스로 뒤엎을 수 있는 전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 등을 통해 전쟁을 수습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의약품 개발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드러난다. 겨자가스에 노출된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백혈구의 감소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크롬바르(E. B. Krumbhaar) 대령은 전쟁 당시 겨자가스 피해 군인의 백혈구 수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음을 종전 후인 1919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백혈구가 줄어들면 안 좋은 것 아닌가? 백혈구가 너무 많아도 위험하다. 비정상적으로 백혈구가 늘어나 손쓸 새도 없이 죽는 병을 백혈병이라 부른다. 암이다. 대부분의 암은 조직을 제거해 버리는 게 최선이다. 꼭 원인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라내 버리면 되겠지만 그럴 수 없는 암도 있다. 백혈병과 같은 혈액암이다. 피를 뽑아낼 수는 없으므로 수술이 불가능하다. 초기부터 학자들이 수많은 암 중에도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했던 이유다. 또 백혈병 치료제는 효과를 관찰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절개를 통해 암조직을 관찰하는 번거로운 작업 없이 그저 채혈해서 백혈구 수치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치료제가 잘 작용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다르게, 백혈구 수치를 줄이는 물질 자체가 별로 없었다. 고작 찾아낸 물질이 벤젠이다. 지금은 대표적인 발암물질이지만 당시의 의학 수준은 이런 물질에라도 기대야 할 정도의 처참한 수준이었다. 벤젠이 싫다면? 말라리아를 감염시켜 백혈구 수치를 줄이는 방법도 진지하게 연구되었다. 참고로 말라리아 감염으로 매독을 치료한 사람은 노벨상도 받았다. 말라리아 원충이 무섭다면? 수혈도 가능했다. 단, 일란성 쌍둥이만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방사선 치료도 있긴 했지만, 역시 지금처럼 최첨단 장비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여러모로 답이 없던 시절에 독가스가 백혈구 수치를 낮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의약품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후속 단계로 이어지기에 겨자가스는 어쨌든 독가스였다. 피해자들이 버젓이 눈뜨고 지켜보던 바로 그 물질, 독가스의 대명사가 겨자가스였다.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론을 반전시킬 거대한 한 방이 필요했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7-19 09:49 |
[약대·약학] <18> 아타브린을 둘러싼 신경전
아타브린을 둘러싼 신경전제2차 세계대전은 지구상 대부분의 영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하늘에선 폭격기와 전투기가, 땅에선 탱크와 보병이, 바다에선 군함이, 그 밑에선 잠수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열대우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직 순수하게 전략적 목표만을 위해 몰려드는 군인들에게 그 지역의 기후는 춥건 덥건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기승을 부린 존재도 있다. 말라리아다.말라리아는 온대지방에서도 유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 빈발하는 지역은 열대나 아열대지역이다. 덥고 습한 이 지역에서 모기는 말라리아 유충을 품고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군인들의 피를 빨며 물리적인 반대급부로 말라리아 유충을 선사했다. 총, 칼, 화약을 대비하던 군인들이 예상치 못한 자연의 습격에 당황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군인들도 대처법을 찾았다. 말라리아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알려진 질병이었고 이에 대한 치료법도 경험적으로 나와 있었다. 대표적인 방법이 신코나(키나) 나무껍질 추출액이었다. 근대 화학이 발전하면서는 이 추출액에서 실제 약효를 띄는 성분을 분리해서 퀴닌이라는 이름으로 복용하고 있었다. 쓰디쓴 물질이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사람들은 퀴닌을 술에 타서 먹거나 토닉 워터와 함께 복용하곤 했다.문제는 퀴닌의 보급이었다. 남미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생산되던 신코나 나무의 종자를 밀반출해서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재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가긴 어려웠다. 보다 효과적으로 이 물질을 생산·보급하는 방법은 없을까? 화학자들이 다시 힘을 낼 때였다.퀴닌은 식물이 생산하는 화합물이었다. 구조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복잡한 구조 모두가 실제 약효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간단하지만 비슷한 구조를 배열하면서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코나 나무가 아니라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아는가?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다.1930년대 독일의 화학자들은 퀴닌의 분자 구조를 기반으로 보다 만들기 쉽고 간단한,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구조적으로 유사한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도 개발도상국에서 널리 사용하는 클로로퀸이나 아타브린이 여기에 해당한다. 드디어 방법이 생겼다. 만들고 싶다고 이렇게 뚝딱 만들어내는 걸 보면 사람의 힘도 대단하다.그런데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런 물질들은 연합국과 추축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게 된다. 특허 문제는 없었을까?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특허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싸울 이유가 많았다. 독일에서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했다. 자신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물질을 그냥 쓰는 것이 싫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어느덧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아타브린을 복용하면 불임이 된다는 식의 소문이었다. 순진한 미국의 병사들은 이 헛소문에 낚여서 열대지역에서도 아타브린의 복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이어졌고, 이는 다시 해당 부대의 말라리아 창궐 및 전투력 급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런 흑색선전을 차단하기 위해 미군 부대는 다시 군인들을 교육시켜야만 했다.말라리아의 폐해는 현재 진행형이다. 연간 2억 회 이상 감염이 일어나고 6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질병이 말라리아다. 빌 게이츠 등의 자산가나 거액을 후원하고 각국 정부가 연구비를 편성해 지구상에서 말라리아를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별다른 진척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모기는 인류의 천적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말라리아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연적으로 발병하는 질환이다. 매년 300~400명 가량 감염되곤 했는데 해외 유입이 아니라 순수하게 국내에서 감염된다는 사실이 무섭다. 그리고 코로나 엔데믹을 맞은 2023년 국내 말라리아 환자가 무려 700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더 무섭다. 그래도 마냥 희망은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말라리아 발병 건수는 1만5천 건을 상회했다. 공중보건이 개선되고 약물을 개발하며 어느 정도는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해도 된다. 이런 약물 개발의 이면에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6-11 11:06 |
[약대·약학] <17> 기적의 생존자
기적의 생존자독일군이 전면전을 개시해 프랑스를 침범하고 전격전을 앞세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을 몰아붙인 1940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전황은 이미 결정이 났다. 앞뒤로 고립당한 연합군은 밀리고 밀려 도버해협까지 후퇴했고 이제 곧 독일군의 기갑사단이 밀어붙이면 항복하는 것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이다. 등 뒤에는 바다가, 눈앞에는 탱크부대가 도사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 어떠한 엄폐물도 전술도 쓸 수 없던 상황이었다.그런데 돌연 독일군의 진격이 멈췄다. 훗날 수많은 군사 전문가들의 머리를 쥐어 짜게 만드는 미스테리한 결정이 베를린의 수뇌부에서 날아들었고, 현장 지휘관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탱크는 단 한 대도 진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대치 상태가 이어진 열흘 간 영국은 쓸 수 있는 배는 모조리 징발해 도버해협을 건넜고 패퇴한 군인 30여만 명을 안전히 후퇴시킬 수 있었다. 이후 이 군인들의 대부분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전장에 복귀하였다. 어쩌면 전쟁의 양상이 초반에 결정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기를 놓쳐버린 이 사건을 덩케르크 탈출사건 또는 덩케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독일군이 노려보기만 하고 있던 7일째인 5월 31일, 프랑스의 한 전함도 자국 군인을 후송하기 위해 접안했다. 하지만, 패잔병을 수습해 작전 지역을 벗어나던 이 전함은 불행히도 독일 잠수함에 발각되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적함을 그냥 보내는 배는 없다. 독일 잠수함도 프랑스 전함을 요격했고, 피격당한 전함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다 밑으로 가라 앉았다. 간절하게 탈출을 원했던 패잔병이나 잠수함의 승조원들 대부분이 죽었음도 당연한 수순이다.그런 면에서 헨리 라보리는 운이 좋았다. 우선 전함이 가라앉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라보리 외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떠다니는 것을 찾아서 싸우다가 자멸하기 일쑤였다. 라보리는 이런 다툼과 한발 떨어져 있으려 했다. 5월 말의 차가운 밤바다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구조선을 기다렸다. 어차피 차분히 기다리는 것 외에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명상에 잠겨서 기적을 기다렸다.영국 구조선이 다가온 것은 새벽이었다. 라보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구조선으로 올라갔고 그 직후 탈진했다. 이후 구조선에서 기력을 회복한 그는 살아남았음에 감사하며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는 외과의사였다.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며 그는 수술 성공률을 높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성공률을 높일 수 있을까? 왜 수술이 실패할까?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면 수술이 더 잘 될 것으로 보았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그가 찾았던 해법은 본인의경험이었다. 덩케르크 탈출 시에 그는 차가운 밤바다에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쩌면 체온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그는 환자의 체온을 낮추기 위한 방법부터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본인의 경험은 탈출 시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수술대 위의 환자에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수술 부위를 차갑게 하는 형태의 처치로는 환자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라보리는 이제 온도보다는 약물에 주목했다. 당시는 항히스타민제가 개발되어 알러지 환자들을 무척이나 졸립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라보리는 초기 항히스타민제를 이용해 외과 수술에 사용했다. 혹시 아는가? 졸리면 진정될지. 그리고 진정되면 수술 성공률이 올라갈지.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외과 수술과 진정제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신기한 사례가 있었다. 조현병 환자에게 외과 수술 목적으로 항히스타민제를 투여했을 때 조현병 환자의 증상이 개선된 것이다.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약물과 같은 물질로 조절할 수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라보리는 분명히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라보리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정신병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관련 학계에서 이슈가 된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외과의사가 개발한 정신병 치료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검증을 이어가고 결과가 재현성 있게 나타나자 이 물질은 이후 그래도 정신병 치료제가 된다. 클로르프로마진이 탄생한 순간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5-24 10:05 |
[약대·약학] <16> 마약류 각성제가 지배한 전쟁
마약류 각성제가 지배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자 이후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을 겪었던 독일은 어떻게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흐름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초반에 프랑스를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을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4년간 참호 밖으로 제대로 전진하지도 못한 채 패했던 프랑스를 독일이 이긴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보통 전격전으로 대표되는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전황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였다. 지리한 참호전으로 가기 전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치고 들어가는 전술이다. 적군이 뒤를 둘러싸면 전멸당할 수도 있지만, 이 위험을 넘어서는 속도로 적군 진영을 전진하며 혼란에 빠뜨리는 이 전격전은 전쟁 초기 느긋하게 대응하려뎐 프랑스군을 궤멸시키는 주요 전술이었다. 탱크의 질도 양도 부족했던 패전국 독일은 어느덧 승전국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술이 이래서 중요하다.그러면 독일군의 전격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체계적인 훈련과 시스템 정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그런데 여기에 마약류 각성제도 한 몫 한다. 당시 독일군이 애용하던 각성제는 퍼비핀(Pervitin)이란 이름의 약이었다. 전쟁 초기 장교들이 직접 나눠주며 복용을 권장하던 이 약의 성분은 메스암페타민. 비슷한 시기 일본군이 필로폰이라는 상품명으로 애용하던 바로 그 물질이다. 일본이 필로폰을 개발한 시기, 대륙 반대편 독일의 화학자는 같은 물질을 퍼비틴이라는 이름의 각성제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리고 군에 납품되어 전쟁의 초반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메스암페타민은 일본인 약화학자가 생약재인 마황을 연구하던 와중에 개발한 물질이다. 이후 이 물질에 집중력과 체력을 일시적이긴 하지만 올려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일본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였다. 이 제품은 심지어 일본 정부도 권장하던 물질이다. 전투원 뿐 아니라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사람들부터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까지 일시적인 생산력 향상을 느끼며 만끽하던 물질이다. 도파민 증가로 인한 신경계의 과잉 활성화 때문이다. 물론 이런 효과는 오래 지속하지 못 한다. 우리 몸은 도파민 과잉을 인지하고 신경세포의 수를 줄이거나 수용체를 조절하는 형태로 넘쳐나는 도파민에 적응해 간다. 따라서 같은 양의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해도 처음 느꼈던 그 쾌감과 활력을 느끼지는 못 한다. 결국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내성이라고 부른다.약물 내성과 중독에 빠진 군대가 강군일리는 없다. 독일군도 이를 인지하고 2년여가 지나자 퍼비틴을 금지시켰다. 잘 보급되던 각성제가 어느날 갑자기 공급이 끊겼다.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군인들이 더욱 더 공황상태에 빠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조금 늦게 끊었다. 전쟁 중 대량생산했던 필로폰이 패전과 함께 민간인에 풀리고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951년 마약법을 제정해 본격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일본인 역시 쉽사리 끊지 못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필로폰은 지금도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물질이다.마약류 각성제에 힘을 빌린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다. 연합군이 애용했던 물질은 암페타민이고, 이를 주로 사용했던 사람들은 파일럿이었다. 잠깐의 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약간의 타격 만으로도 추락해 즉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파일럿들에게 각성제는 필수품이었다. 독일군이 퍼비틴에 취해 출격한 이상 연합군도 약물로 무장하는 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전쟁이라는 극단 속에서 상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이후 마약류 각성제는 지금까지도 살아 나았다. 승전국인 연합국에서 암페타민은 의사 처방전 하에서 ADHD 치료제로 승인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합법적 용도 외에 불법적인 용도로도 여전히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역시 전쟁이다.2010년대 IS가 이슬람에서 전쟁을 일으키던 당시 IS는 조직원들에게 ‘캡타곤’이라는 약물을 지급했다. 캡타곤은 어떤 약일까? 암페타민과 카페인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킨 물질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암페타민을 커피에 타서 마신다고 생각하면 조금 비슷하다. 각성제와 각성제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전투를 앞두고서 몇 알을 먹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금단의 약물까지 꺼낸 상황이 야속하기 짝이 없다.IS가 패퇴한 지금도 캡타곤은 사용되고 있다. 2023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다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보복 공격한 전쟁에서 캡타곤이 다시 발견되었다. 이쯤 되면 전쟁에서 이기는 게 사람인지 약물인지 헷갈릴 지경이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4-15 14:29 |
[약대·약학] <15> 코르티손에 낚이다.
신장은 우리 몸의 변화를 가장 잘 인지하는 조직이다. 혈류의 흐름을 감지하며 혈압을 조절하기도 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재흡수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도 생산해서 직접적으로 우리 몸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아드레날린이나 레닌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마법의 스테로이드, 코르티손도 여기에 해당한다.코르티손은 처음 추출될 때부터 각광받았던 물질이다. 소의 신장 위 부신이란 조직에서 나온 추출액은 ‘코르틴(cortin)’이란 상품명으로 시판되었다. 애디슨씨 병 치료제 용도였는데 이 병이 코르티손 부족으로 인해 발병하는 것을 감안하면 적절한 치료법이라 볼 수 있다. 직전까지는 불치병이었던 애디슨씨 병의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코르틴은 마법의 스테로이드로 각광받았다. 이에 따라 코르티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코르티손이 소의 부신에서 나오기 하지만 어쨌든 화합물이다. 소의 고환에서 나오던 테스토스테론을 콜레스테롤 유도체에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들이 1930년대의 과학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연이어 코르티손도 화학적으로 합성하려 했는데 테스토스테론에 비해 코르티손의 구조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만큼 만들기도 어려웠다. 테스토스테론으로 대박을 쳤던 당대의 과학자들은 코르티손의 난해함에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오히려 소의 부신에서 추출하는 방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축장에서 버려지는 장기도 많던 시절이다. 전세계적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더 현실성 있는 대안일 수도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1941년 미국 정보부는 한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나치가 아르헨티나에서 소의 부신을 대량으로 확보해 본국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정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부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진실은 아니다. 다각적으로 분석해 정확한 정보를 가려내고 규합해서 실체적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정보부의 역할이다. 하지만 연이어서 들어오는 공작원들의 정보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나치가 부신 추출물을 이용해 코르티손을 대량생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슈퍼 파일럿을 양산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파일럿들이 보다 높은 고도에서 활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폭격기가 전투기의 활동 고도를 넘어서서 무차별 폭격한다면? 이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산소 농도가 낮아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만약 코르티손이란 마법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이를 현실화한다면? 제공권을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연합국 수뇌부에게 이러한 정보는 위험하고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연합국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 코르티손을 얻는단 말인가? 현실적인 방법인 소의 부신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나치가 다 수거해 갔는데? 미국의 과학자들인 다시 화학적 합성법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원료가 될 콜레스테롤 유도체 등에서도 확보가 수월했다. 미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제약회사까지 참여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에드웨드 켄달 같은 전문가들은 그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조건에서 화합물 분리 및 합성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원천기술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그런데 정작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했다. 연합군이 확인한 결과 나치 정권은 코르티손을 이용해 슈퍼 파일럿을 양산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거짓 정보에 제대로 놀아난 미국 정보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코르티손 관련 연구도 접어야만 할까?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르티손은 그 자체로 마법의 약이었고 경위야 어쨌든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진보를 이뤄낸 상태였다. 미국 정부의 관심이 나치에서 공산주의자로 옮겨가며 관심이 차갑게 식어버린 이 시기, 제약회사가 본격적으로 코르티손 개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이후 머크와 같은 제약회사는 코르티손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수준으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36단계의 합성법을 개발해 코르티손을 합성해 낸 것이다. 이후 이렇게 개발된 코르티손 9그램은 애디슨씨 병을 넘어서 관절염 치료 등 보다 광범위한 질환에 사용된다. 속고 속이는 전쟁의 흐름 속에서 뜻하지 않게 개발된 코르티손이지만 어쨌든 우리 인류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의약품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3-13 09:17 |
[약대·약학] <14>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
미국으로 건너간 페니실린‘페니실린’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보통 ‘알렉산더 플레밍’이고 실제로 유례없는 기적 끝에 페니실린을 발견한 사람이긴 하지만 개발은 이야기가 다르다. 플레밍이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물질 페니실린에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은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 노만 히틀리 등으로 대표되는 옥스퍼드 병원의 연구진들이다.에른스트 체인은 유대계 화학자였다. 나치가 집권한 후 유대인이 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며 대거 축출되자 영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그가 영국에서 찾고자 하는 물질은 항생제. 독일에서 넘어오기 직전 들었던 프론토실과 같은 항생제를 영국에서도 만들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론토실은 시판 직후 설파제에 영광의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고, 그 설파제 역시 잦은 내성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때에 설파제를 능가하는 항생제를 만들어낸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옥스퍼드 병원 내과장이던 하워드 플로리의 지휘 아래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물질 어디 없을까’하고 관련 문헌을 공부하던 체인의 눈에 플레밍의 논문이 들어왔다.플레밍도 나름 페니실린을 정제한다고 했고 병리학자임을 고려하면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화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플레밍의 연구는 허점이 많았다. 어쩌면 플레밍의 동물실험이 한계를 보였던 이유도 이처럼 화합물의 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체인은 관련 실험을 독자적으로 진행했고 플레밍의 연구 수준보다 높은 순도로 페니실린을 정제할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동물실험을 진행했을 때, 기존의 항생제와는 비교도 안 될 항균 활성이 나오는 것도 관찰할 수 있었다. 베일에 가려진 페니실린이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세상에 소개된 순간이다.이후 플로리의 연구팀은 인력을 보강하여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에 나섰다. 배양 접시의 수를 늘리고 푸른곰팡이가 최대한 편안하게 증식할 수 있도록 온도, 습도, 양분 등의 조건을 최적화했다. 일용직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여 생산량을 늘렸고, 전문 화학자를 섭외해 순도를 높이는 노력도 병행하였다. 그렇게 1941년 2월 12일 사람을 대상으로 페니실린을 투여할 수 있었다. 대상자는 패혈증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전직 경찰관이었다.페니실린의 항균 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양이 모자랐다. 이 환자는 5일여 간 기적처럼 증상이 개선됐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부족해지면서 투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환자의 소변에서 페니실린을 다시 확보하려는 시도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총알이 떨어져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군인처럼 죽었다.한 명의 환자를 구하지 못한 약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획기적으로 생산 시설을 확장하지 않는 한 페니실린은 그럭저럭 좋은 논문 한 편으로 끝나버릴 연구 주제였다. 하지만 1941년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문이 아닌 현실에 쓸 수 있는 치료제였다. 따라서 옥스퍼드의 연구진은 미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밤 쏟아지는 나치 공습기의 공습 하에서는 지속적 연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미국에서 페니실린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관련 연구진이 모여들어 푸른곰팡이의 페니실린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연구했다. 푸른곰팡이 표본을 고르고, 엑스선으로 돌연변이를 만들어 수득률을 높이기도 했다. 배양액에 옥수수 추출물을 넣어서 생산효율이 올라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배양접시를 벗어나 배양탱크를 적용한 것이 결정적 변화였다. 당시 미국 최고의 발효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원료 생산업자 화이자사는 자신들의 구연산 생산 기술을 페니실린에 적용해 발효 탱크 차원에서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942년 11월 미국 보스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일한 출입구인 회전문에 사람들이 탈출을 위해 몰려들면서 회전문이 멈추고, 피해 규모가 더 커진 이 사건은 이후 멈춰버린 회전문 앞에서 대량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5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이슈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페니실린의 개발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진다. 당시 중증 화상환자의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당시 극비로 개발중이던 페니실린은 시의 적절하게 생산되어 보스턴 지역의 사망자를 줄이는데 일조하였다.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후반 페니실린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페니실린이 이토록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이렇게 개발된 의약품이 전투 중 부상병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전쟁과 약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약품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2-15 17:43 |
[약대·약학] <13> 페니실린이란 기적
알렉산더 플레밍은 1차 대전 참전 용사다.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후방에서 부상병들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법. 끝없이 밀려오는 부상병 속에서 2차 감염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보다도 감염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죽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는 전쟁 후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실마리가 잡힌 건 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인 1923년. 실험 도중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좀 더 면밀히 연구해보니 눈물 외에 콧물 등의 다른 체액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균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 물질을 리소자임(lysozyme)이라 명명하고 학회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학회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리소자임으로 죽일 수 없는 균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죽일 수 있는 균도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균이 대부분이었다. 학술논문으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상업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꺾일 법도 했지만 플레밍은 연구를 이어갔다. 실험방법은 간단하다. 배양접시에 균을 키우고 가능성 있는 물질을 떨어뜨려 그 주위로 균이 자라지 않으면 항균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실험방법이 간단할수록 결과도 좋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물질을 테스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약물학자들이 고민하는 빠르고 정확한 약물 효능 평가 시스템 구축을 위해 플레밍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리소자임을 찾아내고 다시 5년이 흐른 1928년 8월, 플레밍은 지친 몸을 이끌고 휴가를 떠나려 했다. 목적지는 고향인 에든버러. 언덕 위 웅장한 성채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에든버러는 지금도 런던에서 가려면 운전으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이다. 영국을 종단하는 이 여행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1928년에도 마찬가지. 플레밍이 계획한 여행은 무려 2주였다. 열심히 일하고 긴 휴가를 떠나는 유럽인답다.그런데 정작 플레밍은 배양접시 뚜껑을 열어 놓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기차 시간에 늦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허둥지둥 나간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실험실 창문도 열어놓고 가버렸다. 꼼꼼한 것으로 유명한 플레밍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틈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푸른곰팡이가 날아들었다. 플레밍 실험실의 아래층에 있던 미생물 배양실에서 푸른곰팡이가 날아와 실수로 열려있던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실수로 열려있던 배양접시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무더웠던 런던의 8월 속에서 2주일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배양접시 속 다른 균들을 무참히 죽였다.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플레밍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실험 결과가 떡하니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은 간다. 플레밍은 이런 기적을 허투루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양접시에 날아든 물질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타진했고 범인의 흔적을 찾는 형사처럼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날아온 푸른곰팡이를 찾아냈다. 유레카.이제 다음 단계는 푸른곰팡이에서 어떤 물질이 실제 항균효과를 띄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감염증을 치료하겠다고 푸른곰팡이를 갈아마시거나 상처에 바르는 용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꿈에 찾던 물질을 눈 앞에 두고서, 플레밍이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잘만 한다면 1910년 마법의 탄환이란 찬사를 들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소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플레밍의 후속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푸른곰팡이가 만들어 낸 물질을 분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리는커녕 물질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이 물질이 단백질인지 작은 화합물인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정제가 안 됐으므로 동물실험에서 보이는 효과도 미미했다. 사람에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플레밍은 이듬해에 논문을 하나 발표하는 것으로 연구를 마무리했다. 플레밍의 연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한계는 화학자의 부재였다. 페니실린이 화합물인 만큼 정제와 개발을 위해서는 화학자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작 플레밍은 화학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렇다면 공동연구를 통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하건만 무슨 이유에선지 플레밍은 이러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페니실린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화학자와의 협력을 통해 진일보한 항생제 프론토실을 선보인 독일 연구진들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페니실린은 다시 돌아온다. 수많은 화학자의 도움과 함께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4-01-10 11:04 |
[약대·약학] <12> 총알과 수면제
12. 총알과 수면제코르다이트란 물질이 있다. 영국에서 19세기 후반에 만든 이 물질은 폭발력이 강해 화약으로 인기가 높았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했다.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 바세린을 아세톤에 녹여서 적당하게 섞어주기만 하면 됐다. 만들기도 쉽고 성능도 좋은 이 화약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주요 화약으로 사용하게 된다.문제는 아세톤의 공급이었다. 아세톤은 당시 독일에서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독일이 이 원료를 전략물자로 규정해 영국에 팔지 않게 된 것이다. 영국에 아세톤이 부족해진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시간이 지나며 코르다이트 마저도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총알을 아껴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기관총 사수에게 총알을 세어 가면서 발사하라고 하면 과연 참호를 지켜낼 수 있을까? 영국은 아세톤으로 위기를 맞았다.이때 영국이 자체적으로 아세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발효였다. 차임 바이츠만이라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생화학자가 그전에 기막힌 방법을 개발해 놓은 것이었다. 바이츠만이 미래라도 내다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해 설탕의 발효를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에탄올과 아세톤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합성고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괜찮은 물질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특허를 신청했고 이후 전쟁 중 위기를 맞은 영국 정부가 아세톤에 주목해 이 과정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어쨌든 영국군은 더 이상 총알을 걱정하지 않고 전장에서 기관총을 난사할 수 있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당시 영국에서 바이츠만의 공법으로 생산한 아세톤의 양은 연간 3만톤에 이른다고 하니 그 중요함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바이츠만은 이때 영국 정부의 눈에 들어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냈고 이후 이 선언은 이스라엘 독립의 주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바이츠만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여러모로 전설적인 이야기다.그런데 의약품 개발과 관련해서도 바이츠만 공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만들어낸 공법에 따라 설탕을 발효시키면 에탄올과 아세톤 외에 부탄올도 만들어진다. 심지어 부탄올이 생성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만들어낸 부탄올을 어디다 써야 할까? 아세톤이야 전쟁 때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었고 에탄올도 나름의 용도가 있지만 부탄올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길어지며 부탄올은 처치 곤란한 물질로 공장에 쌓여가고 있었다.제약회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항상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던 제약회사 연구진은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출발물질을 언제나 주시하곤 한다. 부탄올도 그랬다. 영국의 제약회사는 부탄올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새로운 의약품 골격에 연결해서 더 뛰어난 물질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물질이 부토바비탈이다.바비탈은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개발해 판매한 수면진정제다. 이후 페노바비탈이 나오면서 그 강력한 수면효과를 앞세워 수면제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나름의 불편함도 있었다. 작용시간이 길어서 낮에도 졸립다거나, 본인이 약을 먹었는지 몰라서 다시 먹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바비탈계 수면제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늘어나던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페노바비탈의 단점을 개선하는 물질이 필요한 시기가 1910년대 후반이었다.영국의 제약회사는 페노바비탈의 구조를 바꿔 부토바비탈을 합성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페닐기 대신 값싼 부탄올을 도입한 물질이다. 이 물질은 페노바비탈보다 작용시간이 짧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 의약품으로 넘어가는 출발이 되었다. 어쨌든 전쟁 때 부랴부랴 만든 물질 아닌가. 전쟁이 끝난 후 보다 체계적으로 검증을 거치는 일이 당연한 수순이었다.부토바비탈은 이후 탄소가 하나 더 늘어나 펜토바비탈이 되었다. 바비탈계 수면제 중 그나마 페노바비탈의 명성에 비빌 수 있는 물질이 펜토바비탈이다. 그리고 펜토바비탈은 다시 정맥마취제인 소듐 펜토탈로 바뀌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바이츠만은 고무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지만 정작 그의 연구가 전혀 상관없는 의약품 개발까지 영향 미친 것을 보면 세상 일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12-07 10:27 |
[약대·약학] <11> 공기의 연금술사, 화학 무기를 만들다.
전쟁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군수 산업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은 생산 행위가 아니다. 끝없는 소모 행위다. 적절한 보급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게 군대다. 그 옛날 보급선이 끊겨 어이없게 패한 삼국지연의 속 원소의 군대부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그 예는 숱하게 많다.전쟁 속 수많은 소모품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화약과 식량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전쟁이 총력전으로 변해 가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화약과 식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이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화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당시 사람들이 찾은 해법은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국경을 마주한 지역에 광대하게 존재했던 질산염이었다. 수십만 년 동안 그 지역 새들이 쌓아놓은 똥이 정체였건만 그 긴 시간 지나며 완전히 말라붙어 최고의 화약 원료이자 비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던 이 미지의 땅에 어느덧 사람들이 몰려와서 새똥을 캐기 시작했고 이 세 나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이 전쟁을 19세기 태평양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하지만 독일로서는 이 상황이 그저 남의 일이었다. 20세기 초반 독일이 이 새똥, 즉 구아노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기에, 그리고 그 구아노 자체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독일의 화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공기 중의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서 암모니아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암모니아를 질산염으로 산화시키는 방법, 오스트발트 공정법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따라서 암모니아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게 될까?공기 중의 질소 가스는 대기의 79%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풍부하지만 이게 풍부한 이유는 특별히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질소 원자가 단일도 아니고, 이중도 아닌 삼중 결합으로 존재하기에 이 결합을 끊어서 수소와 결합시켜 예쁘게 암모니아로 만드는 일은 상상속으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고 또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프리츠 하버도 그 중의 하나였다.하버는 불가능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온도나 압력을 조절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방법을 추가했다. 바로 촉매였다. 촉매는 일반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물질이다. 당시 하버는 수많은 금속을 테스트하면서 오스뮴 촉매 존재하에서 드디어 원하던 반응이 진행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하버의 암모니아 생산법은 고온·고압 반응의 전문가 보슈의 도움을 받아 하버-보슈법으로 진화한다. 촉매도 구하기 어려운 오스뮴 대신에 산화철 등으로 구성된 값싼 촉매를 사용해 효율을 높인다. 그렇게 라인강 유역에서는 귀하디 귀한 질산염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질산염은 화약으로, 비료로 사용되어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그런데 하버는 이후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전쟁 승리를 위해 화약과 비료를 넘어 독가스까지 연구한 것이다. 화약과 비료는 전쟁 후에도 인류를 위해 사용하지만 독가스는 다르다. 그런데 하버는 전혀 고민 없이 독가스를 만들어 전장에 살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화학무기는 이렇게 개발되었다.이후 독일이 패전하고 나치가 집권하면서 하버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독일을 위해 헌신하고 노벨상도 받은 상징적인 인물이었건만 하버도 어쨌든 유태인이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하버는 조국에 버림 받은 채 영국으로 망명을 하려 하지만 화학무기 제조 경력을 문제 삼아 영국에서는 망명을 거부한다. 이후 하버는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하버가 실각하고 나서 독일은 달라졌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독일군은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전장의 비대칭 전력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질소 겨자가스와 같은 악명높은 화학무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질소 겨자가스에 노출된 사람들의 백혈구 수치가 상당히 낮아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우연히 밝혀진 이런 사실들로 인해 질소 겨자가스는 백혈병 치료제로 연구되었고 이후 구조 변화를 거쳐서 지금까지도 항암제로 사용하고 있다. 하버가 뿌린 씨앗이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의약품이 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10-27 11:09 |
[약대·약학] <10>. 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
영국 수상을 구한 독일산 항생제게르하르트 도마크는 편지를 교환했다. 같은 편지를 열다섯 장이나 써서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진 것은 열다섯 명의 전우 중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유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도마크와 전우들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편지를 쓰고 나눠 가졌다.도마크가 1914년 10월 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제1차 이프르 전투에 참가한 것은 그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넘치는 애국심으로 다니던 대학교도 한 학기만 마치고 입대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부대인 척탄병으로 배치되었다. 척탄병은 지금으로 치면 수류탄을 던지는 부대다. 다만 지금의 비교적 가벼운 수류탄과는 달리 크고 무거워 멀리 던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적군 가까이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던지고 나서도 적군에게 노출되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당시 척탄병 연대는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부대였고, 그만큼 자부심 높은 부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연대에 소년병을 배치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도마크의 부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세 명이다. 열두 명은 적군 근처도 못 가본 채 사살되었고 도마크 역시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총을 맞았다. 머리에. 그럼에도 살아 남았다. 그가 쓰고 있던 전투모에 총알이 정통으로 맞았고 전투모가 튕겨져 날아갔지만 도마크는 무사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해 치료를 받았다. 이후 이 억세게 운 좋은 학도병은 드디어 조금 더 편한 보직을 받게 된다. 바로 의무병이다. 한 학기이긴 했으나 그가 대학 다니다 온 점을 감안한 배려였다. 그는 의대생이었다.고작 한 학기 수업 들은 의대생이 의무병으로서 얼마나 활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도마크는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무병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감염병으로 죽는가를 알게 되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많았다. 그리고 절단이든 절개든 성공적으로 봉합을 마치고 회복하는 환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일주일 안에 수술 부위 감염증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수술 부위가 빨갛게 변하고 기포가 차오르는 이 증상을 가스 괴저라고 불렀다. 수술 중 감염으로 인한 증상이었다. 전방의 참호나 후방의 병원이나 도마크에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이 당시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도마크는 전쟁이 끝난 후 의대 공부를 마치고 연구직을 택했다. 그는 바이엘사 연구팀에 합류해 이후 연구팀을 이끌었다. 화학자와 약물학자 등 전문가들이 뭉친 이 연구팀은 천 개가 넘는 화합물을 만들며 일일이 활성 검색을 하였다. 이들은 10년 전부터 연구하던 화학 염료를 기반으로 활성을 개선해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10년간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활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1932년 겨울, 프론토실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유의 붉은 색을 띄는 이 물질은 1935년 시판되자마자 기적의 항생제로 찬사를 받으며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그런데 정작 10여 년의 연구 끝에 나온 이 물질은 그다지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연구팀이 프론토실의 실제 활성 골격인 설파닐아마이드를 곧바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프론토실은 우리 몸 안에 들어가 활성 성분인 설파닐아마이드로 전환되어 세균을 죽인다. 설파닐아마이드는 비교적 간단한 물질로서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생산된 물질이다. 구조가 간단하다 보니 화학적으로 수식해 유도체를 만들기도 쉬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들은 대부분 항균활성이 뛰어났고 사람들은 이 물질들을 통틀어 설파계 항생제라고 불렀다.설파계 항생제는 이후 윈스턴 처칠이 폐렴으로 죽을 뻔 했을 때 복용 후 무사히 회복하면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게 된다. 독일에서 개발한 프론토실이 돌고 돌아 설파계 항생제로 진화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이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지휘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도 도마크로서는 전쟁이 끝나고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도 하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9-15 10:26 |
[약대·약학] <9> 스페인 독감의 기원을 찾아서
1918년부터 2년간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던 스페인 독감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감염자들이 속출하면서 집단 면역이 형성되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그래도 1919년 이후로 스페인 독감이 다시 발발한 적은 없다. 다행스러운 일이다.그런데 이 다행스러운 전개는 지금에서야 아는 사실이지, 당시로서는 가령 1930년이나 40년대에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스페인 독감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이 알아서 감염시켰고 알아서 거둬들였다. 그 자연이 변덕을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1918년의 악몽을 겪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스페인 독감의 재현을 막아야만 했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스페인 독감을 막기 위해서는 원인체를 알아야 했다. 다행히도 1930년대를 지나며 스페인 독감의 원인체가 바이러스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하나도 아니고 어느 바이러스가 창궐할지 예측하는 일은 지금도 어렵다. 매번 독감 주사를 맞았음에도 독감에 걸려서 불평하는 이유지만 어쩔 수 없다. 자연을 이기기는 어려운 법이다.그래도 모든 독감을 예방하자는 것도 아니고, 스페인 독감의 원인 바이러스를 규명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1951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요한 훌틴은 비교적 쉽게 생각했다. 알래스카로 가서 얼어붙은 사체를 조사해보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들어 있을테고 이것을 분석하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가설이었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당시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데에도 성공했다. 미국도 마침 소련이 시베리아에 얼어붙은 스페인 독감 사체에서 원인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냉전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비대칭 전력 앞에 미국도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 측면에서 훌틴의 가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그러나 훌틴은 성공하지 못했다. 알래스카의 영구동토층으로 가서 사체를 발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기서 살아 있는 바이러스 샘플을 얻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영구동토층이라고 해도 계절에 따라 땅이 녹고 어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포가 파괴되고 바이러스도 죽었다고 볼 수 있다. 26세의 청년 훌틴은 실패를 받아들여야만 했다.이후 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실마리가 잡힌 것은 40년 넘게 흐른 1997년의 일이다. 미군 병리학 연구소에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조각을 일부 확보해 H1N1 바이러스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미군 병리학 연구소는 샘플을 어떻게 얻었을까? 그들은 미국 본토의 매장지에서 100여 구의 사체를 뒤진 끝에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바이러스는 끔찍할 정도로 훼손돼 있었지만 1997년의 발달한 생화학 기법은 이 사체의 유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해 있었다. 그리고 이 결과가 발표된 이후 연구진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한 훌틴이었다.1997년의 요한 훌틴은 이제 72세의 은퇴한 학자였지만 열정은 그대로였다. 그가 보기에 미군 병리학 연구소가 확보한 샘플은 너무 훼손되어 있었다. 유전 정보도 모두를 확인한 게 아니라 일부만 확인해서 H1N1이라고 결론내렸다. 다른 샘플이 있다면 보다 확실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훌틴은 더 좋은 샘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알래스카였다. 그는 연구진에게 연락해서 알래스카로 가서 더 좋은 샘플을 줄테니 분석해 달라고 제안하였다. 더 좋은 샘플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연구자가 있겠는가? 병리학 연구소의 책임자인 제프리 타우벤버거는 당국에 연구비를 신청할테니 이듬해에 함께 발굴하러 알래스카로 가자고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훌틴은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다음 주에 그냥 가자고 회답하였다. 정부 연구비니 뭐니 다 필요 없고 사비로 가면 되지 않겠냐는 것. 훌틴 가족의 인터뷰에 따르면 훌틴은 당장 그주에 떠나고 싶었지만 아내에게 집안 수리를 약속했기 때문에 다음 주 정도에 떠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이후 정말 훌틴은 발굴단을 이끌고 알래스카로 갔다. 그리고 40여 년 전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그럭저럭 괜찮은 바이러스 샘플을 확보했다. 타우벤버거에게 보내진 이 샘플은 이후 유전자 분석을 거쳐서 H1N1 바이러스로 판가름나게 된다. 한 연구자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덕분에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정체는 이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판명날 수 있었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8-16 14:42 |
[약대·약학] <8> 미국의 참전과 스페인 독감의 창궐
미국의 참전과 스페인 독감의 창궐전염병이 어떻게 창궐했는가를 역으로 추적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지금도 코로나19의 기원이 어느 지역인지, 어떤 동물인지에 대해서 과학자들 뿐 아니라 정치가들까지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널리 창궐한 질병일수록 시작을 찾기는 힘든 법이다.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지금도 어려운 역학조사가 당시라고 쉬울 리 있었겠는가. 최초의 환자를 찾는 일은 그때도 어려웠다. 더군다나 주기적으로 발병하는 계절성 독감과 섞여서 첫 환자, 페이션트 제로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러 문헌에서 최초의 환자를 제시하고 있지만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본다.그래도 스페인 독감이 폭발적으로 창궐하게 된 계기는 대체적으로 동의하곤 한다. 바로 미국의 신병훈련소다. 제1차 세계대전이 길어지고 독일이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미국도 자국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대서양 너머까지 확대된 이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군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숙련된 군인일수록 좋다.미국의 신병훈련소는 입대자들로 가득 찼다. 이 신병을 잘 훈련시켜 대서양 너머 프랑스와 독일이 대치하고 있는 전장에 보내는 것이 이 훈련소의 역할이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독감이 창궐한 것이다. 풋내기 병사들이 기침을 헤대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3일이 채 되기 전에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폐렴 합병증이 발생했다. 일주일 만에 500명 넘는 감염자가 나와서 신병 훈련소는 어느덧 환자 진료소로 기능해야 할 정도였다.전국적으로 독감이 퍼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스크 쓰고 손 씻고 일정 기간 격리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는 용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 아픈 군인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보낸 것이다. 열흘이면 건너 가는 대서양 바다였지만 이 수송선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 독감 바이러스가 탑승해 버렸다. 이후 이 독감 바이러스는 무럭무럭 자라 수송선을 점령하고 유럽에 도착해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끝없는 소모전과 참호전에 지쳐서 이제는 집에 돌아가고픈 불쌍한 군인들을 감염시켰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서.전쟁터에서는 군인이 죽지만 독감이 퍼지면 군인만 죽지 않는다. 어느덧 전선과는 상관없는 지역까지 독감은 퍼져나갔고 전 세계에서 독감 환자가 보고되었다. 이 독감은 그전까지 경험했던 계절성 독감과는 차원이 다른 질병이었다. 일반적인 독감의 치사율이 0.5% 내외인데 이 독감의 치사율은 2퍼센트를 상회했다. 그나마도 4개월 만에 돌연변이가 나타나 6퍼센트로 올라갔다. 지금은 엔데믹을 향해가고 있는 코로나19의 치사율이 1% 내외라는 것을 감안하면 숫자가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구나 싶은 정도의 값이다.그런데 당시는 어쨌든 전쟁 중이었다. 어떻게든 젊은이들을 모아 전선으로 보내야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힘들게 보낸 젊은이들이 정작 싸우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나가는 현실은 어떻게든 비밀로 해야 했다. 이미 전 세계적인 질병이 되었지만 어쨌든 언론에서 발표를 하느냐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래서 당시 참전하고 있던 많은 나라에서는 이 현실을 철저히 함구했고, 전쟁에 참가하지 않던 나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보도하였다. 이렇게 자유롭게 보도하던 나라 중 스페인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국왕까지 발병한 이 질환을 비교적 심각하게 보도했기에 스페인 독감이란 이름이 붙었다. 억울할만 하다.얼마나 죽은 것일까? 문헌마다 조금 다르지만 당시 미군 중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를 대략 4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감염자는 백만 명 정도로 추산하기도 한다. 참고로 당시 참전했던 미군 숫자는 4백만 명 정도이고 전투로 인한 사망자는 6만 명 가량이다. 여러모로 스페인 독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은 병사들 외에 일반인도 죽인다. 지금 추산하고 있는 스페인 독감 사망자는 대략 2천만 명 내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약 천만 명의 두 배 정도 되는 숫자다. 이 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던 우리나라도 14만 명 정도 사망했다. 코로나19의 사망자와 비교해도 터무니없는 수치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던 이 독감을 우리나라에서는 무오년 독감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이 많았던 선조들이건만, 야속하게도 역병은 우리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7-14 09:43 |
[약대·약학] <7> 에디슨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악연
7. 에디슨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악연살리실산은 버드나무 껍질 속 해열성분인 살리신을 가공해서 만드는 물질이다. 이 물질이 합성된 것은 1838년, 화학이 한창 발전하던 시기다. 이후 살리실산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던 식물 등이 알려지며 살리실산은 여러모로 의학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해열효과 못지 않게 염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탁월했기 때문이다.살리실산은 순수하게 화학적으로도 합성된다. 당시에도 쉽게 구할 수 있던 페놀과 수산화나트륨을 섞고 열을 가해서 만들어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도 나오기 전에 이뤄진 이 반응은 여러 가지 학술적, 산업적 의미를 가지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페놀이라는 일반적인 물질에서 생산했다는 점이다. 일종의 석탄 폐기물이 의약품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이 의약품은 독일 바이엘사의 연구를 거쳐 아세틸살리실산, 즉 아스피린으로 진화한다. 해열제에서 시작한 연구가 관절염 치료제를 거쳐 지금까지 사용하는 소염진통제로 변화한 것이다. 이 정도면 연금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897년의 일이다.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스피린의 수급에 변화가 생긴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 페놀을 구하기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당시 페놀은 영국에서 전략물품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페놀에 질산과 황산을 가하면 피크르산이라는 물질이 되는데 이 물질은 폭발성이 강해서 군수물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화약이 부족하던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페놀을 자체적으로 소비하기에도 바빴다. 다른 나라에 내다 팔 여유는 없었다.질 좋은 영국산 페놀의 유통이 막히면서 곤란해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다. 이 미국인은 당시 축음기를 개발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축음기 생산 공정에는 페놀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 문제 없이 수입해서 사용하던 페놀의 공급이 막힌 것이다. 심지어 당시 미국은 참전하지도 않은 중립국이었다. 그럼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은 페놀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었다. 물론 중립국인 미국을 통해 독일로 페놀이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고, 그 페놀이 화약으로 돌아오든 바이엘 아스피린으로 바뀌어 독일의 군자금으로 돌아오든 모두 상상조차 싫은 일이었다. 즉, 영국의 페놀 수출 제한은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였다.물론 에디슨은 불만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페놀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영국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에디슨은 자체적으로 공장을 세워 페놀을 생산해버렸다. 이 정도 해줘야 발명왕인가 보다. 그런데 이 재능 넘치는 발명왕은 페놀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렸다. 하루에 12톤을 생산했다. 축음기 생산에 필요한 양은 9톤. 즉, 3톤이 남았다. 이 페놀은 버려야만 할까?당시 어쨌든 페놀은 여러모로 필요한 물질이었고 영국발 수출 제한 조치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품귀가 일어났던 물질이다. 에디슨은 이 흐름에 맞춰서 남는 페놀을 팔고 싶어했는데 운명적으로 그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미국 내 바이엘 지사에서 일하던 휴고 슈바이처라는 사람이었다. 1915년 7월 1일, 그는 에디슨이 생산한 잉여 페놀을 모두 사가기로 계약했다.난리가 난 것은 그로부터 3주 가량 흐른 7월 24일이었다. 미국 정보 당국이 슈바이처가 사들인 페놀이 독일 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포착한 것이다. 조금 더 조사를 해보니 슈바이처가 에디슨에게 지급한 페놀의 대금 자체가 독일 본국에서 흘러 들어온 활동 자금이었다. 즉, 슈바이처는 중립국인 미국을 거쳐서 전략 물자인 페놀을 수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페놀을 생산한 에디슨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심지어 이때까지도 미국은 중립국이었으므로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는 계약이었다.하지만 세상이 법대로만 흘러 가지는 않는 법이다. 같은 뿌리라고 자부하는 영국을 조금 더 응원하던 미국인들은 어쨌든간에 독일에게 도움을 줘버린 에디슨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 계약도 무효가 되었다. 바이엘사나 독일을 향해 비난이 쏟아진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이후 잘 알다시피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고, 독일은 졌다. 독일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갖은 수를 쓰며 노력했건만, 미국까지 참전한 마당에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지금도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스피린 한 통을 보며 독일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고민했던 치열함을 잠시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필자소개>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2023-06-13 17:44 |